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통과한지 십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 점점 더 서른살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서른이라는 나이가 무언가를 이루기엔 어렵고 심리적으로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울부짖는 나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십대였을 때는 서른은 인생에서 한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나이로 알았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되, 어느 정도 그 가닥을 잡은 나이, 그래서 모험은 조금 밀쳐두고 끈기 있게 밀어부치는 나이라고 말이지요. 




실제, 서른을 통과하던 시점에서 그런 단단함과 의지가 내게 있었는지 확답할 수 없었습니다. 시대가 변한 까닭인지, 뚜렷한 목표라던가 의지가 다가와주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앞선 세대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가 봅니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서른 즈음에 인생의 빛나는 성공을 이룬 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글을쓰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사업을 일으키고 정치 권력에 가까이 간 사람들, 그들은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나이에 참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들이고, 그 시대적 흐름을 현명하게 잘 포착한 젊은이들이 뭔가를 이룰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요? 거칠지만 새로운 목소리를 기성세대 혹은 동세대들이 서로 인정하고 긍정적인 기폭제로서 꽃피웠기 때문일까요? 



한편에서는, 식민과 전쟁의 책임을 기성세대에 물으며 젊은 세대들이 공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고도 하고, 과거를 부정하는 데서 현재를 일으키는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쨋건 그들은 새로운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실었고 기회를 쟁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건축가 김중업이라는 사람, 그도 서른 즈음에 참으로 많은 것을 이룬 청년이었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인만큼 건축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건국대 도서관, 부산대 본관, 서강대 본관이 차례로 지어졌고, 명보극장, 신공덕 원자력 연구소, 남산 드라마센터, 이화산업 공장 그리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그의 삼십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최고 학부를 가르치는 교수였고, 유네스코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수년간 일하기도 했지요. 



그의 사십대라고 빛나지 않았을까요? 성공회회관, 제주대 본관, 단단한 언어가 감지되는 개인주택과 별장, 서산부인과, 부산 UN 묘지, 삼일빌딩이 줄이어 세워집니다. 그는  김수근과 함께 시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건축가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바람은 그를 



내몰았습니다. 추방 난민으로 프랑스에서 살다가 8년만에 귀국이 허락된 비운을 겪고, 다시 돌아와  부산 민주공원의 충혼탑, 올림픽공원 조형물 등을 완공하고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민족대성전 등을 설계했습니다. 건축가는 참 질기게 사회에 결합되었습니다. 추방령을 내린 조국을 등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돌아와 이 땅에 애도와 기도와 비상의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의 건축은 더러 사라지기도 했고 더러 남겨지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어떻게 쓰일 것인가 논의되던 김중업의 건물 하나가 얼마전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있는 김중업박물관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도처에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김수근이 아니라, 김중업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서른 일곱, 젊은 그가 설계한 유유산업 공장. 


안양천변 너른 부지에서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만들어준 한 제약회사의 공장과 연구시설은 설계자에게 헌정된 공간이자 예술과 공공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안양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건축 아카이브와 연구실도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벌써 


6회를 맞이했습니다. 첫회때가 떠오릅니다. 작품들은 신선했고 두고두고 활용되면서 안양유원지를 뜨겁게 했지요. 그 후 안양 시내로 확대되어 예술가들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생겨나는 것을 목격했고 '알바로 시자'라는 굴지의 건축가가 지은 안양 파빌리온과 '비토 아콘치'의 숲위를 덮는 터널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올해는 김중업박물관이 개관하여 프로젝트에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안양문화재단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APAP 프로젝트,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유유산업은 1940년대부터 시작된 



제약회사입니다. 안양에는 공장과 연구시설이 지어졌습니다. 1959년에 공장이 가동되고 50여년간 이어오다 공장이 옮겨간 후,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이 거의 12년 전의 일이니, 그 동안 많은 협의와 계획이 오갔겠지요. 


김중업이 설계한 4개동을 남기고 리노베이션했습니다. 문제는 유유산업 터가 오래전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안양사가 있었던 터이며 여전히 발굴할 여지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절터에서 안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기에 무시할 수 없는 유적지인 것이지요. 때문에 산업유산과 사찰이라는 고대유적지, 그리고 현재의 예술공원이라는 세 개의 시간축을 어떤 식으로 조화롭게 풀어내는가가 관건이었습니다. 



현재, 김중업 박물관은 세 개의 큰 건물에 


각각 예술센터, 김중업 전시관, 안양사지 전시관 등의 프로그램이 삽입되어 있고, 그외의 공간과 중앙의 넓은 터를 각각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는 완충공간으로 이어져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에서 안양의 스토리를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공간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입구의 X자 조형물은 르 코르뷔제의 모듈러(인체비례도)를 응용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김중업 아카이브는 그의 건축세계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모형, 도면, 다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공간은 작지만 단단하고 안정감을 줍니다. 따뜻하고 밝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손댄 흔적들이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경비아저씨들도 이 건물은 남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남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럼 이제 건물을 보러 갈까요? 









1. 어울마당 _ 창고와 공장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전시물이 설치된 예술센터로 사용됩니다. 

중앙에 빛이 들어오는 부분, 황동 느낌의 핸드레일이 보기 좋습니다. 

안양의 현재를 담은 다양한 전시물들을 소소하게 즐기며 공간을 유람할 수 있더군요. 

문은 새롭게 달았지만 문 손잡이는 옛것을 그대로 썼더군요. 




























2. 안양사지 전시관- 보일러실 


고대유적지 전시관의 딱딱한 분위기를 인터랙티브한 전시가공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유유산업 지에서 발굴과정을 소개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더군요. 

공공예술프로젝트 작품이 야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영환 작가의 오벨리스크와 후지코 나카야+더블 네거티브스 아키텍처 팀이 작업한 '무'라는 안개작품이 있는데, 간헐적으로 안개가 형성되는 이 작품을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2. 김중업관 _ 공장및 사무실

건축가 김중업의 기증자료와 그의 건축세계를 살펴보는 전시관입니다. 외부계단이며, 길다란 케노피가 눈에 띕니다. 


기증품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문이 아주 낮아 기분이 묘합니다. 

당시 뉴스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음성자료, 영상자료들은 오래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옵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업은 1970년대 초


몇 가지 정부의 주택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씁니다. 특히, 광주대단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었죠. 그것으로 그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성북동과 장충동에 자택과 사무실, 아틀리에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로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삼일빌딩의 설계비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는 추방됩니다. 여권도 없이 국외로 쫓겨난 그는 난민으로 프랑스에 정착합니다. 



그 지점에서 잠시 발을 멈춥니다. 창신동-백사마을- 아파트인생에 이어 김중업 박물관에서도 광주대단지가 또 등장하는군요. 그곳은 단지 철거민들의 집단이주촌인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김중업은 그곳을 왜 그리고 어떻게 비판했을까요?  


 광주대단지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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