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용산을 걷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몇 군데 표식을 해보았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철길을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삼각지와 용산역주변에서 한강변까지 걸어볼 예정이며, 몇 군데의 장소들은 추가답사하여 블로그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답사를 했던 곳은, 남영동입니다. 지도에서 숙대입구역과 남영역 사이에 있는 사각형 격자모양의 필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지도들을 놓고 비교해보았는데요. 이 지역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점은 1930년대부터입니다. 하지만 용산지역만을 따로 떼어만든 용산시가도(1927년 제작)를 보면 남영동 지역의 필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고, 공설시장이라는 단어도 분명히 적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1920년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1. 1927년에 제작된 용산시가지도.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지도 2. 1929년 제작된 경성시가전도에는 이렇게 필지 구획만 나와있어요. 

아마도 용산시가지도가 더 정확하게 지역을 표시하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지도 3. 1933년에 제작된 경성정밀지도에는 지번까지 부여되어 빼곡히 채워진 모습입니다.

지도 해상도가 뛰어나지 않아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습니다. 






지도 4. 남영동의 당시 지명은 연병정이었습니다. 좌측하단에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경성부도로공사일람도, 1935년 제작, 부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광복 후에 등장하는 지명인데, 일제강점기에는 연병정이라고 불렸습니다. 일본군영과 바로 맞닿은 지역이므로 그와 이어진 지명이겠지요. 조선시대에도 군 주둔지가 있었고 군영지의 영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자료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남영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용산에 남아있다는 옛 시장을 찾아가려고 검색하다보니 옛 필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쩌면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었지요. 그곳이 남영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지도의 그곳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었습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간판들로 몸을 가리고서 이웃집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케이드로 형성된 시장 내부는 상점이 마주보며 일렬로 서있습니다. 너무 오래된 시장이라서인지, 이미 일대에 시장을 이용할 만한 수요층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인지, 상점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았습니다. 아케이드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물들은 꽤 오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용산시가지도에 표시된 바로 그 시장일 것입니다. 그동안 수차례 개수하고 보수하며 지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니 남영동 좌측 하단에도 공설시장이라는 지역이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시장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시장 내부로 들어가 두리번거립니다. 지금은 좀체로 볼 수 없는 천장 구조물을 올려다보고, 창과 창 틈으로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나 살펴봅니다. 상점들은 모두 샷시문이 달려있습니다. 






2층에도 방이 있는 걸로 보아 아케이드 양쪽 옆에도 분명 공간이 있겠지요. 그 방은 어느정도의 규모일까요? 어둡게 닫혀진 창 안에는 아마도 창고로 사용하는 이층방이 있겠지요. 양쪽 출입구의 문은 양문경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 수 있고 뒤로도 열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는군요. 인근 상점에서 일하는 분께 물어보니 문이 오래되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시장은 남영 아케이드라는 간판을 달고 서있습니다. 


<서울의 시장>이라는 책에 따르면, 용산 지역에는 군영을 비롯하여 일본인 사회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시장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수산시장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을 위한 먹거리와 살거리를 제공하는 일본 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서울의 큰 시장이었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크게 자리잡고 있을 때였고 공설시장도 여러 곳 등장했습니다. 



용산의 공설시장은 1920년부터 신문에 등장합니다. 동아일보를 살펴보면, 1920년 8월에 용산의 '경정'에 공설시장을 설치하고 9월 20일부터 시장을 연다는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경정은 지도4에서 공설시장이라 적혀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 시장은 위치가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1922년에는 건너편 연병장 인근에 가옥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수요가 높아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원정2정목(원효로 2가)에 사설 시장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윽고 공설시장도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공사를 진행중이든 룡산연병장에 새로 설치한 경성부의 공설시장은 일전에 공사가준공되야 금십이일오후 세시부터 개상식을 거행하고즉시물품을판매할터이라더라. 

<1922년 10월12일 동아일보>



하지만, 화재로 시장이 불타버렸고 약 백여평 규모의 시장을 부랴부랴 재건하여 1923년 12월에 다시 개점을 하게 됩니다. 다시금 용산 시장의 건물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점은 1937년인데요. 2만3천여원을 들여 "용산공설일용품시장"을 개축했다는 기사입니다. 공설시장이 품목별로 시탄소채시장과 일용품시장 두 가지로 나뉘어진 모양입니다. 


흥미롭게도 신문에서 서울시내 공설시장에서 매달 판매한 액수를 공표하여 시장을 이용하는 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 세워진 공설시장은 명치정, 화원정, 용산, 종로 등 네 곳이며, 이는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시장은 화재가 잦아 소방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공설시장법안이 시행되게 되는데, 1924년 동아일보에는 이러한 법안이나 각종 사회사업비, 공원조성비 등이 조선인의 삶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고 토로하는 기사나 실려있습니다. 


경비비는 작년 본뎡 애정뎡 등의 화재로 인하야 소방긔관을 충실히하라는 일반의 여론이 만흠을 따라 부당국에서도 다소간 충실히 시설할 필요를 늣기고 작년보다 삼만여원을 증가하게 된 것인데, 자동차 몃개를 느리고 소방긔구를 더갓추고 소방수몃명을 더늘이고 아울러그들의(거의 일인)대우를 올려주는것가튼것은 별로 문뎨가 아니나 이가치 충실히하는 소방대들이 어느곳에잇는가 상비소방대는 남대문밧게 경성소방대는 영락뎡에 룡산소방대는 룡산에 잇어 황금뎡큰길을 이북으로한 소위 북부에는 비번소방수 일인이잇슬 출장소한개 설비치 아니하얏스니 까닭은 알수업스나 엇지하얏든지 현재의 소방대와 북부와는 거리가먼것만콤북부와는 등한한처디인즉 이십여만원의 경비는 누구의생명재산을보호할 밋천인가


사회사업의뎨일항이 일용품 공설시장인데 긔설된 공설시장중에서 명치뎡 공설시장 화원뎡 공설시장 룡산공설시장은 그이름과가치 조선인과는 하등의관계가업슬뿐만 아니라 간신히 하나만 잇든 공로공설시장도 무슨까닭인지는 모르나 부에서 방임주의를 쓴지 오래이며 더욱 최근에 이르러 사월일일부터 시행하는 공설시장규뎡에 "종로시장은 제외하고...."라는 문구가씨엿슴을 보아이제로부터 이곳은 경성부와 영영 관계가업서지는 모양인즉 조선인은 공설시장으로하야 부의 덕택을 바든 일도 업고 밧는일도 업스며 그 다음부영주택 중 한강통 삼판통에 잇는 열세평짜리 마흔채는 일본인 주택이오 봉래뎡과 훈련원에 잇는 세평짜리 여든여럽채는 조선인 헛간인데 긔왕은 고사하고 금년에 계상된 삼천여원의 경비도 "다다미"를 밧꾸어놋는다는 것을 보아 조선인 헛간에 관한 비용은 아니즉 이것도 조선인은 모르는 돈이며 도시개량비 이만여원도 연구조사의 경비로 봉급 소모비 등인대 "무슨도시""누구의 서울"을 만들려고 연구와조사를 하는지는 모르나....


(하략)


(1924년 3월 24일 동아일보)






위의 기사를 읽다보면 조선인 거주촌을 '소위 북부'라고 표현한 부분 (그곳에는 소방시설도 변변치 않았고)이 눈에 띕니다. 지금 살펴본 용산시장은 일본인 거주자들을 위한 시장이었지요. 당시에도 요즘처럼  "무슨 도시" "누구의 서울"같은 구호가 있었던 것일까요? 도시 개발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던 것일까요? 

 






시장을 지나 격자형 골목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 지역은 미군부대(옛 일본군영을 그대로 이어받았죠)와 바짝 붙어있어서 개발이 제한된 지역입니다. 때문에, 높은 건물들도 지을 수 없고, 옛날 집들도 찾아볼 수 있지요. 길을 따라 가면 새로 지어진 빌라들 사이로 옛 집들이 슬그머니 몸을 들어냅니다. 


가장 남쪽 구역에는 집들이 서로 마주보고 같은 형태로 지어진 것들이 보입니다. 용산 일대에는 각종 은행 사택, 총독부 직원들의 숙소, 철도관사 등 관사촌과 사택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곳도 어떤 기관의 관사촌이 여태 남아있는 것일까요? 개발이 어려운 곳이었으니, 광복 후 개발업자가 지은 민간주택단지라 보기는 어려울 듯하고요. 이런 저런 짐작과 기대를 하면서 골목을 걸어봅니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있군요. 당시에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골목이었겠지요. 
































미군부대 바로 옆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것은, 부대찌개와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들입니다. 백반을 팔 것만 같은 식당에서 T본 스테이크를 대표 메뉴로 하고 있네요. 왠지 들어가서 한 스테이크 하고 싶은 집이에요. 
















지도에 "선은사택"이라고 적힌 부분까지 가보았습니다. '조선은행'을 '선은'이라고 불렀지요. 지도의 그 장소는, 3년전 답사팀을 따라 가보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때도 일대는 빌라촌으로 바뀌었고, 사택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콘크리트 슬라브의 집 한채가 남아있었지요. 





(2011년 9월 촬영. http://sweet-workroom.khan.kr/24)





하지만,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 일대를 둘러보아도 높다란 빌라들만이 가득하더군요. 겨우 한 채 남은 그 집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주변의 높은 건물을 찾아 옥상에 올라가 일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옛 집들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시간이 뒤섞인 자취를 그대로 노출한 채 도시는 점점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혹시, 

남산타워도 사라질 날이 올까요? 































얼마전, 어떤 모임에서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쓴 책인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두 문장으로 근대문화유산 기행을 하게 된 배경과 의미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그러고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내가 백년 전 건물을 보고 백년 전 이야기를 수집하는 이유는, 그 시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잘 알고 싶어서라는 거였습니다.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노력보다는  지우고 없애는 데 익숙한 지금을 돌이켜보고, 시대를 연결하는 지점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기는 글과 사진들이 기록물로서 좀더 가치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의 길 위에서 도시를, 어떤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하나로서. 







오늘은 용산으로 갑니다. 





용산은 참으로 복잡한 맥락을 가진 지역입니다. 근대시기, 철도로 인해 새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을 수용하면서 세를 키우기 시작한 용산은 일본군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해방후 일군영은 미군부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지요. 해방 후 월남한 사람들이 자리잡은 해방촌,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집창촌, 다문화지역인 이태원, 곳곳에 고개를 쳐드는 재개발 바람과 최근 와해되고만 용산 국제업무지구 등등...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맥락을 가진 곳이 용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후암동, 갈월동, 해방촌 일대는 걸어본 적 있지만 좀더 철도와 가까운 지역들을 탐색하면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없나,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서너 차례 신용산과 구용산을 넘나들며 걸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구용산과 신용산이라는 지명이 실제 사용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라고 합니다. 전철역에만 붙은 편의상 지명인줄 알았는데, 1920년대 지도에서 용산역을 기점으로 서측편은 구용산으로 동측편은 신용산으로 표기하고 있더군요. 옛 지도들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흐릿한 능선이었던 곳이 점차 도로가 되고 필지가 되면서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을 지도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새로 생긴 도로와 옛 도로 사이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도를 무척 좋아합니다. 지도는 비교해서 볼 수록 재미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봐야할지 까마득할때 지도를 펼쳐봅니다. 그러면 가봐야할 장소들이 점차  뚜렷해집니다. 


 

1940년 제작된 대경성명세도의 구용산 부분입니다. 





같은 지역이구요. 1945년 미군이 제작한 경성지도입니다.  



지도를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철도 관사라고 표시된 지점입니다. 위의 지도는 부분만 캡쳐한 것인데, 전체지도를 보면 용산역 우측 하단에 철도관사촌 필지가 크게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효창공원 근처에도 철도관사촌이 생겨났는데, 지도로 보아 1930년대 이후의 일로 추정됩니다. 능을 옮기고 효창원 넓은 부지가 개발되면서 격자형 필지가 생겨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관사들은 등급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기록할만한 사례들이 지방에는 조금씩 남아있습니다. 용산은 어떨까요? 뭔가 남아있는 게 있을까요? 



두번째로 가보고 싶은 곳은, 불교 자제원으로 표기가 된 곳입니다. 1948년 12월 이곳에서 화가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꽃처럼 어여쁘고 귀했던 여자의 말로는 더없이 처참했습니다. 그녀가 왜 용산 자제원에 있었는지 그 누구도 알수 없으며 왜 거기까지 흘러왔는지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곳이 그녀의 마지막 거처였을 뿐입니다.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영역에서 숙대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효창공원쪽으로 꺾어집니다. 이 동네가 청파동입니다. 청파동이라고 하니,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





빈 들판을 서성이는 말을 잃은 짐승처럼 시는 처절하고 거칠고 직설적으로 사랑의 폐허를 말합니다.  청파동 골목길을 돌아 마주친 몇몇의 집 풍경들이 시어들과 묘하게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집, 사람이 살지 않는 집, 폐허가 된 집, 온기를 잃은 집 들 앞에서, 사랑의 폐허를 보는 것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듯이요. 갈길 잃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집 앞에서 시어들이 날아듭니다.  














효창공원을 지나 일대를 한바퀴 돌면서 우리는 점차 관사촌과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빌라촌으로 바뀌어버려 필지의 흔적만 남아있는 거리에서 초창기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필지가 크고 넓어 상당히 큰 관사들이 자리잡았겠구나, 하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퉁이 앞에서 만난 건물 한 채. 당시의 구조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일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맞은 편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서야 집의 형태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옵니다. 즐거운 수확을 했다 싶습니다. 건축학자는 아니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 중에서도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건축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부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쉬워하며 골목을 돌아나옵니다. 










원효로도로 주변의 집들은 여전히 복잡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식 연립주택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촘촘히 어깨를 맞댄 집들이 무수히 넘어온 세월이 참 길어보입니다. 멀리서 초고층 건축물이 하늘을 가릴 듯 서있는가하면,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양식의 건축물들도 틈틈이 넘나듭니다. 좁은 경사 골목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길을 잃을 뻔합니다. 오래된 골목들도 그대로입니다. 낡은 곳을 나름의 방식으로 덧대고 옷을 갈아입히며 마치 집과 사람이 동반자처럼 함께 살아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불교 자제원이라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도에서도 꽤 번듯한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 자리에 지금은 용산경찰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대에 일제강점기 일본식 사찰이 상당히 많았고, 그 중 하나에서 운영하던 시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병원은 전염병 환자 등 격리 수용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기도 했고, 행려병자들을 거두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립병원의 하나가 되었다가, 병원이 이전하면서 용산경찰서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용산원정 일뎡목십이번디 일본인의 경영하는 불교자제원에서는 이전부터 시내각처에서 의지가지가 업시 류리개걸하는 행려병자들을 수용하야 여러가지로 구제하여왓슴으로 지금도 약 오륙명 가량이 그 병원안에잇다는데....(하략)"

1926년 1월 9일 동아일보 




이곳에서 한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녀,  5척 3촌의 신장을 가진 정상신체의 여인이 흐트러진 머리에 남루하고 낡은 옷을 입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립자혜원에서 병사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여류화가, 구미만유를 다녀온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여인이 쓸쓸하게 떠난 곳입니다. 


나혜석의 죽음을 말해주는 것은, 공보처에서 발행한 관보의 내용입니다. 1949년 3월 14일자 관보에 본적, 주소가 미상이며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53세 여인이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에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흔적을 짚어보려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시간 위에 얹어진 인간의 향기를 더듬어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머물렀던 서울의 장소들을 좀더 쓸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굴다리는 상당히 높았다. 경부선 철도선이 지나는 다리다. '영동', '횡간'이라는 지명은 KTX가 등장하기 전, 무궁화호, 새마을 호를 타던 시절에 자주 들었다.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입했을 때 등장하는 지명이다. 다리 아래에 서있은지 십여분 되었을까? 다리 위 철길로 기차가 우당탕거리며 지나간다. 철로 아래 다리에 날카로운 소리와 묵직한 진동이 이리저리 튄다. 나는 기차에 탄 것 마냥 휘청거린다. 오래된 다리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겁이 난다. 하지만, 곧 소리는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근처에는 사람사는 곳도 눈에 띄지 않고 그저 너른 벌판과 야산이 있을 뿐이다. 차나 사람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지점은 아닌듯하다. 




통로가 두 개가 있어 쌍굴다리다. 하나는 하천이 흘러가고 한쪽은 도로다.  쌍굴다리에서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있는 사람들 몇몇이 차를 멈추고 굴다리를 왔다갔다 한다. 굴다리 주변에는 온통 총탄 파편이 튄 자국과 그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표시해둔 자국들로 가득하다. 동그라미도 있고 세모꼴도 있는데, 두 개가 어떤 차이인지 알 수는 없다. 들은 이야기로는 굴 내부에도 총탄의 흔적들이 가득했으나 보수공사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굳이 흉한 자국을 그냥 둘 까닭이 있겠는가, 잊어야 할 일을 자꾸 들추어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말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꾸 덮어두자고, 감추어두자고 한다. 




노근리.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해불가능한 죽음과 학대와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니말이다. 60년 전에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전쟁, 그 전쟁을 수행하던 외국의 군인들이 피난을 가던 사람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거나, 저항하지도 못한채 죽어쓰러진 자들이 수백에 달한다거나,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군인들은 상부의 사격 명령에 따랐다거나, B-29 전투기가 우선 공격하여 수백미터 상공에서 포탄을 떨어트렸다던가, 한날 한시에 죽은 사람들이 많아 그 지역 사람들은 죄다 제사일이 고날고날이라던가, 참다참다 미국에 진상조사를 요청했다가 증거불충분과 시효만료로 거부당했다던가, 이윽고 비공개 문서들이 공개되어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입장을 재점검하게 되었다거나, 한반도 상황에 무지했던 군인들이 캠핑을 오듯 전쟁 수행을 하다가 여러 차례 전멸했다는 기록과 민간인을 공격한 기록들이 공개되었다거나,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정의를 찾고자했던 전쟁이 아니라 소련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제 다 한세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노근리에서, 그 허탈하고 끔찍하고 숱한 죽음 앞에서,


지금 역시 도처에 놓인 죽음들과 유린된 인권 앞에서 진정 애도하고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싶다. 괜찮다는 등 할수있다는 등의 사탕발림으로 토닥거리며 다시금 죽음같은 긴 행렬에 줄을 세우는 값싼 힐링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길고 아프게 울어야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노근리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 보도하여 결국 진상조사와 미국의 가해사실 인정까지 이끌어냈던 저널리스트들이 가졌던 기자정신, 기자의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기자정신이 무엇인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고 권력과 수구와 관행에 빌붙어 히히낙낙하는 자들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하고싶다.



과거사진상조사를 시행하는 단체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와 같은 단체들-이 국가가 저지른 테러에 희생당한 개인의 비극이 묻히지 않도록 어떤 일들을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은 보도연맹으로 죽어간 사람들, 한국군과 미군들이 오인폭격하여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들, 그저 전쟁의광기에 미친 군인들이 유린하고 초토화시킨 마을을 이야기한다. 전쟁직후 유가족들이 얼마나 거세게 국가를 상대로 투쟁했는지, 그러나 혼란한 틈을 타 정권이 바뀌며 또 어떻게 그들의요구가 침묵으로 바뀌었는지, 왜 지금도 빨갱이라는 말로 금을 긋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토록 오랫동안 국가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줄도 몰랐던 사람들, 시절들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눈을 뜨자고, 잠을 깨지고 말이다. 










겨울 노근리에서, 나는  악몽을 꾸고 깨어난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1950년 8월 7일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고지고 손붙잡고 끌며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이 북한 인민군들이 대전을 함락하러 목전에 와있다는 것도 모른채  노근리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미군들의눈빛이 불안했다고 느꼈지만 파란눈의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을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철길 위로 몰았을 때는 빠른길로 안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윽고, B-29전투기가 보이고 기관총 사격과 폭격으로 눈앞이 하얀 연기로 가득했을 때에도 꿈만 같았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길을 달렸을 것이고, 눈을 뜨고 보니 굴다리 안이었을 것이다. 



굴다리 앞에 서본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굴다리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그날이 펼쳐진다. 습하고 무더운 삼복더위의 한낮, 다치고 찟긴 사람들이 아우성대는 굴다리. 그때 사람들은 모두 짐승이 되어있었다. 총든 군인들은 먹이를 지키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였다. 오도가도 못한 닭장 안의 짐승처럼 수백명의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굴다리에 목숨줄 붙들듯 숨어들었다. 굴다리 안에는 숨을 데도 없다. 누군가가 총알받이가 되어준 덕분에 누군가의 목숨이 붙어있을 뿐. 치료해주었다가 총을 쏘아대는 이상한 군인과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우는 아이를 억지로 물 속에 집어넣은 아비는, 팔다리가 떨어진 채 죽은 가족의 시신을 바라보아야하는 남은 자들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어 죽은자들이 흘린 피가 그득한 냇물을 억지로 삼키던 그 여름의 노근리 사람들은 얼마나 울어야했을까. 





그렇게 일주일이 갔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24사단이 퇴각하면서 쌍굴다리 사람들은 버려졌다. 절반은 죽었고 나머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추스린 사람들은 고작 백여명. 얼마나 울어야 그 여름의 더위와 살이 썩는 냄새와 더러운 물을 잊을 수 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죽음을 말할 수 있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굴다리 앞에 설 수 있었을까.


















노근리 쌍굴다리는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노근리 평화공원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기념관과 널따란 공원이 외딴 마을인 철로 주변을 채우고 있다. 2년 전 여름에 쌍굴다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평화공원은 한창 지어지던 중이었다. 기념공원은 조용히 완성되어 조용히 개관했다. 미군의 양만학살이라는 민감하고 복잡한 사안들 때문이었을까. 잊혀진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한 겨울 해거름에 방문한 노근리는 그저 쓸쓸했다. 기념관인 건물과 조각공원, 위령탑 등이 있고, 건너편 너른 부지에는 조잡한 포토존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십년동안 반복해온 이미지들로 가득한 고답적인 조각들도, 십수년 전 다니엘 리베스킨트라는 건축가가 베를린 유태인박물관이라는 걸출한 체험형 건축공간을 만든 이후로 생겨난 아류 같은 박물관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 유적>이라는 공간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있어야 옳은지 논의한 바도 없으며, 수십년 동안 되풀이해온 이미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근거도 문제의식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곳이 추모의 공간이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허벌판의 너른 부지가 아니라 촘촘하게 크고작은 나무가 심어진 숲이되길, 따뜻하고 참한 숲이 자라나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영원한 삶으로 기념해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웨덴 어느 곳의 숲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시민묘지처럼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함께 치유받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좋겠다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노근리 사건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당시 긴박했던 전쟁상황에 대한 기록도 있다. 민간인임을 알았다고 말하는 미군 병사의 인터뷰나, 죽은자 중에 유난히 정씨가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 이 사건을 세계에 알린 저널리스트의 사건 취재수첩도 놓여있다. 미국에 대한 해명 요구와 철회, 재조사와 재조사. 지난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전히 쌍굴다리에는 "노근리 사건 현장"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중인 싸움들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직 우리는 추모할 준비도, 기념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그 현장에 있을 뿐이다.  



















설연휴를 맞아 남쪽으로 가족들을 보러갔습니다. 오랫동안 부산에 살았던 부모님은 몇 해전부터 양산 천성산 아래 신도시로 이사했고 큰동생 부부도 부모님댁에서 멀지 않은 정관신도시(여긴 부산광역시에 속해있다고 하는군요.)로 옮겨왔지요. 부산의 오래된 곳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우리 가족 역시 살던 데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그렇게 옮겨다니는구나, 싶습니다. 온가족이 모였으니 금정산에 올라가 산바람도 쐬고 산성막걸리도 한잔 마시자 했는데, 날이 우중충하니 비소식이 있더군요. 동생 내외가 양산 근처에  한적하게 거닐만한 곳이 있다고 하여 가보기로 했습니다. 


"70년만에 개방하는" 숲이 있는 수원지라고 하더군요. 


숲을 거닐 생각에 따라나섰습니다. 신양산에서 구양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들녘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니 '법기리'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도로 끝에 막힌 담이 있는데 이곳이 수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멀리서도 거뭇거뭇한 큰 나무들이 보입니다. 이곳이 '법기 수원지'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숲의구조가 몹시 이상한 탓이지요.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와 벚나무 숲인데, 그 위로 깎아지른 높은 언덕이 있습니다. 언덕은 잔디를 심어두긴 했지만 그 높이가 몹시 인위적으로 보였어요. 오른쪽에 석재로 쌓은 통로와 문이 있습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세운 댐이었어요. 부산의 물부족 해결을 위해 부산에서 한참 떨어진 양산 어귀에 수원지를 조성한 것입니다. 


옹벽같은 언덕을 올라가려면 120여개의 계단을 밟고 가야합니다. 절로 한숨이 푹 쉬어지는 등반 후에 넓디넓은 물이 우리를 반깁니다. 산으로 둘러싼 호수같은 물은 지하 어딘가에 매설해놓은 수도관을 통해 지금도 부산으로 흘러갑니다. 얼마나 큰 파이프가 그 속에 깔려있는 걸까요? 물 아래 어디쯤일지 가늠되지 않습니다. 



수원지의 물도 많이 줄어있음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2013년 부산은 가뭄으로 피로한 한해였습니다. 여름내내 빗방울이 거의 떨어지지 않아 땅도 들도 사람도 목이 탔습니다. 지금도 그 피로가 여전합니다. 축축해야할 숲길에서 가슬가슬한 기운이 느껴지고 잔디는 말랐으므로, 물은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제 할일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반기는 숲길은 여전히 조성중입니다. 안내문에는 편백나무, 히말라야 시다, 벚나무, 추자나무, 은행나무, 반송, 감나무 등 7종 총 644그루의 나무가 촘촘히 심어져있다고 합니다. 길 따라 심어진 키큰 히말라야 삼나무를 따라 걷다보면 그 틈으로 촘촘히 메워진 편백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편백의 향이 많이 느껴지지 않은 건 여전히 가뭄이 끝나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건 벚나무인 것 같습니다. 


반송은 댐 위쪽에 모두 일곱그루가 심어져있습니다. 허리가 꺾인 채 낮게 가지를 펼친 반송의 자태가 꽤 근사합니다. 나무 모양만 보아도 척척 수종을 알아맞춘다면 좋을텐데요. 나무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어떤 나무들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조만간 꽃과 나무를 좀 배워보렵니다. 배우고 알아갈 때 애정이 더깊어지는 법이니까요.







<1927년 1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 중>



수원지 까닭에 법기리 전멸?


부산부에서는 공업비 이백오십만원을 투하여 사개년 게획으로 부산 상수도 확장을 하는데 그 수원지는 양산군 동면 법기리 하경사산구이라하며 시공식은 거월에 동래 제이 수원지 안 범어사에서 거행하엿스며 차 상수원지 공사는 내년초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이 법기 수원지의 집수면적은 '이백칠십만오천 평'이요 저수하부지 면적은 '십일만삼천삼백여 평'이라 하며 면적 중에 경작면적 '칠만팔천여 평'이 함입된다는데 법기리 중상부락은 전멸지경에 함아엿으며 그 상하부락 전 인구 백삼십육호 중에서 차함멸되는 경지의 소작인은 구십호에 달하여 그 인구가 삼백여명이나 된다 한다. 원래 차 부락은 산중협곡지로 경지가 최귀하며 산곡에 처하야잇는 까닭에 하부락 혹은 경작지와는 전연상격하야 잇스며 농경작면적이 백여정보에 불과하는 터임으로 금번 부산 상수원지가 됨을 따라 각 리민은 경작지 태반이 업서지는 동시에 삼백인구는 그 활로를 실하야버리게 된다더라.







우 수원지 공사 착수에 당하야 부산부에서 그 토지매수와 이민의 양해를 구코저 양산군을 통하야 해함입지주 및  동 소작인 사십여인을 거 십칠일 하오 일시에 양산군읍 보통학교에 초집하고 부산부윤의 부산상수도 확장공사의 설명과 기사의 설계과정이 유한 후 양산군수와 경찰서장의 희망과 주의가 잇슨 후 지주와 주민의 희망진술을 하고 지주급 주민 중에서 토지가격 및 소작인구제에 대한 교섭위원으로 구인을 선거하야 금후교섭을 하기로하엿다는데 부산부에서는 토지가격에 대하야는 상당한 대가를 변상하겠다 하나 활로를 실한 소작인에 대한 구제에 대하야서는 하등설명이 업슴으로 삼백여 인구의 금후 생사양로는 실로 막연하게 되어 잇는데 교섭위원과 군당국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문제는 엇더케 낙착될 것인지 모든 해결은 금후에 남겨두고 마럿다더라.  (하략)





















옛 기사에는 식수로 사용하는 물이 아니라, 공업용수로 제공되는 물이라고 하는군요. 경지는 댐이 되고 주변의 산지는 함양림으로 경작될거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법기 주민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는군요. "생활터전도 경작지도 없이 이곳에서 무슨수로 살아가나, 만주나 간도로 갈수도 없는 마당에...."



댐의 총길이는 260미터에 달하고 댐의 옹벽은 21미터입니다. 공사는 1932년까지 5년에 걸쳐 진행되었지요. 완공후부터 2011년까지 금단의 공간이었습니다. 몇 번 예외는 있었다고 하네요. 1960년대에 대통령이 이 수원지에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은 안내판에 실려있고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일본 황족의 방문하여 숲을 즐겼다고요. 지금은 보호림 내부로 들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누구나 숲과 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석재를 쌓아올리고 문을 만들어놓은 곳은 취수터널입니다. 취수터널 위 석판에는 "生(원정윤군생)"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습니다. 발원지가 맑고 깨끗하면 모두를 살린다는 뜻이겠지요. 글자의 왼쪽에는 子爵 齋藤實 (자작 재등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에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자였지요  1927년에 총독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고문이 되었다가 1929년~1931년에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댐이 조성될 당시 총독이었던 그가 내린 글귀입니다.

 

가까이가면 마치 석빙고의 입구처럼 찬바람이 불고, 물 냄새인지 한 기운이 코로 스며듭니다. 긴 터널이 끝도 없이 뻗어있습니다. 댐 안에 있는 수위관측소도 유사한 시점에 지어졌을 겁니다. 하늘색 페인트는 썩 아름답지 않지만 돔은 꽤 재미난 모양새를 하고있습니다. 마치 클로슈 모자처럼 가장자리가 날렵하게 꺾인 것이 공들여 제작한 것 같아요. 











70년 전에 만들어진 수원지는 있는 듯 없는 듯 듯 제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역사의 한조각을 품고서 우리 삶의 작은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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