《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라는 소설을 읽었다. 명망 높은 건축가와 아틀리에에 속한 건축가들이 국립현대도서관 지명설계공모를 위해 가루이자와 인근 작은 마을의 여름작업실에 모여 건축계획안을 완성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여름작업실이었다. 그 시절만 되면 습관처럼 그곳으로 가게 하는 장소, 그런 힘을 가진 건축 말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책을 읽고 난 후 짙어졌다.

가루이자와로 대표되는 아사마산 부근의 고지대 마을은 메이지시대부터 부유층의 여름 별장지로 조성되었다. 상류층 외에도 선교사, 외교관, 문학가, 예술가, 학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여름을 즐기러 왔다. 그 중에는 윌리엄 메렐 보리스와 안토닌 레이몬드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들도 있다. 이들은 여름이면 아예 사무실을 가루이자와로 옮겨 작업을 할 정도로 가루이자와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델리키트, 딜레탕트, 데카당스.(delicate, diletante, decadance). 가루이자와에는 그들 지은 여름 별장이 여럿 있는데 비밀스런 취향의 공동체처럼 보였다. 지식인들, 문화예술인들은 자발적으로 ‘여름대학’ 같은 지식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소설 속 여름 작업실의 모델이 된 장소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Taliesin)’이었다. 라이트는 인생의 새로운 2막을 펼치고자 했던 1911년, 위스콘신 스프링필드의 자연 속에 건축스튜디오와 거처를 조성하고 ‘탈리에신’이라 명명했다. 웨일즈 고어로 ‘빛나는 이마’라는 뜻인데, 인생을 뒤바꾸는 명칭으로 충분히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라이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20세기 초를 석권한 건축 명제(그의 스승 루이스 설리번의 선언이었다)에 ‘건축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건축유기론을 더하고, 기하학적인 조형성까지 포괄했다. 라이트의 건축은 근사한 조형작품인 동시에 자연의 질서와 인간적 스케일이 공존한다. 이 새로운 근대건축론에 경도된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 지망생들은 기꺼이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탈리에신으로 찾아들었다. 

1938년에는 애리조나 피닉스 북동쪽에 탈리에신 웨스트를 열었다. 이로써 그와 제자들은 위스콘신의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있었고, 황량한 사막에서 자유롭게 유기건축론을 실험할 수 있었다. 탈리에신은 건축 스튜디오이자 라이트의 건축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건축학교이며 마을 안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탈리에신 웨스트에는 건축 스튜디오와 문서보관실 외에도 생활공간, 방문객을 위한 시설, 대형 거실인 가든룸이 있었고, 극장과 댄스홀 같은 오락시설도 추가되었다.  

라이트는 탈리에신을 자신의 사후에도 문하생들이 그의 건축론을 계승 발전시켜 학파를 형성하는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 의도대로 탈리에신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학교로 계승되었고, 한 건축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의 역할을 하면서 건축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위스콘신의 탈리에신은 1976년 국가로부터 역사자산으로 등록되어 보존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탈리에신 웨스트는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추진하고 있다.  


건축과 예술, 삶과 문화가 드넓은 대지에 조화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탈리에신을 살피다 보니, 삶의 체험과 철학, 인간애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그런 건축이 간절해졌다. 좋은 공간이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가슴 따뜻한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취향과 삶의 목적과 태도가 닮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우리에게 이런 장소, 이런 건축물이 있을까? 만약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면 당장 그곳으로 향하기를! 따뜻한 연대의 장소에서 참담한 시국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기를!    

참고로 가루이자와에도 다른 의미를 가진 탈리에신이 있다. 일본어로는 ‘타리아센’이라고 발음하는 그곳은 언덕으로 둘러진 호숫가 마을이며, 가루이자와의 황금기를 거쳐간 문학가와 예술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여러 여름별장들이 한데 모아 조성한 산책공원이다. 유원지처럼 요란스럽게 운영되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건축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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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weet-work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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