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서울에 오시기 직전에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그날 따라 유난히 화창한 하늘이 파랬다. 채도가 높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서있는 성당의 종탑이 더없이 경건해보였다. 

오랫만에 방문한 명동성당에서 몇 가지 변화가 보였다. 성당을 향해 올라가는 진입로가 획기적으로 바뀌었고 앞쪽에 별관도 열심히 지어지는 중이었다. 이런 공사들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는데, 백년이 넘은 성당에 영향을 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하 주차장을 파고 별관을 세우는 거대한 공사를 진행하는 까닭이다. 공사는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성당일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붉은 벽돌을 썼다고는 하나 별관 건물은 명동 거리와 성당을 가로막은 벽돌로 된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계단을 설치한 성당 진입로는 원래 명동 성당이 지어질 무렵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예전에는 성당을 살짝 측면을 바라보고 올라갔다면 계단은 성당 입구로 직진하게 되어 있다. 거대한 종탑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길은 권위에 복종하는 걸음을 요구하는 것 같다. 성당은 속세와 담을 쌓고 하늘의 법만 따르는 중세의 그것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계단을 올라와 성당 앞에 서니, 예전에 성탄전야 미사를 드리고 명동을 돌다 지칠때면 들어와서 쉬어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국내건 해외건, 답사를 할 때나 여행을 할 때 성당 덕을 많이 본다. 특히 무덥거나 추운 날은, 여행자를 위한 안락하고 고요한 쉼터가 된다. 그렇게 자주 내 발길이 성당에 닿았다. 나는 파리에 갈 때면 여정 중 가장 먼저 생제르맹 데프레 성당을 갔다. 1유로짜리 초를 피우고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긴 기도를 올린다. 그 기도 덕분인지 여행은 무탈했고 감사하게도 즐겁고 행복했다.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고 어두운 회랑에서 밝디밝은 제단을 향해 무릎끓고 기도를 드리던 날들. 파이프오르간의 황홀한 음색을 들으며 내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던 날들. 


요즘 나는 세례명이 무색할 지경이지만, 미사의 기도보다 마음의 기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요즘이 더 종교가 간절해지는 시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건물이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미사가 아니나, 종교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한장씩 한장씩 벽돌을 쌓아 이 거대한 건물을 구축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나는 거대함을 즐기는 인간의 손이 참으로 위력적이라 느낀다. 이 벽돌들은 누가 어떻게 만들고 또 쌓았던 것일까? 조선은 벽돌건물의 역사가 거의 없다. 아니, 이 땅의 역사를 보건대, 벽돌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벽돌이 발달하지 못한 것을 몇 가지로 설명한다. 


빚고 구워야 하는 벽돌에 비해 화강석을 성형하는 역사가 훨씬 길었고 그 기술 또한 누적된 상태였으므로 점토를 성형하고 굽는 벽돌보다 돌을 사용하는 사례가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 붉은 색을 불경한 색이라 여긴 당시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기피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검은 색인 전돌을 사용했다는 것. 벽돌이나 기와를 굽는 장인들을 천민 취급하고 관에서 관리대상으로 여겼기에 벽돌산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조는 벽돌로 거대한 수원화성을 지어 대단한 위용을 드러내는 기염을 토했으니, 우리 건축에서 벽돌이 가진 의미를 좀더 파헤쳐보아도 좋지 않을까?











명동성당 주변의 건물들도 모두 붉은 벽돌이다. 우측에 있어 측면만 간신히 보이는 건물은 명동성당보다 먼저 생겨난 사제관(현 사도회관)이다. 1890년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벽돌로 지은 근대식 건축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는 건물이다. 후에 리모델링을 거쳤다고 한다. 사진에 바로 보이는 건물은 서울대교구청으로벽돌 아케이드에서 검은 수사복을 입은 수도사나 사제가 시간을 거슬러 불쑥 나올 것 같다. 




오늘, 명동성당에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성모성화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가 열리는 살트르 바오로 수녀원 기념관은 늘 비밀스럽게 문을 닫고 있던 곳. 내부에는 명동성당만큼이나 오래된 건물들이 있고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 고요하게 숨어있다. 








사람의 발길이 번잡하게 오가지 않아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잘 자란 꽃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억지로 꾸미지 않아서,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맑게 반짝이는 자연의 모습이 그곳에서 생활하는 수녀님들의 모습과 같다고 느껴졌다. 


월전 정우성, 장발, 운보 김기창, 그리고 배운성 등 우리 화단의 주요작가들이 그린 성모와 예수, 그리고 성인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종교와 예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지를 알려주었다.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인, 현명하고 다정하고 끊임없이 따스할 것 같은 그 품, 성모의 팔 안에서 당당하게 바라보는 어린 예수의 어엿한 자태. 곱고 정갈한 이미지들은 종교의 순수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우리 마음에 파고든다. 


우리 전통의 어머니상이 성모상과 오버랩되고 예수와 성모의 일생이 우리 전통식 풍경 속에 녹아든다. 다시 들여다보면 이들은 종교가 지역에 파고들기 위해 지역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통 도상이 가진 힘들을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1960년대의 그림들인 것이다... 


성화전시회는 촬영이 불가하여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의 내부를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명동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명동의 노트르담. 아베 마리아.  

  












너무나 거대해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이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런 형태다. 전형적인 고딕 건축물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전통고딕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고딕양식을 따른 형태로 본다. 1883년에 종현에 있는 윤정현의 집 부지를 조선교우 김 가밀로의 명의로 매입하여 한문서당을 운영했으며, 1887년에 성당을 짓기에 충분한 땅을 마련하고 코스트 신부가 종현의 정지작업을 시작했고, 1892년에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고 나온다. 설계도면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다. 코스트 신부, 프와넬 신부 등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초기 성당들- 약현성당, 용산신학교, 명동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 등에서 그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다. 



벽돌은 어떻게 수급했을까? 


인천 조계지에 19세기 말엽에 등장한 건축물은 대부분 벽돌을 수입해와서 건물을 지었다. 그것은 인천이 무역항으로서 상선이 자주 드나든다는 장점이 있고, 조계지 내부에서는 자국의 물건이 통용되는 일이 용이했기 때문에, 벽돌 공장을 짓고 기술자로 하여금 벽돌을 굽게 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시기에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명동성당은 규모면에서 필요한 벽돌의 갯수가 압도적이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현지 인력이 현지의 자본으로 성당을 세우도록 요구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입장도 있었고 또한 수입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우므로 서울에서 직접 벽돌을 구워서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늘어난 벽돌 건물의 수요에 따라 궐내에 지어지는 건축물 등에 수급하는 연와제조소가 세워졌고, 와서현이라 하여 현재의 신용산 일대에 벽돌과 기와 등을 제조하는 현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동성당의 벽돌도 와서현의 어딘가에 가마를 세우고 구워냈으리라. 


이미 양관을 지어본 경험이 풍부한 한국기술자들도 있었을 터이지만 종교시설에 쉽게 나서기는 어려웠을 터이고 부족한 재원으로 어렵게 성당을 짓다보니 중국의 하급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을 불러다 건물을 축조했을 것이다. 이들은 청일전쟁으로 정세가 불안해지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배에 실려 서울로 와서 일을 했다. 벽돌제조와 석공은 조선인들도 참여했다. 벽돌은 성분으로 보아 용산신학교와 성당을 지을 때 썼던 벽돌과 같은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축일에 명동성당은 축성식을 했다. 참석자가 3천명을 넘어섰고 조선정부 대신과 고관, 양반들이 성당을 찾아와 사진을 남겼다. 








1890년에 성당축조에 앞서 주교관을 먼저 세웠다. 좌측 중앙의 2층짜리 양관이 주교관이다.  

아직 성당은 세워지지 않았다. 




성당이 점차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종현의 남쪽에도 택지 개발이 되어 일본식 목조가옥과 조선 기와집과 초가집 등이 뒤섞여있다.  성당은 쉽사리 완공되지 않았는데, 천장이 무너져 인부가 다치는 사고가 생겨 건축가 사바친에게 구조 안전 진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성당이 축성되었다. 초기에는 진입로를 계단으로 오른다. 현재 복원한 진입로의 모습이 이와 유사하다. 

성당을 짓는 중간에 코스트 신부가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뒤이어 프와넬 신부가 공사를 이었다. 




당시 명동의 모습은 이랬다. 당시에는 약현성당과 종현성당이 서로 바라보였다고 한다. 

언덕위의 성당은 프랑스 성당, 불국교회당 등으로 불렸다.  




성당 뒷편에 있는 바오로 수녀원은 1900년부터 하나씩 건물을 세웠다. 

성당 뒤쪽에서 남산에 이르는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들어오다. 



1920년대의 명동성당. 명동의 남측이  훨씬 더 조밀해지고 집들도 높아진 모습이다. 





자료출처: 명동성당 실측 조사 보고서(2002, 문화재청) 





조홍석의 <근대 적벽돌 생산사에 관한 연구 (2010, 건축역사연구 제 19원 6호)>논문에는 벽돌생산자들의 현장을 흐릿하나마 더듬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정부에서 벽돌건축을 산업화하는 시기는 1907년부터이다. 탁지부(건축및공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마포에 호프만 가마를 설치한 연와 제조소를 두고 한강의 모래와 점토를 섞어서 벽돌을 만들었다. 이 장소는 상당히 오랫동안 용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45년도 지도에서도 벽돌공장의 위치가 정확히 명시되어있다. 이 위치는 지금 용산 미군 부대 내부에 있다. 아마 미군부대 안에는 오래된 벽돌 공장의 건물도 그대로 남아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 이땅에는 일본인이 주도하고 한국민간이 뒤따라가는 벽돌산업이 크게 번성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벽돌건물에 대한 내구성에 의문을 제시한 콘크리트 업자들이 득세하기 전까지 이 땅의 건물은 벽돌이었다. 그리고, 점차 늘어나던 수요는 1939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지역을 산업지역으로 개발하면서 공장 등지를 많이 건설하게 된 까닭일까?



벽돌 건물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벽돌건물은 보기 좋다. 그러나, 한때 붉은 벽돌 건물은 싸구려 다세대 주택에나 쓰이는 싼 집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벽돌 건물들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방법을 찾아보고 벽돌 건물의 흥망성쇠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른바 <벽돌 품평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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