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지 위쪽 동네에서 내려다본 아랫동네. 

                                                                                                                              경사지에 앉은 창신동 풍경.  









창신동, 여름 



 

 

요즘 같은 무더위에 굳이 창신동까지 답사를 가게 이유는 사진 때문이었다. 창신동 절개지를 찍은 1950년대의 사진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made in 창신동>이라는 전시회는 창신동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잘 갈무리해놓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봉제거리와 쪽방촌, 다문화거리와 오래된 집들. 창신동을 설명하는 몇가지 중 돌산 절개지를 사이에 두고 산 위와 산 아래에 자리한 집들을 찍은 사진은 창신동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창신동을 설명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지만, 나는 절개지, 단어만 품고 그곳으로 갔다. 과연, 창신동은 조심스레 걸어내려가야하고 힘겹게 걸어올라야 하는 경사지였다. 그때의 집들은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절개지의 모습은 남아있었다.

동대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경사로를 올라 낙산공원이 멀찍이서 보이는 낙산삼거리에서 내렸다. 길은 가팔랐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동네 특유의 소음을 들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착착착착’하면서 규칙적으로 들린다. 집집마다 겉으로는 오래된 동네의 상가건물이나 작은 집처럼 보였으나 모든 집들이 동대문 광장시장의 하청업체로서 옷과 각종 부재료와 소품을 만들어내는 봉제거리였다. 전시회에서 보던 봉제거리는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내려가던 길을 틀어서 오르막을 따라 다시 올라가니 집의 모양새나 규모가 좀더 오래된 듯 보이는 골목이 나타났다. 그 집들 뒤로 회색빛 돌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산 위에는 여전히 집들이 빼곡했고 돌산 언저리, 집을 지을 수 없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땅이 사람 사는 집으로 채워져있었다.

절개지라고 적힌 푯말을 확인하고 절개지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았다. 한쪽에서는 창신동 골목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반대편에서는 서울의 동쪽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오래된 집들은 건물은 남루할지언정, 전망 만큼은 최고였다.

돌산을 넘어섰으나 예의 귀에 익은 재봉틀 소리가 ‘착착착착’ 들려온다. 봉제거리는 돌산 너머 또다른 경사로 골목 안으로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이제 이동네를 떠올릴 때는, 집과 집 사이의 회색빛 공백같은 절개지와 귀를 간지럽히는 재봉틀 소리, 그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언덕에 서서 그 옛날의 서울 풍경을 조금 상상해보았다. 광화문에서 홍릉까지 이어진 전차가 오락가락하면서 소음을 내고, 도시 곳곳에서 랜드마크를 짓느라 흙먼지를 만들어내던 1920년대 말이다. 낙산에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았고 폭탄을 터뜨려가며 위험천만하게 화강석을 떼어내던 시절. 왼편에는 낮게 엎드린 초가지붕의 집들과 검게 윤기가 흐르는 오른편의 기와기붕 촌이 뚜렷한 경계를 만들던 풍경들을.

 

 

 

 








앞으로 흥인지문을, 등 뒤로 낙산을 둔 창신동은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살다가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살았고 풍경이 좋아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지어지기도 했다. 국궁을 하던 정자도 있었다. 낙산의 질좋은 화강석을 떼어내던 채석장으로 바뀐 것은 1900년대 초반. 석조전과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을 지을 때부터 창신동의 채석장은 바삐 돌아갔다.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거대한 공사와 경성역, 경성부청 신청사를 짓는 등 화강석을 조달해야 하는 일이 더욱 많았다. 창신동의 돌산은 점점 더 날카로운 절개지를 형성했다.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허영섭 지음)>에는 창신동 채석장에서 화강석을 채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채석된 돌은 전차를 활용하여 광화문까지 운반되었다.  


 

“산 전체가 화강석으로 노출되어 있어 돌을 더내기가 편리했고 화강석의 석질도 뛰어났다. … 돌을 뜨는 데는 이미 그 시절에 공기 압축기를 사용했다니 그야말로 최신식 기술이었을 것이다. 창신방 돌산은 골조공사를 맡은 시미즈쿠미 회사가 직접 운영을 맡았다. 이미 옛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돌을 캐내던 중이었다. 허가기간은 1919년 삼월까지로 되어 있었다. 이곳 창신방의 낙산 주변은 그전부터도 경성 일대에서 채석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너른 방위’, ‘마당 바위’ 등등 이 일대에 전해내려오는 적잖은 바위 이름부터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 채석장의 일꾼들은 화강석 큰 덩어리를 쪼아내고 남은 부스러기 돌 조각도 그냥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부스러기는  또 그것대로 신작로 공사에 잡석과 함께 다져넣었다.”      -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허영섭 , 147~148p


 

 

절개지가 날카롭게 형성될수록 웅장한 건축물들이 생겨났고 매끈한 도로가 완성되었다. 낙산의 돌은 서울의 건물을 짓고 온갖 도로에 뿌려져 새로운 서울의 모습을 만들었다. 또한 능수버들을 구경하러 나들이객이 몰려들던 낙산 일대의 풍경도 옛 정취를 잊었다.

 

거대한 돌산 위 아래를 빼곡히 채운 조그마한 집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졌다. 창신정 택지지구에 열을 맞춰 정리된 ‘ㄷ’자형 한옥단지-한옥의 지붕선이 열을 맞춰 세워져 장관을 이루는 풍경이었다. 


반면, 돌산 아래 위의 무척 위험한 장소에는 당국의 눈을 피해 토막집이 생겨났다. 급격히 치솟는 소작료에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경성은 극심한 주택난을 겪었다. 그들은 경성의 변두리와 청계천 등지에 흙을 파고 지붕을 씌운 움막집을 짓고 몸을 피했다. 이러한 집을 토막집이라 했고 이들은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도시 빈민이었다. 창신동 돌산 주변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거나, 연통을 소제하거나, 인력거꾼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살던 토막집들이 있었다. 

 

 

 


십일일 오후 세시 사십분 경에 동대문 외숭인동 청수조채석장에서 돌깨틀이는데 사용하는 화약이폭발하야항부시내창신동사십이번디천덤석(천점석)동리오십칠번디 류성진 숭인동 삼십번디 최선룡의 세사람이 중상을 당햐야 생명이 위독하든 바 원인은 수일전에 광산용화약팔십 몸메를 장사척 직경 일척오촌가량이나 툴흔돌구멍에 폭발물을 너코도 화선에 불을 대어노하도 폭발되지 안흠으로 다시끄내다가 그와가티폭발된것이라더라.  

(1928년 9월 13일 동아일보)

 

 

창신동 3번지 채석장에서 무게가 천 관이 넘는 큰 바위가 120척이나 되는 곳에서 굴러 떨어져서 아래에 있던 집을 덮쳤다.  

(1933 5월 24일 동아일보)

 

 

창신동 채석장은 육이오 동란 후 미군에서 운영하면서 채석에 있어 많은 화약을사용한 관계로 동민들을 위시한 부근 임산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치고 있어 부근 동민들은 미군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한 결과 미군이 최근 철거하게 되었는데 다시 서울시에서 동 채석장을 직접 운영하여 앞으로 채석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어 부근 시민들에게 다시 공포와 위협에 봉착하게 하고 있었는데 … 

(1954년 1월 23일 동아일보)


 

 

 

전쟁 후에는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도시의 좁은 틈을 메웠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채석작업이 중단되었으나 절개지의 집들은 여름 장마철이 오면 낙석사고로 더욱 위험천만했고, 수도나 화장실이 없어 불편했다. 노후된 불량주택을 개량하기 위한 시도가 5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른다.


 






서울 창신동의 높다란 돌산 일대 2천여 가구는 물긷는 일이 밤낮을 가림없이 하루중의 가장 큰일과가 됐다. 이곳주민들은 온 식구가 7백여m 나 밑으로 내려가 공동수도나 큰 길 가 양지회관에서 물을 길어 돌산언덕배기를 오른다. 이길은 물지게를 지고 한번 오르는데다 다섯번이나 쉬고 또 쉬어야 집에 도달하고 보면 물통의 물은 3분의 2가량 밖에 안된다.

(1967년 7월 29일 경향신문)




 

서울시는 채석장 절개지 가운데 낙석위험이 있는 종로구 창신동23일대 27백여평에 대해 오는 8월까지 보수공사를 벌이는 한편 재해발생에 대비해 인근 40여가구의 주민들에... 

(1993 6월 3일 경향신문)


 



깎아지른 절개지에 살아가는 고충이야 말해 무엇하랴. 지금도 경사로 때문에 걸어다니는 일이 쉽지 않은 이 동네의 주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다. 채석장의 운명은 어느 순간 끝이 났지만, 집의 역사는 시대를 자르지 못한 채 복잡한 켜를 여전히 갖고 있다. 


한쪽 켜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잡았으나, 오랫동안 동네를 지킨 사람들의 절개지 집들은 여전히 서울을 내려다보며 오래 전과 다름없이 서울의 풍경을 남겨둔다. 서울의 시간을 지켜낸다.










<made in 창신동>과 관련해서 창신동을 둘러보는 <도시의 산책자>라는 답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창신동의 풍경은 그대로겠지요. 답사 프로그램은 러닝투런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진행했고, 이들은 창신동에 '공공공간'이라는 장소를 만들어 예술 문화 프로젝트를 지역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신동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공공공간에 꼭 들러보시길.



<도시의 산책자>라는 답사 프로그램이었죠. '공공공간'에서 지도와 오디오 가이드를 받아들고 답사길에 나섰습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절개지. 지금의 모습입니다. 까마득한 경사지에 서서 다시 회색의 공백을 바라보니 그 풍경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곳의 집들은 계획된 필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덧붙여지고 보수하면서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합니다. 




(좌)필요에 따라 덧붙여져 완성된 외관. 

(우)미스테리 주택이라 불리는 집.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처럼 보이는데요. 오랫동안 빈집입니다. 




보통의 상가나 주택처럼 보이는 집들이건만 어김없이 재봉틀소리가 경쾌하게 들립니다. 그 언저리에서 도시의 유물을 발견했습니다. 





러닝투런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운영하는 '000간(공공공간)'은 1호점과 2호점 두 개가 있습니다. 

창신동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이곳으로!




동네의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한 조그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창신동 주민들이 함께하는 앱라디오방송 '덤' 

그리고 동네 사랑방같은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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