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창동 예술촌

박물관보다 아름다운 골목길 







집은 아담한 마당을 둘러싼 한옥이었다. 한지가 붙은 문살도, 그림자를 만들던 처마도 흐릿하지만 기억이 난다. 마당은 시멘트를 발랐던 같고, 조금 너머로는 푸른 잎이 축축 처진 꽃나무들이 있었던 걸로 보아 정원이었던 같다. 마당엔 둥근 우물이 있었다. 들여다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물기운이 올라왔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햇살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기억 속의 장소가 그렇듯이, 집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낡은 사진처럼 색이 바랬다. 

거기 내가 있다. 어린 나는 무슨 생각인지 우물가로 갔다. 그리고 우물 가장자리에 놓인 두레박을 만지작거리다가 우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물은 무척 깊었으므로, 한참 후에야 첨벙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어른들이 달려와서 한참을 애쓴 끝에 두레박을 건져냈다. 오로지 장면으로 기억되는 . 

집은 한때 고모가 운영하던 여관이었다. 마산에 있는 여관은 지금 이름도 위치도 남아 있지 않다. 엄마의 기억 저편에서 떠오른 집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엄청 일본식 집이었지. 부림시장 근처였는데벌써 3, 40 전인데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으려나?” 어릴 때는 사진첩을 뒤적이며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들이 요즘은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소들을 우리 이전 세대는 살면서 경험해왔으니까.  

마산 여관에서 찍은 고모의 사진이 사진첩에 그대로 있었다. 장의 사진은 귀퉁이에 77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모는 돌아가신 17년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경주에서 다방을 운영했고, 마산과 부산에서 여관을 운영한 고모의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내가 낯선 곳으로 줄창 떠나려는 것도 고모의 영향인지 모른다. 집을 찾아보자며 엄마와 마산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아름다운 골목길, 마산 창동예술촌 



어느 틈에 창원으로 통합되어 시의 이름을 잃은 마산은 조용하지만 널찍한 시가지가 인상적이다. 부림시장은 원도심 지역인 창동에 있다. 나는 오래된 집들과 꼬불꼬불한 골목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하나를 밟아 들어갔다. 멀찍이서 보이는 이층의 일식주택을 향해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법한 골목을 통과했다. 

새로 단장해서 카페와 공방, 문화센터로 변신한 옛집들이 계속 이어졌다. 외관에 목재나 시멘트를 덧발랐을 , 옛집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는 같았다. 문화센터 앞은 실습을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고, 골목을 구경하는 커플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삶의 형태대로 구불구불 자리 잡은 좁은 골목은 자동차는 허용되지 않는 사람의 길이며, 집과 집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체의 길이다. 골목에선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길게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스케일, 인간적인 척도로 도시의 구석구석이 만들어지던 시대가 존재한다. 퇴색된 그림자를 들추면 한창 빛나던 시기가 또렷이 드러날 골목들이여! 유지되기를, 살아 있기를! 

골목을 빠져나오자창동예술촌이라고 적힌 문패가 골목 어귀에 붙어 있었다. 

 







오래된 장소는 도시의 박물관


늙수그레한 주인이 앉아 있는 헌책방이 있기에 들어가보았다

“77년의 일식 여관이라글쎄요. 8, 90년대 지나면서 남아 있는 있으려나?” 

수십 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헌책방은 낡은 시대의 유물들을 간절히 끌어안고 있었다. 정리조차 어려워 마구 쌓인 책들 사이에서 시대를 풍미한 책들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책의 존재감을 어찌 외면할 있을까! 나도 헌책방에서 사들인 책을 탐독했던 유년 시절이 있었다. 먼지 냄새, 삭아가는 종이 냄새는 언제나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서가를 더듬다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발견했다. 3 출간 기념으로 제작된 양장본 증쇄판이다. 세로로 도열한 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활판인쇄 특유의 오톨도톨한 질감이 전해졌다. 헌책방에 때면, 책이란 지식을 얻는 효용보다 물성을 체험하는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이란 만지고 냄새 맡고 품에 끼고 있는 용도의 물건이라고. 읽는 행위는 그다음이다. 여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토지》 3 권을 사들고 나왔다.

부림시장을 찾아가는 골목길에는 발길을 머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출출해서 들어간 우동집에서 5,60년대 풍경을 간직한 사진 점이 벽에 걸린 것을 보았다. 여전히 자리에서 문을 열고 있는 학문당 서점과 창동의 거리 풍경. 이곳이 마산의 명동 같은 곳임을 이제야 알았다. 

이윽고, 부림시장 앞에 도착했다. 배고프던 시절을 떠올리는 상호가 붙어있는 분식집들이 우리를 맞는다. 좁은 계단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들이 거대한 아케이드 양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재래시장의 현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모든 시장들이 높은 아케이드 형으로 바뀌어 휘황했다. 

다른 도시의 재래시장과 그다지 다를 없는 시장 풍경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전 기억이 모두 휘발된 까닭인지 엄마는 부림시장에 도착해서도 여관의 위치를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수십 걸었던 길인데 전혀 모르겠어.” 

시장을 벗어나 예술가의 초상이 그려진 골목에서 다른 이들의 추억을 훑으며 어슴푸레한 시간을 헤맸다. 








각자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도시가 된다


기억의 휘발은 나와 엄마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만 남아 있는 부산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높은 건물과 도로가 생겨나고 길은 막히거나 넓어졌다. 산이 옮겨지고 물길이 생겼다. 10년만 지나도 도시는 완벽하게 변화한다. 성형미인만 탓할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들 또한 모습을 바꿔가며 과거를 지우고 변형시킨다. 하지만 기억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나의 기억이자 모두의 기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가포동 차고지는 마산 시민들의 다리 노릇을 하던 버스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시내버스 공영차고지로 옮겨간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높은 곳에 있던 차고지는 카페가 되었다. 건물의 전면에는안전제일이라는 글귀가 여전하다. 버스 차량을 수리하는 시설 사이로 카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에는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는 정비소 슬로건도 눈에 띈다. 사람들은 남루한 장소에 담긴 어떤 기억에 비싼 커피만큼의 비용을 지불해도 괜찮다는 표정이다. 카페를 가득 채운 남녀노소 중에는 이른 새벽 일터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탔던 기억과, 밤늦은 시간 버스를 탔다가 잠든 채로 버스 종점까지 와버려서 망연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과 기억 때문일까? 카페는 젊은이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즐길 권리를 준다. 

도시에 남아 있는 오래된 장소( 건물 그리고 골목)에는 기념관이나 역사관에서 들을 없는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런 장소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박물관이 아닐까? 마산의 역사를 따져보자면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도시를 빛낸 역사적 인물도, 발굴해야 이야기도. 일제강점기 시인 임화와 지하련의 애틋한 이야기는 다시 마산을 방문해야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나와 긴밀하게 맞닿은 기억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에 도시를 떠올릴 때면 마음은 애틋해질 것이다. 도시와 나는 가까워질 것이다.






우동 맛은 생각나지 않지만 옛날 사진만큼은 또렷이 기억나는 우동집과, 조각가 문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구불구불한 골목과, 《토지》 판본을 샀던 헌책방과, 기억 우물이 있던 여관 기억들은 나를 여행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광대짓의 위대함,  명동예술극장 






















명동에서 연극을 본다는 것.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환상적인 퍼포먼스의 쇼도, 잘 나가는 뮤지컬도,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닌, 셰익스피어를 보러 명동에 나오다니 그것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공연을 기다리며 명동을 걸었다. 다국적 관광객들의 복잡다단한 언어들이 귓가를 스쳤다. 나의 일행은 대학생 시절에 명동성당 옆의 창고극장에 연극을 보러 꽤 자주 왔다고 말했다. 실험적인 연극을 자주 올렸던 창고극장은 몇 번의 폐관 위기를 겪으며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올해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명동은 유행이 시작되는 거리였다. 가장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태동했다. 한편, 명동성당 앞의 광장은 시민운동의 집결지였다. 그러므로 명동에는 저항의 거리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 명동은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온갖 분야의 예술가들과 문필가들이 명동의 다방에 모여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다방도, 소극장도, 양장점도 사라진 거리에는 다국적 관광객이 또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복잡다단한 언어들이 귓가를 스치고 국밥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즐거웠다. 명동의 여전함이라면 이런 활력일거다. 

그런 명동에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볼 수 있는 극장이 있다. 그것도 80년이나 된 오래된 극장이. 1936년에 개관한 후 국립극장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예스런 석조 장식은 명동을 채우고 있는 높은 건물들과 뚜렷하게 다르다. 나는 입구의 유리문을 밀고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번화하고 번잡한 거리가 닫히고 고요하고 낯선 시간대로 홀연히 빨려들어갔다.

이것은 낯선 체험이었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문화공간들을 보면 번다한 도심의 흐름과 약간은 떨어져 형성되어 있기에 기대를 품고 마음을 준비하는 전이공간이 있다. 그렇다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쇼핑센터와 푸드코트를 통과한 후에야 만나게 되는 어두운 공간은 또 아니었다. 오래되고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인파와 소음과 불분명한 문화가 소용돌이치는 명동거리와 규정하기 어려운 어느 시절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무대라는 환상을 기대하고 온 탓도 있지만, 갑작스런 공간의 전환에 나는 급속도로 상승하는 기분을 느꼈다. 기억을 떠올리자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기 전의 영화관이 이런 분위기였을 것이다. 대로변의 소음과 인파에 시달리며 외부의 티켓판매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장이요!”를 외치고 티켓을 받아들고 종종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기억 속의 그곳 말이다. 



1936년의 명치좌 

그리고 2015년의 명동예술극장 

공연을 기다리면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건물의 역사는 8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명치좌’라는 이름으로 1936년에 개관할 당시에는 토키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최첨단 극장이었으며, 영화와 연극을 둘다 올리는 무대공연장으로 관객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성 시내에서 최고로 꼽힐 만한 시설이었다. 설계자는 타다마로 알려져 있는데, 종로에 세워진 단성사와 황금관 등 경성 시내 극장건물을 상당수 그의 손을 거쳤다. 명치좌의 소유주는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그는 MGM 영화사의 조선 대리인이 되어 영화배급에도 나섰고, 1939년에는 종로의 단성사를 합병하여 운영했다.  

명치좌는 광복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 치하에서 1946년에 국제극장으로 개관했다. 1947년에는 서울시가 인수하여 회관(시공관)으로 사용했고, 1957년부터는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예술공연장이 되었다. 1962년에는 국립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명동은 유행의 중심이자 젊음과 저항의 거리였고, 문화를 추구하는 보헤미안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이 건물이 국립극장이었던 5,60년대는 명동만큼 빠르게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장소가 없었다. 

1973년 국립극장이 남산에 신사옥을 짓고 이전하면서 1975년에 이 건물은 금융회사에 매각된다. 국립극장이 사라지고 금융회사가 들어오면서 명동은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금융과 상업의 거리로 전환되었다. 먹고 살기 바쁘던 시절에는 문화는 남산이나 과천, 우면산으로 저멀리 달아났다. 노래와 춤, 연극이 일상과 멀어지자 예술가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대학가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학가조차도 문화를 잃었다고 말하는 1990년대 말 명동극장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극장의 복원과 문화의 회복을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오랜 시간 건물을 보수하면서 이 장소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리는 건물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기억이 사라진 문화유산, 

의미를 묻다  


나는 오래된 건물들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다양한 시간대의 표정을 간직한 건물이 이 도시에 더욱 많아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 이유는 건물들이 이루는 시간의 켜들이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며 도시가 가진 이야기들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의 연속성을 가진 골목과 거리는 시민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시간의 연속성은 나 이전의 문화와 역사에 내 역사가 더해져서 후손들에게 전달될 거라는 암묵적인 동의다. 나는 단편이나 파편이 아니며, 타인과, 그리고 도시라는 큰 집단과 연결되고 확장된다. 이 때 우리는 사회를 누릴 자유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갖게 된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역사도시라 불리는 데다 고풍스런 문화유산도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문화유산을 복원한 후에는 그 전만 못하다는 아이러니에 빠지곤 한다. 복원한 후에는 시간의 흔적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옛 것과 닮은 새 것이 만들어진다. 명동예술극장의 내부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외관에서 드러난 건물의 옛모습이 내부에서는 도통 발견되지 않는다. 금융회사로 사용되던 시절에 이미 건물 내부를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따라서 공연장으로 되살리는 일은 새로 짓는 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문화유산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외부의 석재 장식마저도 대부분 새로 만들어 붙였다. 석재의 손상이 심해서 세척만으로는 원형을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상이 없는 부분을 원형으로 삼아 주형을 뜨고 그 주형을 바탕으로 장식재를 제작하고 부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외관조차도 형태는 그 이전의 것과 닮아있을 뿐, 이 건물이 ‘오리지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중에 명동예술극장 복원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건축복원을 할 때 외부장식을 살리는 것 외에는 큰 지침이 없었다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게다가 80년 된 건물은 옛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예술극장의 기능까지 가져야 했다. 더 넓고 쾌적한 관람환경과, 더 다양한 무대를 갖춘 공연장이 되기 위해서, 단열과 화장실 등 필요한 설비를 보기 좋게 갖추기 위해서 옛 흔적은 모두 가리거나 지워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건축비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기능을 모두 갖추고 시간성과 건물의 기념성까지 드러내기 위해서는 예산이란 늘 부족하다. 벽돌조의 건축 내벽을 드러내기로 했던 계획의 방향은 예산 앞에서 ‘석고보드에 페인트’로 바뀌었다. 건물이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대적 삶을 충족하는 그릇으로서 존재할 것인가. 명동예술극장은 두 번째를 위해서 첫 번째를 배제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을 문화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이름 그대로 ‘명동예술극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무대라는 판타지

극장이라는 환등기 

극장은 판타지의 공간이다. 암흑의 공간에서 환한 무대를 향한 그 시간 동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으로 완벽하게 채워진 실물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현실로 되돌아오는 길은 더딜 수밖에 없다. 현실을 잊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무대를 바라본 후의 나는 그 전의 나와 다르다. 미약을 마시고 다른 영혼이 주입된 듯 고양된 정신을 갖게 된다. 물론, 현실로 돌아오면서 미약의 기운은 마치 12시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의 주문처럼 스르르 풀리게 되지만. 

원각사라는 최초의 극장이 생겨난 후로, 서울에는 신극, 연희극, 사극, 만담, 무용, 노래, 영화를 듣고 볼 수 있는 공연장이 생겨났다. 영화는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최초의 영화관의 운영했다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공연장은 유명인사의 연설을 듣거나, 난상토론을 하기 위한 집회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중매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므로 극장은 여가와 교육과, 정보 소통의 장으로도 필요한 시설이었다. 경성부에서 운영하는 극장 하나 변변히 없다는 성토를 십수년간 듣고서 1935년 완공한 부민관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시립극장은 후에 국회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강퍅한 현실을 넘어서 감정의 탈출구가 필요한 도시민들 누구나 대중연희를 즐겼다. 배우들은 남녀노소의 감정을 북돋우며 눈물과 웃음을 함께했다. 무성영화를 설명해주는 변사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활동사진이 비치고 빠른 템포로 장면이 흘러가면 이내 사람들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갔노라며, 작가 이태준은 스크린의 힘을 글로 옮겼다. 국내 최초로 연극전문극장이라고 알려진 동양극장은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 가사로 유명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연극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차홍녀와 황철 커플의 눈물의 연기 앞에서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최승희의 무용 발표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단성사로 몰려갔다. 민족의 암흑기라는 그 시대에도 무용을 관람하며 환호하고 연극을 보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완서가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썼듯이, 포격으로 폐허가 된 명동 거리에서도 극장이 불을 밝히고 미국산 토키 영화를 틀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자 하는 갈망과 욕구는 마치 본능처럼 우리에게 있었다.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의 힘이란! 



위대한 광대라는 

이름의 예술가들  


공간에서 느낀 아쉬움은 공연장의 열기로 인해 역전되었다. 연극은 길었고 예상대로 비극으로 끝났다. 그 비극은 희한하게도 눈물이나 비통함보다는 뜨거운 에너지를 주입해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탐욕스런 자들은 서로를 죽이며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죽음의 장면이 끝난 후에는 젊고 탁월한 인물들이 나타나 목도한 사건을 후대에 전하겠다고 했다. 

그때 광대가 나타났다. 광대는 늙고 정신이 나간 왕을 거울처럼 비추는가 하면, 시대를 통찰하며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읊었다. 극과 관객을 오가며 환상과 현실을 중재하던 리어왕의 광대는 관객과 판타지를 연결하는 무대예술가들의 다른 이름이다. 스크린도, 컴퓨터의 화면도 아닌, 무대에 서있는 인간 광대들의 목소리는 공기를 울려 가슴까지 와닿았다. 직접 발화될 때의 소리와 호흡은 긴장된 떨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졌다. 신체로 체험하게 되는 감정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광대짓의 위대함. 나는 변사의 목소리에 열광했던 옛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대를 열렬히 사랑하여 그 무대에 서기 위해 부모와 의절하면서까지 집을 나섰던 예인들과, 이시이 바쿠의 춤을 보고 흠뻑 빠져서 사범학교를 마다하고 무용가의 길로 접어들었던 최승희 같은 예술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명동에서 연극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거대한 상업지구에 활력과 생명력을 주는 향기는 이런 장소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명동의 역사는 또 달라질 것이다. 


(2015. 5. kb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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