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이 사는 곳, 

공소로 떠나다








<운월리공소>







<비봉공소>



<여사울공소>







<신리성지>








홍성에 사는 현옥 선생님과 공소여행을 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현옥 선생님은 주말을 공소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에 할애하고 있다. 순례자처럼 흙냄새도 맡고 야생화도 보며 공소까지 걷는다. 사람의 걸음으로 공소와 공소를 연결하는 건 무척 아름다운 일이다. 이번 여행은 여러 공소를 방문하려다보니 아쉽게도 자동차다. 그래도 공소 가는 길엔 소박한 시골길이 우릴 반겼다. 사람 사는 오종종한 풍경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공소는 사제(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신도들끼리 모여 성찬예절을 올리는 작은 천주교회다. 마을마다 자생적으로 생겨나 운영되다가 신도들이 많아지면 본당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공소 내부는 제단과 회중석이 있는 강당과 부속실로 구성된다. 십자가와 종탑은 있지만 성체를 봉헌하는 감실은 없다. 교회처럼 크고 버젓한 공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고 소박하다. 


현옥 선생님은 충청지역을 천주교가 전래되고 교세가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의 처형지와 신부들의 순교지 등 천주교 성지도 많으며, 예부터 형성된 신앙공동체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 여행엔 한옥으로 지은 양촌 공소, 시골 살림집을 개조한 비봉공소, 작은 교회를 닮은 운월리 공소와 여사울 공소를 만났다. 그 사이에 갈매못 성지와 신리 성지도 돌아보았다. 


농가가 늘어선 마을의 높은 데 자리 잡은 운월리공소로 가는 길엔 채송화밭과 꽃대가 쑥 자란 보랏빛 꽃밭이 우리를 반겼다. 빨간 십자가를 인 높은 첨탑 대신, 나뭇가지를 두 개 겹친 소박한 십자가가 조촐하게 걸린 공소는 작은 마을회관처럼 보였다. 회중석과 제단, 그리고 성화와 성모상을 보게 되니 이곳이 교회가 맞구나 싶었다. 어스름 속에 사물들이 눈에 익자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동안 보아온 교회의 꾸밈새와는 많이 달랐다. 


제단은 오래된 장식장이 대신하고 있었고 팔걸이의자에 핑크색 쿠션이 놓여있었다. 화가가 그린 정밀한 성화가 아니라 빛바랜 낡은 모사본 성화가, 묵직한 조각상이 아니라 날아갈 듯 가벼운 재질의 성모상이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신도들이 사용하던 것들을 한 가지씩 가져다놓은 것 같았다. 현옥 선생님은 회중석 의자들조차도 근처 성당에서 쓰고 남은 것들을 가져와서 쓰는 게 공소의 운명이라며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이 참 좋았다. 이 따뜻한 경건함이란! 삶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에서 풍기는 경건함이었다. 어릴 적 살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창문틀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드는 빛은 프랑수아 밀레의 ‘저녁기도’를 떠오르게 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기도하는 부부의 등을 쓰다듬어주던 그 빛줄기 같았다. 


역사성을 가진 공소들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다. 진안 어은공소, 신성공소, 상홍리공소 등연대가 높고 독특한 양식의 한옥공소들이 이에 해당한다. 한옥 공소인 양촌 공소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보수복원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현옥 선생님은 아담하고 친근했던 느낌이 사라지고 완전히 새 건물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점은 근대건축물의 보수복원 과정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수많은 공소들이 마을 속에 조용히 남아 있다가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지금껏 남아있는 공소들은 주로 농어촌 산간 지역 등지에 몰려있다.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이다 보니 공소를 찾는 사람도 점점 줄어든다.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공소로 바뀐 곳도 있다. 그러다 매각되어 다른 용도로 쓰기도 하지만, 버려져 폐가가 되기도 한다. 마을의 중심에서 함께 호흡해온 중요한 장소라 하더라도 공동체가 사라지면 유지될 수가 없다. 사라지는 것도 건물의 운명일까?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채 먼지로 되돌아가는 것.  


여사울 공소는 새로 조성된 여사울 성지에 모든 역할을 넘겨주고 문을 닫은 지 한참이었다. 1958년에 지어진 여사울 공소는 문화재가 되기엔 건축적 가치가 충분치 않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우리의 정신에 대해 말하는 곳이었다. 먼지 쌓인 창문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니 한 시절이 떠올랐다. 하얀 미사포를 쓰고 기도문을 읊는 여인들이 언뜻 보이는 것 같다. 그 시절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시간은 반듯한 건물을 점점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어정거리며 건물의 곁을 지켰다. 해가 넘어가고도 새파란 하늘이 한참 떠있었다. 첨탑 아래 십자가는 여전히 흰색이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고속열차와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여섯 시간을 달린 후에야 소록도가 바라보이는 녹동항에 이르렀다. 거금대교가 놓여서 배를 탈 필요는 없지만 소록도에는 개방된 지역이 많지 않다.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은 외지인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록도를 출입할 수 있는 프리패스를 가진 사람과 동행하려고 오랫동안 기다렸다. 소록도에는 1930년대 지어진 건축물들이 상당히 많고 열 네 채의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건축물의 현황도 알고 싶었지만 그 섬에 가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화재가 되지 못한 채 버려진 건물들을 보고싶어서였다. 그러려면 마을 가까이로 들어가야 한다. 







문화재 명칭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이름은 소록도갱생원이지만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국립소록도병원이 현재의 이름이다. 작은 사슴이라는 뜻의 소록도지만 섬의 모양을 보면 중앙이 옴폭하게 들어가고 양쪽으로 날개가 팔랑거리는 나비 같다. 그 중앙에 국립소록도병원과 주요시설이 있다. 유일하게 개방된 곳이라 박물관과 기념관도 있다. 동쪽은 병원 관계자들이 살고 일하던 시설이 있고, 서쪽은 환우들의 마을과 병사가 있다. 한센인이라 부르지만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없다. 병은 완치되었지만 후유증이 심해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우들이 가족들과 산다.  

문화재로 등록된 검시실과 감금실부터 둘러보았다. 이 과거의 산물은 소록도가 어떤 곳인지 정확히 보여준다.  죽은 환자들을 해부했다는 수술대가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감금실은 소란을 피우거나 일본인 원장의 뜻을 어긴 사람들, 육지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 격리되었던 곳이며 여기서 나온 사람은 벌로서 검시실에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았다. 근대건축물의 주된 외피인 붉은 벽돌이 진짜 핏빛으로 보였다. 감금실 뒤로 보이는 마을 풍경은 고요하기만 하다. 학교, 운동장, 살림집이 촘촘한데 빈 집처럼 조용하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전동휠체어 소리만 이이잉 울려퍼질 뿐이었다. 곧이어 아름다운 공원이 등장했다. 황금편백나무, 솔송나무 등 희귀한 나무들이 자유롭게 멋을 부리고 있다. 1930년대부터 존재했던 중앙공원은 지금에 이르러 더욱 푸르러졌다. 대만과 일본의 식물들까지 옮겨 심어 독특한 식생을 자랑한다고 한다. 










마을로 향했다. 섬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은 푸르른 숲으로 폭 싸여있었다. 숲에서 진짜 사슴이 나올 때도 있다고 한다. 서남쪽 바다를 향해 자리 잡은 서생리는 풍경이 좋았다. 한센인을 치유하던 소록도 최초의 병원인 자혜의원(1916년 개원)도 서생리에 있다. 지금은 버려진 마을이라 흩어진 폐가들이 부쩍 자라난 풀과 나무에 뒤섞여있다. 

병사지역은 2017년 여름 한 원로건축가 보수공사를 했다. 오년 전 소록도를 방문한 조성룡 선생은 이 섬의 말 못할 아픔을 직면하고서 건축가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버려진 건물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고 이 섬을 철저히 기록하는 일, 그리고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섬의 역사가 사리지지 않도록 다른 방식의 계획을 제안하는 일이었다. 건물은 기억이라서, 건물이 사라지면 이 마을의 아픔과 슬픔의 기억조차도 흐릿해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겨두려고 보수공사를 했다. 그러나 섬의 생명력을 그대로 타고난 식물들이 뭉텅뭉텅 자라나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뒤덮곤 한다. 








과거 병원관리인들이 살았던 섬의 동쪽은 삶의 분위기도 건물의 모양도 완전히 다르다. 1930년대에 지어진 사무실과 강당, 그리고 병원장의 사택은 관공서 건물의 전형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튼튼하게 잘 남아있다. 그러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소록도의 다른 건물과 비슷하다. 이 건물들은 모두 문화재다. 유리로 지어진 온실이 있는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떤 꽃들이 피었을까 상상하는 일이 참 무람없다. 

언덕 높은 곳에 놀랍게도 신사가 있다. 일제 패망 후 신사가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기 소록도에는 남아있다. 참배의 기능은 사라지고 전망대 겸 휴식터로 남아있다. 남동쪽 해안가에 면한 붉은 벽돌의 식량창고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다. 이름이 무색하게 텅 빈 붉은 벽돌의 창고는 수리가 필요한 전동휠체어들을 모아두는 곳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머물렀던 집을 방문했다. 1960년대 소록도에 와서 40년간 담담하게 온정을 베풀던 두 여인의 삶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자물쇠로 잠겨있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두 여인을 다룬 책과 영화에서 이미 이 집의 고요함과 맑음을 경험했다. 

삶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연민은 또 얼마나 깊은 것일까. 어째서 이 섬에 한번 발을 디딘 사람들은 떠나기 어려울까. 마리안느와 마가렛도, 조성룡 선생도, 나와 동행한 사진가도 소록도를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어느새 되돌아와 이 섬을 바라본다. 거기엔 강제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보낸 사람들, 죽음을 넘나들며 고통 받은 사람들, 새파란 바다가 죽음처럼 차가웠던 사람들, 시민으로 태어나 시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시절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봉합하는 거대한 자연이 있다. 이제는 소록도는 치유의 섬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섬을 떠나는데 이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했던 소설가 엔도 슈사쿠 기념관 앞 비석에 적힌 말이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르릅니다.”   








민노아 기념관 




근대건축물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유산에 불과할까? 과연 일본식 주택이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관공서가 전부일까? 근대시기는 유럽 각국의 다채로운 외래 건축이 자유롭게 펼쳐지던 건축의 각축장이었다. 상사나 금융 등 상업건축도 화려하게 등장했고 외교와 무역을 주름잡던 굵직한 인물들이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화려하게 지은 주택이나 별장도 있다. 선교사들이 주도해서 지은 교회(성당)와 사택, 병원과 학교도 빼놓을 수 없다. 선교사들이 행했던 종교, 의료, 교육 활동은 우리 사회의 깊은 뿌리를 형성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기에 건축적 의미 외에도 역사적 사회적 의미도 가진다. 


백년 전 종교적 사명으로 건너온 선교사들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청주, 광주, 순천, 대구는 선교사들이 형성했던 마을이 지금도 도시 속에 완전히 동화된 채로 존재한다. 당시의 풍경을 간직한 건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마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옛 선교사마을은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고즈넉한 길 따라 아름다운 옛 건물을 구경하면서 그 시절을 기웃거리는 일이 진정 ‘근대건축산책’ 아닐까? 





포사이드 기념관



민노아 기념관



청주 선교사마을을 찾아 탑동 일신여고를 산책했던 날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던 주말 오후였다. 학생들이 없는 학교를 거닐면서 보물찾기를 하듯 옛 건물을 찾아보았다. 학교와 강당, 운동장, 뒤뜰 사이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은 기와지붕 건물들이 보이자 설렘이 시작되었다. 붉은 벽돌과 근사한 한옥기와지붕이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축물이었다. 번듯한 이층 벽돌 건물은 청주 최초의 현대식 병원으로 불리는 소민병원이며, 그 가까이에 의사와 간호사 등 병원 관계자들이 휴식하고 머물던 ‘노두의(로위)기념관’이 있다. 일신여중 건물과 강당 사이 언덕에 선교사주택인 ‘포사이드기념관’과 ‘민노아(밀러)기념관’(후에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이 있었다. 학교 바깥에 있는 ‘소열도(솔타우)기념관’과 ‘부례선성경학교’는 개인소유의 건물이므로 자유롭게 관람하기 어렵다. 건물을 모아 보니 마을의 형태가 대략 짐작된다. 언덕 가장 높은 쪽에 민노아 목사의 집(민노아기념관)과 독신 선교사들이 머물던 포사이드기념관이 있고, 서측에 병원과 사택이, 동측에 성경학교가 있는 구조다. 포사이드기념관 앞에는 밀러(민노아) 목사의 묘소와 선교기념비가 있다. 




포사이드 기념관





밀러 목사가 이끄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청주에 정착한 것은 1900년대 초의 일이다. 청주 남문 근처 장터 부근에 교회를 세운 그들은 시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탑동을 거처로 삼아 살고 배우고 나누는 집을 지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1906년에 지어진 포사이드기념관이다. 붉은 벽돌로 단정하게 쌓은 단층 건물에 묵직하면서도 끝이 사뿐한 전통기와지붕을 올려 서로 이질적인 듯 보이지만 한편 교묘하게 어울린다. 

내부는 완전한 서양식이다. 대청마루가 중심에 있는 한옥과 달리 포치가 있는 현관으로 들어서면 중앙홀이나 계단을 따라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단층처럼 보이지만 지하실과 지붕층을 둔 엄연한 2층 건물이다. 온돌 대신 스팀 난방과 벽난로가 설치되고 실내 화장실을 두었다. 뒤에 지어진 건물은 분명한 이층과 삼층 구조를 취하며 서양식 구조가 뚜렷해진다. 한양절충식이라고 불리는 이들 건물은 서양식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한옥을 닮은 외관으로 당시 사람들이 서양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덜고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소민병원


무엇이 그들이 이 먼 곳까지 오게 했을까? 선교사마을을 산책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해본다. 밀러, 로위, 제이슨 퍼디라는 이름 대신, 민노아, 노두의, 부례선과 같은 낯선 이름으로 불리며 민중 속으로 들어섰던 삶, 고난과 행복을 함께 맞이하며 소박한 공동체를 꾸몄던 그들의 삶은 종교를 뛰어넘어 존재의 희망과 고귀함을 느끼게 한다. 파도처럼 흘러다니는 디아스포라의 운명. 일상의 작은 장면조차도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 집이라면, 이 집은 먼 곳의 풍경을 간직한 채로 용기있는 여행을 멈추지 않던 한 인간의 내면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노두의 기념관 

















집을 짓고 도시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넘어서, 건축가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건축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단호한 목소리 아닐까? 한때 우리에게도 ‘말 많은’ 건축가가 있었다. 정부의 주택 정책의 부실함과 인권유린을 분명한 목소리로 비판했던 김중업. 그는 소위 블랙리스트 건축가로 낙인찍혀 10여 년을 해외로 떠돌았다. 그런데, 그의 건축에서는 오히려 희망이라는 감정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건축가는 건축으로 비판하고 건축으로 희망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김중업의 인생 변곡점은 1952년 세계예술가대회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3년을 보내며 유럽 건축을 제대로 흡수하고 돌아온 그는 전후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게 프랑스 문화훈장을 선사한 프랑스대사관 본관과 관저, 서강대 부산대 제주대의 본관, UN묘지 정문과 채플,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던 삼일빌딩, 최근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된 장충동 서산부인과, 예술경매에 등장하여 ‘건축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옛 한국미술관 등 감각적인 풍요로움과 힘찬 역동성이 느껴지는 건축물이 한국건축사에 등장했다. 그리고, 김중업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자신을 위한 박물관으로 헌정된 유일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김중업 건축박물관은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있다. 안양을 대표해온 유유산업이 1959년부터 본관과 연구소, 공장과 창고 등을 신축하고 증축하면서 사세를 확장해온 바로 그 자리다. 김중업이 설계한 네 동의 건축물(본관, 연구동, 창고, 경비실)이 남아있는데, 대지를 거스르지 않고 앉혀진 건물들은 자연이라는 컨텍스트를 강조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조각상과 구조적인 장식이 어울린 본관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전시와 휴게공간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창이 많아 부드러운 빛이 넘실거리는 2층짜리 연구동은 김중업의 건축관을 보여주는 건축박물관이 되었다. 패기 넘치는 야심찬 디자인을 겨우 삼십대의 건축가가 해냈다는 것이야말로 당시가 젊고 역동적인 건축의 시대였음을 실감케 한다.  















건축가가 생전에 꼼꼼히 기록한 노트와 앨범, 건축 도면을 디지털 화면으로 꼼꼼히 살필 수 있는 아카이브와 프랑스에서 제작된 ‘건축가 김중업(1970)’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영상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 되려고 건축을 포기했다가, 시를 버리고 건축으로 돌아왔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빛과 자연이 콘크리트 공간에 아름답게 녹아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그의 건축에 ‘시’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 지 알 것 같다. 김중업의 건축은 도약과 비상의 언어가 읽힌다. 완곡하면서도 절실한 감정이다. 대지의 조건과 인간의 신념이 건축이라는 언어로 번역될 때 필요한 것은 건축가가 품고 있는 세계, 꿈이다. 









펜으로 그린 도면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서 건축가의 의지를 더듬어본다. 도면에서 치열한 삶이 읽히는 건 왜일까? 삶을 혁명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하며 영혼을 고양시키는 비상. 그것이 김중업이 꿈꿨던 건축이기 때문이다. 김중업은 ‘건축가란 역사에 삶을 건 사람이며, 죽음 뒤에 닥칠 책임이 더욱 무거운 것’이라고 했다. 올곧은 선을 긋게 하는 건 곧 건축가라는 자존심이다. 김중업이 견지했던 짱짱한 자존심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건축이 희망이 되는 일은 지금도 유효하다.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춘 단어들 - ‘시’, ‘꿈’, ‘희망’과 같은 감정의 단어들을 건축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는 없을까? 



이름과 기억 : 순천 선교사 마을 

1913년 고라복 선교사는 순천 동산 밖 언덕 위에 지어진 학교 앞에서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립 은성학교로 인가를 받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배유지, 오기원 두 선교사의 본격적인 활동으로 미 장로회 해외 선교부의 사역 활동이 순천까지 넓어진 지 10년, 교세는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됐다. 미국 본토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의료와 건축을 담당할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순천에 당도했다. 변요한, 백미다, 기안라, 한삼엘, 안채륜, 구례인 등, 많은 선교사들이 순천에서 함께 일했다.
고라복 선교사는 뿌듯함을 느꼈다. 서로득 선교사가 합세하여 일한 다음부터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들이 세워지며 완벽한 선교사마을이 지어지지 않았던가! 신앙인으로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의 아름다움과 기쁨도 느꼈다. 지금 한창 계획 중인 안력산 병원도 곧 문을 열 계획이었다. 서양의학으로 준비된 병원은 순천 사람들을 선교사 마을로 더욱 가까이 데려올 것이었다. 고라복은 두 손을 맞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간 얼굴의 학생들을 웃으며 맞았다.






로버트 코잇 선교사의 집. 


고라복은 ‘로버트 코잇’, 변요한은 ‘존 프레스턴’, 배유지는 ‘유진 벨’, 오기원은 ‘클레멘트 오웬’, 백미다는 ‘비거’, 한삼엘은 ‘리딩햄’, 서로득은 ‘마틴 스와인하트’, 기안나는 ‘안나 그리이’의 한국식 이름이다. 안력산의 본명은 ‘알렉산더’, 구례인은 ‘크레인’이다. 서양인들은 어려운 외국 이름이 아니라 한자로 된 이름을 써서 한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고라복과 변요한이 그들 이름이 되었을 때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순천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 마을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경찰과 자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40년 선교사들은 마을을 폐쇄하고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 땅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어느 순간에는 한국인들이 부르던 세 글자의 이름이 그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흔적을 남긴다. 땅과 길과 건물에 붙여진 이름이 길고 긴 역사가 되는 것처럼, 사람에게 깃든 이름도 지울 수 없는 그 자신의 역사이므로. 이름 속에 담긴 긴 인연, 핏빛처럼 진한 이야기들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백년 전 생겨난 선교사 마을


전라남도의 끝자락 순천에 선교사촌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전략적 배경이 있었다. 광주와 목포에 위치한 미 장로회 선교부는 벌교와 순천 중 한 곳을 전라 내륙을 위한 정식 선교부로 삼으려 했다. 그 중 순천이 선택되었다. 교통의 요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크며, 여수로 선교지역을 확장하기에도 좋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선교사들은 순천읍성 북문 밖의 구릉지에 터를 잡았다. 순천 시내를 조망할 수 있었고 시장과도 가까웠다. 게다가 높은 언덕에 서양식 2층 건물을 짓는다면 순천의 조선인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겠는가?
난봉산 기슭에 1910년대부터 1920년대 말까지 선교사들을 위한 주택 여섯 채, 병원과 간호사시설, 남녀 기숙사를 포함한 아홉 채의 학교 시설, 교회 등이 세워졌다. 변요한과 서로득, 두 선교사가 번갈아 마을 만들기를 책임졌다. 1920년대 말에 이르면 경건하지만 활발한 분위기의 마을이 온전하게 완성되었다. 

조지와츠 기념관


마을의 건설 과정은 고라복 선교사가 미국 본부에 띄운 편지에 자세히 담겨있다. “일꾼들이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산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석공들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돌을 다듬느라 분주합니다. 다른 편에서는 매우 낮은 임금을 받은 한국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무거운 짐을 옮깁니다. 다른 사람들은 본부의 기초를 닦거나 길을 고르게 하며 많은 수는 타일을 만들어냅니다.”
대부분의 건축 재료들은 순천 주변에서 조달하고 벽돌과 타일은 가마를 설치해서 직접 구웠다. 석재는 순천 읍성이 해체될 때 나온 돌을 가공해서 쓰기도 했다. 회색 벽돌과 화강석을 주로 쓴 까닭에 건물은 색채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다. 그 외, 시멘트와 미국산 목재,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축재와 페인트는 미국에서 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왔다.
한옥의 지붕선을 닮은 건물도 있고, 고즈넉한 숲과 정원이 감싸고 있어 완벽하게 감추어진 굴뚝 나온 이층집도 있었다. 언덕 가장 위쪽에 선교사 주택이, 그 아래에 남학교와 여학교가 엄격히 나뉘어 세워졌고 병원은 순천 사람 누구나 올 수 있도록 독립된 위치에 자리 잡았다. 교회와 성경학교는 시민들과 자주 만나도록 마을의 초입에 세워졌다. 이를 두고 후대의 건축학자들은 마스터플랜을 갖추고 선교사 마을을 형성한 최초의 사례이며, 일본을 통해서 세워진 변형된 서양식 건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발하게 지어지던 서양식 건축이 곧바로 유입된 현장이라고 설명한다. 


이름 따라 걷는 아름다운 산책


수십 채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고작 여섯 채만이 남아있지만, 그 경건함과 고즈넉함은 여전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선교사를 양성하던 성경학교로 세워진 조지 와츠 기념관이 초입에 있고, 매산학교는 매산중학교로, 여학교는 매산여고로 역사를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재활직업보도소가 있는 언덕까지 선교사 마을은 이어진다.
마을에서는 옛 선교사들의 이름이 여전히 불린다. 주요 시설마다 백 년 전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한 채씩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순천의료원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따라가면 보물찾기 하듯 건물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산책은 조지와츠 기념관에서 시작된다. 단정한 2층 건물은 선교 기념관이자 조지 와츠 선교사를 추억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건물은 1925년에 성경학교로 지어졌는데, 거쳐간 학생이 천 백여 명에 이른다. 진료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기독진료소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현관이 중앙에 있어 대칭형 건물에 뾰족한 박공지붕이 깊게 내려왔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단정하다.
조지 와츠는 누굴까? 1930년에 지어진 매산관(지금의 매산중학교)에 교사가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 바로 조지 와츠 기념 남학교였다. 초창기 마을이 생겨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언급되며 칭송받는 이 사람. 그는 순천에 선교사들이 파견될 무렵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이었다. 헌금을 희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데 도움을 준 덕택에 그의 이름이 타국 만리 먼 곳의 작은 도시에 백년이 지나도록 불리고 있다.
매산관은 1930년에 세워진 것이나 학교의 역사는 더 깊이 올라간다. 학교를 세운 것은 1910년, 2층 회색 벽돌 건물을 지어 은성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은 것이 1913년이었다. 이곳은 성경 교육을 제외하고 기존의 보통학교로 교과를 바꾸는 문제로 인해 폐교에 이르렀다가 1921년 다시 사립 매산학교로 복교한 역사가 있다. 이후엔 신사참배로 인한 마찰로 다시 자진 폐교하는 사태로 이어졌지만, 학교 건물만큼은 굳건히 남아서 매산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매산중학교 매산관



작지만 단단한 건물이 여간 정답지가 않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가 생각났다. 마루로 된 바닥이 잔잔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건물 말이다. 이런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정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단단한 나무처럼 굳게 뿌리내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등나무 덩굴 아래 앉아 나지막한 교사를 바라보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방학이라 학교는 텅 비었지만 정갈한 정원과 운동장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니 교사 뒤쪽 증축된 곳에 독서 동아리임을 알리는 문패가 붙어있다. 소년들이 읽을 책들은 무엇일까, 궁금해서 문을 두드려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매산관 바로 뒤, 매산여고도 한여름의 오수를 즐기는 듯 나른한 매미소리에 잠겨있다. 붉은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학교다운 맛이 가득했다. 여학교 초입에 프레스턴 선교사 주택이 있다. 역시 흑회색 벽돌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1층은 교육실로 2층은 학생들의 미술실로 사용된다. 변요한이라 불리던 프레스턴이 살던 시절에는 2층 서편에 발코니가 쑥 나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발코니 선룸이 광주의 선교사 주택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매산여고 프린스턴 기념관



마지막 건물은 고라복 선교사의 집이다. 애양원 부지 내에 있는데, 철문이 굳게 닫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나중에 살펴보니 애양원은 한센병 환우를 위한 시설이었다. 고라복의 집은 가장 높은 데 있었다. 가장 전망이 좋았을 그 집에서 고라복은 두 아이를 병으로 잃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겪었던 고통도, 선교사로서의 아픔과 희망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두려워하지 않고 걷던 모험가로서의 희열도 ‘고라복’이라는 이름에 담겨있다. 이름 뒤에 남은 기억. 그는 떠났지만 그 집은 백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고라복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질문하는 장소, 

학교에 가다 





변화무쌍한 도시에 살면서 옛 건물을 이야기한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들을 그대로 지속시키자’라고 한다면, 이 오래된 건축물에 좀 더 살가운 애정을 기울일 수 있을까? 인간은 과거와 절연한 채 살아갈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는 연속선상에 있고 그 어떤 부분도 단절되어서는 온전하지 못하다. 경험으로 축적해온 지난 시간들이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고독해진다. 기억을 증명하는 것은 장소와 사물, 사람이다.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갖고 있으며 그러므로 외롭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들이다. 안타깝게도 살아오면서 우리가 자주 버렸던 것들이기도 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면서 잊어버렸던 것들.





인천 창영 초등학교







이번에는 학교를 다녀왔다.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짧거나 길게 몸담았던 장소다. 특히,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의 기억은 무척 따스하고 달콤한 빛을 띈다. 흙모래가 깔린 넓고 평평한 운동장, 낮은 책상과 걸상(의자가 아니라 걸상이라 했다.), 천리 먼길처럼 느껴졌던 등하굣길,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별별 것들이 다 있던 문구점과 구멍가게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던 시절이다. 

두 번 전학을 한 나는 모두 세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건물은 모두 비슷했다. 첫 번째는 ‘ㅡ’자형, 두 번째는 ‘ㄱ’자형 세 번째는 ‘ㄷ’자형이었지만, 이층짜리 박스형 건물에 격자형 창문이 있고 운동장 주변으로 국기게양대와 조례대, 스탠드가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조례가 열려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가 제창, 교장선생님 말씀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그땐 초등학교가 아니라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었다. 

지난여름, 개교 백년을 바라보는 내 모교를 찾았다가 적잖이 놀라고 실망한 기억이 있다. 하필 방문했던 그날, 교사를 신축하느라 대형 공사차량들이 바쁘게 오가며 먼지를 풍겼다. 아무리 둘러봐도 기억 속의 학교는 흔적도 없었다. 학생들은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학교 주변은 오래전 기억대로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데, 정작 학교는 더 새롭고 넓고 크게 변모하고 있었다. 과거가 도려내진 듯한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곳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백년을 가뿐하게 

뛰어넘은 학교들



경기도의 수많은 학교들 중 오래된 교사를 유지하는 곳은 어디일까? 인천 배다리에는 오래된 학교가 두 군데나 있다. 1892년에 설립된 영화초등학교(당시 영화학교)와 1907년에 개교한 창영초등학교(인천공립보통학교)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시행된 근대적 제도에 따라 정부는 전국적으로 공립초등학교를 열었고, 민간 사업가의 민족학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들도 곳곳에서 문을 열었다. 영화학교는 인천지역 최초로 생겨난 교육기관이며 미국 여선교사 존스 부인이 여학생 교육을 위해 설립한 곳이다. 최초의 학생은 단 한명이었으나 이후 학생수를 늘렸고, 지금의 장소에 1911년 벽돌조의 교사를 신축하여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고 유치원도 설립했다. 두 개 층은 교사로 쓰고 지붕 밑 3층은 예배실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재건시대를 거치며 교명과 학제가 끊임없이 바뀌었고,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96년이다. 2000년에는 교사를 신축했다. 새 교사 역시 붉은 벽돌의 잔잔한 분위기를 이었다. 옛 교사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옛 인천영화학교




수원 삼일중학교 아담스 기념관




바로 근처에 창영초등학교가 있다. 1924년에 지어진 고풍스런 적벽돌 교사가 눈에 띈다.  ‘ㅡ’자형 이층건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1층은 아치형 창문, 2층은 직사각형 창문으로 모양을 냈고 창문 주위는 화강석으로 장식했다. 지붕에는 도머창이 근사하게 남아있다. 개교 백주년 기념탑이 학교의 역사를 짐작케한다. 이 학교는 인천 지역의 3.1만세운동 발상지로도 유서깊은 곳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제16호)로 지정된 옛 교사는 특별교실과 동아리실, 학교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수업은 새 건물에서 진행된다. 벽돌조 공립보통학교는 1920년대 처음 등장했고 부산과 평양 등지에도 이곳과 닮은 교사가 지어졌다. 10년대 목조와 30년대 콘크리트조 등 시기별로 교사 건축이 달라졌다. 

수원 삼일중학교도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옛 교사를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일중학교는 1902년 개신교 미션스쿨인 삼일학교로 시작, 1923년 새 교사를 지으면서 수원 매향동에 자리잡았다. 미국 아담스교회의 후원으로 지어져 아담스 기념관으로 불리는 이 건물도 아름다운 적벽돌 건축물이다. 수업은 뒤편에 세워진 신교사에서 이루어지며 행정동, 강당동 등 세 채의 건물 모두 아담스 기념관의 분위기를 이어받았다. 1884년부터 1910년까지 기독교계 학교는 768개에 달했다. 종교인을 양성하는 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교양인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 낯설고 아름다운 서양식 건축물이 지금은 사라진 시대를 부르며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대건축이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학교건축



2004년 정리된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보고서’는 학교건축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경기권에서 조사된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43건이며, 그중 28건이 교사, 창고, 강당 등 학교시설로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이들 교사는 증축과 신축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폐교되거나 휴교된 학교도 몇몇 되었다. 그 이유는 재개발이었다. 신도시 이식을 위해 오랫동안 살던 마을을 남김없이 밀어버리는 마당에 오래된 학교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학교는 사회적 변화에 대단히 민감한 장소다. 특히 60~70년대 문교부 표준설계에 따라 지어진 학교 교사들은 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건축물이다. 

베이비붐세대의 초등교육이 시작된 1960년대는 학교의 재건기였다. 의무교육이 시작되고, 시도 교육위원회가 등장했으며 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학교는 각 시도 교육위가 제시하는 표준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보통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2~4층 규모로 중앙현관과 계단실 주변으로 교실이 배치되고 양 끝으로 계단실이 놓였다. 평슬라브로 지붕을 처리한 박스형태가 많았는데, 이는 학생수가 늘어나 증축해야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교실 크기, 각종 시설의 규모, 운동장 등 설비 지침은 1969년 제정된 학교시설 설비기준령이 적용되었다.(수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6년 이후에는 엄격하게 적용되던 표준설계를 폐기하고, 학교마다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한 교사가 등장했다. 





구리 인창초등학교 



성남 왕남초등학교 








보고서에 수록된 학교 중 1960년대 문교부 표준설계도에 따른 전형적인 학교건축물로 소개된 왕남초등학교와 구리시의 유서 깊은 인창초등학교(1921년 개교)를 방문했다. 성남시 고등동의 왕남초등학교는 고등지구가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터에 홀로 남아있었다. 1960년대의 설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교사를 허물고 2010년 병설유치원과 함께 신축교사를 재건축한 상태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마을은 재개발로 사라졌고 쓸쓸하게 남아있는 학교는 주변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내년도 학사 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학교의 오랜 자랑거리였던 은행나무는 신축 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풍성한 잎사귀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지가 잘려나가 있었다. 어린이 인구가 줄어드는 현재, 옛 교사를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학교의 존립마저도 위태로운 것이 지금의 학교상황임을 여실히 느꼈다. 그러나, 7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학교다. 학교의 첫 졸업생인 팔순 어르신이 찾아온 적이 있다는 경비 아저씨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구리 인창초등학교 역시 교사의 변화가 많았다. 인창초등학교는 1921년 사립 망우학교를 편입하여 인창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4년제 4학급의 조촐한 시작이었지만, 구리 지역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동안 성장을 거듭하여 토평, 구리 등 여러 초등학교를 분리 개교시킨 공신이기도 하다. 두 동의 목조 교사가 운동장을 공유하며 ‘ㄱ’자로 이어져 있던 초기 학교의 배치 그대로 3층의 콘크리트 교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 채로 학교의 역사는 이어져왔다. 1970년대에 지어진 교사동은 창호, 벽체, 바닥 등을 지속적으로 보수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교사는 다양한 변화를 거쳤지만, 정원에 세워진 기념비와 조각상은 과거의 어느 시대를 박제한 듯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있다는 세종대왕상과 국민교육헌장비, 어린이헌장이 적힌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 연대가 다른 졸업생들이 그때그때 기증한 조각상과 기념비들이 학교앞 정원을 채웠다. 그 중에는 반공 교육이 강화되었던 시기에 세워졌던 이승복 어린이상도 있었다. 평화의 비둘기와 함께 서있는 이 어린이는 과연 지금 소년소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운동장 한쪽에는 세월호를 기리는 노란 리본 장식이 선명하다. 


운동장에서 뛰고 노는 아이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한 아이가 나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우리의 미래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무수히 겹쳐진 기억의 길

: 수인선 협궤철도와 소래염전 




인천과 안산을 잇는 그 노란색 전철 수인선이 아니다. 1933년에 개통해서 60여 년을 달리다가 1995년 12월 31일 폐선된 ‘그 수인선’이다. 수원에서 송도를 거쳐 인천항까지 열일곱 개의 간이역을 지나는 총 52킬로미터의 철도. 수인선이 특별한 이유는 협궤열차가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철도는 표준계를 선택하고 있어 철도 궤간이 1435mm지만 협궤는 말 그대로 폭이 좁은 762mm로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협궤를 달리는 기차도 작고 좁았다. 사람들은 협궤열차를 ‘소철’ ‘작은철’ ‘꼬마철’이라고 불렀다. 

사라진 지 20년이 지나 다시금 궤도 위로 수인선 전철이 다닌다. 재빠르고 단단한 전철 위로 협궤열차의 추억이 겹쳐진다. 시발역인 수원에서 안산, 시흥을 거쳐 종착역인 인천까지 이어진 철도선은 삶의 선이요 감정의 선이다. 그 빈번한 삶을 결코 놓을 수 없다는 듯 열차는 다시 달린다.   








수인선은 경기 남서부의 여러 도시들을 이어주는 지리적 맥락도 중요하지만 좁고 느린 협궤열차 주변으로 펼쳐지는 독특하고 생경한 문화라는 문학적인 맥락도 빼놓을 수 없다.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는 1980년대의 경기 남부 일대를 보여준다. 당시 안산에 거주하던 소설가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수인선의 풍경이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서해안을 달리는 이 조그만 열차 안의 허무하도록 낙후된 풍경 너머로 흐린 안개처럼 급격한 도시화가 밀려온다. 역사도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에서도 매일같이 푸성귀 보따리를 안고 장터로 가는 주민들이 있었고, 열차는 낚시꾼들이 낚은 생선 비린내와 어시장 건어물의 곰삭은 냄새가 뒤섞였다. 선로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그 아이들이 비켜날 때까지 기다렸다던가 시동이 꺼지기라도 하면 손님들이 내려서 열차를 밀고 끌었다던가, 트럭하고 부딪혔는데 열차만 발라당 넘거갔다던가 하는 농담도 전설처럼 흘러나온다. 그 시절 도시의 풍경이 환상처럼 보였다는 소설가의 말처럼 수인선 협궤열차는 환상과 현실이 겹쳐지는 지점에 있다. 

평일엔 두 개의 열차로도 듬성듬성하던 열차가 주말이면 세 개의 열차를 꽉채우고도 서서 가는 사람들로 붐볐던 것은 소래포구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일엔 산업철도, 주말에는 관광철도인 셈이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에는 붉은 이끼처럼 바다식물이 자라고, 퇴락한 염전은 하늘의 반사판처럼 눈부신 일몰을 그대로 비춰낸다. 이 낭만적인 풍경을 보러 연인들은 기꺼이 수원과 인천에서 수인선이라는 사랑 열차를 탔다. 


경기 남서부의 변화를 

목격한 열차 수인선


수인선은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추진한 사철로 1936년 5월 16일 기공식을 거쳤다. 이 회사는 1920년에 수원-여주를 오가는 수려선을 협궤선로로 개통한 전력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수인선 공사를 끝내고 1937년 8월 6일부터 정식 운행을 시작했다. 협궤철은 1930년대 전후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철로로 활용되었다. 북한 지역의 장진, 강계, 신응, 백무 등 산업철도에 주로 쓰였다. 남한 지역은 호남선에서 연결되는 함평선(궤간 1,067mm), 그리고 수려선이 전부다. 수려선과 수인선은 같은 회사로 같은 궤간의 선로와 열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서로 호환되어 사용될 수 있었다. 수인선이 개통됨으로써 수려선에서 실려온 이천 여주지역의 쌀이 수원을 거쳐 인천항에 쌓일 수 있었다. 





수인선 역시 산업철도로, 자원수탈의 목적이 뚜렷하다. 군자, 소래 등 경기만의 염전에서 채취한 소금은 인천항으로 집결되거나 수원을 거쳐 부산항으로 실려간 다음 반출되었다. 수원은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농산물이 넘쳐나 곡물창고를 설치할 정도로 농산물 집산처였다. 수려선, 수인선이 물류 유통에 숨통을 틔여주는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수원-고색–어천–일리-원곡-군자-소래-남동-송도-인천항의 10개 역과 그 사이 7개의 임시정류장이 생겨났다. 1944년에는 임시정류장인 성두역과 문학역이 사라지고 고잔 역과 연수역이 생겼다. 남인천과 송도 사이가 폐선된 1973년부터 수인선의 종착역은 송도가 되었고, 다시 1992년부터는 소래가 종착역이 되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1시간 40~50분이 걸렸다. 광복 이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오롯이 정부 소유가 된 수인선은 인력 물자 부족과 더불어 원래 수인선의 목적인 자원 수탈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산업철도로서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수인선이 달리는 동안 경기만의 물과 섬이 메워지고 염전이 시가지가 되었으며 촌락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수인선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바뀌어가는 이 땅의 개발 역사를 고스란히 목격했다.


다시 수인선, 

기억을 연결하다


재개통한 수인선 전철은 인천역에서 출발한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며 옛 수인선 노선을 흝으며 안산 시내로 쑤욱 들어온 안산선 전철과 겹쳐진다.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에 그어진 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삶이 연결되고 기억이 이어진다. 






누군가의 얇은 기억처럼 땅 위에도 수인선의 흐릿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수원역 부근의 두 채의 급수탑이 가장 먼저다. 붉은 벽돌로 된 것과 콘크리트로 된 것이 있는데 키만 다를 뿐 구조는 유사하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으로 이 주변으로 물탱크와 배수관들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붉은 벽돌로 된 키낮은 급수탑이 협궤용이 아닐까 추측한다. 급수탑 근처에 수인선 협궤역사가 있었으나 폐선된 후 철거되었다. 수원역을 출발한 협궤 열차는 가속을 위해 완만한 경사지를 크게 돌면서 경부선과 직교하며 수원비행장 옆을 지나 인천으로 달려갔다. 굴곡진 협궤 선로의 흔적은 수원 세류공원에 남아있다. 실제 선로 대신 선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도블럭을 깔고 그 앞에 협궤열차를 이해할 수 있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 남아있는 협궤를 보려면 고잔역 인근에 있는 협궤열차길을 방문하면 된다. 고가전철의 위용이 교차하는 가운데 협궤의 소박한 흔적이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하듯 뻗어있다. 


지금은 인도교가 되어버린 소래철교를 바라보며 아쉬웠던 마음은 종착역인 송도역에서 절정에 이른다. 임시정류장을 포함해서 열일곱 개 역사 중 남아있는 유일한 역사지만 폐역 이후 창고로 사용된 탓에 내외부에 변형이 많다. 송도역 삼거리라는 지명이 알려주듯 당시에는 도시의 랜드마크였다. 당시 사진과 대조해보면 건물의 형태는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금속으로 된 급수탑이 빨갛게 녹슬어간다. 땅 위의 기억은 약간 비켜난 채로 공존하고 있다.



포구와 염전, 

비린내 나는 삶의 적층 


“종점까지.” 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에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을 올라탔다. 삐이!하고 내지르는 기적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수인선에서 바라보는 염전 풍경이 등장한다. 이 대목은 주안염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남편을 따라 부임지로 이사온 통영 새댁 박금이(박경리 선생의 본명)의 진솔한 경험이 틀림없으리라. 






주안염전은 우리나라 천일염 역사의 시작이다. 1907년 주안염전에서 시작되어 광양, 군자 등에 염전이 생겨났다. 거대한 만입으로 내륙 깊숙이 해수가 유입되는 소래 군자 일대는 염전 조성의 적지였다. 소금은 생필품인 동시에 화약제조에 필요한 군수품으로 쓰였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독점적으로 관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에 7,089정보의 염전이 축조되었다. 그 중 소래와 남동, 군자에 각각 549정보, 300정보, 603정보의 염전이 생겨났다. 지금의 시흥 정왕동 일대에 1924년에 축조된 군자 염전은 1935년 소래 염전으로 확대되었다.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바뀐 소래 염전 주변에 몇 채의 목재창고들은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염전 결정지에서 생긴 천일염을 보관하던 창고다. 염전 주변에 소금창고 외에도 염부들이 머무는 주거공간,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와 부속 건물들이 있었지만 남은 것은 창고뿐이다. 소금창고는 독특하게도 벽면이 경사를 이룬다. 자루에 넣지 않고 소금산처럼 쌓아두고서 간수를 빼기 때문에 소금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릴 때 그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외부는 콜타르로 방수처리해서 시커멓게 보인다. 지면은 벽체가 닿는 부분은 갯벌흙을 쌓아 목재 벽이 젖는 것을 막는다. 개흙은 물이 닿으면 염분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진다고 한다.  








시흥과 소래에 펼쳐져있던 소래 염전은 1935년 당시의 소금창고를 비롯해서 40여 채의 소금창고가 역사 문화적 흔적을 온몸에 지닌 채 서있었지만 2008년 문화재 등록을 앞두고 관리처에서 모두 철거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시흥 갯골생태공원과 소래습지생태 공원화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시민들의 항의와 촉구로 소유자는 훼손된 창고 20채를 새로 복원했다. 등록문화재 예고 당시의 목재들을 대부분 이용해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한번 훼손된 건물은 문화재로 보호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엄마 없는 하늘아래’에서 발로 수차를 돌리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아버지를 보며 눈물 쏟았던 세대라면 소래 염전을 방문해야한다.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간이역에서 삶의 속도를 생각하다 






기차에 올라야 진짜 여행이다. 어디든 자동차를 몰고 갈 수 있고 비행기로 국경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여행의 흥분과 낭만을 떠올린다면 기차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리라. 매끄럽게 미끄러지듯 달리는 고속열차보다는 쇳바퀴에서 철컹철컹 울리는 소리가 객실까지도 들리고 덩달아 차체가 덜컹거리기도 하는 덜 빠른 기차여야 한다. 뭉게구름이 가벼운 속도로 따라붙고 차창 풍경도 부드럽게 흘러갈 정도로 달리는 기차. 목적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풍경을 감상하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일상을 벗어난 일탈감 속에서 공상에 잠기는 모든 것이 기차여행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옆이나 앞자리의 승객들이 궁금해서 힐끗거리기도 한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 거기요! 거기도 참 좋죠!” 


이런 대화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차여행은 그 모든 것이다. 

기차를 타고 국경선을 지나 시베리아의 넓은 대륙과 유럽의 평원을 넘어 대륙의 서쪽 끝 바다에 이르는 꿈을 가진 자로서 철길과 역사와 기찻길 주변의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은근히, 그러나 확실히 변화한 것이 철도다. 철도는 속도전을 방불케하듯 나날이 빨라졌고, 역사(驛舍)도 박공지붕의 벽돌건물에서 장식 없는 밋밋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거쳐 유리커튼월과 알루미늄 패널 박스 등 그 형태를 바꾸었다. 이 속도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을 견인해온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속도전에서 탈락한 선로와 역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요즘도 어느 시절처럼 기차여행이 낭만과 일탈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진짜 복원해야 하는 것은 옛 건물과 옛 시절이 가진 아날로그적 감성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속도감이라고 생각된다. 숨 막힌다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는 속도, 더 빨라지지 않아도 되는 속도. 달려야 마땅한 철로 위에서 더 느린 삶의 속도를 떠올려본다. 








낡고 오래된 

간이역을 찾아서 


간이역이 주는 반가움이 그랬다.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렸기에 살아남은 몇 개의 간이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중앙선 팔당역과 구둔역, 문화재는 아니지만 관광지의 시작점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능내역, 모두가 외면한 채 바스라지고 있는 중앙선 매곡역과 수인선 송도역, 문화재는 아니지만 60년 넘는 역사 동안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경원선 연천역을 손꼽을 수 있다. 수원역과 연천역은 증기기관차에 급수하기 위해 세워진 급수탑이 남아있고, 몇 개의 터널, 폐선로와 쓰이거나 쓰이지 않는 교량 등 철도시설물들도 있다. 전국 곳곳에서 서울로 향했던 수많은 철도들이 경기 지역을 통과했다. 경기지역은 철도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 철도는 이제 복선전철이 되면서 선로를 확장하고 역사를 더 크고 편리하게 새로 지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서울과 더 빨리 연결된다. 스쳐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다니, 불필요한 감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 경춘선 태릉역인 화랑대역이 문화재가 되고, 강원도의 경춘선 역인 강촌역, 경강역, 김유정역이 폐역이나마 남아있는데, 대성리역이나 가평역 등 경기도권의 역사들은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은 과거를 침해당한 것 같은 묘한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옛 건물을 남겨두자’고 주장하는 것은 문학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질주하는 사회에 약간의 틈과 단절을 주는 것, 그 틈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건물 앞에 걸음을 멈추고 뜸들이며 기다리며,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차중인 역에 내려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와도 될 만큼 연착이 잦았던 기차와, 그 기차가 언제쯤 도착할지 역장이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품어주는 낡고 좁은 역사의 풍경을 떠올리며 낡은 폐역으로, 소박한 간이역으로 가보려 한다. 느린 속도만큼 기다림이 익숙했던 시절로. 

이런 풍경은 실제의 경험이라기보다 집단 기억의 한 가지다. 모든 세대의 DNA에 들어있는 구전의 기억들이다. 간이역과 철길은 기다림과 떠남의 공간이며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공간, 잃어버린 나를 찾는 공간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기차역으로 그 시절을 만나러 간다. 












추억이 되어버린 

경춘선 간이역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경춘선의 역사들이었다. 경춘선이라는 이름에서 새파란 청춘의 물빛이 스며든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열차라서 두 도시의 이름을 땄을 뿐이지만, 공교롭게도 봄 춘(春)이 쓰였으니 우연은 운명을 만든 셈이다. 2010년 복선전철이 개통되기 전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싣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대성리며, 가평이며, 강촌 혹은 춘천은 그 젊음을 수용하느라 몸살이 났다. ‘춘천 가는 기차’에서 내려 작은 역을 통과하면 일탈로 가는 무장해제의 수순을 밟는 것과도 같았다.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냄새가 다르다는 걸 감지한다. 역문을 밀고 나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역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기 전, 작은 역사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짐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하루건 이틀이건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채 다시 역사로 돌아온 젊음을 다독거리며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곳도 이 작은 역이다. 벽돌을 쌓거나 콘크리트로 빚은 길쭉한 입방체 공간은 박공지붕을 얹은 게이트 형 통로를 두었고, 천장은 목구조 트러스로 잔뜩 힘을 주었다. 작은 역사들은 모두 닮았다. 박공지붕을 얹은 게이트 형의 구조물을 통과해야 역사를 빠져나가 도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 과거의 역은 도시의 관문이었다. 

경춘선의 역사를 살펴보자. 1915년 개통된 경춘국도는 자연 재해가 많아 도로 상황이 순조롭지 못했으므로, 1920년부터 도청소재지인 춘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의 필요성이 계속 대두되었다. 오랜 협의 끝에 1936년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철도를 추진했고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1939년 철도선이 완공되었다. 

당시엔 산업철도가 주로 건설되었지만 경춘선은 여객 수송을 우선했던 열차였다. 성동(제기동)에서부터 춘천까지 총 93.7킬로미터를 운행했으며 그 사이 보통정거장이 성동, 퇴계원, 금곡리, 마석, 대성, 청평, 가평 등 12곳이고, 정류소가 태릉, 평내, 중색 등 10곳이었다. 태릉역은 지금의 화랑대 폐역이며 역사는 등록문화재 제300호다. 특히 경춘철도주식회사는 성동과 동대문 일대의 지하철도, 동대문 부근의 백화점 설립, 동쪽 교외지가 발달하면서 주택 사업을 벌이는 등 철도의 영향력을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했던 이력이 있다. 광복 후 국영화되어 일상에 깊이 들어왔고 경춘선의 전설을 다양하게 뿌려놓았다. 


2010년에 기존 선로를 확장 변경하면서 복선전철화되었다. 이때 옛 역사는 새로운 역사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역 중 남아있는 역사는 고작 5개에 불과한데 서울의 화랑대역과 춘천의 4개 역이므로, 경기도권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새 역사의 디자인과 옛 보통역사를 비교해보면 철도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철도가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고 도시의 관문으로 역사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게이트처럼 생긴 역사를 통과해서 도시로 들어왔다면, 지금의 역사는 목적지로 더 빠르게 수송하는 기능적 개념이 강해져 그에 부합하는 교차로의 형태를 띈다. 온갖 편리한 장치들이 집약된 사각박스가 철로를 감싸고 있는 형태다. 

우리의 도시는 서울과 목적지 사이를 빠른 속도로 오가는 열차의 통과지점이 되었다. 역사로 도시의 특정한 이미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마저도 예전보다 띄엄띄엄 존재한다. 열차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무는 도시는 수많은 역 중 하나, 우리는 수많은 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여행자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변화는 속도에 있었다. 철도의 숙명이기도 하다.  











중앙선 구둔역과 능내역, 

우리가 잊어버린 역에 가다  


경기도는 우리나라 철도의 중요한 선들이 교차되는 지역이다.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1899)으로부터 경부선(1905), 경의선(1906), 경원선(1914), 호남선(1914)이 개통되자 전국을 X자로 가로지르며 중국과 만주까지 이동할 수 있는 교두보가 확실히 확보되었다. 곧이어 산업철도의 역사가 시작된다. 석탄, 철강과 미곡 등 자원 수탈에 동원된 철도선이다. 특히 청량리에서 남양주, 가평을 지나 원주, 문경, 경주에 이르는 중앙선은 1930년대의 핵심 철도사업 중 하나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네 개 지역을 통과하면서 생산되는 다양한 자원들을 실어 나를 목적이었다. 모든 철도와 마찬가지로 광복 후 국영화되면서 중앙선은 여객 운송 위주로 운명이 달라졌다. 중부 내륙을 관통하는 중앙선은 수려한 산세를 감상할 수 있어 관광열차도 자주 운영된다. 

경기권의 중앙선은 가평군 용문역까지 복선전철화되면서 기존의 역사들이 큰 변화를 겪었다. 지정 문화재인 역은 팔당역, 구둔역 두 개이며,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폐역으로 남아있는 간이역은 능내역, 매곡역이다. 팔당역은 신 역사 내부에 마치 조형물처럼 존재하지만 구둔역은 일신역이 새로 생기면서 열차가 지나가지 않는 역이 되었다. 선로마저 끊어져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역사 주변으로 짧은 철로가 마치 장식처럼 남아있다. 능내역의 운명은 또 달랐다. 선로를 직선으로 하면서 강변에 자리잡은 능내역이 중앙선에서 제외되자 폐역이 되었지만 북한강 주변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카페촌도 들어섰다. 역사 내부는 능내역의 과거를 보여주는 사진첩이 장식되어 있다. 기차역마다 붙어있던 노선표와 간결한 나무벤치도 그대로다.  


구둔역은 공사중이다. 단정한 건물에 얹힌 박공지붕이 기분 좋게 관람객을 맞는다. 커다란 향나무와 은행나무가 철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동, 부산과 같은 먼 곳의 지명이 무뚝뚝하게 붙어있는 안내판이 세월에 쓸린 자국을 가득 안고 있다. 잘린 철로나마 뜨겁던 시절을 느끼게 한다. 역무실과 역장실, 숙직실 부분을 한창 보수하고 있지만 어떻게 변화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미 역 주변으로 이질적인 구조물들이 관광객을 끌기 위한 장치처럼 들어섰다. 외딴 곳에 조용히 남아있는 이 작은 문화재 건물에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며 치장하고 덧붙이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역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문화재로 지정된 급수탑과 열차 

경기 지역 철도시설물 중 특별한 하나는 급수탑이다. 경원선 연천역은 두 개의 급수탑이 위풍당당한 모양새를 견지하고 있다. 높이 23미터의 원통형 급수탑(등록문화재 제45호)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급수탑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드는 원통형 위에 지금이 넓은 원통이 올려져 버섯모양이다. 윗부분을 철 구조물로 막아서 물을 저장하고 두 개의 수도관을 연결되어 있다. 수도관 하나는 물을 끌어올리는 용도, 다른 하나는 기관차로 물을 담는 용도였다. 대부분의 급수탑은 철물 시설이 남아있지 않다. 급수탑 근처에 물 저장소가 있다.   연천역에는 상자형의 건물처럼 생긴 급수시설도 있다. 콘크리트로 단단히 만든 외관에 줄눈을 넣어 장식했다. 한국전쟁 시절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있어 근현대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재다.   








그 외에도 의왕 철도박물관에 보관된 열차문화재도 눈여겨 볼만하다. 일제강점기 철로를 누볐던 미카3 증기기관차와 파시형 증기기관차, 그리고 협궤형 증기기관차가 새카만 몸체를 자랑하며 서있다. 총독부 철도국에서 제작한 열차지만 이후 대통령 전용열차가 되어 국빈을 모신 역사를 간직한 ‘대통령 전용 열차’(등록문화재 제 419호)와 ‘유엔군 사령관 전용 객차’(등록문화재 제420호)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열차가 선로를 달릴 때의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정란각은 오래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던 곳이다. 일본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기생집이라고도 하고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이 드나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나 못가는 고급 요정이라는 설명은 이 집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정란각이 이제 누구나 들어가서 내부를 구경하고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세월은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을 활짝 열었고 시대를 관통하는 건축물이라는 의미로 문화재 역할을 부여했다. 정란각의 새 이름은 ‘문화공간 수정’. 이름이 바뀌니 공간이 달리 보인다. 일본인 부호의 집에서 적산가옥, 요정을 거쳐 문화재가 된 이 집의 역사가 천천히 표백되어 말끔해진 느낌이다. 오롯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건축물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요정이 문화재가 된다고 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일본식 저택의 당당한 위용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아름다운 꽃길만 걸어온 것이 아니기에, 역사의 어두운 길만 걸어온 이 건물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세찬 풍파를 헤쳐온 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먼 계절을 돌아 이제 투명한 눈빛으로 후손들 앞에 선 한 노인의 인생처럼.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1943년 6월 12일, 수정동 한복판에서 나는 태어났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지나온 시절을 돌아볼 틈도 없었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정란각이 있는 초량 일대는 부산근대사의 중요한 장면을 품은 지역이다. 한산한 포구였던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왜관이 설치된 곳이었고, 개항 직후엔 일본조계지가 열려 돈과 기회를 잡으려는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운 그 자리에는 철도와 항만이 생겨나고 관공서와 상가, 저택들이 등장했다. 수정동 일대는 옛 왜관지역이라 ‘고관’ 혹은 ‘구관’으로 불렸다.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사지였으므로 대지주와 자본가, 권력가들의 대저택들이 들어서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수정동 1010번지의 옛 토지대장은 이 집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산 상권과 자본을 휘어잡은 주요한 인물들이 소유해오다가 1939년 다마다 미노루라는 재력가가 매입하여 정란각이 되는 저택을 지었다. 철도관사가 자리잡았던 곳이기도 해서 이 집이 철도청장의 관사라는 소문도 무성했으나 문화재 등록을 위한 조사를 하던 중 상량판을 발견하면서 집의 처음이 선명하게 밝혀졌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 보자. 대문부터 높다랗게 세워져 재력가의 저택다운 면모를 보인다. 본채인 이층 목조 건물은 양식 건물이 어색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데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모습이다. 그 사이에는 탐스런 꽃나무들로 조성된 일본식 정원이 있다. 1층과 2층은 일본식 툇마루인 엔가와 바깥으로 유리미서기문이 가지런히 닫힌 상태이며 유리문 너머로 살짝 뒤로 물러선 방들이 넌지시 보인다. 겹을 이룬 공간이 주는 비밀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집의 구조와 규모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부는 중복도와 내부 계단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중층으로 연결된 부속채로 이리저리 이어지는 구조인데다 요정으로 활용하면서 증개축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손님이 다니는 공간과 직원이 다니는 공간을 분리하고, 손님들끼리도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답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문화재 조사를 위한 기록화보고서는 처음 이 주택을 지을 당시에도 일반적인 주거 개념이 아니라 연회나 회합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컸으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2층 다다미방이다. 벚꽃과 독특한 과실 무늬를 새겨넣은 목조장식들과 도코노마 같은 일본식 장식 공간이 돋보이게 꾸며진 이 방은 방문을 모두 걷어내면 수십 명의 권력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다마다 미노루는 이 집을 고작 3년도 소유하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그 뒤 미군정청 장교 숙사로 사용되었고 개인에게 불하된 이후로 요정과 요릿집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찌 부와 권력 이면의 추함과 서늘함을 전부 상상할 수 있을까? 개항기 일본인들이 성공을 좇아 낯선 대륙에 발을 디뎠다가 결국 패망인의 운명에 처했고, 정치를 제 맘대로 주무르던 지난 시대의 권력자들이 결국 역사의 그림자로 사라져갔으나, 건물은 남아 노쇠한 목소리로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란각을 방문한다면 자원봉사로 해설을 하는 어르신을 만나보기를 권한다. 저택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복잡함을 균형 있게 전달할 뿐 아니라, 일본풍을 추종하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재로서 저택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겐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도쿄도 정원박물관 : 아사카노미야 저택 






도쿄도 정원 박물관은 일왕가의 일원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1933년에 지은 저택과 영지 내 거대한 정원에서 비롯되었다. 전후 저택 부지가 국가로 환수된 후에 총리관저로도 사용된 이곳은 1983년부터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시민들은 물론 도쿄 여행자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 저택은 1920~30년대 프랑스 파리를 휩쓴 아르데코 스타일을 도쿄에서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도쿄건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웅장함이나 화려함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모던한 외관을 지녔지만 현관을 통과하면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다가온다.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된 바닥과 비상하는 여신을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조각으로 뒤덮인 벽에서 정교한 세공의 세계로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이윽고 우아한 식물 모티프가 기계미학과 만나 섬세한 패턴을 이루는 공간들! 정교한 비례와 절제된 형태의 장식들이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주는 공간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저택은 대형 홀과 응접실, 대식당, 소식당 등으로 이루어진 공적인 영역인 1층과 침실과 서재 등 사적인 영역인 2층, 바우하우스 풍 가구가 구비된 겨울온실이 있는 3층으로 구분되는데, 가구, 조명, 오브제, 벽화, 벽지, 그리고 경첩이나 라디에이터 가리개 같은 크고 작은 철물까지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이것이 바로 아르데코’라고 외치고 있었다. 


박물관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건축물이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곳이었다. 건축과 실내 디자인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오디오 가이드와 도록으로 접할 수 있었다.(한국어 설명도 있다) 이 집을 디자인한 앙리 라팽과 르네 랄리크에 대한 이야기, 건물을 실제로 구현해냈던 궁내부 건축 집단에 대한 심도 깊은 설명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의 서사는 전시장과 카페, 그리고 다양한 상품들에서 훌륭하게 활용되었다. 좋은 건축을 보유하고서도 건축 이야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박물관들이 우리에게는 참 많지 않던가. 건축서사를 잘 활용한 좋은 장소를 알았다는 흡족함에 즐겁게 관람을 마쳤다. 


                        옛 아사카노미야저택의 내부 모습 ( http://www.teien-art-museum.ne.jp)


그런데,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여 아름다운 저택을 완성한 아사카노미야 아스히코. 그가 궁금해졌다. 간단한 검색으로 많은 정보가 나왔다. 메이지천황의 자손인 야스히코는 일본육군 장교로서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예술적 취향이 높았던 그는 1925년 파리장식미술박람회에 참관하고서 아르데코에 푹 빠졌으며, 앙리 라팽과 르네 랄리크를 초빙하여 도쿄 저택의 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그저 예술애호가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군국주의자였고 1938년 난징대학살 때 일본군 지휘관이었다. 전쟁의 책임을 져야할 위치였으나 왕족이라는 이유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던 비굴한 역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전력을 알게 되자 건축적 아름다움과 박물관의 경이로움만으로 이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것이다. 건축은 시대의 요구나 기술력, 건축가 혹은 건축주의 예술적 안목만으로 설명을 끝낼 수 없다. 건축에는 사람의 인생이 압축되어 있고, 그 인생의 의미와 공간의 가치는 서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건축은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한때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의 집이라고 하더라도 후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면서 또다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에게 많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이 그러하듯이,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건축은 다양하게 확장된다. 


삶의 복잡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의 해답이 건축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뜨겁게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의 삶에 이토록 깊은 관심이 있다는 건 건축이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설지 않은 분야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 전시의 중심에 카바농이 있었다. 건축가가 남프랑스 가장자리 도시에 지은 작은 별장이다. 그는 이 장소를 무척 사랑했고 카바농에서 내려다보이는 푸른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길 즐겼다. 그는 결국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마을 묘지에 잠들어있다. 

몇 해 전 이 카바농을 취재하러 프랑스 끄트머리의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Roquebrune-cap-matin)까지 간 적이 있다. 절벽을 따라 얇은 선처럼 둘러진 오솔길- 르코르뷔지에 오솔길이라고 적혀있다-을 걷다보면 표지판 하나 없이 서있는 작은 나무집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이 떠난지 반세기가 흐른 만큼 낡아버린 나무집과 여전히 변함없이 드넓고 푸른 바다의 간극이 묘하게 다가왔다. 기후대가 달라지는 것처럼 아열대의 달근한 꽃향기가 계속 퍼졌고 강렬한 햇살은 건너편 고지대 마을의 풍경을 황금빛으로 만들었다. 지난 세기 건축의 대가로 꼽히며 그의 건축물을 예술작품처럼 저작권 보호를 하는 건축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곳이라고 하기엔 뭔가 불충분해보였지만, 그의 마지막 장소라고 하니 그건 그런대로 어울려보였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바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이라는 이 마을이 풍기는 정취 때문이었을까? 니스의 달콤한 해변과 달리 야생적이며 차가워보이는 바닷물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식물들과 가득한 태양빛마저 기묘한 야생성을 갖고 있던 이곳. 여기인가, 홀린 듯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도 건축가처럼 그 바다와 작은 고지대 마을에 푹 빠져버렸다.

아래에 카바농에 대해 쓴 글을 덧붙인다. 내외부 사진이 많지만 저작권이 엄격한 작가라 공개하기가 어렵다. 혼자보기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외관 사진은 아래에 있다. 혹시 문제가 되면 알려주길. 




카바농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다. 

1951 12 30일 남프랑스의 작은 식당의 구석자리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는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린 후 퍼즐을 짜맞추듯 4개의 직사각형과 1개의 정사각형으로 쪼갰다작은 직사각형 안에 다시 여러 개의 사각형을 그려넣었다크고 작은 사각형의 조합으로 보이는 이 스케치는 지중해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벽 암석 위에 세울 별장의 기초 도면이었다쪼개진 직사각형은 각각의 기능을 담은 공간이 되고 그 속의 작은 사각형은 가구가 되었다가장 바깥에 있는 정사각형은 이 기능을 아우르는 집이다그는 집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방 주변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지중해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연필을 놓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줄 작은 여름별장을 그리고 있었다도면은 45분만에 그려졌다그렇게 확정되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45분만에 그려진 스케치 속의 별장 카바농은 다음해인 1952년 여름에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의 절벽 위에 세워졌다남프랑스의 끝자락에 위치한 로크브륀은 온화하면서도 야생의 거칠음이 공존하는 도시였다르 코르뷔지에는 여름마다 이곳을 찾아왔다휴가라고 해서 잠시도 나른하게 보내는 일이 없었다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거나 돌조각을 줍기도 했지만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혼자 있을 때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로 분주했다.

카바농이 세워진 다음 해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장소에 카바농보다 더 작은 아틀리에를 하나 만들었다아틀리에 벽에는 르 코르뷔제가 그린 그림과 스케치들로 가득했다카바농과 아틀리에를 오가며 건축가는 열정과 영감을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그리고 이 집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1965년 8수영을 하러 해변으로 나간 르 코르뷔지에는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작은 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장소가 되었다


건축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기능적인 구조를 감싸는 거대한 풍경과 함께 존재한다.

로크브륀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날씨가 확연히 다르다뜨겁고 달근한 꽃향기가 동네마다 농밀하게 밀려온다굵은 대가 휘어져 축 늘어진 용설란이나 상쾌한 향을 뿜는 유칼리 나무한창 푸르른 아칸더스 나무가 쑥쑥 자라 덤불을 이루고 있다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제각기 한창때를 표현한다온화한 날씨도 잠시폭풍이 밀려와 한바탕 비를 뿌리고 달아난다그러면 바다와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꽃과 나무는 더욱 짙은 향기를 뿜는다

카바농은 절벽의 거친 돌과 하염없이 자라는 열대 식물의 덤불 속에 자리잡고 있다르 코르뷔제가 살았던 당시에는 바다를 가리지 않도록 덤불을 쳐내곤 했지만 야생의 자연은 쉴 줄을 모른다건너편 고지대 마을에는 별장과 호텔리조트가 촘촘이 들어섰다고지대 마을은 르 코르뷔제가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주택들을 경계하며 제대로된 리조트 단지를 세우자던 록 앤 롭(Roq et Rob) 프로젝트의 대상 부지들이었으나 이미 각각의 집들로 빼곡히 채워졌다바다 위에는 거대한 크루즈선이 로크브륀 해안의 절경을 공유하는 중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카바농이 있는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정작 카바농은 그전과 그리 다른 모습이 아니다소나무 패널을 합판 위에 붙여서 제작한 몸체와 슬레이트 지붕은 예전과 다름없이 소박한 모습이다모던한 콘크리트 큐브라면 또 모를까수직과 수평이 강조되고 수평띠창이 있는 흰색의 건축물을 주로 선보이던 르 코르뷔지에가 나무집을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건물 내부로 들어서야 비로소 이 집의 매력이 확연히 다가온다좁은 공간을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었다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한 심플하고 기능적인 가구들은 충분히 세련된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벽에 그려진 생생한 벽화들 때문도 아니었다이 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절묘한 위치에 창문은 액자처럼 풍경을 가두었다세 개의 크지 않은 창문으로 에메랄드 빛의 풍경이 흐른다어두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남불의 공기햇살암석 그리고 풍경집은 밀려드는 자연의 정취와 어울려 더 크고 더 넓게 느껴졌다.  

 공간 가장자리를 따라 2개의 침대와 작은 세면대가 있는 수납장약간 사선으로 놓인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벽장이 차례로 놓였다침대 왼쪽에는 커튼으로 구분한 화장실이 있고천장은 수납시설로 꾸몄다몇 가지 되지 않는 가구들이지만 침대 상판을 들어올리면 내부에 수납공간이 있고스툴형 의자도 무언가를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휴지걸이 모양의 조형물은 밤에 책을 읽거나 할 때 켰다 끌 수 있는 간이 스탠드 조명이다나무널이 깔린 마루바닥은 노란 색으로 칠해져있고 현관 복도에는 큐비즘을 연상케하는 벽화가 그려져있다천장은 화면이 분할되고 부분적으로만 칠해진 몬드리안의 추상화같다내부에는 벽이 설치되지 않았으나 공간은 온통 사각형의 결합이었다그 사각형은 답답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시선을 유도하고 적절히 분산하며 공간으로 넓게 펴져있다.

복도 끝에는 커다란 나사를 끼우듯 목재 옷걸이를 조립했다옷걸이를 조립할 때 수치와 위치를 정하느라 그렸던 연필 선이 지금도 남아있다작지만 효율적으로 꾸미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이 집의 주인은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얻고 또 어떤 구상을 했을까그리고 그의 아내는 생일선물로 마련된 이 장소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이 작은 집이 그의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었을 지 더없이 궁금해졌다.






336cm의 공간에 건축가의 철학이 담겼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카바농에는 샤워시설과 부엌이 없다외부에 수도시설을 끌어올려 샤워를 했고 사용했고 식사는 바로 이웃한 불가사리 식당(Etoile de Mer)’에서 해결했다불가사리 식당의 주인 토마 르뷔타토(Thomas Rebutato)는 카바농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르 코르뷔제는 1930년대부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진 건축가겸 디자이너인 아일린 그레이의 빌라 E-1027을 자주 찾았고 디자이너들과의 교류와 프로젝트 구상을 위해 이 집에 머무는 기간이 많았다. 1949년경 보고타 시의 도시계획에 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빌라에 머물던 중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바로 근처에 르뷔타토의 식당을 선택하게 되었다르 코르뷔지에와 르뷔타토는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되었고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구상했다마음 좋은 식당 주인은 기꺼이 건축가가 머물 집을 위해 작은 부지를 제공해주었다

카바농은 코르시카에서 프리패브 방식으로 만들어 배와 철도로 이곳까지 옮겨졌다공장에서 생산하여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내부 공간을 구성하는 구성체계로는 르 코르뷔지에가 창안한 모듈러가 활용되었다신체의 황금비례를 수학적으로 적용한 모듈러는 공간과 사물의 비례척도라고 할 수 있다카바농의 길이와 너비에 적용된 336cm와 높이 226cm도 자신이 정립한 모듈러 체계에 따라 결정된 수치다가구의 높이창과 면의 구성 등 모듈러에 따라 형성되었다

용설란에 둘러싸인 통나무집이라는 낭만적인 외관과 달리카바농의 내면은 건축가의 엄격한 건축적 이상과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자유롭게 놓여진 듯 보이는 가구도 공간을 형성하는 사각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개인의 취향처럼 여겨지는 추상적인 선들도 공간의 흐름을 무한히 확장하는 요소로 배치되어 있다이 집 자체가 하나의 모듈로서 완전한 기능을 가진 큐브다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건축가의 철학은 단단하고 뚜렷하다


사적인아주 사적인 집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로크브륀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계획안을 세웠다휴양지로 더할 나위없는 장소라 판단한 그는 지중해의 쪽빛 해안을 공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게 머무를 수 있는 리조트 타운을 계획했다로크 앤 롭 프로젝트도 이 때 계획된 것이다건축가는 투자를 얻어 이 계획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아쉽게도 리조트 프로젝트는 르뷔타토의 식당 옆에 여행자 숙소인 캠핑을 세우는 데 그쳤다. 1957년에 건축된 캠핑은 2층으로 구성된 숙소이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져 전망이 좋았다두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콤팩트한 구조에 가구와 세면대까지 설치하는 등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에서 실험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현했다르뷔타토는 이 캠핑 덕분에 여름 휴가 시기에도 활발하게 레스토랑 영업을 할 수 있었지만 건축가에게는 아쉬움으로 찾아왔다개인별장으로 완성된 것은 오직 카바농 뿐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을 배경으로 많은 사진을 남겼다창문으로 벗은 몸을 내밀며 햇살을 쬐는 장면도 있고 카바농 바로 옆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스케치에 매진하는 장면도 있다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개를 끌어안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가 하면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카바농과 로크브륀의 스케치를 넣어보내기도 했다

카바농은 엄격한 이상의 공간이지만 건축가의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도 보듬어주는 장소였다그는 카바농을 마음껏 즐겼다폭우가 자주 쏟아져 길이 진흙밭이 되어도시도때도 없이 자라는 야생의 덤불에 계속 신경써야 해도샤워와 식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해도 말이다.  

건축가는 집 안에 있는 것보다 카바농 옆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수영복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일에 몰두하는 건축가 앞에는 거친 해안과 야생의 덤불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등을 굽히고 몰두하는 뒷모습에서 예술가적 기질을 본다이제 카바농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르 코르뷔지에를 떠올리게 되었다. '작은 별장'이라는 뜻을 가진 평범한 단어 카바농에 예술의 향기가 충만해졌다.  이 작은 집 카바농에서 발견한 건축가의 삶처럼.









<장면가옥 추정복원도-기록화보고서>


근대기 서울 한옥을 보는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옛 사람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구가했나 엿보며 상상할 수도 있지만 전통한옥과는 다른 공간들, 다른 건축언어들이 기발하게 뒤섞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멈춰진 시대가 간곡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지요. 화려한 한옥에 엉뚱하게 끼어든 서양식 공간이나 일본식과 한식을 절묘하게 오가는 공간, 한,일,양 세 가지 스타일이 모두 섞여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중국식 건축 형태가 스며든 집도 있지요. 게다가 한옥 자체가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개량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건축가들은 한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제거하면서 주택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한 근대기 서울한옥을 한채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유한 계층에서는 궁궐에서나 지을 법한 고급한옥을 지었습니다. 백인제 가옥처럼 좋은 한옥과 일식 가옥을 함께 배치하는 경우도 있었고, 완전한 서양식 대저택을 짓고 뽐내던 상류층들도 있었지요. 서양식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게 가장 모던한 유행이었던 당시엔 이런 집들이 환영받았겠지요. 죽첨장(지금의 경교장)이 바로 그런 서양식 대저택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촌 언덕위에 있던 윤덕영 저택(벽수산장)도 있었고요.  그러나 이런 집들은 연회나 귀빈 대접에 사용되었을 뿐 실제 생활은 서양식 저택 뒤켠에 근사하게 지은 한옥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유행은 유행이고 삶은 또다른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한옥에 머물러있었습니다. 

명륜동에는 1937년에 지은 한옥 한 채가 남아 있습니다. 역사인물인 장면 선생의 옛집입니다. 장면 총리라는 직함으로 더 잘 알려져있지만 이 집을 지을 당시엔 교육자의 삶을 누리던 중이었지요. 명륜동이 아직 주택가가 되기 전 천변 언덕에 한옥과 양옥이 각각 한채씩 놓인 이 집이 지어졌습니다. 집 앞에는 천이 흐르고 있었다지만 복개된 지 오래되어 모두 도로로 바뀌었습니다. 이 집은 선생의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놓인 역사인물가옥이자 등록문화재 357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집은 김정희라는 건축가가 지었습니다. 장면 선생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지요. 신학교에 입교했다가 건축가로 선회한 그는 1937년에 지은 이 집을 시작으로 1938년 명동성당 문화관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갑니다. 몇가지 일에 그의 흔적이 있지만 1950년 납북되는 바람에 명맥이 끊어집니다. 

집에 살다간 사람의 일생도 한국의 현대정치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지만, 집만 봐도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집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매력있습니다. 경사지에 세워진 대문을 지나면 눈앞을 가리는 담이 하나 나옵니다. 이 담의 오른쪽으로 양식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됩니다. 담벼락은 은근한 시선높이까지 세워져 본채(안채)인 잘생긴 한옥은 훤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채로 가려면 왼쪽으로 담을 따라 걸어가야하지요. 지체 높은 양반댁에서 중문을 설치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양옥은 사랑채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지요. 

우선 양옥으로 들어섭니다. 나무바닥이 깔리고 방과 거실이 정갈합니다. 손잡이가 달린 문이 방과 복도와 거실을 구분합니다. 바깥에 복도가 있는 점도, 붙박이 장식장이 있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일본식 기와가 올려진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양식처럼 보이지만 일본식 가옥의 언어가 슬쩍 비쳐납니다. 복도나 붙박이장은 워낙 자연스럽게 적용되어 있어서 일식가옥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건물은 목구조에 몰타르와 시멘트, 벽돌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방화의 목적이었겠지요.  

이곳은 장면 선생이 여러 인사들과 만나 담소와 회의를 했던 곳. 신사들의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 선생의 유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창밖으로 꽃나무 사이로 한옥의 처마가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안채로 들어가면 단아한 한옥의 품새를 만나게 됩니다. 단정한 장마루와 반자를 친 천장은 적당히 높아서 편안합니다.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주변으로 연결된 방과 생활공간들은 동선의 편리함을 염두에 둔 것 같지요.  이 집은 솜씨좋은 세공사가 다듬은 듯 고급 한옥의 구조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건넌방의 창문은 외부 유리 쌍창 안에 나무살이 있는 영창, 나무 틀은 두고 벽지를 바른 갑창 등 복잡한 구조로 된 창호는 궁궐 전각에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쌍창도 바깥 경관이 보이는 곳은 유리로, 나머지는 창호지로 해서 장식성과 바라보는 기능을 잘 살렸습니다. 문과 천장 사이의 고창도 단정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지요. 조그마한 환기구창은 새로운 시도입니다. 온돌방의 환기를 좋게 하는 이 조그마한 창은 개량식 한옥에서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동선과 환기. 이 점이 한옥의 개선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죠.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유물들이 전시대 속에 들어있습니다. 

실내외에서 모두 연결되는 부엌과 찬마루는 널찍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라 주방은 무척 바빴을 것 같습니다.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 등 현대적인 설비가 처음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채 뒤에도 작은 채가 있는데 총리시절 경호원 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담과 가까운 곳에도 경호실이 설치되어 있지요.  

정갈하고 조심스러운 집이었을 겁니다.   

오랫동안 머물며 삶을 이어오기에 편안하고 평온한 집이었을 겁니다. 

한 채의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마을을 만들고 길을 열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혹은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는 주요한 길목이라고 봅니다. 그 시대의 질문은 지금도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집을 짓는 자들은 어떤 삶을 표현하려 하는지, 개개인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떠한지, 그때와 지금은 또 어떻게 다른지 해답을 구합니다. 

근대기의 서울 한옥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러나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던 집을 좀더 집중해서 살피며 삶의 개별성과 복잡성을 좀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서울 상류층이 살던 근대 한옥



집은 삶의 그릇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일상과 내면, 가치관까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택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향기는 비밀스런 시대로 우리를 부른다. 근대건축유산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회동 93번지에는 ‘백인제 가옥’으로 불리는 고택이 있다.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선생이 가족들과 1944년부터 살던 곳이다. 뛰어난 의사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그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고 말았지만 전설처럼 뒤따르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 집은 여러 소유주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백인제 선생 전에는 최선익이라는 청년갑부이자 민족사업가의 삶이 비밀스럽게 묻혀있고, 한성은행이 소유하고 있을 1930년에는 천도교에서 잠시 사용하면서 스며든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을 지은 실업가 한상룡이 있다. 


한성은행장을 지낸 친일실업가 한상룡(1880~1949). 총리대신 이완용의 친인척이며 대한제국왕실 총친의 조카였던 그는 어려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일본통이었다.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추앙하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분이 깊었던 그는 한편, 허례허식이 없으며 정치적 노림수보다는 실업가로서의 철학을 지켰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회갑을 맞아 성대한 연회를 거행하는 대신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집필한 것도 이 인물의 독특한 이력이다. 


1906년 가회동으로 이사온 한상룡은 주변의 집 열 두 채를 매입해서 900평에 이르는 넓은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1913년부터 살림집으로 쓰는 안채와 연회와 사교를 위한 사랑채, 하인들이 사는 문간채, 처가 식구를 위한 별채, 테라스가 있는 일본식 주택 등 100여 평에 이르는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조선 최고 실업가로서 일본인 관료를 비롯, 정제계 유력자들과 회합하는 사교의 장이자 연회공간이었다. 살림집인 안채는 중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고 외부에서는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고위층 인사들이 자동차를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대문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고 정원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총독을 비롯, 일본인 관료들이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를 곳곳에 발휘했다. 일본주거에서 자주 사용되는 흑송을 사랑채에 사용한 것, 전통식 우물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를 깐 중복도와 다다미가 깔린 이층방을 설치한 것 등은 한상룡의 전략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은행 상황이 악화되자 한상룡은 부채 5만원을 스스로 감당하며 한성은행 측에 이 집을 넘겼다. 이 집은 그는 인근 178번지로 거처를 옮겨 자신의 입지에 걸맞는 또 다른 대저택을 세웠으니 가회동에는 한상룡이 소유했던 두 채의 대저택이 있는 셈이다. 


이 집은 서양식, 일본식 건축언어가 접목되어 있지만, 전통한옥의 우아함과 아름다움도 충분히 담고 있다. 공들여 지은 집답게 반드시 살펴봐야할 부분들도 많다. 우선, 분합문(들어 올려 걸어둘 수 있는 장지문)을 설치한 사랑방이 딸린 사랑대청은 이 집의 가장 멋진 장소다. 유리문으로 두른 사랑대청은 서양식 가구가 놓여 근대기의 멋이 살아있다. 안채 마당으로 향한 사랑채 화방벽은 길상문자와 전통 무늬로 고즈넉한 안채에 우아한 멋을 수놓는다. 이 집의 가장 높은 지대인 북쪽 언덕에 세워진 누각은 집주인이 홀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유리문으로 두른 누마루에 앉으면 북촌 일대가 두루 펼쳐져 그 풍경이 한편의 드라마가 된다. 


이 대저택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소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친일파 실업가의 집을 문화재로 보호하는 일, 잘 지어진 집이라고 감탄하는 일에 감정적인 혼란을 배제할 수 없다. 과연 이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어야하나,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건축물들을 ‘부정적인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라고 부른다. 당시 삶을 조명하는 자료로서, 후대에 교훈이 되도록 남기고 그 의미를 계속 새롭게 읽어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의 복잡성, 삶의 복잡성이 끼어든다. 아프고 고된 근대사를 경험한 우리에게 부정적인 문화유산은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상룡의 집은 민족실업가인 최선익이 소유하면서 한상룡이 전략적으로 세운 일본식 가옥을 철거하고 집의 규모를 줄인 역사가 있고, 백인제라는 근대사의 주요한 인물이 살면서 민족의 비극을 읽을 수 있는 역사가옥으로 의미가 더해진다. 문화유산은 오직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거쳐간 인물들이 시대가 켜켜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상룡의 집이자 최선익, 그리고 백인제의 집인 이 역사가옥을 중요하게 살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최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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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좋아! F1963 




공장과 창고가 근사한 공간이라는 걸 세상이 알아버린 것 같다. 용도 폐기된 공장과 창고들이 카페와 예술공간으로, 상점과 쇼룸으로 변모하고 있다. 손댄 듯 안댄 듯, 오래전 생겨난 생채기들과 숨겼어야 마땅한 철골과 구조재들을 드러낸 거친 공간에 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과 다른 감각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새로운 행성에 발을 디딘 것처럼 다른 파동이 흐른다. 재료의 거친 질감과 무게감이 신체를 압박하고 불편한 온도와 강도 높은 소음이 신경을 거스른다. 까마득히 높고 넓은 공간이라면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공간의 압력에 신체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구조와 재료가 주는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복잡한 업무를 기꺼이 처리한다. 



부산 수영동의 오래된 공장지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철재 와이어를 생산하는 고려제강이 1963년부터 2008년까지 운영해온 공장이 그 주인공이다. 건물 면적만 1만650㎡에 이르니 누구나 탐낼 만하나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4년에 부산비엔날레라는 깜짝손님이 찾아왔다. 건축가 조병수의 설계한 기념관으로 시민들과 거리를 좁힌 고려제강은 이 오래된 공장의 문을 대중에게 살짝 열었다. 2016년에는 시비를 들여 리모델링하면서 주요 전시공간으로 본격 등장했다. ‘F1963’의 탄생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화려했다. 새롭고 낯선 장소의 기대감과 입소문으로 부산비엔날레는 흥행에 성공했고 메인 테마를 전시했던 시립미술관보다 더 많은 관객이 F1963에 몰렸다. 공간의 특성이 너무 강해서 전시된 작품이 주제와 긴밀해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과 오히려 작품이 특별해보였다는 의견이 교차했다. 



거칠고 센 공간일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F1963은 묘한 부드러움이 있다. 공장 외부를 모두 감싼 옅푸른 색의 경계면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보면 철판에 절단면을 넣어 늘린 전신금속(expended metal)이지만 빛이 투과되면 가볍게 물결치며 오래된 건물의 어두움과 무게감을 덜어준다. ‘세 개의 네모’를 겹쳤다는 간단한 설명답게 공간은 단순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페와 맥주펍이 양쪽에 자리 잡은 첫 번째 네모, 그 사이에 파고든 중정의 네모, 전체를 아우르며 뒤쪽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전시공간이라는 세 번째 네모가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관람객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철강와이어를 제조하는 회사답게 다양한 형태의 와이어가 구조를 지지하는 요소로, 혹은 디자인 요소로 사용되었다. 팽팽하게 잡아주는 견고하고 날렵한 와이어는 구조미와 함께 시선을 적절히 가려주는 반투명한 가림막의 역할을 했다. 외부공간의 독특함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이어와 모양도 성격도 닮은 대나무숲이 펼쳐져 공장이 아니라 공원 같았다. 공장바닥에 사용된 실제 금속판들은 외부 정원의 바닥돌로 재활용되었다. 바닥에 깔린 금속판을 따라 내나무 숲을 거닐다보면 옅푸른 물감을 칠한 가벼운 건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회가 끝난 후 F1963은 더 대담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카페와 맥주펍을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고, 올해는 인터넷 서점의 중고서적매장과 도서관, 갤러리와 공연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연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자선공연과 함께 브랜드의 런칭행사, 젊은 셀러들의 마켓 등이 열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상태다. 이와 더불어 부산 낙동강 주변의 문 닫은 공장지대가 예술공간으로 변모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좋은 사례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좋은’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에 대한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기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초고층빌딩뿐만 아니라, 요상한 감각을 전해주는 오래된 공장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다.   


글/사진 최예선











성당은 참담할수록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보여준다. 기도하는 인간, 겸손하게 몸을 숙이고 타인을 향해 팔을 벌리는 인간, 지고지순한 희망을 꿈꾸는 인간... 그리고 신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며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조각하고 가장 아름다운 빛을 드리우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던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은 건축기술도 부족하고 물자도 없던 시절,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쌓고, 한 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기둥을 세우며 이루어낸 성당이다. 








1892년이 축성된 약현성당은 고딕양식을 닮은 듯하면서도 그보다 이른 시대의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는데, 당시 그는 용산신학교를 완공하고 명동성당 공사를 막 공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고딕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장엄하게 지어진 명동성당과 비교하면, 약현성당은 규모도 작고 천장 구조도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공동체를 품어주는 넉넉함이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은 ‘최고(最古)’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건축학자들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초기 양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약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언덕에 약초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옛 지명인데, 질병을 치유해주는 약초밭에 성당이 지어졌다는 점이 무척 상징적이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의 사형집행장이자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서소문 밖 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약현성당은 피 흘린 장소를 치유하는 의미와 함께, 종교의 신념으로 기꺼이 죽음을 맞았던 인간들의 넋을 감싸안는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약현성당은 다른 성당과 다른 절실함과 신실함이 있다.









120년을 견뎌온 오랜 성당이기에 여러 차례 보수 복원공사가 있었다. 원래는 마루가 깔리고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는 벽이 있었는데 1921년에는 그 벽을 없애고 벽돌기둥을 석조기둥으로 바꾸어 견고하게 했고, 1974년에는 해체대보수를 실시해서 외벽돌을 교체하고 창호, 지붕, 바닥을 완전히 바꾸었다. 


1998년에 화재가 발생해서 지붕과 건물 내외부가 크게 훼손되자, 2000년 이를 보수하면서 성당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원형복원 공사를 실시했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외벽의 벽돌이었다고 한다. 요즘 벽돌과는 색도 모양도 공법도 다른 당시의 벽돌을 재현하기 위해서 고령토를 섞어 가장 흡사한 색을 냈고 오래된 벽돌과 조화를 이루도록 표면을 거칠게 제작했다. 내벽도 붉은 벽돌의 침착하고 단단한 색감이 돋보이는데, 오랫동안 뒤덮인 흰색 시멘트 모르타르를 벗겨낸 결과다. 이렇게 해서 120년 된 벽돌과 새로운 벽돌이 공존하며 거대한 성당을 이루게 되었다. 



건물은 시간이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백년이 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드리운 손길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복구하며 건축물에 담긴 정신과 전통을 이어온 수많은 사연들이 겹쳐진 후에야 건물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영롱하게 어우러진 빛 그림 속에는 시대를 넘나들며 만들어진 다양한 유리 조각들이 섞여있고, 단단하고 고요한 벽돌 속에도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수많은 손길이 있다. 시대가 엮어주는 작은 조각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의, 그리고 시대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유산으로 만든다. 





용인 마북동의 조용한 동네에 기와를 얹은 전통 민가가 한 채 있다. 양반댁 큰 저택은 아니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사랑채 앞으로 넓찍한 마당이 있는, 제법 모양새를 갖춘 집이다. 풍성한 나무들이 있어 집이 더 넓어보인다. 겨울엔 이 풍경이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겠지만 봄이 오면 분홍으로 만발할 꽃나무들이 지천이다. 

한옥만 보았다면 이 집의 절반만 본 셈이다. 뒤쪽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된 이층 양옥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다. 건물 옆에는 두꺼운 돌판에 우산을 든 사람과 양옥집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집과 어쩐지 닮았다. 그림 위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 등장한 집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이곳은 화가 장욱진이 여생을 보냈던 집이며 화가의 예술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곳이다. 

장욱진은 집을 자주 그렸다. 초가삼간 작은 집이 땅과 하늘을 모두 담은 듯 광활하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들어앉아 있어도, 누정처럼 마루와 기둥과 지붕만 있어도 좋았다. 그림 속 집은 하늘도 땅도 물도 집의 일부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보듬어주었다. 그 집엔 새가 앉았다 날아가고, 황소와 수탉과 호랑이가 들락날락한다. 부처도 아이들처럼 슬며시 미소짓고 있다. 화문석 한 장으로, 방 한 칸으로 세상과 맞먹는 그림도 있다. 그림 속은 모두 평등하다. 나무 한 그루가 긴 강물처럼 하염없이 깊은 곳, 도인의 이상향처럼 말갛고 밝은 곳이다.

수많은 ‘집’ 그림은 화가가 살아온 여러 ‘집’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화가에게는 특별한 화실이 여럿 있었다. 남한강가 덕소에 화실을 짓고 혼자 생활하기도 했고 가족들이 사는 서울 명륜동 집 근처 한옥을 아틀리에로 꾸미기도 했다. 예순을 넘긴 뒤에도 수안보로 가서 농가를 고쳐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가족과 떨어져 화실 생활을 고집한 것은 그림에 대한 집념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세상과 절연한 채 은둔하며 오로지 그리기만 했다. 그 덕분에 어떤 경지에 이른 맑은 화폭과 개구진 표정의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맑고 옅게 절제된 이상향이 펼쳐졌다. 

1986년 예순아홉의 화가는 용인 마북동의 조선 후기 한옥을 사서 고쳤다. 아내와 둘이 살며 그림을 그림에 매진했던 화가는 3년 후 양옥을 지었다. 몸이 쇠약해지고 기관지가 약해진 화가가 조금은 편리한 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은 살림집 겸 아틀리에다. 이 집은 화가가 술을 마시며 그림을 펴놓고 인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흐른다. 그래서인지 양옥은 그림 같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집에서 맑은 밤을 유영하는 노인을 그린 ‘밤과 노인(1990년 작)’이 완성되었다. 

마북동 주택은 그림 속의 모든 집의 총합이다. 초가삼간처럼 아담한 작은 집도 있고, 양옥도 있고, 조그만 누정도 있으며, 화문석을 깔기 좋은 마당도 있다. 집도 온전히 화가의 작품이었다. 오래된 한옥을 손수 고치면서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길다란 나무판에 그림처럼 글자를 새겨 걸어두었는가 하면, 뒤쪽 정자에는 특유의 물고기 모양의 현판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채를 살펴보면 재미난 부분이 많다. 작은 창문이 예상치 못했던 위치에 뚫려 있었고, 조그만 문은 키가 큰 화가가 제대로 드나들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그 어느 나무 기둥도 반듯하게 재단된 것이 없었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채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양새가 흰 캔버스에 그어놓은 검은 선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부드럽고 온건한 형태의 밝음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고독하지만 밝고 따스한 온기야말로 웅숭깊은 고옥이 드러내는 예술가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 집은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 흔들리며 또 스스로를 세우며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집은 한 인간이 예술가임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 흔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할 때 진정한 감동의 공간이 된다. 

나는 그림 속 작은 집을 향해 걷는다. 작디작은 문을 열고 아랫목에 슬그머니 발을 뻗는다. 그림과 나는 일체가 되어 밝은 밤을 유영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라는 소설을 읽었다. 명망 높은 건축가와 아틀리에에 속한 건축가들이 국립현대도서관 지명설계공모를 위해 가루이자와 인근 작은 마을의 여름작업실에 모여 건축계획안을 완성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여름작업실이었다. 그 시절만 되면 습관처럼 그곳으로 가게 하는 장소, 그런 힘을 가진 건축 말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책을 읽고 난 후 짙어졌다.

가루이자와로 대표되는 아사마산 부근의 고지대 마을은 메이지시대부터 부유층의 여름 별장지로 조성되었다. 상류층 외에도 선교사, 외교관, 문학가, 예술가, 학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여름을 즐기러 왔다. 그 중에는 윌리엄 메렐 보리스와 안토닌 레이몬드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들도 있다. 이들은 여름이면 아예 사무실을 가루이자와로 옮겨 작업을 할 정도로 가루이자와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델리키트, 딜레탕트, 데카당스.(delicate, diletante, decadance). 가루이자와에는 그들 지은 여름 별장이 여럿 있는데 비밀스런 취향의 공동체처럼 보였다. 지식인들, 문화예술인들은 자발적으로 ‘여름대학’ 같은 지식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소설 속 여름 작업실의 모델이 된 장소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Taliesin)’이었다. 라이트는 인생의 새로운 2막을 펼치고자 했던 1911년, 위스콘신 스프링필드의 자연 속에 건축스튜디오와 거처를 조성하고 ‘탈리에신’이라 명명했다. 웨일즈 고어로 ‘빛나는 이마’라는 뜻인데, 인생을 뒤바꾸는 명칭으로 충분히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라이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20세기 초를 석권한 건축 명제(그의 스승 루이스 설리번의 선언이었다)에 ‘건축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건축유기론을 더하고, 기하학적인 조형성까지 포괄했다. 라이트의 건축은 근사한 조형작품인 동시에 자연의 질서와 인간적 스케일이 공존한다. 이 새로운 근대건축론에 경도된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 지망생들은 기꺼이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탈리에신으로 찾아들었다. 

1938년에는 애리조나 피닉스 북동쪽에 탈리에신 웨스트를 열었다. 이로써 그와 제자들은 위스콘신의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있었고, 황량한 사막에서 자유롭게 유기건축론을 실험할 수 있었다. 탈리에신은 건축 스튜디오이자 라이트의 건축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건축학교이며 마을 안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탈리에신 웨스트에는 건축 스튜디오와 문서보관실 외에도 생활공간, 방문객을 위한 시설, 대형 거실인 가든룸이 있었고, 극장과 댄스홀 같은 오락시설도 추가되었다.  

라이트는 탈리에신을 자신의 사후에도 문하생들이 그의 건축론을 계승 발전시켜 학파를 형성하는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 의도대로 탈리에신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학교로 계승되었고, 한 건축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의 역할을 하면서 건축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위스콘신의 탈리에신은 1976년 국가로부터 역사자산으로 등록되어 보존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탈리에신 웨스트는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추진하고 있다.  


건축과 예술, 삶과 문화가 드넓은 대지에 조화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탈리에신을 살피다 보니, 삶의 체험과 철학, 인간애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그런 건축이 간절해졌다. 좋은 공간이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가슴 따뜻한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취향과 삶의 목적과 태도가 닮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우리에게 이런 장소, 이런 건축물이 있을까? 만약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면 당장 그곳으로 향하기를! 따뜻한 연대의 장소에서 참담한 시국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기를!    

참고로 가루이자와에도 다른 의미를 가진 탈리에신이 있다. 일본어로는 ‘타리아센’이라고 발음하는 그곳은 언덕으로 둘러진 호숫가 마을이며, 가루이자와의 황금기를 거쳐간 문학가와 예술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여러 여름별장들이 한데 모아 조성한 산책공원이다. 유원지처럼 요란스럽게 운영되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건축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장소다. 





불편하고 어려운, 이 문화유산들 

베를린 보로스 컬렉션



 



(보로스 컬렉션 : www.sammlung-boros.de)










                  




문화유산 연구자 이현경 박사가 이런 이야길 했다. “네거티브(negative)나 다크(dark)라는 개념보다 디피컬트(difficult)라는 개념이 우리 문화유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점과 시대에 따라 문화유산은 다양한 맥락을 가지므로 특성을 고정하는 단어보다 복잡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열린 언어가 적절하다는 뜻이다. 디피컬트. 와닿는 표현이었다. 특히,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건물군들은 이 단어가 필요했다. 외국어를 부러 쓴 이유는 ‘네거티브’ ‘다크’라는 단어가 문화유산과 결합해서 개념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전쟁유적. 예전엔 전쟁영웅의 무용담이 흐르는 호국보훈의 장소임을 부각했으나 지금은 반전과 평화의 의미가 더 중요해졌다. 나는 전쟁 유적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사건임에 틀림없는데, 어째서 모든 관점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아있는 것일까? 방치된 전쟁유적지들은 상당수 사라졌다. 전쟁 체험은 휘발되고 본질을 바라볼 시간을 놓쳤을 지도 모른다. 


파괴의 장소에 삶의 장소가 생겨난다면 그 역시 강력한 장소적 상징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속엔 교교히 전쟁의 아우라가 남아있지 않던가, 권력과 자본이 망각을 종용하며 흐르지 않던가? 삶도 땅도 건물도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토록 어려우니 ‘디피컬트’다. 



보로스 컬렉션(Sammlung Boros)은 그러므로 의미 있게 볼만한 건축물이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있는 거대한 장방형의 콘크리트 건물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주민 방공호로 지었던 벙커다.(보로스 컬렉션 홈페이지에는 강제노동자들이 건설했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제국 수도의 건축 총감독을 맡은 알베르트 슈페어의 마스터플랜 아래 카를 니콜라우스 보나츠가 계획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이라 불리던 나치 독일의 장대한 고전주의 건축물을 설계했던 건축가다. 웅장한 건축과 압도적인 퍼레이드가 합쳐진 나치전당대회를 조직했던 슈페어는 로마처럼 폐허가 된 뒤에도 아우라를 가지는 천년의 도시 게르마니아를 꿈꿨다. 불멸의 도시는 전쟁 종료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보로스 컬렉션이라는 걸출한 미술관으로 탄생하기 전까지 건물은 흑역사로 얼룩진다. 무역회사의 창고로 쓰이기도 했지만, 전쟁포로를 수감하거나 보통은 에로틱하고 미심쩍은 대규모 행사용이었다. 1995년 이후로 전시공간으로 간혹 사용되었고 2003년 크리스찬 보로스가 구입해서 소장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바꾸었다. 옥상에는 보로스 부부의 집이 꾸며져 있다.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로 가볍게 얹혀진 증축부분이 절묘하게도 거대한 벙커와 잘 어울린다. 



예술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기꺼이 치유해주는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간은 힘이 세다. 거칠고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질감이 되어버린 이 건물에서 예술작품은 맥 빠진 존재가 되기 쉽다. 장소의 기억과 그 장소의 감각이 각인된 후에는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음지의 장소에 환한 빛을 뿌린다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전쟁 건축에 대해, 폭력과 광기에 쉽게 사로잡히는 인간에 대해, 그 모든 것을 감싸주는 예술이라는 인간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전쟁 지도부의 책임을 통렬히 언급함으로써 히틀러의 최측근 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다. “정권의 수장이 독일 국민과 세계 시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버린 이상 저에게 그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회고록을 남겼다. 


우리도 비슷한 무게의 짐이 있다. 우리는 침묵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질문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건물은 역사이고 역사는 결코 순결할 수 없다. 그 복잡함과 어려움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결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디피컬트. 그게 인생 아닌가?


마산 창동 예술촌

박물관보다 아름다운 골목길 







집은 아담한 마당을 둘러싼 한옥이었다. 한지가 붙은 문살도, 그림자를 만들던 처마도 흐릿하지만 기억이 난다. 마당은 시멘트를 발랐던 같고, 조금 너머로는 푸른 잎이 축축 처진 꽃나무들이 있었던 걸로 보아 정원이었던 같다. 마당엔 둥근 우물이 있었다. 들여다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물기운이 올라왔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햇살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기억 속의 장소가 그렇듯이, 집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낡은 사진처럼 색이 바랬다. 

거기 내가 있다. 어린 나는 무슨 생각인지 우물가로 갔다. 그리고 우물 가장자리에 놓인 두레박을 만지작거리다가 우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물은 무척 깊었으므로, 한참 후에야 첨벙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어른들이 달려와서 한참을 애쓴 끝에 두레박을 건져냈다. 오로지 장면으로 기억되는 . 

집은 한때 고모가 운영하던 여관이었다. 마산에 있는 여관은 지금 이름도 위치도 남아 있지 않다. 엄마의 기억 저편에서 떠오른 집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엄청 일본식 집이었지. 부림시장 근처였는데벌써 3, 40 전인데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으려나?” 어릴 때는 사진첩을 뒤적이며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들이 요즘은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소들을 우리 이전 세대는 살면서 경험해왔으니까.  

마산 여관에서 찍은 고모의 사진이 사진첩에 그대로 있었다. 장의 사진은 귀퉁이에 77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모는 돌아가신 17년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경주에서 다방을 운영했고, 마산과 부산에서 여관을 운영한 고모의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내가 낯선 곳으로 줄창 떠나려는 것도 고모의 영향인지 모른다. 집을 찾아보자며 엄마와 마산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아름다운 골목길, 마산 창동예술촌 



어느 틈에 창원으로 통합되어 시의 이름을 잃은 마산은 조용하지만 널찍한 시가지가 인상적이다. 부림시장은 원도심 지역인 창동에 있다. 나는 오래된 집들과 꼬불꼬불한 골목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하나를 밟아 들어갔다. 멀찍이서 보이는 이층의 일식주택을 향해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법한 골목을 통과했다. 

새로 단장해서 카페와 공방, 문화센터로 변신한 옛집들이 계속 이어졌다. 외관에 목재나 시멘트를 덧발랐을 , 옛집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는 같았다. 문화센터 앞은 실습을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고, 골목을 구경하는 커플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삶의 형태대로 구불구불 자리 잡은 좁은 골목은 자동차는 허용되지 않는 사람의 길이며, 집과 집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체의 길이다. 골목에선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길게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스케일, 인간적인 척도로 도시의 구석구석이 만들어지던 시대가 존재한다. 퇴색된 그림자를 들추면 한창 빛나던 시기가 또렷이 드러날 골목들이여! 유지되기를, 살아 있기를! 

골목을 빠져나오자창동예술촌이라고 적힌 문패가 골목 어귀에 붙어 있었다. 

 







오래된 장소는 도시의 박물관


늙수그레한 주인이 앉아 있는 헌책방이 있기에 들어가보았다

“77년의 일식 여관이라글쎄요. 8, 90년대 지나면서 남아 있는 있으려나?” 

수십 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헌책방은 낡은 시대의 유물들을 간절히 끌어안고 있었다. 정리조차 어려워 마구 쌓인 책들 사이에서 시대를 풍미한 책들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책의 존재감을 어찌 외면할 있을까! 나도 헌책방에서 사들인 책을 탐독했던 유년 시절이 있었다. 먼지 냄새, 삭아가는 종이 냄새는 언제나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서가를 더듬다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발견했다. 3 출간 기념으로 제작된 양장본 증쇄판이다. 세로로 도열한 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활판인쇄 특유의 오톨도톨한 질감이 전해졌다. 헌책방에 때면, 책이란 지식을 얻는 효용보다 물성을 체험하는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이란 만지고 냄새 맡고 품에 끼고 있는 용도의 물건이라고. 읽는 행위는 그다음이다. 여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토지》 3 권을 사들고 나왔다.

부림시장을 찾아가는 골목길에는 발길을 머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출출해서 들어간 우동집에서 5,60년대 풍경을 간직한 사진 점이 벽에 걸린 것을 보았다. 여전히 자리에서 문을 열고 있는 학문당 서점과 창동의 거리 풍경. 이곳이 마산의 명동 같은 곳임을 이제야 알았다. 

이윽고, 부림시장 앞에 도착했다. 배고프던 시절을 떠올리는 상호가 붙어있는 분식집들이 우리를 맞는다. 좁은 계단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들이 거대한 아케이드 양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재래시장의 현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모든 시장들이 높은 아케이드 형으로 바뀌어 휘황했다. 

다른 도시의 재래시장과 그다지 다를 없는 시장 풍경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전 기억이 모두 휘발된 까닭인지 엄마는 부림시장에 도착해서도 여관의 위치를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수십 걸었던 길인데 전혀 모르겠어.” 

시장을 벗어나 예술가의 초상이 그려진 골목에서 다른 이들의 추억을 훑으며 어슴푸레한 시간을 헤맸다. 








각자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도시가 된다


기억의 휘발은 나와 엄마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만 남아 있는 부산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높은 건물과 도로가 생겨나고 길은 막히거나 넓어졌다. 산이 옮겨지고 물길이 생겼다. 10년만 지나도 도시는 완벽하게 변화한다. 성형미인만 탓할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들 또한 모습을 바꿔가며 과거를 지우고 변형시킨다. 하지만 기억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나의 기억이자 모두의 기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가포동 차고지는 마산 시민들의 다리 노릇을 하던 버스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시내버스 공영차고지로 옮겨간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높은 곳에 있던 차고지는 카페가 되었다. 건물의 전면에는안전제일이라는 글귀가 여전하다. 버스 차량을 수리하는 시설 사이로 카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에는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는 정비소 슬로건도 눈에 띈다. 사람들은 남루한 장소에 담긴 어떤 기억에 비싼 커피만큼의 비용을 지불해도 괜찮다는 표정이다. 카페를 가득 채운 남녀노소 중에는 이른 새벽 일터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탔던 기억과, 밤늦은 시간 버스를 탔다가 잠든 채로 버스 종점까지 와버려서 망연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과 기억 때문일까? 카페는 젊은이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즐길 권리를 준다. 

도시에 남아 있는 오래된 장소( 건물 그리고 골목)에는 기념관이나 역사관에서 들을 없는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런 장소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박물관이 아닐까? 마산의 역사를 따져보자면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도시를 빛낸 역사적 인물도, 발굴해야 이야기도. 일제강점기 시인 임화와 지하련의 애틋한 이야기는 다시 마산을 방문해야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나와 긴밀하게 맞닿은 기억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에 도시를 떠올릴 때면 마음은 애틋해질 것이다. 도시와 나는 가까워질 것이다.






우동 맛은 생각나지 않지만 옛날 사진만큼은 또렷이 기억나는 우동집과, 조각가 문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구불구불한 골목과, 《토지》 판본을 샀던 헌책방과, 기억 우물이 있던 여관 기억들은 나를 여행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광대짓의 위대함,  명동예술극장 






















명동에서 연극을 본다는 것.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환상적인 퍼포먼스의 쇼도, 잘 나가는 뮤지컬도,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닌, 셰익스피어를 보러 명동에 나오다니 그것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공연을 기다리며 명동을 걸었다. 다국적 관광객들의 복잡다단한 언어들이 귓가를 스쳤다. 나의 일행은 대학생 시절에 명동성당 옆의 창고극장에 연극을 보러 꽤 자주 왔다고 말했다. 실험적인 연극을 자주 올렸던 창고극장은 몇 번의 폐관 위기를 겪으며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올해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명동은 유행이 시작되는 거리였다. 가장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태동했다. 한편, 명동성당 앞의 광장은 시민운동의 집결지였다. 그러므로 명동에는 저항의 거리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 명동은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온갖 분야의 예술가들과 문필가들이 명동의 다방에 모여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다방도, 소극장도, 양장점도 사라진 거리에는 다국적 관광객이 또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복잡다단한 언어들이 귓가를 스치고 국밥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즐거웠다. 명동의 여전함이라면 이런 활력일거다. 

그런 명동에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볼 수 있는 극장이 있다. 그것도 80년이나 된 오래된 극장이. 1936년에 개관한 후 국립극장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예스런 석조 장식은 명동을 채우고 있는 높은 건물들과 뚜렷하게 다르다. 나는 입구의 유리문을 밀고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번화하고 번잡한 거리가 닫히고 고요하고 낯선 시간대로 홀연히 빨려들어갔다.

이것은 낯선 체험이었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문화공간들을 보면 번다한 도심의 흐름과 약간은 떨어져 형성되어 있기에 기대를 품고 마음을 준비하는 전이공간이 있다. 그렇다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쇼핑센터와 푸드코트를 통과한 후에야 만나게 되는 어두운 공간은 또 아니었다. 오래되고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인파와 소음과 불분명한 문화가 소용돌이치는 명동거리와 규정하기 어려운 어느 시절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무대라는 환상을 기대하고 온 탓도 있지만, 갑작스런 공간의 전환에 나는 급속도로 상승하는 기분을 느꼈다. 기억을 떠올리자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기 전의 영화관이 이런 분위기였을 것이다. 대로변의 소음과 인파에 시달리며 외부의 티켓판매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장이요!”를 외치고 티켓을 받아들고 종종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기억 속의 그곳 말이다. 



1936년의 명치좌 

그리고 2015년의 명동예술극장 

공연을 기다리면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건물의 역사는 8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명치좌’라는 이름으로 1936년에 개관할 당시에는 토키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최첨단 극장이었으며, 영화와 연극을 둘다 올리는 무대공연장으로 관객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성 시내에서 최고로 꼽힐 만한 시설이었다. 설계자는 타다마로 알려져 있는데, 종로에 세워진 단성사와 황금관 등 경성 시내 극장건물을 상당수 그의 손을 거쳤다. 명치좌의 소유주는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그는 MGM 영화사의 조선 대리인이 되어 영화배급에도 나섰고, 1939년에는 종로의 단성사를 합병하여 운영했다.  

명치좌는 광복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 치하에서 1946년에 국제극장으로 개관했다. 1947년에는 서울시가 인수하여 회관(시공관)으로 사용했고, 1957년부터는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예술공연장이 되었다. 1962년에는 국립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명동은 유행의 중심이자 젊음과 저항의 거리였고, 문화를 추구하는 보헤미안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이 건물이 국립극장이었던 5,60년대는 명동만큼 빠르게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장소가 없었다. 

1973년 국립극장이 남산에 신사옥을 짓고 이전하면서 1975년에 이 건물은 금융회사에 매각된다. 국립극장이 사라지고 금융회사가 들어오면서 명동은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금융과 상업의 거리로 전환되었다. 먹고 살기 바쁘던 시절에는 문화는 남산이나 과천, 우면산으로 저멀리 달아났다. 노래와 춤, 연극이 일상과 멀어지자 예술가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대학가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학가조차도 문화를 잃었다고 말하는 1990년대 말 명동극장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극장의 복원과 문화의 회복을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오랜 시간 건물을 보수하면서 이 장소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리는 건물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기억이 사라진 문화유산, 

의미를 묻다  


나는 오래된 건물들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다양한 시간대의 표정을 간직한 건물이 이 도시에 더욱 많아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 이유는 건물들이 이루는 시간의 켜들이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며 도시가 가진 이야기들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의 연속성을 가진 골목과 거리는 시민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시간의 연속성은 나 이전의 문화와 역사에 내 역사가 더해져서 후손들에게 전달될 거라는 암묵적인 동의다. 나는 단편이나 파편이 아니며, 타인과, 그리고 도시라는 큰 집단과 연결되고 확장된다. 이 때 우리는 사회를 누릴 자유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갖게 된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역사도시라 불리는 데다 고풍스런 문화유산도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문화유산을 복원한 후에는 그 전만 못하다는 아이러니에 빠지곤 한다. 복원한 후에는 시간의 흔적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옛 것과 닮은 새 것이 만들어진다. 명동예술극장의 내부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외관에서 드러난 건물의 옛모습이 내부에서는 도통 발견되지 않는다. 금융회사로 사용되던 시절에 이미 건물 내부를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따라서 공연장으로 되살리는 일은 새로 짓는 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문화유산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외부의 석재 장식마저도 대부분 새로 만들어 붙였다. 석재의 손상이 심해서 세척만으로는 원형을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상이 없는 부분을 원형으로 삼아 주형을 뜨고 그 주형을 바탕으로 장식재를 제작하고 부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외관조차도 형태는 그 이전의 것과 닮아있을 뿐, 이 건물이 ‘오리지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중에 명동예술극장 복원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건축복원을 할 때 외부장식을 살리는 것 외에는 큰 지침이 없었다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게다가 80년 된 건물은 옛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예술극장의 기능까지 가져야 했다. 더 넓고 쾌적한 관람환경과, 더 다양한 무대를 갖춘 공연장이 되기 위해서, 단열과 화장실 등 필요한 설비를 보기 좋게 갖추기 위해서 옛 흔적은 모두 가리거나 지워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건축비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기능을 모두 갖추고 시간성과 건물의 기념성까지 드러내기 위해서는 예산이란 늘 부족하다. 벽돌조의 건축 내벽을 드러내기로 했던 계획의 방향은 예산 앞에서 ‘석고보드에 페인트’로 바뀌었다. 건물이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대적 삶을 충족하는 그릇으로서 존재할 것인가. 명동예술극장은 두 번째를 위해서 첫 번째를 배제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을 문화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이름 그대로 ‘명동예술극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무대라는 판타지

극장이라는 환등기 

극장은 판타지의 공간이다. 암흑의 공간에서 환한 무대를 향한 그 시간 동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으로 완벽하게 채워진 실물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현실로 되돌아오는 길은 더딜 수밖에 없다. 현실을 잊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무대를 바라본 후의 나는 그 전의 나와 다르다. 미약을 마시고 다른 영혼이 주입된 듯 고양된 정신을 갖게 된다. 물론, 현실로 돌아오면서 미약의 기운은 마치 12시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의 주문처럼 스르르 풀리게 되지만. 

원각사라는 최초의 극장이 생겨난 후로, 서울에는 신극, 연희극, 사극, 만담, 무용, 노래, 영화를 듣고 볼 수 있는 공연장이 생겨났다. 영화는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최초의 영화관의 운영했다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공연장은 유명인사의 연설을 듣거나, 난상토론을 하기 위한 집회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중매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므로 극장은 여가와 교육과, 정보 소통의 장으로도 필요한 시설이었다. 경성부에서 운영하는 극장 하나 변변히 없다는 성토를 십수년간 듣고서 1935년 완공한 부민관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시립극장은 후에 국회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강퍅한 현실을 넘어서 감정의 탈출구가 필요한 도시민들 누구나 대중연희를 즐겼다. 배우들은 남녀노소의 감정을 북돋우며 눈물과 웃음을 함께했다. 무성영화를 설명해주는 변사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활동사진이 비치고 빠른 템포로 장면이 흘러가면 이내 사람들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갔노라며, 작가 이태준은 스크린의 힘을 글로 옮겼다. 국내 최초로 연극전문극장이라고 알려진 동양극장은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 가사로 유명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연극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차홍녀와 황철 커플의 눈물의 연기 앞에서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최승희의 무용 발표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단성사로 몰려갔다. 민족의 암흑기라는 그 시대에도 무용을 관람하며 환호하고 연극을 보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완서가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썼듯이, 포격으로 폐허가 된 명동 거리에서도 극장이 불을 밝히고 미국산 토키 영화를 틀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자 하는 갈망과 욕구는 마치 본능처럼 우리에게 있었다.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의 힘이란! 



위대한 광대라는 

이름의 예술가들  


공간에서 느낀 아쉬움은 공연장의 열기로 인해 역전되었다. 연극은 길었고 예상대로 비극으로 끝났다. 그 비극은 희한하게도 눈물이나 비통함보다는 뜨거운 에너지를 주입해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탐욕스런 자들은 서로를 죽이며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죽음의 장면이 끝난 후에는 젊고 탁월한 인물들이 나타나 목도한 사건을 후대에 전하겠다고 했다. 

그때 광대가 나타났다. 광대는 늙고 정신이 나간 왕을 거울처럼 비추는가 하면, 시대를 통찰하며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읊었다. 극과 관객을 오가며 환상과 현실을 중재하던 리어왕의 광대는 관객과 판타지를 연결하는 무대예술가들의 다른 이름이다. 스크린도, 컴퓨터의 화면도 아닌, 무대에 서있는 인간 광대들의 목소리는 공기를 울려 가슴까지 와닿았다. 직접 발화될 때의 소리와 호흡은 긴장된 떨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졌다. 신체로 체험하게 되는 감정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광대짓의 위대함. 나는 변사의 목소리에 열광했던 옛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대를 열렬히 사랑하여 그 무대에 서기 위해 부모와 의절하면서까지 집을 나섰던 예인들과, 이시이 바쿠의 춤을 보고 흠뻑 빠져서 사범학교를 마다하고 무용가의 길로 접어들었던 최승희 같은 예술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명동에서 연극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거대한 상업지구에 활력과 생명력을 주는 향기는 이런 장소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명동의 역사는 또 달라질 것이다. 


(2015. 5. kb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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