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곳한 부처를 보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 돌의 질감이 무척 마음을 당긴다. 돌을 쪼고 부드럽게 갈아내며 형태를 완성하기까지 예술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얼굴을 조각하게 되면 불법도, 번민도, 모두 사라진 채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그 예술가도 그예 부처가 되었겠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의 검은 벽을 뒤로 하고 부처와 여인들을 보았다. 반가사유의 자세로 마주보는 두 미륵불도 보았다. 이 불상은 허리 위는 수난의 시대에 잃어버린 채 다리를 하나 든 자세로 앉아있다는 그 초유의 자세만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관을 쓴 보살상은 화려한 자태와 달리 초연한 얼굴이다. 그 또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서 만물의 일렁거림에 개의치 않을 듯한 서늘한 미소를 지녔다. 


그리고 멀고먼 중앙아시아 투르판에서 온 날카로운 눈빛의 여인과 다리를 벌리고 말에 앉을 수 있었던 기마족의 여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투르판. 텐산산맥 동편의 위구르족 마을라고 한다. 나는 이 여인들을 보는 순간 그만 바싹 말라버린 먼먼 들판을 달리는 말타는 여인이 되어버렸다. 내 먼먼 기억 속에는 그녀들과 함께 말을 달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강인한 그들의 후예가 되고 싶었다.      


투르판 흙더미 고분군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어쩌다 자신의 나라에서 옮겨져 옴팡진 언덕의 나라에 당도하게 되었을까? 이 말없는 사물들의 이력들은, 천년 동안 잠들어있다가 억지로 깨어난 채 무참한 여행을 해야했던 어느 시대를 감추고 있다. 


이 전시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사물들은 왜 이곳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부처, 북제, 

1918년 8월 1일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쌍 반가사유상, 북제, 

1916년 8월 12일 우라타니 세이지에게서 구입 






보살, 송

1922년 1월 15일 요시다 겐조에게서 구입 






여인, 투르판 무르투크 

1916년 5월 15일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 






말을 탄 여인, 7~8세기,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군, 

1916년 5월 15일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 






투르판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오타니 탐험대가 발굴한 것이다. 


제국의 총아인 고적탐사대는 소멸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발굴한 것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약탈이라고 했다. 독일의 고고학 탐사단이 터키에 가서 아시리아 유물을 모두 불쏘시개를 쓰는 것을 보고서 기겁을 하면서 조심히 가져왔다는 물건들은 베를린 페르가몬 뮤지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학자들은 둔황의 촌부를 쉽게 휘두르며 천년도 더된 불경들을 헐값으로 자기네 나라로 가져와 도서관에 모셨다. 일본의 탐사대 역시 아시아를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190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를 비롯해서 중국까지 고고학 유적을 두루 살폈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된 이후에는 총독부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한반도 전역의 유물들을 조사 수집하여 총독부 박물관(1915년 개관)을 채웠다. 동서를 통털어 근대의 박물관은 약탈과 사기의 검은 그림자 없이는 컬렉션을 이루지 못했다.  

   

교토의 니시혼간지의 주지였던 오타니는 탐험대를 조직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의 유물을 일본으로 옮겼다. 그러나 재정 파탄으로 인해 유물들을 구하라 후사노스케에게 처분했고, 그는 이들의 일부를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동향이었고, 진남포에 제련소를 설립한 후 사업상의 후원을 받기 위한 제스처로 유물을 기증한 것이다.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이라는 이름 뒤에는 오타니 탐험대의 도굴행위가 숨겨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400여 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이 있다. 오타니 컬렉션이다. 


미술사학자이자 건축학자인 세키노 타타시는 총독부의 고적 답사에서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세키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는 만주에서 발굴한 유물을 대행인인 에토 나미오를 내세워 총독부 박물관으로 입고시켰다. 세키노라는 이름은 다른 이름 뒤에 숨어있는 셈이다.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1910년대 만주를 조사하면서 기록한 자료들. 

화가, 사진가, 통역, 헌병이 그를 뒤따랐다. 

만주의 민족들과 일본인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총독부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은 1915년 총독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던 경복궁의 박물관을 그대로 사용하여 개관했다.







유진오 <화상보>에서 미술관을 구경하는 모습이 나왔다. 뚜렷하게도 석조전이다. 

동아일보, 1940년 3월 12일자 신문이다. 삽화는 심산 노수현이 그렸다.


 



석조전은 1910년에 완공되었으나 영친왕과 왕비의 공간으로 가끔 사용되다가

(그들은 내내 일본에 머물지 않았던가) 1933년에 영친왕이 컬렉션한 일본작가들의 그림이 걸리면서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1938년에 신관을 신축하면서 창경궁 내의 이왕가박물관의 유물을 선별하여 

옮겨와 이왕가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전시에서 가장 보고싶었던 그림은 바로 이것이다. 

와다 산조의 <우의>.






누군가에게는 중앙청으로,누군가에게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억되는 

총독부 청사.






총독부 청사 중앙홀. 북쪽 벽에 우의가 걸려있었다. 














총독부 청사는 철거되었으나 벽에 결려있던 벽화들은 조심스레 떼어져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경향신문 1995년 8월 11일 자 신문에는- 총독부 청사가 해체되기 직전이다- 이 벽화 제작의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와다산조는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색채학을 연구했으며 1963년에 만셀과 함께 색상표를 만든 서양화가다. 1921년 총독인 데라우치가 의뢰하여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으며 "내선일체 사상을 잘 담을 수 있는 작품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총독부 청사에 걸린 벽화는 2점이지만 벽화가 2점 더 남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와다는 1921년 데라우치 총독의 제작 의뢰에 따라 당시 돈으로 6만엔을 받고 벽화제작 계약을 체결했다. 와다는 이후 한국 금강산의 '나무꾼과 선녀'와 일본 후지산의 '하고모로(우의)' 전설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데 착안, 이 두 대표적인 전설을 작품 소재로 정했다. 자신의 고향인 시즈오카현에서 7명의 조수와 함께 벽화제작에 들어간 와다는 24년 동양화충의 벽화를 완성했다..... 무슨 일인지 정작 조선 총독부청사 중앙홀에는 서양화풍의 벽화가 내걸리게 됐다....갑작스럽게 그림이 바뀐 이유를 '데라우치가 서양식 건물인 총독부청사 양식에 맞춰 서양식 풍으로 바꿔 제작토록 요구해 급히 다시 그림을 그린것으로 보인다,며 이때 동양화풍 그림 2점이 일본에 남게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박물관측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상징미술품이자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내선일체의 내용이 담긴 벽화를 역사의 증거물로 영구보전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1995년 8월 11일 금요일 자  






고대의 유물들과 당대의 예술품으로 박물관은 화려하게 채워졌다. 박물관 컬렉션은 문화를 매개하고 선전하는 충실한 도구였다. 그 컬렉션은 광복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흡수되었다. 도처를 떠돌던 사물들이 이 공간에서 멈춰섰다. 방랑하는 문화재들의 이야기 또한 인간의 역사만큼 사연이 복잡하지 않겠는가.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많은 유물들이 과거의 오욕을 숨긴 채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다. 

 

박물관은 역사를 거슬러 교육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먼지처럼 쌓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만큼 비밀스런 공간이 또 있을까? 이제 우리는 유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유물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와있는지도 질문해야할 것이다.  











* 이 사물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동양을 수집하다> 전시는 1월 11일까지 열린다.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이라는 소설은 큐슈제국대학병원에서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중심이 됩니다. 1945년 전쟁 말기, 불시착한 b-29기에서 포로로 생포된 미군병사들에 행한 인체 해부사건이지요. 사건 주변으로 계속되는 전쟁과 공습과 절망으로 이미 지쳐버린 사람들과 병원의 암투에 휘말리는 젊은 의사들과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군인들이 교차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만연한 죽음과 절망 사이에서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의사는 습관처럼 되뇌입니다. 우리 모두 죽을 거라고.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당시의 병원의 풍경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소독약 냄새와 지금보다 덜 정교했을 수술실 장면, 차가운 기구들, 부족한 약, 추운 병실과 얇은 담요, 엉성한 식사, 흰색 모자를 썼던 간호사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 침묵하는 복도, 길쭉한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하늘과  마지막 잎새 같은 것. 병실의 다른쪽에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들과 온갖 논문들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수술법을 찾던 의사들이 있었겠지요. 



서울에는 엔도 슈사쿠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병원 건물이 몇 채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1928년)과 서울대병원 내부에 있는 대한의원 본관(1910), 그리고 용산 철도병원(1928)입니다. 철도병원은 2011년까지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으니, 최근까지 병원의 기능을 유지했던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딱 알맞은 모양새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몇 년간 방치되면서 건물 주변으로 돋아난 덩굴식물들로 인해 어둡고 낡고 미스테리한 모양새이지요. 




어느 날 근처를 지나가다보니 낡은 창과 둥글게 말린 건물 벽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사진 속의 장소는 오래된 학교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합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물들이 등장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내키지 않아 계속 미뤄뒀던 건물의 속 이야기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문화재청의 기록화보고서는 건물의 역사와 이 병원의 특정한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용산역은 경인선과 경부선이 생겨날 시절 종착역이었습니다. 서대문정류장이라 불렸던 마지막 역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용산에서 더 중요한 역이었지요. 모든 역이 용산으로 향했습니다. 용산은 1905년 이후 일본군영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되었습니다. 용산에 병원이 생겨난 것은 1907년부터입니다. 철도를 놓으면서 철도 기술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그들의 가족이 용산에 자리잡게 됩니다. 철도병원은 기술자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들의 질병 혹은 사고를 치료하기 위해 철도국에서 세운 특수병원이며, 대구, 대전, 목포, 평양, 원산, 청진 등지에도 세워졌다고 하는군요. 


이곳에서 진료받은 환자들은 모두 4개의 카테고리로 구분되는데, 1종 환자는 철도국 직원으로 직무상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2종 환자는 철도의 승객 중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3종은 퇴직한 직원이나 직원의 가족으로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4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진료비와 치료비도 서로 차등이 있었고 1종 환자를 가장 우선했습니다.  



용산철도병원은 1907년에 철도 관사 하나를 개조한 동인병원으로 시작하여 1913년에 용산철도병원으로 개칭하고 필요한 건물을 세워나갑니다. 그동안 화재로 인해 여러 차례 무너지고 지어지고 했고, 1928년에 벽돌건물로 어엿한 2층짜리 건물이 완공됩니다. 원래 병원보다 북쪽 도로변에 신관 건물(현재 본관)을 두게 되었고 그 후로도 부족한 설비를 메우느라 조금씩 증축을 거듭했지요. 


당시의 모습을 보면, 도로변에 출입구가 있고 캐노피로 멋스럽게 장식했음은 물론 자동차로 현관까지 올 수 있도록 오르막 도로도 만들었습니다. 출입구의 캐노피는 1984년 도로가 확장되면서 잘려나가고 화강석 테두리의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1973년에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1981년에 9층짜리 병동이 신축되어 병원은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병원은 철도국의 이름이 바뀌면서 그 이름이 계속 변화했습니다. 미군정 시절 운수부였을 때는 운수병원으로, 후에 교통부가 되었을 때는 교통병원으로, 철도국이 교통부에서 분리되면서 서울철도병원으로, 다시 변화를 꾀하느라 국립병원으로 개칭되었고 이윽고 1984년에 중앙대학교가 위탁운영하면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이 되었습니다. 


















<기록화보고서에 실린 평면도 신축당시의 평면도






붉은 벽돌 사이로 하얀색 화강석 라인이 사라진 캐노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원래 도로변에 있던 출입구가 측면 구석에 옹색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의 왼쪽 편에 신축된 병동 건물이 거대하게 남아있습니다. 

병동 건물도 본관 건물도 방치된 채로 문닫혀 있습니다. 코레일 재산이겠지요. 

코레일은 용산 개발의 꿈에 부풀었다가 주저앉았지요. 이 건물은 어떻게 될까요? 











11월 말, 용산지역을 답사하는 행사를 진행하면서 이 건물을 다시 한번 들렀습니다. 건물의 역사와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건물이 주변 관사들과 긴밀했던 예전을 소환해볼 수 있었습니다. 

답사 참가자 중 한 분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중앙대 병원이던 시절, 이곳에서 자신의 딸이 태어났다고요. 병원이 문을 닫아버린 지금, 딸이 태어난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이지요. 


건물이 없다면 기억도 자꾸 지워지는 걸까요? 

아직은 멀쩡한 건물을 현명하게 다시 사용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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