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통과한지 십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 점점 더 서른살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서른이라는 나이가 무언가를 이루기엔 어렵고 심리적으로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울부짖는 나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십대였을 때는 서른은 인생에서 한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나이로 알았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되, 어느 정도 그 가닥을 잡은 나이, 그래서 모험은 조금 밀쳐두고 끈기 있게 밀어부치는 나이라고 말이지요. 




실제, 서른을 통과하던 시점에서 그런 단단함과 의지가 내게 있었는지 확답할 수 없었습니다. 시대가 변한 까닭인지, 뚜렷한 목표라던가 의지가 다가와주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앞선 세대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가 봅니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서른 즈음에 인생의 빛나는 성공을 이룬 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글을쓰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사업을 일으키고 정치 권력에 가까이 간 사람들, 그들은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나이에 참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들이고, 그 시대적 흐름을 현명하게 잘 포착한 젊은이들이 뭔가를 이룰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요? 거칠지만 새로운 목소리를 기성세대 혹은 동세대들이 서로 인정하고 긍정적인 기폭제로서 꽃피웠기 때문일까요? 



한편에서는, 식민과 전쟁의 책임을 기성세대에 물으며 젊은 세대들이 공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고도 하고, 과거를 부정하는 데서 현재를 일으키는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쨋건 그들은 새로운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실었고 기회를 쟁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건축가 김중업이라는 사람, 그도 서른 즈음에 참으로 많은 것을 이룬 청년이었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인만큼 건축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건국대 도서관, 부산대 본관, 서강대 본관이 차례로 지어졌고, 명보극장, 신공덕 원자력 연구소, 남산 드라마센터, 이화산업 공장 그리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그의 삼십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최고 학부를 가르치는 교수였고, 유네스코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수년간 일하기도 했지요. 



그의 사십대라고 빛나지 않았을까요? 성공회회관, 제주대 본관, 단단한 언어가 감지되는 개인주택과 별장, 서산부인과, 부산 UN 묘지, 삼일빌딩이 줄이어 세워집니다. 그는  김수근과 함께 시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건축가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바람은 그를 



내몰았습니다. 추방 난민으로 프랑스에서 살다가 8년만에 귀국이 허락된 비운을 겪고, 다시 돌아와  부산 민주공원의 충혼탑, 올림픽공원 조형물 등을 완공하고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민족대성전 등을 설계했습니다. 건축가는 참 질기게 사회에 결합되었습니다. 추방령을 내린 조국을 등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돌아와 이 땅에 애도와 기도와 비상의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의 건축은 더러 사라지기도 했고 더러 남겨지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어떻게 쓰일 것인가 논의되던 김중업의 건물 하나가 얼마전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있는 김중업박물관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도처에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김수근이 아니라, 김중업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서른 일곱, 젊은 그가 설계한 유유산업 공장. 


안양천변 너른 부지에서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만들어준 한 제약회사의 공장과 연구시설은 설계자에게 헌정된 공간이자 예술과 공공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안양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건축 아카이브와 연구실도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벌써 


6회를 맞이했습니다. 첫회때가 떠오릅니다. 작품들은 신선했고 두고두고 활용되면서 안양유원지를 뜨겁게 했지요. 그 후 안양 시내로 확대되어 예술가들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생겨나는 것을 목격했고 '알바로 시자'라는 굴지의 건축가가 지은 안양 파빌리온과 '비토 아콘치'의 숲위를 덮는 터널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올해는 김중업박물관이 개관하여 프로젝트에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안양문화재단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APAP 프로젝트,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유유산업은 1940년대부터 시작된 



제약회사입니다. 안양에는 공장과 연구시설이 지어졌습니다. 1959년에 공장이 가동되고 50여년간 이어오다 공장이 옮겨간 후,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이 거의 12년 전의 일이니, 그 동안 많은 협의와 계획이 오갔겠지요. 


김중업이 설계한 4개동을 남기고 리노베이션했습니다. 문제는 유유산업 터가 오래전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안양사가 있었던 터이며 여전히 발굴할 여지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절터에서 안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기에 무시할 수 없는 유적지인 것이지요. 때문에 산업유산과 사찰이라는 고대유적지, 그리고 현재의 예술공원이라는 세 개의 시간축을 어떤 식으로 조화롭게 풀어내는가가 관건이었습니다. 



현재, 김중업 박물관은 세 개의 큰 건물에 


각각 예술센터, 김중업 전시관, 안양사지 전시관 등의 프로그램이 삽입되어 있고, 그외의 공간과 중앙의 넓은 터를 각각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는 완충공간으로 이어져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에서 안양의 스토리를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공간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입구의 X자 조형물은 르 코르뷔제의 모듈러(인체비례도)를 응용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김중업 아카이브는 그의 건축세계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모형, 도면, 다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공간은 작지만 단단하고 안정감을 줍니다. 따뜻하고 밝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손댄 흔적들이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경비아저씨들도 이 건물은 남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남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럼 이제 건물을 보러 갈까요? 









1. 어울마당 _ 창고와 공장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전시물이 설치된 예술센터로 사용됩니다. 

중앙에 빛이 들어오는 부분, 황동 느낌의 핸드레일이 보기 좋습니다. 

안양의 현재를 담은 다양한 전시물들을 소소하게 즐기며 공간을 유람할 수 있더군요. 

문은 새롭게 달았지만 문 손잡이는 옛것을 그대로 썼더군요. 




























2. 안양사지 전시관- 보일러실 


고대유적지 전시관의 딱딱한 분위기를 인터랙티브한 전시가공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유유산업 지에서 발굴과정을 소개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더군요. 

공공예술프로젝트 작품이 야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영환 작가의 오벨리스크와 후지코 나카야+더블 네거티브스 아키텍처 팀이 작업한 '무'라는 안개작품이 있는데, 간헐적으로 안개가 형성되는 이 작품을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2. 김중업관 _ 공장및 사무실

건축가 김중업의 기증자료와 그의 건축세계를 살펴보는 전시관입니다. 외부계단이며, 길다란 케노피가 눈에 띕니다. 


기증품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문이 아주 낮아 기분이 묘합니다. 

당시 뉴스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음성자료, 영상자료들은 오래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옵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업은 1970년대 초


몇 가지 정부의 주택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씁니다. 특히, 광주대단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었죠. 그것으로 그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성북동과 장충동에 자택과 사무실, 아틀리에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로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삼일빌딩의 설계비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는 추방됩니다. 여권도 없이 국외로 쫓겨난 그는 난민으로 프랑스에 정착합니다. 



그 지점에서 잠시 발을 멈춥니다. 창신동-백사마을- 아파트인생에 이어 김중업 박물관에서도 광주대단지가 또 등장하는군요. 그곳은 단지 철거민들의 집단이주촌인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김중업은 그곳을 왜 그리고 어떻게 비판했을까요?  


 광주대단지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아파트에 다들 살고 계신가요? 저는 분명 어렸을 적엔 마당있는 단층집에서 살았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파트로 옮겨왔습니다. 지금은 베드타운으로 형성된 신도시의 대단지 아파트의 고층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다들 아파트에 삽니다. 년수와 평수가 다를 뿐, 비슷비슷한 구조의 집입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략적으로, 누군가는 늘 그래왔다는 듯,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며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살아갑니다. 


앞으로는 예술가나 문인들의 생가나 아틀리에를 찾아갈 때, 복잡한 골목을 통하지 않고,  00 아파트 0동 0호로 가게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므로 집보다는 다른 장소, 이를테면 세컨드하우스나 아틀리에, 작업실과 같은 개성있고 은밀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질거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파트 인생>이라는 전시는 서울의 아파트 변천사를 꽤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살게 된 아파트에서의 인생이 국가정책의 변화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문화, 가전제품 등 산업 등 모든 것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도시에 침투한 것이 1960년대라고 하니, 50여년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맞춰서 성형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이 50년 전 계획된 아파트에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강풀의 만화 <아파트>가 꽤 으스스한 호러물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아파트 인생>은 전시회로 울렸다 웃겼다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당신, 꼭 한번 가서 관람해보기를 권합니다. 





서울의 아파트 개발정책에서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다양한 아파트들, 투기열풍과 아파트 디자인, 재개발과 철거.....인생의 여러 고비처럼 전시관을 넘나들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들을 발견했습니다. 








1. 아파트 분양 추첨






요즘도 아파트 분양 추첨할 때 경찰관이 참여하여 엄정하게 진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눈을 가리고 해당 관계자가 번호를 뽑거나 분양대기자들이 추첨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과 호수에도 민감한 만큼 그 방법이 엄정하지 않다면 곤란하겠지요. 예전에는 손톱만한 은행씨앗에 번호를 적어 그것을 추첨하는 데 썼다고 합니다. 은행이라니요. 처음엔 어이없게 생각되었지만, 합리적인 방법을 찾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추첨방식에 의문이 없는지도 궁금해지네요.  









2.초기 아파트 디자인 




1961년 지어진 마포아파트





금화아파트



단순하지만 디자인 요소가 분명한 아파트.


콘크리트로 장식없이 만든 미니멀한 디자인의 놀이터.


아파트 단지 디자인이 꽤 멋집니다.1960-70년대 우리는 아파트를 짓는 기술 수준이 꽤 높았다고 합니다.

1961년에 등장한 마포아파트는 단지 계획이 최초로 실시된 것으로 의미가 높은 건물입니다. Y형 아파트가 당당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이 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에서 추진했고 임대가 아닌 분양 방식으로 제안하여 아파트 문화의 미래를 열어간 사례라고 합니다.  단지 안에는 공원, 녹지, 운동장이 있었고 정부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이 아파트가 초기에는 큰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아파트는 서구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인식되면서 선망의 집으로 자리바꿈을 했고, 영화에서도 아파트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아파트에 살던 친구가 부러웠던 때는 놀이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놀이터는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였습니다. 작은 단독주택에 살던 나는 다리 건너 다른 동네의 아파트 안의 놀이터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네와 뺑뺑이를 타면서 보았던 하늘은 높고 크고 파랬지요. 재미있고 신나던 시간을 들라면 어린 시절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기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 놀이터에 모래가 깔려있었나, 고무블럭이 깔려있었나를 가지고 세대차이를 논한다고 합니다. 마당이란 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아파트 키드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변화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차별화하는 모양입니다. 


 


 









3. 주택복권 




어렸을 적 주말마다 주택복권 맞춰보는 게 정해진 일과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꽝이지만 추첨시간에는 두근거리며 숫자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 때 주택복권은 내집에 대한 희망과 일주일에 한번 느끼는 스릴, 모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로또 복권을 사고 추첨시간을 기다립니다. 



내 집갖기가 우리 부모 세대들의 목표였습니다. 부모의 삶을 돌이켜보면, 열심히 일하고 회사가 성장하고, 자식들이 커가면서 집의 규모를 조금씩 늘리고, 소박하고 작은 가구에서 화려하고 큰 가구를 들여놓는 등,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얻은 만큼의 만족도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의 2,30대에게 세상은 부모가 물려준 것으로 사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얼마전 트위터에서 이런 농담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딸에게 말하길, "너도 커서 꼭 너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라고 했는데, 나 닮은 딸은 지금 엄마한테 가서 자라고 있다."  부모의 손길이 없이는 경제적 자립도, 육아도, 학업도 불가능한 시대인데다, 우리는 이 복권에 기대를 걸만큼 꿈이 있지도 않습니다. 







4. 아파트 인테리어 






아파트가 한창 보급되면서 집꾸미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인테리어잡지들이 속속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하지요. 초창기 아파트는 아궁이와 창호지가 붙은 여닫이 문이 있는 구조를 취했다가 점차 입식 생활, 간편한 생활에 적합한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1959년에 세워진 종암아파트는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었고 70년대에 싱크대가 부엌에 들어왔습니다. 



가구와 가전제품의 종류와 크기도 아파트라는 집의 구조, 평형과 긴밀히 연결되게 됩니다. 예전에 사용했던 가전과 가구들은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지요. 아파트 평형을 넓혀가며 식구수도 늘고 가구와 가전도 점점 커지고 그런 흐름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1인가구,2인가구도 많아서 큰 평형의 집도, 큰 가전도 필요없는 추세로 가게 되는데도 가전제품의 크기는 줄어들 줄을 모릅니다. 일단 커진 것은 줄어들기가 어려운 법이죠. 생활공간도 대단지 아파트타운이 되다보니, 자가용과 대형 마트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쇼핑과 택배가 늘어났습니다. 도시의 구조, 건축의 형태, 산업 등이 연쇄적으로 변화합니다. 아파트가 만든 변화들은 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고착화된 구조들로 인해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5.광주 대단지 















철거와 이주 문제는, 대단지 개발을 할때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등장합니다. 구호와 현수막과 망가진 집들로 도시의 폐허가 생겨날 때 한쪽에서는 그 폐허 위에 태어날 황금빛 초고층 아파트를 꿈꿉니다. 


전쟁 전후 지어진 판잣집, 재건시대에 부족한 물자로 엉성하게 지어진 불량주택, 도시 빈민들의 무허가 거처 등은 도시의 골칫거리였습니다. 특히나 부족한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택지개발과 아파트 단지 계획을 1960년대부터 시작했는데, 이때 도심부를 장악하고 있던 빈민촌이나 불량주택지들은 철거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9년부터 철거민들은 단계적으로 경기도 광주의 이주촌으로 옮겨갔습니다. 20여평의 땅을 불하받았으나 도로도 상하수도도 없는 무방비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쓰레기차에 실려서 이주했고 겨우 블록집이나 천막집이 집으로 주어졌습니다. 먹고살 방법도 없었습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집단 시위를 벌입니다. 광주대단지는 후에 성남시로 이어집니다. 


광주대단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창신동> 전시에서였습니다. 철거민의 대단지 이주라는 희대의 사건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져 오랫동안 되뇌이곤 했습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진과 내용이 이번 <아파트 인생>전시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파트가 주거문화의 부분을 넘어서 경제적, 사회적인, 정치적인 부분과도 긴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건 우리 삶이, 우리 스스로는 자립적이고 자존적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이 사회에 깊이 존속되어 있고 사회 구조를 바꾸는 힘,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틀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얼마전 친한 디자이너와 만나서 타이포그래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이있는데, 한글 글꼴개발자이며 안상수체의 장본인이 안상수선생이 이상체를 디자인했다는 겁니다. 날개의 작가인 이상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그에게 헌정하는 서체를 개발해 '이상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요.   


이상의 시에서 착안되었다는 글꼴을 보니, 글자가 초성, 중성, 종성의 총합이 아니라, 모음과 자음의 음가 하나하나가 의미와 형태를 가진 존재인것 같습니다. 무수한 의미의 총합, 무수한 형태의 총합이 한편의 시이며, 한마디의 말이 되는 것이지요. 단단한 의미 덩어리는 당돌하고 당당합니다. 태연자약하고 방약무인합니다. 이상이 시로서 전달하려던 행동과 의미들이 지금 이 글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서체로 "오감도"나 "날개"를 읽으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봉별기를 읽으면 어떨까?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라던가,

"날자, 날자, 날자꾸나,"

라던가,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금홍의 노랫소리 같은 것을, 이상체로 읽으면 더 슬프고 더 우습고 더 기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촌의 어느 길목에 이상의 집이 있습니다.몇달간의 공사를 끝내고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에는 집의 얼굴이 되는 도로변 정면 입구에 이상체로 적힌 "이상의 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자로 이상의 시가 적혀있다면 글꼴의 느낌과 이상이라는 의미가 결합하여 상승효과를 만들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시는 공간 내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은 이상이라는 기이한 인물의 예술가적 기질을 좀더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생 금홍과 제비다방을 차린 사연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도안을 만들던 시각예술가로서의 이상의 자료를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경성고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로 일하면서 탐독했던 <조선과건축>의 표지 도안을 다양하게 그렸고, 오감도를 연재할 무렵, 친구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이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서, 나이많은 친구이자 화가인 구본웅과도 곧잘 어울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구본웅이 그린 홀쭉하고 수척한 얼굴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우인의 초상>은 바로 친구 이상을 그린 것이라고 하지요. 이상의 집에서는 문학으로서만 존재했던 이상이라는 인물을 실제하는 어떤 존재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가 그린 그림, 그의 사진, 그런 것들이 미약하나마, 요절한 예술가를 더듬게 해줍니다. 


그런 한편, 이상의 초현실적인 시들은 당시 사람들은 물론 21세기 인간들까지도 혼란하게 만듭니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 삶이 소설이었던 문제적 인물. 그래서 가장 권위있고 대중적인 문학상이 '이상'이라는 이름을 품고 있는 것 아닐지요. 


저는 박태원의 만년필이 그려진 이상의 삽화 엽서를 하나 샀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친구는 역시나 타이포그래피를 재미있게 응용한 도안 엽서를 구입하더군요. 
















이상의 집은 그동안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여러가지 사연이 많았습니다. 154-10번지는 이상의 백부의 집이 있었던 곳입니다. 필지는 훨씬 컸고 집도 그만큼 넓었지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에게서 태어난 첫째 아들 김해경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흔했지요. 어렸을 적부터 모든 학창시절을 이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폐결핵에 걸려 총독부를 그만두고 백천으로 요양을 가면서 금홍을 알게 되고 이후 금홍과 청진동에 제비다방을 차리게 되어 집을 나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 집은 양자로 입양된 후부터 금홍과 살림을 차리기 전까지 스무해를 살았던 곳이 됩니다. 스무해 동안 김해경은 엘리트 청년이었고, 그 스무해 이후부터는 이상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예술가로 살았습니다. 그 전환점은 무엇일까요? 


이상이라는 이름은 고등학교 졸업앨범에도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구보 박태원처럼 저널리스트다운 에세이로 자신의 옛일을 꼬박꼬박 적어두었다면 모를까, 이상의 학창시절은 뻥 뚫린 구멍 같습니다. 



이상이 머물렀던 집이라 하여 문화재 지정예고에 이르렀으나, 검토한 결과 이 집은 백부가 가산을 처분한 후 필지가 나뉜 뒤에 생겨난 집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상 김해경은 이 집에서 기거한 사실이 없는 셈이지요. 문화재 지정은 취소되었고, 이 시설을 관리하는 아름지기 측에서는 한옥을 없앤 후 새로운 이상기념관을 지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한옥의 정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항의와 건의가 있었습니다. 의견을 조율하는 지난하고 답답한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건물을 없애지 않고 이상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몇 달간의 공사가 끝난 후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은,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우선, ㄱ자형 건물은 그대로 자리잡고 있지만 벽을 틀어내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고, 뒤쪽에 있던 한옥의 한부분은 불법 층축된 부분이라 하여 철거되었습니다. 한옥이 있던 자리에는 좁고 긴 하얀색의 공간이 투입되었습니다. 내부에 검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내부에 영상물이 흘러나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지붕 너머로 멀리 서촌의 곳곳이 내려다보입니다. 한옥의 원래 벽은 털어내고 투명한 유리를 끼워 모든 장소들이 겹쳐지고 투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원래의 부재들을 최대한 쓰기 위해 추춧돌과 지지대를 곳곳에 썼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옛 재료와 새 재료가 적절히 섞여서 몹시도 모던한 느낌을 줍니다. 


옛집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공간이 가진 고즈넉함이나 자잘한 공간과 벽이 주는 느낌들은 없어졌습니다. 하얀색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두고 건축가는 '이상에게 헌정한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이상의 내면을 엿보는 것 외에는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일층부분은 화장실로 사용되긴 하지만요) 이상이 살았던 쪽방의 어두컴컴함, 좁은 계단이 만드는 분위기, 탁트인 외부와 만날 때의 통쾌함 등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원래 집이었던 곳은 관람자들이 쉬었다 가거나 행사를 치르는 용도로 사용하고, 이상이라는 우리의 주인공을 위한 공간은 모던하지만 색채가 드러나지 않도록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한옥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이상을 위해서 가상의 공간, 제의적인 공간, 기념의 공간을 새로 투입한 것이지요. 













온통 유리로 둘러싼 건물은 길과 마을과 사람의 움직임이 서로 통과하고 반영합니다. 새로운 공간은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다채로운 행사들이, 재기발랄하고 기발한 생각들이 많이 오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자와 테이블 구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진 의자와 테이블이 마치 카페처럼 놓여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게 하는데, 이 구조에서 벗어나서 원형 테이블과 소파, 높낮이가 다른 스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기발한 디자인의 가구들, 다양하게 섞을 수 있는 책선반 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가구의 컨셉도 관람자의 행동을 제한하고 또 유발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누군가도 서로 눈빛을 마주칠 수 있고 자유롭게 공간을 거닐 수 있으며, 또한 자유로운 발상의 예술문화행사들이 마구마구 벌어지는 재미난 공간이 된다면 좋지 않을까요? 


이상이라면 반듯하게 놓인 무난한 의자를 마구 흐트러놓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았을까요? 




납작하고 하얗고 작은 공간, 아이들 의자마냥 낮은 의자들이 놓였다던  다료 제비.

한면이 유리로 되어 지나가는 여인들의 종아리를 훔쳐볼 수 있엇다는 끽다점 제비. 


종로 귀퉁이에 조용히 앉았다 날아가버린 그 제비는 또 어디선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겠지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경험한 후, 작은 공간을 위안 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도모하고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작지만 의미있게 소통하고 모여서 노래를 하고 시절을 수상히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모두 제비 다방의 후예들이 아닐까요?  
























1925년 을축년은 대홍수가 일어난 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네 차례의 폭우로 서울은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강가의 마을이 물에 잠겼고, 육지였던 곳이 섬이 되는가하면, 한강의 북쪽에 붙어있던 잠실은 갑자기 생겨난 지천으로 인해 뚝 잘려져 물로 둘러싼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도상의 큰 변화는 실제 사람들의 삶에는 청천벽력이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집이 물에 잠기고 쓸려나갔으며 한강철교의 교각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교량이 무너지고 철로가 제맘대로 쓸려나갔지요.  죽은 자들도 넘쳐났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부은 빗줄기로 전국에서 647명이 죽고, 6300여 호의 집이 유실되고 17000여호의 집이 무너졌습니다. 침수된 집은 46만호가 넘었고 논과 밭의 침수피해도 컸습니다. 총 피해액은 1억 300만원으로 집계되었고 이는 그 해 총독부 일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비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을축년대홍수는 '최대의 물난리'를 표현하는 특별한 명칭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1925년 7월 11일과 12일 사이 중부지방을 통과한 태풍으로 황해도 이남 지역에 300~500mm의 비가 쏟아져 강들이 범람했고, 그 물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7월 16~18일까지 두번째 태풍이 임진강 유역에 상륙하면서 최대 650mm의 비를 쏟아부었습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대범람하여 사상최대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등포, 용산의 제방이 넘쳐, 그렇잖아도 도도하게 흐르던 한강이 더욱 넓고 망망해졌습니다. 동부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 신천, 풍납리 등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습니다. 


위의 지도는 <경성부수해도>는 서울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준 두번째 홍수 이후 수해로 인한 지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파란색으로 색칠된 한강물이 도시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물이 남영동 일대까지 덮쳐 용산역 일대가 모두 잠긴 걸로 나타나고 있고, 마포 일대도 물에 잠겼지요. 


이 큰 비로 인해서 강변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선 마을 하나가 통째로 쓸려나간 잠실은 주민이 다른 마을로 이주했으며 땅이었다가 섬이 됩니다. 제방을 쌓기 위해 산들이 깎여나갔습니다. 대홍수로 풍립리 마을일대의 토사가 쓸려나가면서 옛 백제 토기가 무수히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풍납토성의 연혁이 한성백제시대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도 한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20년에도 용산일대가 물에 잠겨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에 민간에서 수재의연금을 모금하는 일도 생겼다고 하지요. 1924년 한강에는 수위 관측소가 세워졌습니다. 마포대교와 원효대교 중간지점의 한강 둔치에 세워진 용산수위관측소는 한강변에는 최초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1925년 1월에 정식으로 관측을 시작하고 1977년에 폐쇄되었으므로, 을축년 대홍수는 이 관측소에서 실시된 첫 홍수 관측이자 최악의 관측이 된 셈입니다. 








수위관측소는 일정한 프로토타입으로 지어졌는데요. 등대나 급수탑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유사한 모양입니다. 탑신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상단부 시설이고 콘크리트나 돌, 벽돌 등을 이용합니다. 얼마전 소개한 법기 수원지 수위관측소도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지요. (http://sweet-workroom.khan.kr/59) 


탑신 뒤쪽에는 수위를 확인하는 수치표가 그려져있습니다. 탑신 내부에 물이 들어오는 파이프가 있고 물에 뜨는 부자를 설치해서 수위를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이 당시에는 꽤 첨단이었나 봅니다. 외부의 눈금표시가 있는 수치계는 오차를 알기 위해 육안으로 측정하는 보조장비라고 합니다. 옛 용산 수위관측소는 서울시 기념물 제18호이지요. 








원효대교 주변에서 바라본 한강의 풍경입니다. 한달쯤 전에 찍은 사진이라 다소 황폐한 모습이지만 강주변의 도로를 따라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이 많이 보입니다.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한강 둔치가 지역마다 조금씩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특히, 원효대교 인근 지역은 주변의 높은 건물들을 제외하면 마치 소래포구 같은 한적한 들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효대교 북단 교차로 아래에는 예부터 지천이 흘렀던 수로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욱천이라 불렸고 그 이전에는 만초천이었다고 합니다. 제법 긴 하천은 이미 오래전에 복개되어 최종 수로만이 남아있습니다. 영화 '괴물'에서 등장한 장소라서 좀 눈에 익다,싶기도 할 겁니다. 이 하천은 지금도 욱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 앞에는 욱천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일제식 지명에 대한 문제 제기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이런 표지판도 서있지요. 



이제 시선을 돌려 강의 북쪽이 아니라, 강의 남쪽을 바라봅니다. 그 다리 아래에서 보이는 조각난 강남의 풍경은 반듯한 고층건물의 스카이라인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바로는 충분히 가깝지만, 생활 방식과 생각을 두동강 낼 정도로 한강의 위력은 지금도 강력합니다. 오래전 두려워하고 극복하려던 한강은 이제 이점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좋은 날, 걸어서 강을 건너보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때의 강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요. 
















천사마을이 아니라 백사마을이었습니다. 



중계본동 산104번지 일대에 앉혀진 마을이라 104마을이라 부른다고 하지요. 중계본동이라 하면 서울의 북동쪽 끝에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불암산으로 경계지어지고, 앞쪽 멀리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보입니다. 집에서 조명하는 경치로 보자면, 서울의 어느곳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경사지에 층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백사마을은 1967년 철거민의 집단이주촌으로 형성된 지역입니다. 

그동안, 군사제한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가, 2000년이 되면서부터 이지역의 개발이 논의되었고, 작년부터 건축가 집단에서 기존과 다른 개발을 목표로 백사마을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올 하반기부터는 계획이 완료되어 어떤식으로든 마을이 달라지게 됩니다. 



백사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예상보다 큰 규모에 깜짝 놀랐습니다. 노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에 이르러 가장 오른쪽 골목으로 걷기 시작해서 골목마다 오르락내리락 해보았습니다. 마을은 이미 이주가 시작되어 비어있는 소위 '공가'도 많았고 허물어진 집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연령대는 다양했습니다. 아이들도 종종 보였고요. 낯선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는 그런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소박하게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 전체에 감돌았습니다. 


그날, 봄날씨가 완연했습니다. 꽃도 피고, 연초록 잎사귀가 살포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갑게 얼어붙어있지 않을까, 걱정하며 골목을 걸었는데, 오히려 그 폭발적인 생명감에 안도와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백사마을은 어쪄면 천사마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건 아마 답사가 끝날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툭툭 꽃망울이 터지는 봄이 마을 구석구석을 환하게 물들이는것을 보고나서 말이지요.  

 













판자촌. 철거민. 이주촌. 대기업 건설회사. 아파트 개발. 



이런 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그동안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노후된 동네들이 비참하게 철거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속에 살았던 시간과 묵혔던 기억들마저도 건축폐기물이 되어버린 적도 종종 있을 겁니다. 그것들은 버려 마땅한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곤 하지요. 



무허가 판자집의 존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3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로 서울(경성)은 그야말로 집없는 빈민자들이 도시의 한켜를 이루고 있었지요. 광복후부터 월남민들의 이주, 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이동 등 인구의 대이동이 있었고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으로 서울 경기로 일자리를 찾아 보여든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당시 주택 보급율은 5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들은 허가되지 않은 땅에 소위 판자집을 짓고 삽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나왕 판자와 깡통 재료들로 집을 지었던 것이죠. 무허가 정착지에 형성된 불량주택들은 현저동 일대의 구릉사면, 노고산동, 신공덕동, 효창동, 후암동, 한남동, 장충동 약수동, 신당동, 옥수동, 금호동, 응봉동, 행당동, 창신동, 숭인동, 동숭동, 돈암동, 미아리, 답십리, 전동농, 이문동, 휘경동, 수유리, 흑석동, 노량진의 곳곳에, 도심지나 도심으로 접근하기 좋은 자리에 생겨났습니다.  택지개발과 도시 개발을 하면서 철거해야할 불량주택들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불량주택 대책을 네 가지로 진행했습니다. 

1. 집단이주정착지 조성, 2. 불량주택 개선사업, 3.철거 후 시민아파트 건립 4. 광주 대규모 단지로 이주.



이와 관련해서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아파트 인생>이라는 전시를 관람해보길 권합니다. 광주 이주촌에 대해 늘 궁금했었는데,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우리의 마을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아파트 또한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는지 보입니다. 






















백사마을은 청계천이 복개되고(복원이 아닌)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될 때,  천변에 살던 사람들과 영등포, 용산, 안암동 일대에서 온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촌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이 조성되던 1967년 경에 이미 수유지구, 망원지구 창동지구 등이 대규모 택지구역으로 개발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먼곳인 불암산 자락 구릉지가 선정되었다고 하는군요. 


이들에게는 임야지 8평과 블록 200장, 소형텐트 1개를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상하수도나 도로는 전혀 없었으며, 도로, 치안, 위생 등 도시안전망이 전혀 없는 장소였습니다. 시영버스와 공동우물만 있을 뿐이었따고 합니다. 블록으로 대충 지은 집에 겨우 지붕을 얹고 살던 당시에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 집들은 서로 합치고 남은 땅에 집을 지으면서 20평 정도로 집들이 커졌고 지붕도 집집마다 달라졌으며 개량된 양옥집도 들어오는 등 다양한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번듯한 2층집도 있고 오래되었지만 마당이 잘 조성된 집도 생겨난 것입니다. 


주변까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왔음에도 백사마을은 계속 개발에서 소외되어 왔습니다. 개발제한구역이기 때문이지요. 이제야 다른 개발을 하겠다며 도시재생 분야에서 믿음직한 건축가들이 투입되었는데, 거주민들에게 그것이 너무 늦은 일이 아니었기를 바라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는 예술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밋밋한 블록 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멘트 벽돌을 사이사이에 넣어 모양을 내는가하면, 기단이 되는 석재가 없으므로 시멘트 포대 째로 쌓아 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세월이 흘러 시벤트 포대 자루는 사라져버리고 단단한 시멘트만 남았습니다. 









벽돌로 틀을 잡은 건물 안에 기와지붕이 있는 희한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재활용된 집이군요.




옛 나무대문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환기구도 기능적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백사마을의 현관 앞에는 자그마한 문이 달린 창고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탄을 보관하는 곳일까요? 열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골목길이 자유롭습니다. 건물과 건물의 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틈들이 사람 길이 되고 물길이 됩니다.  





집집마다 연탄난방을 합니다. 마을 입구에 연탄을 보급하는 장소가 있는데, 봉사활동하러 온 사람들이 지게에 연탄을 짊어지고 날라주기도 한답니다. 












점점 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여러 예술가들이 마을의 한쪽 귀퉁이 골목에 벽화를 그려놓았습니다. 백사마을이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늘마을로 개칭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늘색으로 담을 칠해놓은 집들이 꽤 많습니다. 






그 길에서 아빠와 딸아이를 만났습니다. 답사팀의 K선생님이 이야기를 던지며 카메라를 드니, 아이는 부끄러운 듯 숨다가 아빠 다리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밉니다. 그래도 깔깔 웃으며 여지없이 따사로운 봄을 터트립니다. 

 









점점 푸르러지는 길, 나무들은 주인 없이도 자라납니다. 

봄은 부르지 않아도 자기 자리를 찾아듭니다. 












봄 기운에 마음이 풀려버립니다. 오늘은 건축가와 여행자의 모입입니다. 특히 백사마을의 중심부를 계획하는 건축팀의 L은 오늘 답사가 몹시 인상적인 모양입니다. 길과 꽃나무의 포근함, 경사에 찬찬히 기댄 집들, 작지만 생활에서 나온 디자인 요소들, 이런 것들이 계획안에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마을은 골목과 필지와 경사는 남겨 저층의 집들을 계단형식으로 짓는 구역이 있고, 왼쪽 뒷편의 공간은 20층 규모의 임대아파트가 올라갑니다. 

마스터 플래너인 승효상 선생은 아파트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백사마을을 이루었던 오래된 집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또한 수십년을 지나오면서 불량한 재료로 지어진 위험한 주택이기 때문이지요. 


문화유산 지킴이를 하는 C는 말합니다. "골목과 필지를 남긴다고 해도 집을 모두 없애고 거주민을 뒤쪽의 임대아파트로 보내면 그것이 재생인가?"라고요. 이제 거주민이 힘겹게 살아온 마을은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 삶을 꾸미겠지요. 



사진찍는 여행가인 K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이 마을의 생동감을 이야기합니다. 골목은 걷기 좋고 경사를 오를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져 압도되곤 합니다. 마을에는 누대도 있습니다. 폐자재를 모아 만든 쉼터이지요. 그곳에 앉으면 도봉산과 북한산의 기암괴석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 풍경은 이제 누가 보게 될까요? 














마을은 올 가을까지 계획을 완료하고 올해 말,내년부터는 개발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마도 백사마을은 마지막 봄을 맞이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백사마을에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목련나무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와 홍매화가 터지듯 꽃이 맺힌 걸 보았습니다. 개나리가 지붕위에 무성하게 덩굴진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이 버리고 간 집을 감싸주는 푸른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마치 마지막 봄인 걸 알고 있는듯, 힘껏 봄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들을 내년 봄에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백사마을의 마지막 봄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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