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곳곳을 산보하고 다니느라 그동안 인천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했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개항장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있었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매력이 있다. 개항장이며 항구라는 조건은 내가 유년을 보낸 부산과도 닮았고, 점점 낡아가는 풍경들과 그것을 지키려고도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 무심함이 있다. 구도심은 한산하다. 오래된 주택가에는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국제공항을 짓고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수도권을 가로지르는 모든 철로들이 이어지도록 길을 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은 여전히 공허함을 감추고 있다. 


인천만큼 바람이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인천의 바람에는 바다도시 특유의 소금기가 없이 습하다.

 


인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느 지역 사람은 속을 감추고 있고 어느 지역 사람은 화통하고 어느 지역 사람의 말은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다고도 하는데, 인천 사람들은? 개항장 장사꾼들이 한 세월을 뜨겁게 달군 도시답게 빠르고 눙치고 의뭉스럽고 수다스럽고 활력있고 쾌활하고 그리고 일을 잘 벌리고 돈을 잘 벌고.... 그런 사람들일까. 



나는 또 여행자가 되어 인천을 걸었다. 중구청 주변에 있는 일식가옥이 갤러리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관일에 구경을 갔던 것이다. 이 장소의 이름은 <관동갤러리>다. 원래 이 동네 이름이 관사들이 많아서 관동이었단다. 옛 역사를 겨우겨우 이어가던 길조차도 엉뚱한 이름으로 강제로 바뀌었는데, 본래의 이름을 회복해가는 한편, 점차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일식 가옥을 옛 모습대로 기꺼이 품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갤러리 구경에 나섰다. 이 집은 나가야라는 형식의 집이다. 적게는 2~3채에서 많게는 5~6채의 집이 하나의 지붕을 공유하며 나란히 이어져있는 연립주택 형식의 일본식 가옥이다. 이 집은 전면에 보이는 규모는 작지만 뒤쪽으로 길쭉하게 뻗어있다. 뒤쪽에는 지붕 사이의 공간으로 빛도 들어오고 뒷채로 연결되어 있어 공간이 재미있다. 


이 집은 관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관사로 지어진 것으로 6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인천부청에 근무자들을 위한 관사였으리라고 짐작한다. 집의 연대에 대해서도 재미난 일화가 있다. 지붕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꺼번에 지어진 집일텐데도 집마다 신축연대가 1939, 1941년 등 다르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다른 나가야의 집은 상량문에 1932년이라고 되어있는 한편, 교토대학교에 있는 인천지도에는 1930년에 이미 이 6채의 나가야가 버젓이 그려져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작은 보에 붙여진 신문지를 발견했는데, 대정13년(1924년)에 발행된 경성일보였단다. 십여년 전의 신문을 붙일 리는 없으므로 대략 일년전이라고만 해도 192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않나,라고 집주인은 판단하고 있다.  


집주인은 갤러리 옆 주택을 구입해서 살림집으로 쓰다가 다시 옆집을 매입하여 갤러리로 리노베이션을 했다. 두 주택은 1층과 3층을 서로 공유하면서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주고받는다. 주택 리노베이션은 한양대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맡았다. '일식주택 재생프로젝트'로 나가야 주택의 매력을 자유롭게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도미이 교수는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보다는 나가야 건축의 재미있는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집의 개축방향을 잡았다. 


집이 서로 관통하면서, 메자닌층을 연결되고 트이고 좁히며 다채로운 공간이 연결되었다. 원래의 집에 시멘트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벽들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8~90년 동안 변화된 모습을 애써 없애지 않았다. 건물 뒤쪽에는 또다른 공간이 연결된다. 게스트룸과 부대시설로 이용한다.  







지붕을 공유하는 나가야주택의 중간채 두 채를 이어붙였다. (관동갤러리 리플렛에서 사용)






이 집의 변화와 함께 들여다볼만한 장소는 중구청 왼쪽편에 있는 카페 팟알이다. 이 건물은 1880년대 말에 지어진 일식 사무실 건물이며 1층은 상점이나 사무실로 쓰고 윗층은 살림집인 형태다. 개인 소유주가 건물을 사들여 리노베이션했다. 처음에는 흰색 몸체에 파란색 지붕을 덮고 선 살림집이었다.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최대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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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알이 리노베이션을 끝내고 오픈했을 때, 의아한 마음이 컸었다.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흥미로웠던 주택인지라 재미나게 변화하길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원형을 찾아 복원에 이른 결론이 '덜 재밌게' 느껴졌던 것이다. 방문했던 날, 건물 리노베이션에 참가한 건축가와 자문을 맡았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는 완전히 새롭게 공간을 변화하는 것으로 제안했으나 건물의 중요성을 들어 원형찾기에 도전해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건물은 인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건물의 연혁과 역사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고증하고 복원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건물은 지금 등록문화재 제567로 등재되었다. 만약 다른 식으로 리노베이션을 했다면 건물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관동갤러리가 선택한 방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옛 건물을 바라보는 방식, 이 건물을 현대화하는 방식에 하나의 기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물에 의미를 담는 방식도 개개인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변함없는 것은 건물이 사용자의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뿐이다. 















"수봉다방으로 놀러오세요!"




문화기획자 H가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장소를 알려왔다. 어쩌다보니 초대 날짜보다 2주나 늦게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인천 숭의동에 있는 수봉다방이다. 실제 운영되는 다방은 아니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작품도 걸고 커피도 마시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마실도 나오는 그런 동네 사랑방이다. 요즘, 이 동네에 젊은 예술가들이 쏠쏠히 모여들고 있다. 동네 예술장소 중 하나인 '그린빌라'는 일반 빌라의 한 세대를 예술가 레지던시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덕분에 인구가 빠져나가고 있는 동네에 젊은 피를 수혈하게 되었다. 

퇴락하여 고요해진 낡은 동네에는 늘 뭔가 뜨겁게 하고 싶어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나는 그들의 뒤를 좋아라하며 쫓는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이 나라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재밌게 살 수 있는 멋진 종족이다. 지하철타고 서울로 출퇴근하고 높은 건물에 갇힌 채로 주어진 업무만 하는 종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진. 그리고 늘 요상하고 기상천외하며 섬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꺼내어 보여준다.   



무용하고 또 무용한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로 날마다 새롭게 노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는데 좀 많이 늦었다. 2주라니.. 전시가 끝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문을 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저 공간이라도 보게 된다면 좋으련만... 일단 전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려서 걷는다. 도원역에서 내리면 늘 배다리 헌책방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는데, 오늘은 반대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싸늘한 날씨지만 햇살이 좋아서 다행이다. 건들건들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조용하지만 오래된 듯한 동네가 나타났다. 도로를 따라 형성된 상점가는 퇴락했다. 나른한 흔적들이다. 이 동네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물이 있었다. 문닫은 옛날 시장인가 싶어 들어가본 그곳은, 거대한 중정을 3층짜리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시장이었다. 'ㅁ'자 모양으로 둘러진 건물은 두 겹으로 세워져서 무척 독특한 구조다. 중정은 넓은 데다 볕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시장은 텅 비어있었다. 벽 하나가 뜯겨나간 것을 보니 철거하다가 멈춘 것 같다.  


어떻게 이 거대한 장소가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저 문을 닫은 수많은 시장 중 하나인가? 이곳은 언제 시작되어 어떤 사람들과 어떤 물건들이 오고갔으며 어떤 역사를 갖고 있을까? 궁금한 것은 많지만, 해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일행과 나는 묵묵히 사진을 찍었다. 구석에서 영화 <써니>와 드라마 몇 가지를 촬영한 장소라는 광고판을 발견했다. 빈집처럼 보이지만 드문드문 사람이 사는 집도 있었고,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누구요? 왜 사진을 찍어요?"


어디선가 등장한 중년남이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근대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며 촬영현장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금세 눈 주름을 폈다. 시장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모르는데, 재개발을 주도하던 사람이 돈을 갖고 날랐다더라고. 공사도 하다가 중단된거지. 그것도 5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에요."


 






     

    


     



나는 이 시장이 제물포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천남구문화대전'이라는 사이트에 따르면 수봉공원과 제물포 역 사이에 있는 재래시장이며, 1972년에 개장했다고 한다. 수봉산 자락은 1970~80년대에 주택지가 형성되어 인구가 모여들고 인천대학교를 비롯, 초중고 학교들이 생겨났다.  인천의 주요 놀이공원이던 수봉공원이 있었기에 시장도 덩달아 번성했던 모양이다. 

한때 잘나가던 위락시설들이 시대의 변화에 쓸쓸하게 폐허가 된 것이 하나둘은 아니다. 수봉공원은 사람들의 여가문화도 변화하면서 쇠퇴를 맞는다. 시장도 타격을 맞는다. 제물포시장의 개선안, 재개발안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96~7년대부터. 신도시로 인구가 옮겨가면서 재래시장의 흐름은 뚝 끊어졌고 분양사기 등으로 피해를 입고서는 몰락했다. 105개에 달했던 상점 중 영업하고 있는 상점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단단한 건물들은 각자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넓은 중정은 축제의 현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따금 예술가들의 돌발적 모임이 열리기도 한단다. H도 이 건물을 보았을까? 그녀라면, 수봉다방 가는 길에 버젓이 서있는 이 화석화된 건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빛과 어둠이 묘하게 그늘질 때, 그녀의 카메라에는 분명 이 시장의 부서진 돌조각과 부식된 철무더기와 먼저처럼 쏟아지는 빛의 입자들을 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도착한 수봉다방은 문이 닫혀있었다. 

자물쇠가 잠긴 문을 잡아당겨 보는데, 옆에 앉아계신 할아버지가 툭 던진다. 


"그 친구들 오후나 되야 나온다."


예술가들의 전시장인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다시 철로변을 따라 걷는다. 숭의평화시장은 어디일까? 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만 달랑 들고서 지도앱에 의지해 장소를 찾아간다. 검색 결과는 조그마한 삼각지를 나타낸다. 지도를 따라 가니 거짓말처럼 시장이 등장한다. 삼각형의 중정이 있는 3층짜리 건물(옥탑처럼 4층도 있다고 한다)로 둘러싸인 이곳이 숭의평화시장이다. 사람이 없으니 시장이 될 리가 있나? 예상대로 시장은 고요했다. 커다란 현수막에는 숭의평화시장 레지던시에 참여할 예술가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다소 낡았고 소비자를 끌만한 그 어떤 장치도 없으나 나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얕은 경사지에 놓인 삼각형의 중정이라니 지나치게 재미있었다. 언젠가 만났던 어느 낯선 여행지의 풍경 같았다. 초여름 햇살 아래 파라솔이 꽂힌 테이블이 상점마다 놓이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상쾌하게 수다떠는 웅성거림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시장이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질식 상태의 시장에 인공호흡을 시도하려고 한다. 공간도, 건물도, 끝없이 번영할 수는 없다. 도시의 변화에 따라 활발했다가 사그라진다. 공간은 늘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공간들에 잠시 머문다. 고여있던 시간의 먼지가 새로운 바람에 일렁거린다. 


봄이 오면, 문닫은 시장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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