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를 지나칠떄마다 시인 기형도가 생각난다. 




그가 종로3가의 파고다극장에서 숨진채 발견되기 전에  낙원상가 근처에서 누군가를 만나 저녁시간을 보냈다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곳이 낙원의 언저리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낙원상가의 이름 때문인지 밥을 먹었다는 행위 때문인지 마음이 엉키어버린다. 지하차도처럼 컴컴한 도로 위에 세워진 낙원상가. 그곳은, 음악과 영화라는 두 가지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려던 젊은이들의 성지와도 같은 장소였을 터인데, 지금은 다소 철지난 분위기를 풍긴다. 


반질반질 잘 닦인 색소폰과 매끈하게 잘 빠진 기타가 관객을 부른다. 나는 악기라는 신묘한 물건의 소리를 참 좋아하지만, 낙원상가의 악기들은 조금 쓸쓸해보인다. 그것은, 내가 이 거리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상영하던 스크린의 기억이거나, 혹은 어둠을 뚫고 빛이 만들어내는 영상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의 허무함에서 오는 감정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던 그 두시간 동안 마치 밤하늘을 유영한 것처럼 나는 행복했거늘, 암막을 젖히고 환한 세상으로 나올 때, 아직 채 감정이 식지 않아 들뜬 마음과 이미 끝나버린 영화 앞에서의 허무함이 뒤섞인 채 환한 세상의 빛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요즘은 영화의 스토리를 즐기려고 영화를 보려는 마음보다, 깊이 몰두했다가 금세 깨져버리는 환타지의 허무함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환상이나 즐거움은 허무한 감정과 같이 있어 소중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것인가. 


그 허무함을 이해하면서 기형도의 시를 읽는다. 그의 시 속에는 낙원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서도, 빈집같은 사랑과 질투하는 마음과 서울에서 분노를 배워버린 한 사내의 절규와 포도밭과 공장 같은 단어에서 종로거리에 번듯하게 서있는 낙원의 중의적인 모습이 오버랩된다. 


기형도는 '그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인사동과 탑골공원 사이에 헐리우드 극장 간판이 기억에 선연한 낙원상가가 있다. 도로 위에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툭하고 떨어진 듯한 형태의 건물. 도로 위에 놓인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삘딍’은 1969년에 완공된 것이다. 오래전에 그 아래 도로를 지나가며 나는 서울은 몹시도 미로같은 곳이라고 중얼거렸다. 도로를 지나쳐가면 운현궁 앞으로 향하게 되고 옆으로 빠져나가면 인사동이나 탑골공원 뒤쪽 동네로 가게 된다. 그늘 깊은 자리에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다. 상가와 아파트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두 대 오르내리고 있다. 일년 365일 어두컴컴한 건물의 한쪽에 오래된 악기상점이 있고 지하에 있는 낙원시장으로 내려가는 진입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주차장처럼 보이는 그 안에 오래된 식료품가게와 정육점,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해결하는 국수집, 국밥집이 있다.


예전부터 음악한다 하는 사람들은 악기상이 몰려있는 낙원상가 주변을 성지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동네 언니 오빠라면 기타 정도를 칠 줄 알던 시절에는 꽤나 잘 나갔을 게다. 악기 대신 노래방이 성업하던 시절에는 침체되었다가, 밴드활동이 늘어난 요즘은 그런대로 생명력을 되찾고 있다.













헐리우드 극장은 헐리우드 클래식이라 하여 흘러간 고전 영화를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노인전용상영관으로 바뀌었다. 그 옆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특별한 영화광들을 불러들이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두 영화관의 출입구가 있는 상가 4층 야외 공간에는 “지난 주에 벤허를 봤는데, 참 좋더군. 그래서 한번 더 보려고 왔어.”라고 말하는 어르신들과 켄 로치의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학생들이 한 공간에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그 어디에서도 섞일 가능성이 없는 두 연령대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이 낙원상가 4층의 풍경이다.


그들은 모두 헐리우드 키드였을 지도 모른다. 나도 어린시절의 많은 부분을 영화에 빚졌다. 대학에서도 영화 동아리에 몸담고서 특별한 영화들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다. 그 즈음 시네마테크협의회가 막 추진되었고 영화는 많은 기회를 주는 산업이 되려던 참이었다. 나도 선배들이 해온 길을 따라 영화의 수혜를 누릴 것이라 기대했었으나 20년이 지난 후, 나는 영화관을 거의 찾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극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영화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판타지가 사라진 현실에서 영화라는 아름다운 스토리는 자본과 3D 기술로 아무리 치장하더라도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시절을 되살리려는 듯한 슬픈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불꺼진 영화관을 나설 때의 아득한 기분. 흥분이 짜릿한 만큼 허탈함은 깊다. 



 


 



중정에는 거대한 벽처럼 아파트가 솟아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낙원상가 주변을 다녔으나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층수를 헤아리다가 그만둔다.



1968년 7월 15일에 개관한 낙원상가아파트는 그 전해에 종로 탑골공원 주변의 판자촌 시장을 현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청계천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세운상가와 함께 추진된 주상복합 건물. 모두 16층의 아파트와 4층짜리 현대적인 상점을 목표로 완공된 낙원상가는 40미터로 확장한 도로 위에 세워졌다. 어수룩한 장터에 불과했던 낙원동 일대의 지가는 1년 사이 두배 이상 크게 뛰었다. 낙원동에 사는 사람들은 진정 낙원에 있는 듯했을 것이다.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도로주변으로 솟아오르는 타워들. 16층이라는 초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도시가 끝없이 엔진을 가동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광로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나버린 후에야 찾아오게 된다. 잃은 후에야 그리워한다. 놓친 후에야 깨닫는다. 



탑골 공원 북쪽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여관촌과 쪽방촌 그리고 한옥지구가 등장한다. 재개발을 맞은 익선동 한옥지구는 절반 정도 파괴되었고 절반 정도는 여전히 꽃을 가꾸고 골목을 청소하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떠나보내는 것도, 남아있는 것을 보는 것도 힘겨운 검은 구멍같은 서울의 중심.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나는 그 길의 모퉁이. 흔적만 남은 낙원이 여기 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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