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기억 : 순천 선교사 마을 

1913년 고라복 선교사는 순천 동산 밖 언덕 위에 지어진 학교 앞에서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립 은성학교로 인가를 받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배유지, 오기원 두 선교사의 본격적인 활동으로 미 장로회 해외 선교부의 사역 활동이 순천까지 넓어진 지 10년, 교세는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됐다. 미국 본토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의료와 건축을 담당할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순천에 당도했다. 변요한, 백미다, 기안라, 한삼엘, 안채륜, 구례인 등, 많은 선교사들이 순천에서 함께 일했다.
고라복 선교사는 뿌듯함을 느꼈다. 서로득 선교사가 합세하여 일한 다음부터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들이 세워지며 완벽한 선교사마을이 지어지지 않았던가! 신앙인으로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의 아름다움과 기쁨도 느꼈다. 지금 한창 계획 중인 안력산 병원도 곧 문을 열 계획이었다. 서양의학으로 준비된 병원은 순천 사람들을 선교사 마을로 더욱 가까이 데려올 것이었다. 고라복은 두 손을 맞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간 얼굴의 학생들을 웃으며 맞았다.






로버트 코잇 선교사의 집. 


고라복은 ‘로버트 코잇’, 변요한은 ‘존 프레스턴’, 배유지는 ‘유진 벨’, 오기원은 ‘클레멘트 오웬’, 백미다는 ‘비거’, 한삼엘은 ‘리딩햄’, 서로득은 ‘마틴 스와인하트’, 기안나는 ‘안나 그리이’의 한국식 이름이다. 안력산의 본명은 ‘알렉산더’, 구례인은 ‘크레인’이다. 서양인들은 어려운 외국 이름이 아니라 한자로 된 이름을 써서 한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고라복과 변요한이 그들 이름이 되었을 때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순천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 마을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경찰과 자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40년 선교사들은 마을을 폐쇄하고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 땅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어느 순간에는 한국인들이 부르던 세 글자의 이름이 그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흔적을 남긴다. 땅과 길과 건물에 붙여진 이름이 길고 긴 역사가 되는 것처럼, 사람에게 깃든 이름도 지울 수 없는 그 자신의 역사이므로. 이름 속에 담긴 긴 인연, 핏빛처럼 진한 이야기들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백년 전 생겨난 선교사 마을


전라남도의 끝자락 순천에 선교사촌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전략적 배경이 있었다. 광주와 목포에 위치한 미 장로회 선교부는 벌교와 순천 중 한 곳을 전라 내륙을 위한 정식 선교부로 삼으려 했다. 그 중 순천이 선택되었다. 교통의 요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크며, 여수로 선교지역을 확장하기에도 좋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선교사들은 순천읍성 북문 밖의 구릉지에 터를 잡았다. 순천 시내를 조망할 수 있었고 시장과도 가까웠다. 게다가 높은 언덕에 서양식 2층 건물을 짓는다면 순천의 조선인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겠는가?
난봉산 기슭에 1910년대부터 1920년대 말까지 선교사들을 위한 주택 여섯 채, 병원과 간호사시설, 남녀 기숙사를 포함한 아홉 채의 학교 시설, 교회 등이 세워졌다. 변요한과 서로득, 두 선교사가 번갈아 마을 만들기를 책임졌다. 1920년대 말에 이르면 경건하지만 활발한 분위기의 마을이 온전하게 완성되었다. 

조지와츠 기념관


마을의 건설 과정은 고라복 선교사가 미국 본부에 띄운 편지에 자세히 담겨있다. “일꾼들이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산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석공들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돌을 다듬느라 분주합니다. 다른 편에서는 매우 낮은 임금을 받은 한국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무거운 짐을 옮깁니다. 다른 사람들은 본부의 기초를 닦거나 길을 고르게 하며 많은 수는 타일을 만들어냅니다.”
대부분의 건축 재료들은 순천 주변에서 조달하고 벽돌과 타일은 가마를 설치해서 직접 구웠다. 석재는 순천 읍성이 해체될 때 나온 돌을 가공해서 쓰기도 했다. 회색 벽돌과 화강석을 주로 쓴 까닭에 건물은 색채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다. 그 외, 시멘트와 미국산 목재,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축재와 페인트는 미국에서 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왔다.
한옥의 지붕선을 닮은 건물도 있고, 고즈넉한 숲과 정원이 감싸고 있어 완벽하게 감추어진 굴뚝 나온 이층집도 있었다. 언덕 가장 위쪽에 선교사 주택이, 그 아래에 남학교와 여학교가 엄격히 나뉘어 세워졌고 병원은 순천 사람 누구나 올 수 있도록 독립된 위치에 자리 잡았다. 교회와 성경학교는 시민들과 자주 만나도록 마을의 초입에 세워졌다. 이를 두고 후대의 건축학자들은 마스터플랜을 갖추고 선교사 마을을 형성한 최초의 사례이며, 일본을 통해서 세워진 변형된 서양식 건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발하게 지어지던 서양식 건축이 곧바로 유입된 현장이라고 설명한다. 


이름 따라 걷는 아름다운 산책


수십 채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고작 여섯 채만이 남아있지만, 그 경건함과 고즈넉함은 여전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선교사를 양성하던 성경학교로 세워진 조지 와츠 기념관이 초입에 있고, 매산학교는 매산중학교로, 여학교는 매산여고로 역사를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재활직업보도소가 있는 언덕까지 선교사 마을은 이어진다.
마을에서는 옛 선교사들의 이름이 여전히 불린다. 주요 시설마다 백 년 전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한 채씩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순천의료원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따라가면 보물찾기 하듯 건물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산책은 조지와츠 기념관에서 시작된다. 단정한 2층 건물은 선교 기념관이자 조지 와츠 선교사를 추억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건물은 1925년에 성경학교로 지어졌는데, 거쳐간 학생이 천 백여 명에 이른다. 진료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기독진료소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현관이 중앙에 있어 대칭형 건물에 뾰족한 박공지붕이 깊게 내려왔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단정하다.
조지 와츠는 누굴까? 1930년에 지어진 매산관(지금의 매산중학교)에 교사가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 바로 조지 와츠 기념 남학교였다. 초창기 마을이 생겨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언급되며 칭송받는 이 사람. 그는 순천에 선교사들이 파견될 무렵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이었다. 헌금을 희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데 도움을 준 덕택에 그의 이름이 타국 만리 먼 곳의 작은 도시에 백년이 지나도록 불리고 있다.
매산관은 1930년에 세워진 것이나 학교의 역사는 더 깊이 올라간다. 학교를 세운 것은 1910년, 2층 회색 벽돌 건물을 지어 은성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은 것이 1913년이었다. 이곳은 성경 교육을 제외하고 기존의 보통학교로 교과를 바꾸는 문제로 인해 폐교에 이르렀다가 1921년 다시 사립 매산학교로 복교한 역사가 있다. 이후엔 신사참배로 인한 마찰로 다시 자진 폐교하는 사태로 이어졌지만, 학교 건물만큼은 굳건히 남아서 매산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매산중학교 매산관



작지만 단단한 건물이 여간 정답지가 않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가 생각났다. 마루로 된 바닥이 잔잔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건물 말이다. 이런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정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단단한 나무처럼 굳게 뿌리내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등나무 덩굴 아래 앉아 나지막한 교사를 바라보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방학이라 학교는 텅 비었지만 정갈한 정원과 운동장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니 교사 뒤쪽 증축된 곳에 독서 동아리임을 알리는 문패가 붙어있다. 소년들이 읽을 책들은 무엇일까, 궁금해서 문을 두드려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매산관 바로 뒤, 매산여고도 한여름의 오수를 즐기는 듯 나른한 매미소리에 잠겨있다. 붉은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학교다운 맛이 가득했다. 여학교 초입에 프레스턴 선교사 주택이 있다. 역시 흑회색 벽돌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1층은 교육실로 2층은 학생들의 미술실로 사용된다. 변요한이라 불리던 프레스턴이 살던 시절에는 2층 서편에 발코니가 쑥 나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발코니 선룸이 광주의 선교사 주택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매산여고 프린스턴 기념관



마지막 건물은 고라복 선교사의 집이다. 애양원 부지 내에 있는데, 철문이 굳게 닫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나중에 살펴보니 애양원은 한센병 환우를 위한 시설이었다. 고라복의 집은 가장 높은 데 있었다. 가장 전망이 좋았을 그 집에서 고라복은 두 아이를 병으로 잃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겪었던 고통도, 선교사로서의 아픔과 희망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두려워하지 않고 걷던 모험가로서의 희열도 ‘고라복’이라는 이름에 담겨있다. 이름 뒤에 남은 기억. 그는 떠났지만 그 집은 백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고라복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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