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광양, 섬진강 가의 


작은 목조주택 앞에 섰다. 집을 찾아가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강가는 한적한 마을이었고 드문드문 횟집들이 보였다. 완만한 곡선의 길을 따라 차를 몰고 천천히 두리번 거렸다. 물은 천천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고 있다. 약간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금세 저물것만 같은 시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을 속절없이 기다리는 추운 3월의 첫째날이었다. 



이윽고 집을 찾았다. 집 앞에 놓은 문화재청의 표식이 우리를 불렀다. 집은 비어있었고, 동네는 조용했다. 빈 집이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윤동주 사건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장소로 바뀌었다. 문이 닫혀있어서 창밖에서 망연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저기쯤 원고가 보존되어있던 마루인가 보다, 저기가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고 안쪽이 살림집인가 보다, 서로 중얼거렸다. 



이 집은 시인의 문우인 정병욱의 본가다. 그는 윤동주가 정서한 육필원고를 받아든 두번째 인물이다. 세 권의 원고뭉치는 난리 중에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문우의 집에 한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결정적 원고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일본으로 떠나고 정병욱은 징병으로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원고를 소중히 간직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는 공출로 쑥대밭이 되는 날이 많았지만, 그 어머니는 아들이 맡기고 간 문서들을 귀하게 숨겼다. 사실 그 어머니는 원고가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전장으로 떠난 아들이 유언처럼 간곡히 부탁한 것이라, 그 마음이 서러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둔 것일게다.



그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자기에 쌓여 마루널 아래에 숨겨져있던 원고도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인의 행적을, 시인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찾아헤매는 시인의 동생에게 전달되었다.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시들은 이윽고 출간되어 수십년간 수많은 청년들의 말 속에서 숨쉬고 살았다. 












예전 사진에는 


나무집 바로 앞으로 강물이 흐른다. 지금은 넓은 도로가 생겨나 물이 좀더 멀리 있다.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리다가 옆쪽 임시대문을 밀어보니 그예 슥,하고 열린다. 집은 커다란 창고가 딸린 'ㄱ'자 형이고 도로변에 상점용도의 건물이 붙어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되었을까? 집은 그들이 떠난 그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딱, 멎어버린 옛집. 우리는 이런 집들을 많이 보아왔다. 



유리문을 열고 상점쪽으로 들어가본다. 무엇을 팔던 가겟집일까? 



집을 설명하는 말중에 양조장 건축이라는 단어가 언뜻 보인다. 그렇다면 커다란 창고는 술도가였던 것일까? 쉽게 술을 제조하지 못했을 텐데, 어떤 일들을 했을까? 이 창고는 원래부터 있던 것일까? 후에 증축된 걸까?

빈 집은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고서 시간의 한 단면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시간의 단면 속으로 들어가야 옳다. 















원고가 숨겨져있던 곳은 


마루널 아래다. 마루판자를 두 개 정도 빼면 그 속에 물건을 숨길만한 공간이 어둡게 보인다. 공출당하지 않으려고 소중한 물건, 일용할 양식들을 이곳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원고뭉치도 그 틈에 숨겨졌을 것이다. 



정병욱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조선어가 폐지된 후 학교를 다녔던 여동생은 한글을 읽지 못했다. 원고 뭉치를 들여다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글자가 한글이라는 것은 알았을까? 한글로 적힌 글자를 읽지 못했을 때 그녀는 조금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우리에게도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체제를. 아니면 그 글자가 뭔가 운명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한글로 씌여진 시.라는 것을 몰랐던 그 소녀는, 

훗날 시인의 동생과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었다.




바다로 향하는 섬진강 끝자락의 물길이 유유히 흐른다. 시간은 그렇게 끊이지 않으며 비통한 죽음 앞에서 느끼는 애잔한 감정 위에 회복과 기념과 기록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아이가 자라고, 그들의 아이가 또 자라서 상처를 덮는다. 나는 '회복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사람들의 삶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미래가 찾아오는 한 우리는 회복할 수 있다. 











육필원고는 이러한 


모양새였다. 원고지를 반으로 접어 오른편에서 묶으면 앞뒤로 마치 책처럼 읽을 수 있게 제본된다. 글자를 몰랐던 소녀와 달리, 나는 글자 한자 한자가 모여서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강처럼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회복하는 만큼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우리 세대에게 남겨진 것을 또 보았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와 죄의식도 고스란히 60년이 지난 지금 시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시대의 빈곤도, 역사의 요철도 60년을 건너뛰어 우리에게로 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덮어온 한 덩어리의 역사. 



그것이 자꾸 보인다. 시를 읽으니,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어두운 역사가 보인다. 이 시대에 시인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교토의 동지사대학은 윤동주의 모교다. 투옥되기 전까지 윤동주는 문학을 배우며 이 기독교계 대학교에 다녔다. 1995년 시비가 세워진 후, 교토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기억하며 이 시비 앞을 서성인다. 누군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필사한 액자를 가져다놓았고, 누군가는 방명록이 다할 때마다 새로운 노트를 가져다놓는다. 방명록은 비에 젖기도 하고, 눈과 바람에 찢기기도 했다. 글자는 뭉쳐지고, 종이는 젖어서 떼어지지 않을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글자가 적혀진 노트는 보통의 방명록이 아니라, 작은 시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시인의 시비를 찾았던 10월 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10월부터 새로 쓰기 시작한 방명록은 젖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비닐을 씌워두었지만, 금새 찢어질 것 같아 나는 가방 안에서 낡은 비닐을 꺼내 그 위에 덧씌워놓았다.









2013년 3월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본 후, 나는 내내 이 시인이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보고픈 생각이 컸다. 서울의 몇몇 장소들과 멀리 섬진강 근처의 어느 작은 집에도 들렀다. 일본 교토에도 머물렀다. 동지사대학의 시비 앞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적지 못해 한참 앉아있다가 딱 두줄의 메모만 남기고 돌아나왔다. 나혜석과 정지용이, 윤동주와 그의 사촌이자 문우이자 동지였던 송몽규가 거닐며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카모가와 강도 걸어보았다. 몇백년 된 나무집에서 풍기는 음침한 냄새들을 맡으며 그 시절의 젊은이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도 회색의 원고지에 메마른 잉크로 쓰여진 시인의 글자만큼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어느 장소도 시인이 아꼈던 그래서 낡고 닳은 책들만큼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을 품어준 도시와 집들을 미약하게나마 더듬어보고싶었다. 시인이 숭배했던 수많은 시인의 이름을 옮기며 나 또한 열렬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쓰다만 원고들을 조금 더 채워보고자 한다. 





 尹東柱를 줄을 그은 뒤 平沼東柱라고 새로 쓰여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그 학적부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1942년 1월 29일에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주라는 일본식 이름이 적힌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에 제출했다.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면 이름을 바꿔야했던 것이다.  석자에서 넉자로 바뀐 그 이름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이유로, 시인은 '참회록'이란 시를 그 즈음에 남겼다.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에는 시인이 <참회록>을 쓴 종이의 여백에 낙서처럼 이런 글자들이 남아있다고 썼다. "시인의 고백, 창씨개명, 힘, 생, 생존, 생활, 문학, 시란? 비애 금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중에서





그가 먼 곳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학을 떠나기로 한 데에는 사촌인 송몽규의 영향이 클 것이다. 송몽규는 시인의 행보와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으며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용정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과 일본으로 갈 때에도, 그리고 사상범으로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을 때에도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였다. 둘은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고, 송몽규는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실패하였으므로 동경의 입교대학에 다시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한학기 머문 후에는 교토 동지사대학으로 옮겼고 두 사람의 사상적, 학문적 교류는 계속되었다. 







동지사대학을 찾았던 작년 10월말. 학교 곳곳에서 금목서가 고옥한 향기를 뿜었다. 노란꽃들이 자잘하게 매달린 푸르른 나무들은 고풍스런 빨간벽돌 건물을 한층 생동감있게 했다. 진한 꽃향은 가을을 향하는 길목이라 더 매혹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동지사 대학 하면 교정을 가득채웠던 금목서의 향기를 먼저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20세 전후의 학생들이 몸도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곳곳에는 학회와 세미나를 알리는 안내포스터가 가득했는데, 군데군데 한글로 된 것들도 있었다. 



















1875년에 세워진 학교답게 오래된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작지만 단정한 교사와 크고 육중한 채플이 교차되는 평평한 길은 은근한 소란만이 가득했다. 평일 오전 시간이었는데, 학교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꽤 보였다. 천천히 거닐다보니 문학부 건물 옆에 윤동주 시비를 발견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시인은 동지사대학의 문학부 문화학과 영어영문학 전공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영문학사, 영문학연습, 영작문, 신문학 등의 수업을 들었다. 시인이 집은 다나카 타카하라초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 있었다. 시로카와(백천)과 카모카와(압천) 두 강 사이의 동네다. 그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통학했다. 거리는 아주 먼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대학이 곧바로 이어져 학풍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훌륭한 산책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더구나 그의 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몽규의 집이 있었다. 둘은 자주 함께였을 것이다. 



나혜석이 그렸고 정지용이 읊었던 카모카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나는 강변을 따라 조금 걸어보았다. 넓고 잔잔한 물가는 여름이면 사람들의 휴식처가 된다고 했다. 누군가는 카모카와는 밤에 보는 게 더 좋다고도 했다. 나는 아무 감흥없이 물을 보고 다리를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 어떤 까닭에서인지 교토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히 감흥에 젖어들 수가 없었다. 다만 금목서의 향기가 나를 불렀다. 혹시 시인의 글 언저리에도 금목서의 향이 깃들지 않았을까. 





1942년은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다. 군국주의는 거세게 날뛰어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옥죄었다. 사상의 압박이 거세졌고 조선어로 된 것들이 사라져갔다. 누구나 전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열정적이며 창백한 지사인 송몽규는 요시찰인이었고 온화하고 조용한 시인이나 집안 좋고 두뇌가 뛰어난 조선인 학생들과의 회합은 전쟁 중인 경찰에게는 좋은 사냥감이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사상 탄압을 주임무로 하는 특고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취조과정에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쓴 시와 글들을 일본어로 옮겨야했다. 단 한편도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던 시인이 자신의 글을 일본어로 옮긴다. 그는 재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교토를 떠나 후쿠오카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후에 발견된 취조문서와 판결문은 조선독립과 자국의 문화부흥을 위해 어떻게 활동할지를 조밀하게 의논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선고받은 날은 1944년 4월 1일, 맑은 봄날이었다. 시인이 교토를 떠나던 날, 벚꽃이 진창으로 피었을까, 얼음장처럼 암담했던 카모가와가 맑은 노랫소리를 내며 흘러갔을까,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며 소란스런 젊음을 내뿜지 않았을까, 강가의 다리에서 예술학교 학생들이 사생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검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그들은 죽음의 형무소로 가게 되었던 것일까, 거대한 주목 같은 오래된 도시를 떠나며 그들은 이 도시의 묵은 내를 폐속 깊이 심어두지는 않았을까, 귓가에 들리는 온갖 달콤한 일본말들이 상냥했을까, 그들은 죽음을 예감했을까. 떠나면서 이 도시가 그리웠을까? 







이 도시는 작은 시비로서 그렇게 떠났던 자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 시비 옆에 세워진 정지용 시비를 들여다보았다. 시비에 새겨진 카모카와(압천)이라는 시는 윤동주가 걸작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좋아한 시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지사대학에 유학했으며 또한 윤동주가 그토록 숭배하던 시인이었다. 그는 1947년에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를 소개했고, 그 다음해 뜻을 모은 사람들이 윤동주의 유고시집을 출간할 때 서문을 적었다. 정지용의 시비는 2005년에 세워졌다.


압천 십리 ㅅ 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여울 물소리에 묻는다. 십리벌에 묻는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가혹했는지. 





























흐린 회색으로 바랜 원고지에서 세월을 읽을 수 없었다. 엊그제 필적을 남긴 것처럼 잉크의 흔적이 생생했다. 원고지는 반으로 접어 오른쪽 귀퉁이를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세로로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간 글씨에 잉크의 농담이 느껴졌다. 푸른 색 펜 글씨는 멋부려 구부린 흔적 없이 담담하고 단정했다. 펜으로 글자를 적으면서 약간 긴장한 듯도 싶었다. 시집을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후, 스스로 필사해서 만든 시집이었으니까.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잠깐의 멈춤이 느껴진다. 원고지 속 사각의 칸에 한 글자씩 써 넣으면서 무던히도 호흡을 고르는 시인이 숨결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글자는, 한 편의 시가 되어 읽히기 전에 종이 위에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쪽 손바닥을 조용히 누른 채 글자를 채워가던 청년의 호흡으로 먼저 다가왔다. 나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그 호흡을 따라간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일혼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이윽고 마침점


나도 격앙된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작년 봄날의 일이다. 

시인 윤동주의 육필 원고가 모교인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던 2013년 3월, 도서관 전시실에서 원고를 공개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우연히도 연세대 교정을 지나다가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았고 얼른 도서관을 찾았다. 평전이나 논문 속에서만 존재하던 육필 원고를 직접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시인의 필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윤동주의 시는 내가 “책읽기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또랑또랑하게 발표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시인의 온기와 흔적이 담긴 원고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그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원고 뭉치 속에서 그는 봄의 미풍처럼 머물렀고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인의 유족이 연세대에 기증한 시인의 소장품. 그가 사랑했던 시집과 문학책들이다. 




10대의 문학소년 시절부터 그토록 아끼며 읽었다던 정지용 시집과 한정으로 발간된 백석의 시집을 구할 길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 베껴쓰고 거듭 읽었다는 <사슴> 필사본도 한켠에 있었다. 시인은 이 자리에 없건만 시인이 소장했던 책들은 북간도 용정의 집에서 먼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왔다. 시집 <사슴>에 대한 사연은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 평전’에서 읽고서 밑줄 그어두었던 부분이었다. 그런 책들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의 학적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적부에는 ‘尹東柱’라는 이름은 붉은 색으로 지워진 채 ‘平沼東柱’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히라누마 도주'라는 그의 새로운 이름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전시실에 머물다가 도록을 챙겨서 나왔다. 밖은 봄날 답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으나, 빛나는 햇살만큼은 참으로 아름답게 나를 감싸주었다. 어디론가로 바삐 걸어가는 신입생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경쾌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번지는 따사로운 기운에 눈을 감고 어찌할 바 모른 채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교문을 향해 가는 학생들과 반대로 옛 기숙사쪽으로 걸어갔다



 



연세대 교정의 윤동주 시비. 그의 아우인 고 윤일주 교수가 디자인했다.




2층 한켠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기숙사. 그가 시를 쓰던 곳은

지붕 아래의 어느 작은 방이었으리라.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이다. 그는 북간도 명동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났고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잠깐 수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명동과 용정에서 살았다. 서울의 대학시절을 마친 후에는 도쿄와 교토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했다. 교토 동지사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2년째 접어들 무렵, 사상범으로 체포된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절명했다.

그의 흔적은 1917년에서 1945년 사이, 저 북간도에서 한반도를 지나 도쿄까지 오간다. 만 27년 2개월의 삶의 동선에 시대를 대입해본다. 그 시절 저 북간도에서, 바로 이 서울에서, 먼 일본땅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왜 시인은 그토록 자주 참회를 했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을까?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빛나는 청춘을 맞이한 젊은 시인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조금의 위안이라도 선사했을까? 그는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떤 동네를 걸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까? 






옛 기숙사 내부에서 바라본 시비

 

     

 기념관으로 꾸며진 옛 기숙사의 한켠에 시인이 거쳐간 장소들이 나열되어 있다. 연세대의 옛 기숙사와 그가 유학했던 교토의 동지사대학, 그리고 투옥되어 절명한 후쿠오카 형무소. 형무소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 구조와 형태가 서대문형무소와 닮았다고 한다.



연세대의 옛 이름인 연희전문학교는 교사가 세워진 지역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원래 주소지였다. 1917년에 작은 목조 교사로 시작된 학교는 1920년부터 25년까지 화려하게 변신했다. 학생들이 공부하고 머물렀던 석조건축물과 기숙사, 운동장, 테니스 코트가 지어져 제법 캠퍼스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백양로라 불리는 캠퍼스 내부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유럽풍으로 지어진 당당한 건축물이 잘 다져진 대지에 펼쳐져있는 구조였다. 

1928년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잡지에 소개된 바로는 “경의선 신촌역에 내리면 15분이면 도착한다. 교사는 녹음이 짙고 오래된 소나무로 둘러싸인 산에 위치하고 있다. 공기가 신선하여 자연공권에서 즐기는 감이 든다. 건축은 대지내 산간에서 채굴한 운모편암을 주요 석재로 하여 요소요소에 화강암을 넣은 순 석조인 본관, 학관, 이학관 및 기숙사로 구성되는데..”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관 좌측편 언덕 위에 기숙사가 있다. 지금은 재단관련 시설과 시인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옛 기숙사 앞에서 윤동주 시비를 만났다. 누군가 두고간 꽃다발이 보인다. 높다란 시비 앞에서 잠시 멈추어섰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읊을 수 있다는 서시가 시인의 필체로 새겨졌다. 아까 보았던 육필원고의 그것이다. 

화강석 시비는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의 작품이다. 아우의 초상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우다. 시인보다 9살이나 어린 아우는 형의 죽음 이후, 혼자 서울로 내려와 형의 유품과 유작을 찾아다녔다. 북간도 용정에 살던 가족들은 광복후 월남하면서 시인이 아끼던 책들과 책상, 어릴 때 썼던 시와 편지 들을 가져왔다. 혼란한 시기에 모두 잃어버릴 처지에서도 비참하게 절명한 시인의 남은 흔적들을 품고 또 품었다. 연세대에 기증된 책과 원고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가족들이 죽을 위험에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놓지 못했던 것들. 아우는 시인의 시를 묶어 유고집을 냈고 시인의 족적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 아우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잠시 생각했다.



시인의 시비 뒷쪽 언덕 위에 거무스름하게 세월을 머금은 옛 기숙사 건물이 보인다. 2층짜리 건물이지만 지붕 아래에 다락처럼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붕 아래 공간에 동주의 방이 있었다. 대학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어떠할까? 한창 젊은 청춘들이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만들어내는 문화가 무척 궁금하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어른 대접을 받았고 실제로 더 성숙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아무렴 공부만 했을까? 일탈의 즐거움도 느끼고 이성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순수와 낭만을 오가던 이 시기는 빨리도 흘러 암흑으로 치닫는다. 

 

1940년부터는 한국어강좌가 일본학이라는 과목으로 바뀌고, 금서가 늘어났으며 도서관을 수색하여 책을 압수하는일도 생겨났다. 한인의 황국신민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말과 글은 허락되지 않은 언어였다. 시인은 시를 쓰지 못했고, 삶과 종교를 회의했다. 그러나 암흑 속에도 빛이 있듯이, 그 한줄기 빛처럼 평생에 이어질 우정을 나눈 문우 정병욱을 만났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결국 출간하지 못한 채 종이에 눌러쓴 글씨로만 남은 시들을 깨끗하게 정서하여 문우에게 맡겼다. 그는 시인이 죽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글로 씌어진 시들을 어렵게 보관하고 있다가 시인의 아우에게 주었고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날 쉽게 씌어지지 못했던, 허락되지 않았던 말의 흔적을 본 것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죄의식과 치욕을 견디던 청춘의 시간을 본 것이다. 

종이는 거무스름하게 변해 버렸지만 잉크의 흔적도 점점 옅여졌지만, 뭉개진 글자의 흔적 속에서도 빛나는 그 무엇을 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돌이키고 돌이켜 스스로를 일깨우고 또 일깨우는 목소리. 말의 정신. 그 신성한 봄날에 나는 투명하게 빛나는 정신을 보았다. 수십년이 지나 그 정신은 쉽게 꺼지지 않을 횃불이 되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공유된 감정이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시의 정신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시인이 필요한 시대, 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해 봄날 보았던 그 빛나던 순간이 나는 지금도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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