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를 질문하는 장소, 

학교에 가다 





변화무쌍한 도시에 살면서 옛 건물을 이야기한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들을 그대로 지속시키자’라고 한다면, 이 오래된 건축물에 좀 더 살가운 애정을 기울일 수 있을까? 인간은 과거와 절연한 채 살아갈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는 연속선상에 있고 그 어떤 부분도 단절되어서는 온전하지 못하다. 경험으로 축적해온 지난 시간들이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고독해진다. 기억을 증명하는 것은 장소와 사물, 사람이다.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갖고 있으며 그러므로 외롭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들이다. 안타깝게도 살아오면서 우리가 자주 버렸던 것들이기도 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면서 잊어버렸던 것들.





인천 창영 초등학교







이번에는 학교를 다녀왔다.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짧거나 길게 몸담았던 장소다. 특히,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의 기억은 무척 따스하고 달콤한 빛을 띈다. 흙모래가 깔린 넓고 평평한 운동장, 낮은 책상과 걸상(의자가 아니라 걸상이라 했다.), 천리 먼길처럼 느껴졌던 등하굣길,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별별 것들이 다 있던 문구점과 구멍가게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던 시절이다. 

두 번 전학을 한 나는 모두 세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건물은 모두 비슷했다. 첫 번째는 ‘ㅡ’자형, 두 번째는 ‘ㄱ’자형 세 번째는 ‘ㄷ’자형이었지만, 이층짜리 박스형 건물에 격자형 창문이 있고 운동장 주변으로 국기게양대와 조례대, 스탠드가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조례가 열려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가 제창, 교장선생님 말씀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그땐 초등학교가 아니라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었다. 

지난여름, 개교 백년을 바라보는 내 모교를 찾았다가 적잖이 놀라고 실망한 기억이 있다. 하필 방문했던 그날, 교사를 신축하느라 대형 공사차량들이 바쁘게 오가며 먼지를 풍겼다. 아무리 둘러봐도 기억 속의 학교는 흔적도 없었다. 학생들은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학교 주변은 오래전 기억대로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데, 정작 학교는 더 새롭고 넓고 크게 변모하고 있었다. 과거가 도려내진 듯한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곳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백년을 가뿐하게 

뛰어넘은 학교들



경기도의 수많은 학교들 중 오래된 교사를 유지하는 곳은 어디일까? 인천 배다리에는 오래된 학교가 두 군데나 있다. 1892년에 설립된 영화초등학교(당시 영화학교)와 1907년에 개교한 창영초등학교(인천공립보통학교)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시행된 근대적 제도에 따라 정부는 전국적으로 공립초등학교를 열었고, 민간 사업가의 민족학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들도 곳곳에서 문을 열었다. 영화학교는 인천지역 최초로 생겨난 교육기관이며 미국 여선교사 존스 부인이 여학생 교육을 위해 설립한 곳이다. 최초의 학생은 단 한명이었으나 이후 학생수를 늘렸고, 지금의 장소에 1911년 벽돌조의 교사를 신축하여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고 유치원도 설립했다. 두 개 층은 교사로 쓰고 지붕 밑 3층은 예배실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재건시대를 거치며 교명과 학제가 끊임없이 바뀌었고,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96년이다. 2000년에는 교사를 신축했다. 새 교사 역시 붉은 벽돌의 잔잔한 분위기를 이었다. 옛 교사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옛 인천영화학교




수원 삼일중학교 아담스 기념관




바로 근처에 창영초등학교가 있다. 1924년에 지어진 고풍스런 적벽돌 교사가 눈에 띈다.  ‘ㅡ’자형 이층건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1층은 아치형 창문, 2층은 직사각형 창문으로 모양을 냈고 창문 주위는 화강석으로 장식했다. 지붕에는 도머창이 근사하게 남아있다. 개교 백주년 기념탑이 학교의 역사를 짐작케한다. 이 학교는 인천 지역의 3.1만세운동 발상지로도 유서깊은 곳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제16호)로 지정된 옛 교사는 특별교실과 동아리실, 학교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수업은 새 건물에서 진행된다. 벽돌조 공립보통학교는 1920년대 처음 등장했고 부산과 평양 등지에도 이곳과 닮은 교사가 지어졌다. 10년대 목조와 30년대 콘크리트조 등 시기별로 교사 건축이 달라졌다. 

수원 삼일중학교도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옛 교사를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일중학교는 1902년 개신교 미션스쿨인 삼일학교로 시작, 1923년 새 교사를 지으면서 수원 매향동에 자리잡았다. 미국 아담스교회의 후원으로 지어져 아담스 기념관으로 불리는 이 건물도 아름다운 적벽돌 건축물이다. 수업은 뒤편에 세워진 신교사에서 이루어지며 행정동, 강당동 등 세 채의 건물 모두 아담스 기념관의 분위기를 이어받았다. 1884년부터 1910년까지 기독교계 학교는 768개에 달했다. 종교인을 양성하는 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교양인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 낯설고 아름다운 서양식 건축물이 지금은 사라진 시대를 부르며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대건축이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학교건축



2004년 정리된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보고서’는 학교건축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경기권에서 조사된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43건이며, 그중 28건이 교사, 창고, 강당 등 학교시설로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이들 교사는 증축과 신축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폐교되거나 휴교된 학교도 몇몇 되었다. 그 이유는 재개발이었다. 신도시 이식을 위해 오랫동안 살던 마을을 남김없이 밀어버리는 마당에 오래된 학교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학교는 사회적 변화에 대단히 민감한 장소다. 특히 60~70년대 문교부 표준설계에 따라 지어진 학교 교사들은 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건축물이다. 

베이비붐세대의 초등교육이 시작된 1960년대는 학교의 재건기였다. 의무교육이 시작되고, 시도 교육위원회가 등장했으며 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학교는 각 시도 교육위가 제시하는 표준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보통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2~4층 규모로 중앙현관과 계단실 주변으로 교실이 배치되고 양 끝으로 계단실이 놓였다. 평슬라브로 지붕을 처리한 박스형태가 많았는데, 이는 학생수가 늘어나 증축해야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교실 크기, 각종 시설의 규모, 운동장 등 설비 지침은 1969년 제정된 학교시설 설비기준령이 적용되었다.(수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6년 이후에는 엄격하게 적용되던 표준설계를 폐기하고, 학교마다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한 교사가 등장했다. 





구리 인창초등학교 



성남 왕남초등학교 








보고서에 수록된 학교 중 1960년대 문교부 표준설계도에 따른 전형적인 학교건축물로 소개된 왕남초등학교와 구리시의 유서 깊은 인창초등학교(1921년 개교)를 방문했다. 성남시 고등동의 왕남초등학교는 고등지구가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터에 홀로 남아있었다. 1960년대의 설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교사를 허물고 2010년 병설유치원과 함께 신축교사를 재건축한 상태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마을은 재개발로 사라졌고 쓸쓸하게 남아있는 학교는 주변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내년도 학사 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학교의 오랜 자랑거리였던 은행나무는 신축 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풍성한 잎사귀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지가 잘려나가 있었다. 어린이 인구가 줄어드는 현재, 옛 교사를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학교의 존립마저도 위태로운 것이 지금의 학교상황임을 여실히 느꼈다. 그러나, 7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학교다. 학교의 첫 졸업생인 팔순 어르신이 찾아온 적이 있다는 경비 아저씨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구리 인창초등학교 역시 교사의 변화가 많았다. 인창초등학교는 1921년 사립 망우학교를 편입하여 인창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4년제 4학급의 조촐한 시작이었지만, 구리 지역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동안 성장을 거듭하여 토평, 구리 등 여러 초등학교를 분리 개교시킨 공신이기도 하다. 두 동의 목조 교사가 운동장을 공유하며 ‘ㄱ’자로 이어져 있던 초기 학교의 배치 그대로 3층의 콘크리트 교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 채로 학교의 역사는 이어져왔다. 1970년대에 지어진 교사동은 창호, 벽체, 바닥 등을 지속적으로 보수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교사는 다양한 변화를 거쳤지만, 정원에 세워진 기념비와 조각상은 과거의 어느 시대를 박제한 듯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있다는 세종대왕상과 국민교육헌장비, 어린이헌장이 적힌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 연대가 다른 졸업생들이 그때그때 기증한 조각상과 기념비들이 학교앞 정원을 채웠다. 그 중에는 반공 교육이 강화되었던 시기에 세워졌던 이승복 어린이상도 있었다. 평화의 비둘기와 함께 서있는 이 어린이는 과연 지금 소년소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운동장 한쪽에는 세월호를 기리는 노란 리본 장식이 선명하다. 


운동장에서 뛰고 노는 아이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한 아이가 나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우리의 미래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무수히 겹쳐진 기억의 길

: 수인선 협궤철도와 소래염전 




인천과 안산을 잇는 그 노란색 전철 수인선이 아니다. 1933년에 개통해서 60여 년을 달리다가 1995년 12월 31일 폐선된 ‘그 수인선’이다. 수원에서 송도를 거쳐 인천항까지 열일곱 개의 간이역을 지나는 총 52킬로미터의 철도. 수인선이 특별한 이유는 협궤열차가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철도는 표준계를 선택하고 있어 철도 궤간이 1435mm지만 협궤는 말 그대로 폭이 좁은 762mm로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협궤를 달리는 기차도 작고 좁았다. 사람들은 협궤열차를 ‘소철’ ‘작은철’ ‘꼬마철’이라고 불렀다. 

사라진 지 20년이 지나 다시금 궤도 위로 수인선 전철이 다닌다. 재빠르고 단단한 전철 위로 협궤열차의 추억이 겹쳐진다. 시발역인 수원에서 안산, 시흥을 거쳐 종착역인 인천까지 이어진 철도선은 삶의 선이요 감정의 선이다. 그 빈번한 삶을 결코 놓을 수 없다는 듯 열차는 다시 달린다.   








수인선은 경기 남서부의 여러 도시들을 이어주는 지리적 맥락도 중요하지만 좁고 느린 협궤열차 주변으로 펼쳐지는 독특하고 생경한 문화라는 문학적인 맥락도 빼놓을 수 없다.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는 1980년대의 경기 남부 일대를 보여준다. 당시 안산에 거주하던 소설가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수인선의 풍경이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서해안을 달리는 이 조그만 열차 안의 허무하도록 낙후된 풍경 너머로 흐린 안개처럼 급격한 도시화가 밀려온다. 역사도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에서도 매일같이 푸성귀 보따리를 안고 장터로 가는 주민들이 있었고, 열차는 낚시꾼들이 낚은 생선 비린내와 어시장 건어물의 곰삭은 냄새가 뒤섞였다. 선로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그 아이들이 비켜날 때까지 기다렸다던가 시동이 꺼지기라도 하면 손님들이 내려서 열차를 밀고 끌었다던가, 트럭하고 부딪혔는데 열차만 발라당 넘거갔다던가 하는 농담도 전설처럼 흘러나온다. 그 시절 도시의 풍경이 환상처럼 보였다는 소설가의 말처럼 수인선 협궤열차는 환상과 현실이 겹쳐지는 지점에 있다. 

평일엔 두 개의 열차로도 듬성듬성하던 열차가 주말이면 세 개의 열차를 꽉채우고도 서서 가는 사람들로 붐볐던 것은 소래포구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일엔 산업철도, 주말에는 관광철도인 셈이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에는 붉은 이끼처럼 바다식물이 자라고, 퇴락한 염전은 하늘의 반사판처럼 눈부신 일몰을 그대로 비춰낸다. 이 낭만적인 풍경을 보러 연인들은 기꺼이 수원과 인천에서 수인선이라는 사랑 열차를 탔다. 


경기 남서부의 변화를 

목격한 열차 수인선


수인선은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추진한 사철로 1936년 5월 16일 기공식을 거쳤다. 이 회사는 1920년에 수원-여주를 오가는 수려선을 협궤선로로 개통한 전력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수인선 공사를 끝내고 1937년 8월 6일부터 정식 운행을 시작했다. 협궤철은 1930년대 전후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철로로 활용되었다. 북한 지역의 장진, 강계, 신응, 백무 등 산업철도에 주로 쓰였다. 남한 지역은 호남선에서 연결되는 함평선(궤간 1,067mm), 그리고 수려선이 전부다. 수려선과 수인선은 같은 회사로 같은 궤간의 선로와 열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서로 호환되어 사용될 수 있었다. 수인선이 개통됨으로써 수려선에서 실려온 이천 여주지역의 쌀이 수원을 거쳐 인천항에 쌓일 수 있었다. 





수인선 역시 산업철도로, 자원수탈의 목적이 뚜렷하다. 군자, 소래 등 경기만의 염전에서 채취한 소금은 인천항으로 집결되거나 수원을 거쳐 부산항으로 실려간 다음 반출되었다. 수원은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농산물이 넘쳐나 곡물창고를 설치할 정도로 농산물 집산처였다. 수려선, 수인선이 물류 유통에 숨통을 틔여주는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수원-고색–어천–일리-원곡-군자-소래-남동-송도-인천항의 10개 역과 그 사이 7개의 임시정류장이 생겨났다. 1944년에는 임시정류장인 성두역과 문학역이 사라지고 고잔 역과 연수역이 생겼다. 남인천과 송도 사이가 폐선된 1973년부터 수인선의 종착역은 송도가 되었고, 다시 1992년부터는 소래가 종착역이 되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1시간 40~50분이 걸렸다. 광복 이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오롯이 정부 소유가 된 수인선은 인력 물자 부족과 더불어 원래 수인선의 목적인 자원 수탈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산업철도로서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수인선이 달리는 동안 경기만의 물과 섬이 메워지고 염전이 시가지가 되었으며 촌락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수인선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바뀌어가는 이 땅의 개발 역사를 고스란히 목격했다.


다시 수인선, 

기억을 연결하다


재개통한 수인선 전철은 인천역에서 출발한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며 옛 수인선 노선을 흝으며 안산 시내로 쑤욱 들어온 안산선 전철과 겹쳐진다.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에 그어진 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삶이 연결되고 기억이 이어진다. 






누군가의 얇은 기억처럼 땅 위에도 수인선의 흐릿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수원역 부근의 두 채의 급수탑이 가장 먼저다. 붉은 벽돌로 된 것과 콘크리트로 된 것이 있는데 키만 다를 뿐 구조는 유사하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으로 이 주변으로 물탱크와 배수관들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붉은 벽돌로 된 키낮은 급수탑이 협궤용이 아닐까 추측한다. 급수탑 근처에 수인선 협궤역사가 있었으나 폐선된 후 철거되었다. 수원역을 출발한 협궤 열차는 가속을 위해 완만한 경사지를 크게 돌면서 경부선과 직교하며 수원비행장 옆을 지나 인천으로 달려갔다. 굴곡진 협궤 선로의 흔적은 수원 세류공원에 남아있다. 실제 선로 대신 선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도블럭을 깔고 그 앞에 협궤열차를 이해할 수 있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 남아있는 협궤를 보려면 고잔역 인근에 있는 협궤열차길을 방문하면 된다. 고가전철의 위용이 교차하는 가운데 협궤의 소박한 흔적이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하듯 뻗어있다. 


지금은 인도교가 되어버린 소래철교를 바라보며 아쉬웠던 마음은 종착역인 송도역에서 절정에 이른다. 임시정류장을 포함해서 열일곱 개 역사 중 남아있는 유일한 역사지만 폐역 이후 창고로 사용된 탓에 내외부에 변형이 많다. 송도역 삼거리라는 지명이 알려주듯 당시에는 도시의 랜드마크였다. 당시 사진과 대조해보면 건물의 형태는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금속으로 된 급수탑이 빨갛게 녹슬어간다. 땅 위의 기억은 약간 비켜난 채로 공존하고 있다.



포구와 염전, 

비린내 나는 삶의 적층 


“종점까지.” 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에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을 올라탔다. 삐이!하고 내지르는 기적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수인선에서 바라보는 염전 풍경이 등장한다. 이 대목은 주안염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남편을 따라 부임지로 이사온 통영 새댁 박금이(박경리 선생의 본명)의 진솔한 경험이 틀림없으리라. 






주안염전은 우리나라 천일염 역사의 시작이다. 1907년 주안염전에서 시작되어 광양, 군자 등에 염전이 생겨났다. 거대한 만입으로 내륙 깊숙이 해수가 유입되는 소래 군자 일대는 염전 조성의 적지였다. 소금은 생필품인 동시에 화약제조에 필요한 군수품으로 쓰였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독점적으로 관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에 7,089정보의 염전이 축조되었다. 그 중 소래와 남동, 군자에 각각 549정보, 300정보, 603정보의 염전이 생겨났다. 지금의 시흥 정왕동 일대에 1924년에 축조된 군자 염전은 1935년 소래 염전으로 확대되었다.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바뀐 소래 염전 주변에 몇 채의 목재창고들은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염전 결정지에서 생긴 천일염을 보관하던 창고다. 염전 주변에 소금창고 외에도 염부들이 머무는 주거공간,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와 부속 건물들이 있었지만 남은 것은 창고뿐이다. 소금창고는 독특하게도 벽면이 경사를 이룬다. 자루에 넣지 않고 소금산처럼 쌓아두고서 간수를 빼기 때문에 소금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릴 때 그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외부는 콜타르로 방수처리해서 시커멓게 보인다. 지면은 벽체가 닿는 부분은 갯벌흙을 쌓아 목재 벽이 젖는 것을 막는다. 개흙은 물이 닿으면 염분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진다고 한다.  








시흥과 소래에 펼쳐져있던 소래 염전은 1935년 당시의 소금창고를 비롯해서 40여 채의 소금창고가 역사 문화적 흔적을 온몸에 지닌 채 서있었지만 2008년 문화재 등록을 앞두고 관리처에서 모두 철거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시흥 갯골생태공원과 소래습지생태 공원화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시민들의 항의와 촉구로 소유자는 훼손된 창고 20채를 새로 복원했다. 등록문화재 예고 당시의 목재들을 대부분 이용해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한번 훼손된 건물은 문화재로 보호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엄마 없는 하늘아래’에서 발로 수차를 돌리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아버지를 보며 눈물 쏟았던 세대라면 소래 염전을 방문해야한다.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간이역에서 삶의 속도를 생각하다 






기차에 올라야 진짜 여행이다. 어디든 자동차를 몰고 갈 수 있고 비행기로 국경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여행의 흥분과 낭만을 떠올린다면 기차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리라. 매끄럽게 미끄러지듯 달리는 고속열차보다는 쇳바퀴에서 철컹철컹 울리는 소리가 객실까지도 들리고 덩달아 차체가 덜컹거리기도 하는 덜 빠른 기차여야 한다. 뭉게구름이 가벼운 속도로 따라붙고 차창 풍경도 부드럽게 흘러갈 정도로 달리는 기차. 목적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풍경을 감상하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일상을 벗어난 일탈감 속에서 공상에 잠기는 모든 것이 기차여행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옆이나 앞자리의 승객들이 궁금해서 힐끗거리기도 한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 거기요! 거기도 참 좋죠!” 


이런 대화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차여행은 그 모든 것이다. 

기차를 타고 국경선을 지나 시베리아의 넓은 대륙과 유럽의 평원을 넘어 대륙의 서쪽 끝 바다에 이르는 꿈을 가진 자로서 철길과 역사와 기찻길 주변의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은근히, 그러나 확실히 변화한 것이 철도다. 철도는 속도전을 방불케하듯 나날이 빨라졌고, 역사(驛舍)도 박공지붕의 벽돌건물에서 장식 없는 밋밋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거쳐 유리커튼월과 알루미늄 패널 박스 등 그 형태를 바꾸었다. 이 속도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을 견인해온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속도전에서 탈락한 선로와 역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요즘도 어느 시절처럼 기차여행이 낭만과 일탈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진짜 복원해야 하는 것은 옛 건물과 옛 시절이 가진 아날로그적 감성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속도감이라고 생각된다. 숨 막힌다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는 속도, 더 빨라지지 않아도 되는 속도. 달려야 마땅한 철로 위에서 더 느린 삶의 속도를 떠올려본다. 








낡고 오래된 

간이역을 찾아서 


간이역이 주는 반가움이 그랬다.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렸기에 살아남은 몇 개의 간이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중앙선 팔당역과 구둔역, 문화재는 아니지만 관광지의 시작점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능내역, 모두가 외면한 채 바스라지고 있는 중앙선 매곡역과 수인선 송도역, 문화재는 아니지만 60년 넘는 역사 동안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경원선 연천역을 손꼽을 수 있다. 수원역과 연천역은 증기기관차에 급수하기 위해 세워진 급수탑이 남아있고, 몇 개의 터널, 폐선로와 쓰이거나 쓰이지 않는 교량 등 철도시설물들도 있다. 전국 곳곳에서 서울로 향했던 수많은 철도들이 경기 지역을 통과했다. 경기지역은 철도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 철도는 이제 복선전철이 되면서 선로를 확장하고 역사를 더 크고 편리하게 새로 지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서울과 더 빨리 연결된다. 스쳐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다니, 불필요한 감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 경춘선 태릉역인 화랑대역이 문화재가 되고, 강원도의 경춘선 역인 강촌역, 경강역, 김유정역이 폐역이나마 남아있는데, 대성리역이나 가평역 등 경기도권의 역사들은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은 과거를 침해당한 것 같은 묘한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옛 건물을 남겨두자’고 주장하는 것은 문학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질주하는 사회에 약간의 틈과 단절을 주는 것, 그 틈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건물 앞에 걸음을 멈추고 뜸들이며 기다리며,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차중인 역에 내려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와도 될 만큼 연착이 잦았던 기차와, 그 기차가 언제쯤 도착할지 역장이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품어주는 낡고 좁은 역사의 풍경을 떠올리며 낡은 폐역으로, 소박한 간이역으로 가보려 한다. 느린 속도만큼 기다림이 익숙했던 시절로. 

이런 풍경은 실제의 경험이라기보다 집단 기억의 한 가지다. 모든 세대의 DNA에 들어있는 구전의 기억들이다. 간이역과 철길은 기다림과 떠남의 공간이며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공간, 잃어버린 나를 찾는 공간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기차역으로 그 시절을 만나러 간다. 












추억이 되어버린 

경춘선 간이역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경춘선의 역사들이었다. 경춘선이라는 이름에서 새파란 청춘의 물빛이 스며든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열차라서 두 도시의 이름을 땄을 뿐이지만, 공교롭게도 봄 춘(春)이 쓰였으니 우연은 운명을 만든 셈이다. 2010년 복선전철이 개통되기 전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싣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대성리며, 가평이며, 강촌 혹은 춘천은 그 젊음을 수용하느라 몸살이 났다. ‘춘천 가는 기차’에서 내려 작은 역을 통과하면 일탈로 가는 무장해제의 수순을 밟는 것과도 같았다.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냄새가 다르다는 걸 감지한다. 역문을 밀고 나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역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기 전, 작은 역사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짐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하루건 이틀이건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채 다시 역사로 돌아온 젊음을 다독거리며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곳도 이 작은 역이다. 벽돌을 쌓거나 콘크리트로 빚은 길쭉한 입방체 공간은 박공지붕을 얹은 게이트 형 통로를 두었고, 천장은 목구조 트러스로 잔뜩 힘을 주었다. 작은 역사들은 모두 닮았다. 박공지붕을 얹은 게이트 형의 구조물을 통과해야 역사를 빠져나가 도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 과거의 역은 도시의 관문이었다. 

경춘선의 역사를 살펴보자. 1915년 개통된 경춘국도는 자연 재해가 많아 도로 상황이 순조롭지 못했으므로, 1920년부터 도청소재지인 춘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의 필요성이 계속 대두되었다. 오랜 협의 끝에 1936년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철도를 추진했고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1939년 철도선이 완공되었다. 

당시엔 산업철도가 주로 건설되었지만 경춘선은 여객 수송을 우선했던 열차였다. 성동(제기동)에서부터 춘천까지 총 93.7킬로미터를 운행했으며 그 사이 보통정거장이 성동, 퇴계원, 금곡리, 마석, 대성, 청평, 가평 등 12곳이고, 정류소가 태릉, 평내, 중색 등 10곳이었다. 태릉역은 지금의 화랑대 폐역이며 역사는 등록문화재 제300호다. 특히 경춘철도주식회사는 성동과 동대문 일대의 지하철도, 동대문 부근의 백화점 설립, 동쪽 교외지가 발달하면서 주택 사업을 벌이는 등 철도의 영향력을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했던 이력이 있다. 광복 후 국영화되어 일상에 깊이 들어왔고 경춘선의 전설을 다양하게 뿌려놓았다. 


2010년에 기존 선로를 확장 변경하면서 복선전철화되었다. 이때 옛 역사는 새로운 역사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역 중 남아있는 역사는 고작 5개에 불과한데 서울의 화랑대역과 춘천의 4개 역이므로, 경기도권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새 역사의 디자인과 옛 보통역사를 비교해보면 철도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철도가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고 도시의 관문으로 역사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게이트처럼 생긴 역사를 통과해서 도시로 들어왔다면, 지금의 역사는 목적지로 더 빠르게 수송하는 기능적 개념이 강해져 그에 부합하는 교차로의 형태를 띈다. 온갖 편리한 장치들이 집약된 사각박스가 철로를 감싸고 있는 형태다. 

우리의 도시는 서울과 목적지 사이를 빠른 속도로 오가는 열차의 통과지점이 되었다. 역사로 도시의 특정한 이미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마저도 예전보다 띄엄띄엄 존재한다. 열차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무는 도시는 수많은 역 중 하나, 우리는 수많은 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여행자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변화는 속도에 있었다. 철도의 숙명이기도 하다.  











중앙선 구둔역과 능내역, 

우리가 잊어버린 역에 가다  


경기도는 우리나라 철도의 중요한 선들이 교차되는 지역이다.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1899)으로부터 경부선(1905), 경의선(1906), 경원선(1914), 호남선(1914)이 개통되자 전국을 X자로 가로지르며 중국과 만주까지 이동할 수 있는 교두보가 확실히 확보되었다. 곧이어 산업철도의 역사가 시작된다. 석탄, 철강과 미곡 등 자원 수탈에 동원된 철도선이다. 특히 청량리에서 남양주, 가평을 지나 원주, 문경, 경주에 이르는 중앙선은 1930년대의 핵심 철도사업 중 하나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네 개 지역을 통과하면서 생산되는 다양한 자원들을 실어 나를 목적이었다. 모든 철도와 마찬가지로 광복 후 국영화되면서 중앙선은 여객 운송 위주로 운명이 달라졌다. 중부 내륙을 관통하는 중앙선은 수려한 산세를 감상할 수 있어 관광열차도 자주 운영된다. 

경기권의 중앙선은 가평군 용문역까지 복선전철화되면서 기존의 역사들이 큰 변화를 겪었다. 지정 문화재인 역은 팔당역, 구둔역 두 개이며,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폐역으로 남아있는 간이역은 능내역, 매곡역이다. 팔당역은 신 역사 내부에 마치 조형물처럼 존재하지만 구둔역은 일신역이 새로 생기면서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 역이 되었다. 선로마저 끊어져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역사 주변으로 짧은 철로가 마치 장식처럼 남아있다. 능내역의 운명은 또 달랐다. 선로를 직선으로 하면서 강변에 자리잡은 능내역이 중앙선에서 제외되자 폐역이 되었지만 북한강 주변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카페촌도 들어섰다. 역사 내부는 능내역의 과거를 보여주는 사진첩이 장식되어 있다. 기차역마다 붙어있던 노선표와 간결한 나무벤치도 그대로다.  


구둔역은 공사중이다. 단정한 건물에 얹힌 박공지붕이 기분 좋게 관람객을 맞는다. 커다란 향나무와 은행나무가 철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동, 부산과 같은 먼 곳의 지명이 무뚝뚝하게 붙어있는 안내판이 세월에 쓸린 자국을 가득 안고 있다. 잘린 철로나마 뜨겁던 시절을 느끼게 한다. 역무실과 역장실, 숙직실 부분을 한창 보수하고 있지만 어떻게 변화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미 역 주변으로 이질적인 구조물들이 관광객을 끌기 위한 장치처럼 들어섰다. 외딴 곳에 조용히 남아있는 이 작은 문화재 건물에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며 치장하고 덧붙이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역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문화재로 지정된 급수탑과 열차 

경기 지역 철도시설물 중 특별한 하나는 급수탑이다. 경원선 연천역은 두 개의 급수탑이 위풍당당한 모양새를 견지하고 있다. 높이 23미터의 원통형 급수탑(등록문화재 제45호)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급수탑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드는 원통형 위에 지금이 넓은 원통이 올려져 버섯모양이다. 윗부분을 철 구조물로 막아서 물을 저장하고 두 개의 수도관을 연결되어 있다. 수도관 하나는 물을 끌어올리는 용도, 다른 하나는 기관차로 물을 담는 용도였다. 대부분의 급수탑은 철물 시설이 남아있지 않다. 급수탑 근처에 물 저장소가 있다.   연천역에는 상자형의 건물처럼 생긴 급수시설도 있다. 콘크리트로 단단히 만든 외관에 줄눈을 넣어 장식했다. 한국전쟁 시절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있어 근현대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재다.   








그 외에도 의왕 철도박물관에 보관된 열차문화재도 눈여겨 볼만하다. 일제강점기 철로를 누볐던 미카3 증기기관차와 파시형 증기기관차, 그리고 협궤형 증기기관차가 새카만 몸체를 자랑하며 서있다. 총독부 철도국에서 제작한 열차지만 이후 대통령 전용열차가 되어 국빈을 모신 역사를 간직한 ‘대통령 전용 열차’(등록문화재 제 419호)와 ‘유엔군 사령관 전용 객차’(등록문화재 제420호)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열차가 선로를 달릴 때의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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