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가을은 베른하르트 슐링크를 만난 해로 기억된다.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가 독자들과 만나는 작은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 《귀향》 등 아름다운 한편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이 소설들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책 두 권을 들고 그의 육성을 들으러 갔다. 일흔을 훌쩍 넘은 그는 여전히 팽팽한 문제의식으로 가득했다. 이번이 첫 방문인데, 마지막 방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유머와 여유를 보여주었다. 


슐링크의 방문으로 박경리 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슐링크 이전에는 최인훈,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메릴린 로빈슨이 이 상을 수상했다. 이해 불가한 역사의 단면들을 질문하고 되새기는 작품을 써온 슐링크가 선정된 것을 보니, 이 문학상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2015년 수상자는 아모스 오즈다. 이스라엘 출신으로 복잡한 역사 지형 속에서 이야기를 꺼내며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소설가다. 


박경리와 베른하르트 슐링크, 아모스 오즈… 닮은 듯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역사의 지형 속에 휘말린 개인의 삶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깊이 바라보는 사람들. 역사를 다루는 소설가란 그런 존재다. 상처를 쓰다듬는 존재들이다. 


통영에서 인천으로, 전쟁 직후 서울로, 다시 원주로. 박경리라는 인물은 늘 예상치 못한 도시에 삶을 부려놓았다. 도시들은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각 도시에서 보낸 삶을 따라 선생의 인생을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제1막의 시작은 통영이다. 유년시절의 좋고 나쁜 것들이 풍부했던 도시다. 신비롭고 비밀스런 바닷가 마을의 풍문들은 짠내 나는 언어와 함께 박경리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어머니를 버리고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소녀의 마음에 날카로움을 심어주었다. 금이(박경리의 본명)는 말을 줄였고 책에서 위안을 찾았다. 


제2막은 인천. 신혼의 달콤함과 평온함이 가득했던 시절이다. 남편의 부임을 따라 낯설지만 바다가 가까운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헌책들이 수시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 책들을 궤짝으로 사들여 읽으며 딸과 아들, 두 아이를 키웠다. 선생은 이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했다. 일본 유학파인 남편은 아내가 좀 더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도사범학교에서 수학하고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교직을 맡는가 했으나, 곧 전쟁이 터지고 남편이 행방불명된다. 2막의 마지막 장면은 강한 여운을 남기며 앞날을 예고한다. 




《토지》가 시작된 곳, 정릉집 

제3막은 서울에서 이어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 직후 혼란한 시절을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헤쳐 온 삶을 나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금이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 아들이 병을 치료하던 도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운명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 금이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소설가로 등단한다. 그 후 십수 년간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며 수십 편의 장편, 단편소설을 써냈다. 그러다 1969년, 그 모든 열정을 하나의 이야기에 쏟아붓기로 결심한다. 길고긴 역사소설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토지》의 시작이다.







선생이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 곳은 정릉의 오래된 집에서다. 나는 이따금 이 집 앞을 서성이곤 한다. 서울시는 이 집을 미래유산으로 매입하기를 원하지만 소유자와 원만히 협의되지 못한 상태다. 한편 정릉집은 유신정부로부터 사찰의 대상이 되었던 곳으로, 선생의 저항과 비판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집에 서면, 암울했던 시절을 오로지 글 쓰는 일로 이겨내려고 했던 작가가 떠오른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져야 하는가. 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토지》의 서문에 적힌 이 글은 언제 읽어도 마음에 사무친다. 하나의 이야기를 26년간 쓰게 될 줄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글 감옥 속에서 매일같이 연자방아를 돌리듯 살아온 삶이었다.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면서 가장 깊은 사유의 시대를 살았고, 그것은 작가에게 고통만큼의 희열을 주었을 것이다. 50년에 걸친 3대의 이야기에는 등장인물만 해도 700여 명이 넘는다. 민초의 삶은 매일 방영되는 드라마처럼 생생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남쪽 끝의 사투리와 북쪽 끝의 사투리가 뒤섞이고 남쪽의 아지랑이 피는 풍경과 북쪽의 강물이 꽝꽝 얼어붙은 풍경이 겹친다. 수많은 민초들은 소설가의 분신이다. 용이에서 월선으로, 서희에서 길상으로, 우관선사에서 윤보로, 단 한 번만 등장하는 노동자와 농사꾼과 장돌뱅이의 입에서도 작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원주,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곳 

완독을 목표로 《토지》 읽기를 시작하고 몇 달이 흘렀다. 대하소설의 중간 정도에 이르자 선생 곁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박경리 선생을 기념하는 장소들이라면 통영, 원주, 하동 등 여러 곳에 있고,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옛집도 있다. 정릉집이 기념관으로 바뀐다면 좋겠지만,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곳을 찾는다면 원주 옛집이 좋으리라. 시간이 허락한다면 원주 흥업면에 있는 토지문화관도 들러볼 수 있다. 《토지》 집필이 끝난 후 펜을 놓은 대신 호미를 든 선생이 농작물을 키우며 글을 쓰러 온 작가들에게 따뜻한 밥을 내어주던 곳이다. 토지문화관은 글 쓰고 예술 하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집필실이다.






단구동에 자리 잡은 옛집 주변으로 너른 공원이 꾸며졌다. 이름 하여 ‘박경리문학공원’이다. 선생의 삶과 저서를 살펴볼 수 있는 ‘문학의 집’도 곁에 세워졌다.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관엽식물과 침엽수들이 노랗게 빛바랜 겨울 정원을 선명하게 채웠다. 정원 중간에 너른 바위에는 앉아 있는 선생의 모습과 애교를 부리는 듯한 고양이 동상이 함께 있다. 선생은 16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키에 자그마한 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직접 땅을 일구고 미싱을 돌려 옷을 만들던 선생이 큰 손을 가졌으리라 믿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작가의 몸은 실재하는 것보다 훨씬 큰가 보다. 


옛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사랑방에 깔린 바닥지며 벽지, 주방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십여 년 전의 예스런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방은 향을 피울 만한 사물이 전혀 없었지만 정갈한 향내가 나는 것 같다. 묵직한 탁자에 앉아 사전과 책을 들추던 집필실, 책이 무너질 만큼 꽂히고 쌓여 있던 서가, 손님에게 내주었던 건넌방, 주방과 거실. 넉넉한 공간에 겨울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창을 통과한 따뜻한 볕이 은근한 그림자를 만들며 바닥을 데운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 토지 초판본이 놓여 있다. 꾹꾹 눌러 찍었을 인쇄본은 작가가 온몸으로 부딪혀 쓴 글자들만큼 식자공의 손길이 들어갔을 테다. 한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길고 지난한 세월이 내게도 훅 밀려든다. 시간이란, 시간이란! 







박경리 인생의 제4막은 원주에서 시작된다. ‘근원이 되는 곳’이라는 이름이 선생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토지 3부를 마무리하고 삶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1980년부터 원주의 삶이 시작된다.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구속되자 시댁으로 들어간 딸과 손주를 곁에서 돌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2층짜리 양옥집 앞에는 칠백 평가량의 텃밭이 있어 손수 무언가를 지어먹기 좋았다. 단단하고 넓고 환하고 따뜻하기란 정릉집에 비할 수 없었으리라. 선생은 손주들이 노는 모습을 보려고 거실 창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1994년에 이 집에서 《토지》의 긴 여정이 모두 끝난다. 


폭풍 같은 세월이 잠잠해질 때 인간은 어떤 마음을 느낄까? 이 집에서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담담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저항과 고통과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이곳에서 느낀다. 아주 오랫동안 싸운 후에야 깊은 깨달음과 긴 안식이 찾아온다는 것도.

































오래된 성당은 향기가 있다. 몇해 전 여름날, 나는 성공회신자인 친구 P와 함께 J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정동에 있는 성공회성당을 구경했다. 밝은 오렌지빛의 몸체와 지붕은 지중해의 햇살을 받은 것처럼 따사로웠다. 장엄하면서도 온기가 넘치는 장소였다. 성당 안은 벽이고 기둥이고 모두 하얬다. 높은 천장만이 오래된 목조의 짙은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햐안 벽과 기둥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무지개빛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단 뒷면의 돔에는 금색 모자이크 벽화가 찬란한 빛으로 성당 내부를 밝혔다. 신앙과 삶이 밀착되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친밀감이 가득했다. 이런 살뜰한 감정을 ‘영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지하의 소성당은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오르겔이 있었고 사람들은 촛불을 켜두고 고요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바닥 중앙에 금장으로 장식된 곳은 특별히 더 성스럽게 보였다. 이 성당을 축성한 트롤로프 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한껏 고양된 나에게 친구 P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웠다. 이 성당에는 초기부터 이어져온 혼배성사첩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첫 페이지를 펼쳤던 순간의 이야기였다. 첫 혼배성사의 날짜는 1899년 3월 22일이었고, 장소는 제물포성당이었다. 신랑은 서양 국적의 52세의 토마스, 신부는 일본 국적의 25세의 유키였다. 나이가 곱절인 신랑을 맞이한 유키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토마스는 어떤 이유로 조선땅을 밟았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낯선 땅 조선에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모습이 백여 년 전 이 땅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토마스에겐 동방의 끝, 유키에겐 서양을 향한 시작이었을 이 땅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그 후로, 나는 연인들의 흔적을 찾아 가장 오래되었다는 성공회성당들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옛 연인의 흔적은 이미 사라졌지만 성당의 진실된 아름다움을 여실히 느낀 나날이었다. 




성당이라는 배에 오르다 

영국국교회인 성공회가 이땅에 상륙한 것은 1890년의 일이다. 조용히 물가에 닿은 배처럼 이 종교는 민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성공회성당은 높은 첨탑도 없고 위압적인 성화도 없다. 선교 초기부터 토착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은 건축을 지향해온 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토착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던 데는 한옥의 힘이 컸다. 19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진 수많은 초기 성당들이 한옥의 외피 속에 서양교회의 원형인 바실리카 양식을 삽입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로 손꼽히는 정동 성공회 성당도 원래 한옥성당이 있던 곳이다. ‘외교관 거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정동은 서울이 국제도시라 불릴만큼 외국인들이 많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한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열 줄기 물길을 합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인, 일본인, 한국인 신자들이 각각 다른 한옥성당에 모였던 것이다. 

트롤로프 주교는 흩어진 신앙인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고자 했다. 1914년부터 시작된 새성전 사업은 트롤로프 주교에게 힘겨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헌금으로 모인 육천 환과 영국에서 지원받은 팔천 환을 합해도 총 공사비 삼만 환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결국, 일시에 완공을 보기보다는 일부만이라도 지어서 성전을 열기로 했다. 

공사는 1924년부터 시작되어 2년만에 끝났고, ‘성모와 성 니콜라스를 위한 성당’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하늘에 봤을 때 라틴십자가 형태가 되어야 했으나 팔이 없이 일자형으로 마무리되었고, 신도석의 규모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 건물의 설계자인 영국인 건축가 아서 딕슨은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까지 먼 뱃길을 달려와 자신의 마지막 작품 앞에 섰다. 그는 꼼꼼히 작성한 도면과 스케치, 그리고 모형 등을 가져왔으나, 절반의 완성 앞에 새로운 도면을 그려야했다. 그의 심경은 건물이 완공된 후인 1927년 건축잡지인 <건축과 조선>에 실렸다. 

“... 완성 후에는 하나의 콰이어(성가대석)와 일곱 개의 베이(bay)를 가진 네이브(nave)와 두 개의 트란셉트(transept)로 이루어질 것이나, 현재 네이브의 베이는 단지 세 개에 불과하며 트란셉트는 극히 일부부만 완성된 데 지나지 않는다..... 주교님이 택한 전통은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12세기까지 멀리 유럽에서 행해지던 이른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양식이 발달 변화한 것으로, 보다 더욱 동양풍을 가미한 비잔틴 양식과는 형제 사이와 같은 것이다..... 머지 않아 성당 정원에는 전나무와 기타 수목을 심어 주위에는 낮은 담장 또는 사철나무를 두르고 도로에서의 조망을 미화할 예정이다. 남쪽 탑 위에 최근 단 종은 영국의 로프바로에서 주조한 것으로 영국 제일의 것이다. 이 건물이 언제 완성할 것인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다.” 

딕슨은 1929년에 생을 마감했고 트롤로프 주교도 고베에 다녀오는 길에 해상에서 사고를 당해 1930년 운명했다. 이로써 건물 복원에 대한 염원도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혔다. 





복원, 70년의 세월을 봉합하다

1991년 건축가 김원에게 성당을 증축하고 복원하려는 의뢰가 들어왔다. 건축가는 현대적인 감각에 따라 증축하여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왕립건축학회에 보관된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검토하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잉크로 정교하고 세심하게 그은 선을 더듬으며 원 설계자가 느꼈던 미완의 아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옛 건축가가 미지의 건축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가 언제 이 미완의 건축물을 완성에 이르도록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분명한 희망으로 써내려간 편지.

건축가는 문화재 건물의 복잡한 법규와 규제를 해결해가며 옛 설계를 그대로 옮겼다. 새로 덧붙여야할 공간은 지하로 숨겼고, 옛 건물과 새로 지어지는 부분이 안전하게 맞물리도록 애썼다. 벽돌은 지금의 것과 형태나 크기가 달라 특수제작을 했고, 석재가공은 국내 업체를 찾을 길 없어 모두 중국에서 작업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처음 건물을 계획했던 마음 그대로를 담았다. 그것은 70년이라는 세월을 봉합하는 일이었다. 본래의 모습을 갖게 된 성당은 1996년에 두 번째 축성식을 가졌다. 

정동 성공회 성당은 세월이 건물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1926년과 1996년의 두 시대의 삶이 합쳐지듯, 옛 건물과 새 건물이 경계없이 스며들어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 그 공간에서 세월을 넘은 두 건축가의 대화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부산에서도 예술가들이나 마을활동가들이 원도심 재생사업에 나선 현장들을 자주 목격했다. 마음 벅찬 적도 많았지만 갑작스런 뜨거운 활동들이 기름을 끼얹은 불꽃같아 아슬아슬할 때도 있었다. 최근엔 지자체에서 나서서 테마거리를 조성하고 푯말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다. 고요히 유지되던 커뮤니티들이 부동산바람에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며 오래되고 연약한 건물들 또한 살아남지 못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 

백제병원은 그 틈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근대건축물이다. 단단한 벽돌이 검붉은 장밋빛을 유지하며 백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확장과 증축을 거치며 여러 변화를 거치긴 했으나 옛 모습이 여전하다. 고요하다 못해 비밀스럽기까지 했던 이 건물에 들어가보게 된 것은 우연과 인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 연구자인 친구 L로부터 연구주제로 백제병원을 다루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되지 않아, 문화공간인 ‘통의동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가 ‘도시의 기억’이라는 테마의 세미나를 백제병원에서 열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왔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이 건물을 이야기했다. 도대체 백제병원이 무엇이길래? 건물을 찾아가면서 유년의 기억이라는 빈약한 그림자와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먼 시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물결쳤다. 모든 건 친밀하면서도 모호했다.





꽃 같은 건물은 길모퉁이에 있었다. 4층 건물의 절반 이상이 비어있었다. 내부의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덜어낸 채로, 오래된 틀로만 남아있었다. 벽돌은 근사했고 아치형으로 난 창과 문은 오히려 현대적인 감각으로 읽혔다. 나무로 된 계단과 ‘오시레’라 불리는 일본식 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내부는 흥미로웠다. 나무문이며 창틀이며 모든 오래된 것들이 견고하게 남아있어 숨을 멈추게 했다. 건물 2층에서 열렸던 세미나는, 건물에 대한 관심인지 주제에 대한 관심인지, 초대인원을 훌쩍 넘겨 빈 공간 하나 없이 가득 메웠다. 그들 중에 이 건물의 주인인 정은숙 씨가 있었다. 





이 건물이 가진 모호함과 아름다움은 그해 가을과 겨울 동안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해를 넘기기 직전 나는 친구 L과 함께 백제병원을 다시 찾았고, 정은숙 씨를 만나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동네에 사무실을 두고 오랫동안 살았으나 한번도 관심있게 본 적 없었던 건물이 어느날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던 그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서울로 떠난 건축주를 무작정 찾아갔던 자신의 심경과, 절대 팔지 않겠다며 완강하던 건축주가 정은숙 씨에게 건물의 주인이 나타났구나,하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 마음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게 행운처럼 건물을 갖게 되었으나 오래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물은 오랜 정성을 기울인 후에야 몸을 열었다. 정은숙 씨는 건물의 몸 속이며 외부까지 구석구석 만져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건물의 미래에 대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절대로 이 건물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일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연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건물을 다시금 채워가는 계획을 세웠다. 젊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좋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현대적인 개념의 공간들을 이 오래된 건물에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옛 건물의 가치를 알고 정성껏 매만질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하여 장밋빛 벽돌이 여전히 빛나는 1층의 너른 공간의 리모델링과 운영을 ‘브라운핸즈’라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자 그보다 큰 활동을 담보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한다. 도시라는 벅찬 단어도, 재생이라는 생경한 단어도, 관광이라는 세찬 단어도 백제병원의 계획에는 없다. 젊음, 교류, 아름다움, 즐거움, 활동 그리고 예술. 이 우아하고 창조적인 단어들이 오래된 건물 속에 스며들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찍은 <카페 뤼미에르>에는 도쿄의 전철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엿보인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하지메’가 전철 소리를 녹음하러 다닌다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여주인공 요코가 걷고 멈추고 잠들고, 말없이 무언가를 응시하는 순간에도 전철은 어김없다. 철로 위를 가볍게 미끌어지는 전철은, 한낮의 햇볕처럼 삶으로 쏟아져 들어와 도시 사람들에게 인연을 만들어준다. 기차가 서로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도쿄의 상징이다. 





도쿄의 전철이 언제 생겼을까? JR 야마노테센의 역사는 1885년부터 시작된다. 도시철도가 조금씩 길어지고 휘어져 완전한 동그라미 순환선이 된 것은 1925년. 도시철도는 노면전차와 환승되면서 시민들을 직장과 집으로 이동시켰고,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지하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함께해왔기 때문인가, 도쿄 사람들은 전철과 정서적으로는 물론, 공간적으로도 밀착되어 있다. 도쿄의 전철은 길가의 건물들과 바짝 다가서서 달린다. 부딪힐 정도로 가까울 때도 있다. 이 소음과 먼지를 그들은 어떻게 감당하나? 그러나 창문 너머 아파트 베란다엔 새하얀 빨래들이 주렁주렁 나부낀다. 우리에게 지하철은 이런 형용사로 점철되지 않을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서민의’ ‘세련되지 못한’ ‘소음이 많고 번잡한’ ‘위험한’...  







고가철로가 있는 야마노테센이나 추오혼센은 철교 아래 자투리 공간을 근사한 상점가로 바꾼 경우가 종종 있다. 간다천이 흐르는 운하 옆에 자리한 렌가아치(レンガ アーチ, 붉은 벽돌 아치) 상점가 ‘마치 에큐트(mAAch ecute)’도 그 중 하나다. 오랜 시간이 스며든 붉은 벽돌과 화강석의 고풍스런 세공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부분과 만나 세련된 공간미를 연출한다. 이 철교는 추오본센 전철의 종착역인 간다만세이바시(神田万世橋)역이 있던 곳으로 1912년에 완공되었다. 간다강을 건너는 철도교가 없었기에, 강과 맞닿은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은 유럽풍의 화려한 붉은 벽돌 역사를 통과하여 노면전차로 환승하곤 했다. 일대는 번화가 중의 번화가가 되었다. 웅장한 역사가 1924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다시 지어지는 동안, 강을 지나는 철로가 세워지고 1930년대에는 지하철공사가 시작되면서 만세이바시 역의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주변 역시 화려한 번화가로서의 면모를 잃는다. 1938년, 만세이바시역은 업무를 중단하고 교통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다양한 열차들이 철로를 달렸을까? 다양한 전철들이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6년 교통박물관이 시즈오카 현으로 이전한다. 보수복원한 만세이바시 철교는 2013년에 상점가로 재개관했다. 











겉으로는 붉은 벽돌로 치장되어 있지만 문을 열고 상점 안으로 들어오면 높은 층고로 시원하게 아치형을 그리는 노출 콘크리트의 내부를 만나게 된다. 지금도 상부에는 중앙선 전철이 왕복으로 지나다는데, 그 소음이나 진동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손맛나는 오브제와 소품들, 소량제작하는 문구와 만세이바시 기념품, 싱싱한 로컬푸드들, 베이식한 디자인의 패션아이템들이 공간을 채운다. 아치형 창문 밖으로는 간다강의 짙푸른 물결이 출렁인다. 

숍 중에는 소품과 잡화, 카페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는 후쿠모리가 가장 크다. 야마가타 산 싱싱한 채소를 이용한 채소 정식과 생선 정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신선해 보이는 음식들이 먹음직스럽다. 그러나, 야마가타 현이 어디인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여행에서 채소와 생선을 먹는 일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무엇을 선택해도 실패하지 않는 이 미식의 도시에서 원료의 산지를 따져야 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1912계단을 밟고(1935계단도 있다) 2층 플랫폼에 오른다. 추오센 왕복 철로 사이에 카페가 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창고를 밝고 투명한 장소로 만든 것이다. 지하철이 지나가면  유리창이 바르르 떨릴 테고 철컹철컹 소음도 귀를 울릴 텐데, 지하철에 탄 사람들과 손님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도록 좌석을 만들었다. 사방으로 트인 창으로 도쿄의 햇살이 폭발한다. 

카페 뤼미에르. 이곳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도 좋겠다. 







 






지난 여름 <공간의 탐닉>이라는 전시회를 다녀왔다. 운영을 마친 폐소각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전시는 흥미진진했고 공간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어떻게 변화할까, 계속 궁금해지는 장소였다. 



경기도 부천시 삼정동에 있는 쓰레기소각장. 높다란 굴뚝이 있는 7층 높이의 플랜트가 재활용될 대상이었다. 7월에서 8월까지 열린 첫 전시회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0월에도 대안미술공간들과 협업한 결과물을 선보인다고 한다. “여가를 즐기려는 시민들보다 산업시설물의 재생에 관심있는 전문가들이나 학생들이 곳곳에서 찾아오더군요.” 프로젝트 매니저 손경년 씨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건물을 바다보는 관점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아직 설비가 들어차있는 플랜트는 개방하지 않은 채 반입동과 관리동의 두 건물에서 열린 전시회는 그동안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갤러리 공간을 벗어나 일상의 영역에 놓인 예술은 공감의 시선 속에서 빛났다. 반입동의 일부는 플랜트와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 37미터의 뻥뚫린 공간을 곧장 바라볼 수 있었다. 너울거리는 천과 음향의 묘한 리듬이 어둡고 거대한 공간에 뻥뻥 울렸다. 어떻게 여기에 작품을 걸 생각을 했을까? 관리동 지하실은 물이 차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설치되었다. 습기와 수증기와 흐릿한 빛 속에서 공간은 아련한 기억들을 뱉어냈다. 박병래 작가의 <유틀란디아>라는 영상 작품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작품 자체는 이해될 듯 말 듯한 지점에 있었지만, 고인 물에 비쳐 두배로 증폭된 영상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습한 냄새와 서늘한 공기는 시청각적인 작품을 촉각과 후각으로 확대했다. 작품이 걸리지 않았더라도 이 공간에 들어온 것 자체가 예술적 체험이었다. 


공개되지 않은 플랜트는 몇몇 예술가들과 함께 탐방했다. 전기가 끊기고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 모든 게 질서정연했다. 천장으로 새어드는 빛이 어둠을 가르며 군데군데 건물의 형태를 비췄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모두의 기대감이 아우성쳤다. 스무명 남짓은 고고학 탐험이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비밀의 땅을 밟았다. 기계들의 잔해는 발굴 현장 같았고, 제어실의 버튼들은 어둠에 파묻힌 보석처럼 빛났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자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수도권의 중소 도시의 풍경이 드러났다. 우리가 본 것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다들 놀라움과 고민스러움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탐방의 인솔자인 부천문화재단 류자영 팀장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이 장소가 기계미학을 체험하는 예술의 장소로만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지자체와 싸우고 협의하며 만들어낸 특별한 시민의 역사가 깃들였던 것이다. 1995년 소각장이 지어질 무렵 부천시는 인접한 6개 도시의 쓰레기를 모두 반입하는 광역 소각장을 추진다가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수년에 걸친 복잡한 싸움을 거치면서 소각장은 규모를 줄였고 소각로의 내구성이 허하는 15년 동안만 사용하는 협의안이 결정되었다. 15년 후, 주민과의 약속대로 삼정동 소각장은 운행을 멈추었고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바뀌게 되었다.




삼정동 소각장은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의 목소리를 만들고 의미를 영글게 하는 곳으로 바뀔 것이라고 한다. 과연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을까? 난제는 곳곳에 있다. 무엇보다 도심에서 훌쩍 떨어져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게 최대의 단점이다. 자원과 환경을 연구하는 단체, 환경디자인을 실험하는 회사와 학교 등 전문집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면 어떨까? 프로젝트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가장 적절한 해법을 찾아갈 거에요.” 



어떠한 결론에 이르던 그 과정은 지난해야 한다.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빚고 욕심과 결핍을 드러내며 죽을 듯이 싸우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약속을 받아내고 약속을 지키는 과정과, 고민을 공유하고 더 좋은 것을 찾아헤매는 과정. 긴 투쟁으로 겨우겨우 협의를 얻어내는 이 순정한 과정의 중요성을 우리는 종종 잊지 않던가? 건축물은 다양한 목소리를 뒤섞으며 도시의 서사를 담아낼 것이다. 진정한 재생은 그 과정에 있다. 


 



















안녕하세요, 이쾌대 씨 




그림과 음악과 문학. 그 사이에서 “예술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이 낡은 질문을 늘 새로운 대답을 요구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예술은 작은 역사라고. 격랑의 시대에 파묻힌 개인의 기록이며,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남루한 시대조차도 빛나게 끌어올려진다고. 낯선 화가 이쾌대가 찾아왔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안녕하시오, 여러분. 









낯선 이름, 이쾌대

이쾌대. 한번 들으면 결코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처음에, 그는 낯선 이름으로 멀찍이 서있었다. 두 번째로 이쾌대라는 화가를 보게 된 것은 그의 작품 <카드놀이하는 부부>에서 묘한 도발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초록색 저고리를 입고 쪽을 진 전통적인 여인을 보라. 아내는 남편과 함께 카드놀이에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부드러운 쾌남 스타일의 남편의 표정과 달리 아내는 새초롬한 표정이다. 


“당신 때문에 게임을 계속 못하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방해할 건가요?” 


아내는 이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이 아내,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무심하듯 시크하다고 할까? 모두 일곱장의 카드를 들고 있고 테이블에는 여러 장의 카드가 펼쳐져있다. 카드게임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이 게임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나는 도통 모르겠다. 숫자와 그림을 맞춰 하나씩 카드를 버리고 가장 먼저 버리는 사람이 이기는 그런 게임일까? 무엇보다 카드 테이블에 놓인 술병이 시선을 끈다. 병 모양이나 색깔로 봐서 위스키가 아닐까?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즐기면서 카드게임을 하는 아내는 백년 전 여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이쾌대는 감성이 충만했던 휘문고보 시절에 근처에 살던 여학생 유갑봉에 첫눈에 반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를 아내로 맞은 이쾌대는, 그 아내가 너무나 귀하고 어여뻐서 평생 존대할 정도였다. 부부는 사진으로 봐도 무척 닮았다. 심지가 강해보이는 아내는 전쟁 중에 궁핍하던 시절에도 화가가 북으로 간 뒤에도, 화가의 그림을 절대 놓지 않았다. 



너는 내 운명. 이들 부부에게서 느껴지는 단 한마디는 바로 그것이다. 


















<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탐스런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술을 마시며 남편과 카드게임에 열중하는 아내. 

자못 유쾌한 설정은 1930년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상황, 1938> 외세에 대항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힘과 

봉건적인 구습에 저항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두 가지 과제가 예술가들 앞에 놓여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 알레고리로 담겼다. 






시대의 얼굴을 그리다 


세 번째로 이쾌대를 깊이 새기게 된 것은 원주 한솔뮤지엄 개관전에 걸린 석 점의 대형 작품을 본 이후다. 그의 대표작인 <상황>과 <운명>을 보았을 때 이 화가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건 아닌지 불현듯 부끄러워졌다. 1938년에 그려진 이 두 작품은 이쾌대가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전람회 출품을 위해 그린 것들이다. 알레고리화처럼 보이는 <상황>이나 비통한 애도를 표현한 <운명> 모두 강렬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지도 설정할 수도 없었다. 그림에서 풍기는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층의 수수께끼를 담은 그림과 선연한 색채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이쾌대를 만나게 될 시간을 나는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은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두루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바람도 없이 찜통같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림은 서늘했다. 한여름의 열기마저도 차갑게 식히는 결기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인물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화폭에 담긴 인물들의 날카롭고 짙은 눈빛들, 생생한 표정들이 압도적이었다. 미술관의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에 이런 얼굴의 사람과 마주칠 것 같았다. 피가 돌고 살이 뜨거운 저 살아있음. 이것이 식민지 시대 청년들의 얼굴일까? 그 얼굴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첼로를 연주하고 시를 쓰오. 들어보시겠소?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소. 

나도 꿈이 있소. 나는 멋지게 살아갈 것이오.

거긴 안녕하시오? 여긴 뭐 그냥 그렇습니다만. 




이쾌대는 1930년대부터 1950년까지 근현대의 가장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다. 이쾌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보고싶어졌다








이쾌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대 현실 속에서 곧바로 끌어올린 듯 생생함이 묻어난다. 

그들의 표정에서 당대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1930년대 청년의 모습이다. 






혼란한 시대,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유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여유롭고 풍족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족함 없이 자유롭게 성장했다.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도쿄로 가서 제국미술학교(오늘날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에게는 열두살 위의 형님 이여성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이여성은 항일에 뜻을 두고 만주에서 활동했고, 도쿄로 유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섭렵한 지식인이었다. 상하이, 도쿄, 만주 그리고 경성을 오가며 정치와 사상뿐만 아니라 미술과 학술연구에도 심취했다. 

이여성은 1939년 ‘신동아에 실린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말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현실 조선의 과학적 파악자인 예술가-우리의 예술가는 유한자를 위한 사치품의 제조자가 아니오, 민중의 피와 살을 돋우며, 그 감각과 기분을 살리면서 또 생활과 활동을 향도하고 붙들어 주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면 아닐지니 조선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여 그 마음의 소리를 밝게 듣는 예술가가 요구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여성은 민중을 위한 예술을 설파했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었던 큰형의 울타리는 이쾌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조선에서 예술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여전히 이쾌대라는 화가가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전쟁 이후 북쪽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의 족적이 너무나 미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선미술전람회나 미술협회 등 식민지 시대의 관전이나 기관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해방공간에서 그의 흔적은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인 몇 개의 미술협회와 성북회화연구소라는 장소에서 나타난다. 성북회화연구소는 후대 많은 화가, 조각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불과 4년여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해방공간에서 그림을 배울 장소로는 그곳뿐이었다. 







군상 시리즈. 곤궁한 시대에 불어닥친 해방의 바람을 표현했다. 

대형벽화처럼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군상 시리즈는 

이쾌대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에 이르면 선이 편안해지며 

전통적인 붓칠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그림, 누군가의 희망을 보다


이쾌대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을 하나 구했다. 삼선교 부근에 있는 상가건물이었다. 화가의 꿈은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군상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큰 화폭을 다듬은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장소에 예술대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들이닥쳤다. 그림을 그릴 공간과 그림을 배울 선생이 필요했던 학생들에게 이쾌대는 흔쾌히 공간을 허락했다. 어느새 서른명 가까운 학생들이 모였고 그의 화폭을 바라보며 데생을 하고 그림 지도를 받았으며 그의 예술론을 경청했다. 


돈암동에서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겨서 4년 남짓 운영되던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해방공간은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이념을 요구했고 그 어느쪽도 선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쾌대는 머뭇거렸다. 실낱같은 희망이 핏빛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그림을 남겨둔 채로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성북회화연구소도, 그가 심오하게 바라보았던 인물들도 육체들도 봄날의 바람도 이제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 돈암동 458-1번지에 있었다는 그곳은, 지금은 사라진 지번이다. 그곳은 그러므로 사라진 시대의 장소다. 예술은 끊임없이 유전되고 전래되지만 그에 비하면 장소의 생명은 얼마나 짧은가. 



그렇다면 화가가 몰두했던 시대의 얼굴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 시와 음악과 그림과 사람을 말하던 그 얼굴들을 나는 여기, 도처에서 본다. 시청앞 광장에서, 덕수궁에서, 광화문에서, 도로에서, 지하철에서. 이쾌대의 시대처럼, 이 거리의 얼굴들도 간절하고 또 강인하다. 

















건축가 사바친의 흔적을 찾아서



도시의 골목은 가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인 것처럼 문득 낯설어진다. 그럴 때면, 이 도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이방의 여행자가 된다. 이방의 시선은 내부적 존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진귀한 눈이다. 이 땅을 스쳐간 역사를 더듬을 때 이방인의 기록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도쿄 여행에서 길을 지나던 길이 우연히 문화재로 지정된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츠비시를 세운 이와사키 집안의 저택 중 하나였는데, 규모와 화려함이 유럽에서 보았던 궁을 연상케했다. 목재와 벽지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이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는 조시아 콘더(Josiah Conder). 영국인인 그는 자국의 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화려하게 이식했다. 

콘더가 일본에 온 것은 1877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 후 40여년 동안 메이지시대 상류층의 유흥공간인 로쿠메이칸, 오랜 후원자였던 미츠비시의 양관과 저택들, 성 니콜라이 성당 등 교회와 성당 등 메이지 시대를 이끄는 건축가로 활동했다. 공부대학교 조가학과(후에 동경대학교 공학부 건축과) 교수를 지냈으며 그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이후 일본의 건축을 주도했다. 동경대 건축과 건물 앞에는 그의 동상도 세워져있다. 콘더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다쓰노 킨고는 동경역 등을 지었으며 킨고의 제자인 츠카모토 야스시, 나카무라 요시헤이 등은 조선의 건축에도 족적을 남겼다. 경성역, 중앙고등학교 동관, 서관, 한국은행 본점, 군산 조선은행, 옛 충남도청 등등.




1. 조시아 콘더는 메이지시대의 건축을 이끌었다. 옛 이와사키 저택. 

2. 미츠비시1호관의 도면. (1894년 완공)





구한말 궁정의 외국인 건축가 사바친 

조시아 콘더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면서 우리 땅에도 그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가 서양식 건축문화를 이식해온 사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크라니아 출신으로 스물셋에 조선에 온 아파나지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친.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다. 조시아 콘더와 마찬가지로, 한창 젊은 나이에 극동의 작은 나라에 들어와서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경운궁의 양관(관문각, 중명전, 정관헌, 돈덕전, 구성헌)과 인천해관청사, 독립문, 정동 러시아 공사관, 손탁호텔, 세창양행 사옥과 사택, 홈링거 양행 사옥, 제물포 외국인 구락부 등을 지어 개화기 인천과 서울에 양식 건축의 풍경을 이식했다. 



특히, 1900년대 전후로 경운궁(현재 창덕궁)의 양관 건축에 깊이 관여했던 바, 대한제국기의 궁정건축가라는 그의 직함을 다시 한번 주의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사바친은 아내, 그리고 다섯 아이와 함께 인천 조계지에 살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순양함을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사바친의 가족은 상하이를 거쳐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으나 그곳 생활에 정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들 가족에게는 조선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극동의 생활을 그리워했던 사바친의 가족은 1908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다시 왔고,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미국 등으로 흩어졌다. 사바친은 유랑의 삶을 살다가 1920년에 볼가 강 근처 어디쯤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 대한제국기 경운궁(덕수궁)의 양관을 설계한 사바친.
        2. 덕수궁 내부에 있었던 돈덕전. 



사바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태중 교수의 논문 <개화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1993)>을 참고로 하면, 그는 성실하고 강직한 원칙주의자였다. 인천에 도착하고 인천해관에 소속된 관리로 몸담았던 10여 년간 세레딘-사바친은 아직 서양식 건축물을 수용할 수 없었던 정부의 호출을 기다리며 어려운 날들을 보냈다. 제안들은 반려되었고 제대로된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경복궁 내에 관문각 공사를 맡게 되었는데, 공사 현장에서 불합리한 행동을 일삼는 한국관리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를 신임했고, 어떤 대안이든 해결해주려 노력했다. 경복궁 수비대에 사바친이 배치된 것도 그의 성실함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때, 명성황후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는데, 전모를 목격한 그는 외국 언론에 자신이 본 것을 거짓됨 없이 알렸다.  





        1. 손탁호텔의 외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엽서 
        2.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한국전쟁시기 파괴되고 긴 탑신만 남아있다. 



이후 10년을 살펴보면 그는 실리를 쫓는 약삭빠른 사람이기 보다는, 한번 목표한 것을 끝까지 관철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레딘-사바친은 해관의 신분에서 벗어나 건축가로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가 등장하자, 왕은 경운궁의 양관 프로젝트를 서둘러 진행한다. 1900년 전후로 왕은 외국 공관들에게 내어주었던 정동의 땅을 다시 사들였고 궁궐 권역은 점점 넓어졌다. 거기에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양관들이었고 그 주역은 세레딘-사바친이었다. 황실 도서관이자 황제의 집무실이었던 중명전, 어진을 보관하던 상징적인 공간인 정관헌을 비롯해서, 침전과 정전이 있던 돈덕전, 환벽정 등이 사바친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돈덕전은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으나 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붉은 벽돌과 묵직한 장식, 영국공사관과 미국공사관 사이에 가로놓인 절묘한 위치는 이 장소의 의미를 좀더 되새기게 해준다. 왕궁건축과 맞물려 새로운 일들이 쏟아졌다. 고종에게 매일 같이 올렸다던 커피의 주인공 앙투아네트 손탁이 운영하던 손탁호텔을 지었고, 인천에는 외국인들이 어울려 회포를 풀 수 있는 제물포 구락부를 완공했다. 20년의 세월 동안 두 도시에서 풀어놓은 건축물들은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 조계지 건축가로서 외국인들을 위한 건축물에 그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제물포구락부. 
        2. 자유 공원 내에 건립되었던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사택.  



기록되지 않은 인생을 엿보다 

나는 낯선 땅에 빌을 디딘 스물 셋의 젊은 청년이 본 하늘과 화염을 뒤로하고 다급하게 짐을 꾸려 프랑스 순항함에 몸을 실은 마흔넷의 남자가 바라본 하늘이 어떻게 달랐을까, 궁금해진다. 은자의 나라에 점점 가까워지며 호기심과 기대감이 부풀어올랐을 1883년 9월과 점점 멀어지는 그 땅 위로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던 1904년 2월. 지지리도 고생스러운 한편, 환희와 감격으로 벅찼던 20년의 세월이 그 사이에 압축되어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젊음을 모두 던졌던 20년이었다. 그가 바라보았던 조선은, 대한제국은 어떠했을까?


안타깝게도 사바친이 남긴 흔적은 여기까지다. 미국에 살고 있다는 유족들의 증언과 아들이 남긴 회고록(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 학자들이 연구한 사바친의 약사 정도가 있다.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미약한 언어들을 추려보자면, 1908년에 나가사키로 온 사바친은 가족들을 그대로 두고 대륙으로 떠났다. 은둔자처럼 유랑하는 사바친을 찾아온 아들에게 남겨준 것은 사냥용 총, 카메라, 제도용품, 그리고 판화 콜렉션이었다. 한 인간의 보유한 사물들이야말로 그를 설명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면, 총, 카메라, 제도기, 그리고 판화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축가가 모든 걸 다 버리고서라도 떼어놓을 수 없었던 필수품들일 터이다. 나는 그 총이 쏘아 맞춘 것들이 무엇일지, 카메라에 들어있는 필름에 찍힌 것들이 무엇일지(카메라는 어떤 상표의 어떤 기종인지도!), 그 제도기가 그린 도면들은 과연 어디 있을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그림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극동의 끝 조선으로 밀려오게 한 홀연한 바람과 홀로 다시금 대륙으로 걸어들어가게 한 그 바람은, 그리하여 태어난 고향까지 다시 그를 밀어놓은 그 바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몇 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인생의 여정 동안 인물을 휘둘렀던 바람같은 운명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공사관 거리, 정동을 걷다 

나는 정동길에 서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면 정동제일교회를 기점으로 왼쪽은 옛 경성재판소를 개조한 시립미술관이, 우측에는 미국대사관저, 그리고 큰 길을 따라 영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길따라 쭉 올라가면 좁고 아기자기한 보도 주변으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화여고 박물관, 정동극장 안쪽에 있는 중명전, 옛 신아일보 본사 등이 가로수 사이로 몸을 드러낸다. 이 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공사관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학교와 사무실들을 오가는 발걸음들이, 느긋하지만은 않은 속도를 보여준다. 






1. 덕수궁 정관헌. 왕실번영의 상징물이 다채롭게 장식되어 있는 야외 살롱이다. 어진을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2. 덕수궁 중명전은 외따로 떨어져있어 당시 궐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의 황실도서관 겸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사라진 건물과 남아있는 건물 사이의 간극을 본다. 백년이 넘는 시간만큼이나 무수한 사건과 인물들이 이 거리를 거쳐갔다. 정동을 화려하게 수놓던 세레딘-사바친의 건물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탁호텔은 이화여고의 기숙사로 쓰이다가 사라졌고,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탑신만 남아있다. 그리고 덕수궁의 양관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사라진 채다. 민간에 불하되어 여러 차례 개축되어온 중명전이 궁궐건물의 위상을 되찾고 정관헌에서 가끔 커피 시연회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돈덕전과 환벽정이 사라진 것을 위안해본다. 사라진 건물은 새로운 건물들로 대체되고, 옛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그들의 먼 후손이 다른 마음, 시선으로 살아간다. 


이 거리에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 같은 것 사이로 낡은 양복을 입은 콧수염의 신사가 환영처럼 나타난다. 마음을 움직이는 풍경을 만났는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그린다. 그는 오랫동안 그 풍경 속에 멈춰 서있었다. 









사진가 구본창의 작업 중에 황량하게 비어있는 공간을 찍은 <인테리어>시리즈가 있다. 희게 빛바랜 공간에 가늘게 그어진 모서리들이 뇌리에 강하게 금을 그었다. 공간의 현현(顯現)을 보여주는 건 삶의 먼지와 시간의 흔적이 검게 들러붙어있는 남루한 모서리들뿐이었다. 벽들이 부딪히는 날선 흔적들. 이 엄연한 경계선에 시간의 주름이 자리잡는다. 우리 각자가 평온하게 누리는 아름답고 청결하며 경건한 공간들조차도 이 그늘진 모서리들을 담보하고 있다. 언젠가는 텅비어 그늘진 모서리만 남거나, 그조차도 사라진 폐허가 될 것임을 알고도 모른체하는 것같다.





도시에도 모서리가 있다면, 서울의 모서리 중 하나는 영등포가 될 거다. 20세기 초, 경인선과 경부선이 생겨나면서 번창하기 시작한 한강 아랫동네 영등포는 지리적 이점으로 공업지역으로 급성장했다. 철도공장 뿐만 아니라, 방직, 피혁, 요업, 벽돌제조업, 제분업 등의 공장이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1930년대에는 일본의 맥주공장들이 영등포에 상륙했다. 광복 후에도 이전과 닮은 모습으로 60년을 이어왔다. 그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개발붐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과거의 모습 그대로 이 지역이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철공거리와 집창촌, 그리고 방직공장의 잔재들로 그늘진 사거리 한켠에는 타임스퀘어라는 화려하고 거대한 쇼핑몰이 영등포를 물신의 장소로 재정의한다. 그러므로 영등포은 온갖 욕망의 거리다. 존재의 깊은 우울을 잠재우는 성적이고 물적인 욕망들. 















커먼센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서두가 길었다. 몇 해 전부터 영등포 문래동 일대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비어 있다가 무너져가는 건물들과 재건축이 유예된 골목에 어느새 예술가들이 스며들었다. 값이 싼 스튜디오를 찾아온 사람들, 기존의 예술의 틀에서 벗어나고픈 공간들이 자리를 잡았다. 커먼센터는 젊은 작가들이 그때그때 하나의 주제 아래 모이는 전시공간이다. 홈페이지 소개글에 따르면, 컬렉터-딜러-작가라는 미술시장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자 갤러리가 아닌 ‘센터’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현대작가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기금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와 미술현장에 스스로 뿌리내리는 방법을 찾고 있단다. 미술칼럼을 쓰는 지인의 말을 빌리면 개관전인 ‘오늘의 살롱’전은 지금도 회자되는 전시이며, 컬렉션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커먼센터에 등장하는 작가들을 유심히 지켜보라고 했다. 




커먼센터는 영등포대로에 면한, ‘휴게실(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4층짜리 사무실 건물이다. 낡고 바스라진 것들을 그대로 둔 전시공간은 오래된 물질과 디테일을 찾아온 예술가들의 페티시즘을 느끼게 한다. 볼품없이 각진 건물은 한때 타일로 도배되기도 했고 또 타일이 떨어져나가자 제대로 보수하지도 못한 듯하다. 그 위에 먹색 페인트로 덧칠하고 창문마다 검은 종이 위에 흰색의 두꺼운 테이프로 X자를 그렸다. 검은색의 창호와 먹색의 벽은 내부의 빛과 흰 공간과 적절한 리듬을 연주한다. 두꺼운 ‘X’가 저돌적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음. 이것이야말로 커먼센터의 아이덴티티다. 또한 영등포에 스며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크기가 제각각인 사무실 공간은 적절히 분할된 전시장이 된다. 뜯어내다만 벽지, 그냥 내버려준듯한 전기 배선과 조명, 벽돌이 드러난 벽과 천장... 이전 삶의 기록이 역력하다. 훤히 열린 창문으로 빛이 새어든다. 옥상과 열린 창문은 건물 주변으로 낡아서 바스라지는 영등포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또다른 전시장이다.










회색덩어리같은 센터의 내부는 날선 모서리로 가득하다. 그늘진 주름 사이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전시의 주제는 “혼자 사는 법”이다. 우리는 어째서 “지금, 여기” 있음을 이렇게도 자주 일깨워야하는가. 이 사회에 살면서 그토록 자주 정체성을 떠올려야 하는가. 혼란한 시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공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일까. 그늘진 모서리에 잠시 몸을 숨긴다. 

















얼마전 미술품 복원전문가인 김겸 선생(김겸복원연구소)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관심있는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강연을 청해들었습니다. 그동안 해온 예술품 복원 사례들과 복원이라는 작업의 의미들을 천천히 이야기해주시던 말미에,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이한열 선생의 운동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술관에 놓이는 예술작품들을 보수하고 복원하는 사례는 익히 들어왔지만, 운동화라니.. 다소 의아했지만 박물관의 유품들처럼 필요하다면 복원 절차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운동화 복원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 이름, 이한열을 다시 듣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생이었기에 직접 겪은 일도 상세히 알고 있는 일도 없습니다. 한참 나중에 아주 먼 지점에서 87년의 일들을 흘러가는 옛 노래마냥 듣고서 멀게 또 멀게만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원가는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의 현장에 그대로 있는 듯한 격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복원가가 하는 일은, 시간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흘러가버린 과거의 것들을 생생한 현재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나도 작가로서 과거의 사건을 꺼내서 지금과 맞닿는 지점을 찾고 다시 들여다보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글은 현재가 되지 못하며 항상 방향성을 지닙니다. 사물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그 자체입니다. 문자와 다른 의미에서 파워풀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만나러 박물관에도 가고 미술관에도 가게 됩니다. 과거를 보는 이유는, 현재와 미래를 더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작가로서 나역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을 꺼내어 들춥니다. 모든 것은 지금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복원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원은 시간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복원은 어느 정도까지, 어느 지점의 모습으로 복원하는가가 무척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고정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유물이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후대의 어느 시점에서 그때 필요한 복원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란 유구한 시간 속에서 고작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 있을 뿐이다,라는 것을 누구보다 명명백백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들이 복원가인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시간을 거스를수 없으며 시간 그 자체가 유물에도, 우리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촌 이한열 기념관에서 6월 11일에 이한열 선생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공개하는 세미나와 전시가 있었습니다. 삼화고무의 타이거운동화는 오른쪽 한쪽만 남아있습니다. 그마저도 2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레탄고무가 삭아서 바스라지고 있었습니다. 국내에 신발을 복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끝에 예술복원가 김겸 선생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손이 닿기만 해도 폴리프로필렌우레탄 밑창이 가루가 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에폭시계 접착 물질을 넣어 우레탄을 굳히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점점 형태가 어그러지는 운동화를 펼치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 다음 운동화의 상태가 어떠한지 뒤집고 안을 들여다보며 차근차근 짚어갑니다. 


운동화 바닥은 패턴이 있습니다. 다행히 바닥패턴의 앞부분은 남아있습니다. 우레탄 덩어리를 맞춰서 조금씩 조금씩 바닥의 부스러진 부분을 추려가는 동안, 바닥의 패턴을 찾아보는 일을 병행합니다. 삼화고무는 이미 오래전에 도산했기에 제조사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어려웠고, 운동화 컬렉터들에게도 수소문해보았으나 같은 모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바닥 패턴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하나씩 맞춰졌습니다. 자잘한 조각을 하루에 한조각도 제대로 못맞추고 시간을 보낸지 오래.. 바닥 조각의 주요한 지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패턴이 위와 90도 정도 틀어진 형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유물을 설명하는 기록지를 오랫동안 읽습니다. 내용물의 외형을 설명해주는 기록지입니다. 나는 이 기록지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말해지는 것은 언제나 말해지지 않는 것보다 적습니다. 말해진 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나는 물어봅니다. 



이한열 기념관 3층에는 당시의 사진과 선생이 당일 입었던 옷과 안경, 그리고 운동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이 그곳에 있습니다. 매캐한 최루탄이 퍼지고, 최루탄 통이 하늘을 날고, 그리고 머리에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대학생과 그를 안고 있는 학우. 어째서 이 사회는 그런 장면을 만들어냈을까요? 그리고, 이 장면이 다시 없으리라는 보장을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들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라는 거대한 성과를 일궈냅니다. 하지만,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은 저 사진 속의 학우들이 그렇게도 몰아내고 싶었던 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지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어났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왜 여태, 저 말도 안되는 사건이 이토록 무수히 일어나고 있을까요? 과연 이 사회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28년이 지났습니다. 행사장에는 이한열 선생의 어머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의 풍경이 우리에게는 되새겨야 하는 과거의 유물들인데 그 어머님께는 28년간 쭉 현실이었음을 알게됩니다. 우리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과거가 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2015년 6월 10일이 끝끝내 해결되지 못하고 28년이 지난 후에도 가슴에 피멍이 든 현실이지는 않을까...   











"도시의 작가라면 모름지기 도회의 항구와 친해져야 할 것이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떠나는 기차들로 붐비는 역이 그다지 아름답지도 기능적이지도 않았다. 누런 색깔의 3층짜리 사각형 건물에 부,산,역,이라고 적힌 볼품없는 간판과 시멘트로 발라진 대책없이 너른 광장이 부산역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기차를 타는 일은 늘 즐거웠다. 티켓의 모양과 크기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던가. 각잡힌 모자를 쓰고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깎듯하게 거수경례를 하고 검표를 하면 멀리 떠나는 일이란 이렇게도 대접받는 일이며,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나의 여행은 대구와 구미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졸업반때 입사시험을 보러 처음으로 서울역까지 오는 기차표를 끊었을 때의 두근거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둔 밤에 보았던 붉은 벽돌 건물의 불빛반짝이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게는 여전히 서울역,하면 붉은 벽돌과 초록빛 청동돔이 얹혀진 바로 그 건물이 떠오른다. 지금은 서울역도 부산역도 그 전과 모습이 달라졌다. 쇼핑몰을 낀 높고 깊은 유리커튼월 건물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대도 유리커튼월의 거대한 공간은 내 마음에 들어오기가 어렵다. 




1925년에 경성역으로 지어진 서울역이 '문화역 284'로 바뀐지도 벌써 몇해가 지났다. 몇번의 전시회, 몇 번의 행사와 공연으로 옛 서울역사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행사와 전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너무 아름답고 너무 난해했다. 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기에 예술센터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예술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자 하는 지적인 그룹만이 누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쉽게 공감하고 널리 공유하며 충분히 아름다운 그런 예술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기차 플랫폼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파이프 오르겔 제작자인 홍성훈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옛 서울역 중앙홀에서 오르겔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그 울림 좋은 곳에서 오르겔의 소리를 듣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손꼽아 날짜를 기다렸다. 오르겔은 바람을 불어넣어 관(파이프)을 통해서 소리가 흘러나간다. 홍성훈 선생님의 오르겔은 맑고 쟁쟁 울리는 소리보다는 거친 나무를 쓰다듬는 숨소리가 흐른다. 거문고와도 대금과도 맥이 통하는 소리, 오랫동안 우리 정서 속에 흐르는 소리가 서구 악기에서 나온다.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나 성당 건물 내부에 설치되어 있어 미사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그 소리를 듣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서울역에 공개되는 오르겔은 가로세로높이 각 1미터짜리의 이동할 수 있는 트루에 오르겔이었다. 갤러리, 한옥, 문화시설 등지에서 자유롭게 연주하고 소리를 경험하며 음악의 감동을 나누려는 계획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오르겔의 계획, 제작부터 활용까지, 문화운동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클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몇 가지 인증절차를 거쳐서 펀딩 프로그램에 약간의 기부금을 보냈다. 프로젝트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많은 분들의 재능기부를 통해서 작은 오르겔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공개했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 가는 것을 보면서 7개월이 흘러 연주회 날이 찾아왔다. 



파이프오르간을 바람피리라 이름붙여졌다. 풍관. 폐와 심장을 가진 사람같은 악기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입장하니 리허설 중이었다 가림막 뒤에 분명 트루에 오르겔이 숨어있으리라. 조심조심 가슴을 졸이며 오르겔의 탄생을 기다렸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오르겔 독주와 트럼펫과의 협주, 현악사중주와의 합주, 가야금과의 혐주, 그리고 국악편성과의 합주 등이 있었다.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귀에 익은 곡과 낯설지만 기품있는 곡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제천. 정악 중의 정악이라 불리는 수제천이 오늘 연주될 예정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트루에 오르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 장인의 손길로 검은 칠 위에 홍매화가 그려졌다. 붉고 검고 금색이 어우러진 빛깔에서 새침하고도 세련된, 감각적인 아가씨가 연상되었다. 악보대가 세워지고 붉은 빛이 드러나자 탄성이 이어졌고, 경첩 장인이 만든 자물쇠를 열자 은색의 파이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름답고 예뻤다. 오르겔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다니!


오르겔 제작자가 트루에 오르겔 제작과정과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는 공간을 채운 소리들이 옛날 건물을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던가,를 말하고 싶다. 사적이라는 엄격한 문화재로, 작품이 전시되는 장소로서 고유의 특성이 제거되고 엄정한 규격 속에 포장된 듯 보였던 이 공간이 오늘만큼은 오페라 홀처럼 자유분방하게 보였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공간은 그 어떤 예술이 와도 품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잊혀진 공간을 되살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던 밤. 











공연이 끝나고 찬찬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살펴보았다. 이 작은 몸통에 224개의 금관과 목관 파이프가 담겼다. 건반은 5옥타브에 불과하지만 오르겔의 소리를 조절해주는 버튼으로 다채로운 음을 들려준다. 원래 오르겔은 피아노건반을 방불케하는 페달이 있는데 과감히 그것을 없앴다. 전문 오르겔 연주자가 아니라 건반 연주자 누구나 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깊었지만 돌아서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아리따운 마드무아젤 오르겔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근사한 공간. 서울역 중앙홀에서 그 유쾌함을 다시 즐길 수 있을까?













동인천 역에서 옛 거리를 따라 걸어간다. 오래된 가게, 청과물시장, 서점, 그외 알게 모르게 형성된 거대한 시장들이 즐비하다. 여전히 건물들은 빡빡하게 거리를 채우지만 비어있는 건물이 태반이다. 오래된 거리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벽돌로 지은 작은 상가건물들을 리모델링하여 재미나게 변화시켜볼 생각도 하게 될 것 같다. 


큰 도로변의 풍경과 한 켜 안쪽의 골목길의 풍경이 또 다르다. 상가가 형성되었다가 쇠락한 지점에 배다리 헌책방골목이 연결된다. 오랜만에 배다리를 걸었다. 예전에 꽤 북적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장소들을 기웃거려본다. 45년이 족히 된 아벨서점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토요일임에도 거리를 찾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재미난 동네 가게 몇 군데는 임대표지판을 붙인 채였고, 주민텃밭은 휑했다. 무엇이 동네의 활력을 앗아갔을까. 슬프게도 평화롭고 안락하게 걸을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도매창고와 큰 트럭이 오가는 거리는 아무래도 상업지구나 관광지구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배다리 동네의 위축에 마음이 아프다.



인천은 시장마다, 마을마다, 예술가들을 불러모으는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숭의평화시장 레지던시 프로젝트 외에도 용일자유시장 재생 프로젝트인 <돌아와요 용자씨>도 요즘 동구에서는 이야깃거리다. 공가 프로젝트라고 이름붙여진 이런 활동들은 비어있는 장소들을 활용하기 위한 시도들이다. 이들 장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예술의 일상화인가? 그러나, 결국 빈집은 빈집으로 돌아가지 않던가. 



결국 정주자들이 거처하는 마을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떠나고 쇠락한 지역을 예술가들에게 의존한다는 것도 옳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인천 구도심을 돌아보며 생각하게 된 것은, 인천은 규모에 비해 정주자가 적어 도심이 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목마다 교통과 인프라가 이미 구현되어 있는 구도심을 내버려두고 매립지에 신도시를 만들다니 뭔가 이상해도 많이 이상하다. 




지난번에 들어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좀더 구경하기 위해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수봉다방과 숭의평화시장이다. 

























수봉다방에는 3부에 걸쳐 

이 공간에 관심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모여들어 

수상한 작당을 펼치고 있었다. 





















숭의시장 내의 레지던시 공간이다. 오래된 건물의 내부는 흥미를 자아낼만큼 기묘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옛 건물답게 상가건물에도 연탄보일러시설이 있고, 또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공간을 바꾼 것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 한채는 계단을 따라 4층 옥상까지 이어져있다. 요즘 보기 드문 형태의 구조이기에 무척 관심이 갔다. 


숭의평화시장 레지던시는 마을만들기 활동가, 다문화운동 기획가, 그리고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가 따로 또 함께 빈공간에 스토리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곧 말끔하게 리노베이션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공간에서 이루어질 일들이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곧 조금씩 터져나오게 될 것 같다. 










수봉다방과 숭의시장 공간을 둘러보며, 이런 장소들은 '어떤 예술'로 인해 인천의 시대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중력지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가 앓고 있는 문제, 사람들의 인식, 자본의 문제, 개인적인 비전 같은 것들이 그 무게를 증발시킨 채 오로지 공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장소에 설치된 작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소통의 매개가 되기 위해 아이디어를 부려놓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유쾌한 행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이 동네에서 너무나 생소해서 반가운 개념이 아니던가. 


작은 호흡, 작은 환기, 작은 움직임. 작은 꿈틀거림. 그것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생동감같은 것. 


오래되고 비어있다가 어찌할바몰라 삭아가는 공간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어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다시 한번 이 공간에 머물러있고 싶다. 








서울 곳곳을 산보하고 다니느라 그동안 인천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했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개항장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있었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매력이 있다. 개항장이며 항구라는 조건은 내가 유년을 보낸 부산과도 닮았고, 점점 낡아가는 풍경들과 그것을 지키려고도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 무심함이 있다. 구도심은 한산하다. 오래된 주택가에는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국제공항을 짓고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수도권을 가로지르는 모든 철로들이 이어지도록 길을 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은 여전히 공허함을 감추고 있다. 


인천만큼 바람이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인천의 바람에는 바다도시 특유의 소금기가 없이 습하다.

 


인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느 지역 사람은 속을 감추고 있고 어느 지역 사람은 화통하고 어느 지역 사람의 말은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다고도 하는데, 인천 사람들은? 개항장 장사꾼들이 한 세월을 뜨겁게 달군 도시답게 빠르고 눙치고 의뭉스럽고 수다스럽고 활력있고 쾌활하고 그리고 일을 잘 벌리고 돈을 잘 벌고.... 그런 사람들일까. 



나는 또 여행자가 되어 인천을 걸었다. 중구청 주변에 있는 일식가옥이 갤러리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관일에 구경을 갔던 것이다. 이 장소의 이름은 <관동갤러리>다. 원래 이 동네 이름이 관사들이 많아서 관동이었단다. 옛 역사를 겨우겨우 이어가던 길조차도 엉뚱한 이름으로 강제로 바뀌었는데, 본래의 이름을 회복해가는 한편, 점차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일식 가옥을 옛 모습대로 기꺼이 품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갤러리 구경에 나섰다. 이 집은 나가야라는 형식의 집이다. 적게는 2~3채에서 많게는 5~6채의 집이 하나의 지붕을 공유하며 나란히 이어져있는 연립주택 형식의 일본식 가옥이다. 이 집은 전면에 보이는 규모는 작지만 뒤쪽으로 길쭉하게 뻗어있다. 뒤쪽에는 지붕 사이의 공간으로 빛도 들어오고 뒷채로 연결되어 있어 공간이 재미있다. 


이 집은 관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관사로 지어진 것으로 6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인천부청에 근무자들을 위한 관사였으리라고 짐작한다. 집의 연대에 대해서도 재미난 일화가 있다. 지붕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꺼번에 지어진 집일텐데도 집마다 신축연대가 1939, 1941년 등 다르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다른 나가야의 집은 상량문에 1932년이라고 되어있는 한편, 교토대학교에 있는 인천지도에는 1930년에 이미 이 6채의 나가야가 버젓이 그려져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작은 보에 붙여진 신문지를 발견했는데, 대정13년(1924년)에 발행된 경성일보였단다. 십여년 전의 신문을 붙일 리는 없으므로 대략 일년전이라고만 해도 192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않나,라고 집주인은 판단하고 있다.  


집주인은 갤러리 옆 주택을 구입해서 살림집으로 쓰다가 다시 옆집을 매입하여 갤러리로 리노베이션을 했다. 두 주택은 1층과 3층을 서로 공유하면서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주고받는다. 주택 리노베이션은 한양대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맡았다. '일식주택 재생프로젝트'로 나가야 주택의 매력을 자유롭게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도미이 교수는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보다는 나가야 건축의 재미있는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집의 개축방향을 잡았다. 


집이 서로 관통하면서, 메자닌층을 연결되고 트이고 좁히며 다채로운 공간이 연결되었다. 원래의 집에 시멘트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벽들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8~90년 동안 변화된 모습을 애써 없애지 않았다. 건물 뒤쪽에는 또다른 공간이 연결된다. 게스트룸과 부대시설로 이용한다.  







지붕을 공유하는 나가야주택의 중간채 두 채를 이어붙였다. (관동갤러리 리플렛에서 사용)






이 집의 변화와 함께 들여다볼만한 장소는 중구청 왼쪽편에 있는 카페 팟알이다. 이 건물은 1880년대 말에 지어진 일식 사무실 건물이며 1층은 상점이나 사무실로 쓰고 윗층은 살림집인 형태다. 개인 소유주가 건물을 사들여 리노베이션했다. 처음에는 흰색 몸체에 파란색 지붕을 덮고 선 살림집이었다.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최대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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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알이 리노베이션을 끝내고 오픈했을 때, 의아한 마음이 컸었다.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흥미로웠던 주택인지라 재미나게 변화하길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원형을 찾아 복원에 이른 결론이 '덜 재밌게' 느껴졌던 것이다. 방문했던 날, 건물 리노베이션에 참가한 건축가와 자문을 맡았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는 완전히 새롭게 공간을 변화하는 것으로 제안했으나 건물의 중요성을 들어 원형찾기에 도전해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건물은 인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건물의 연혁과 역사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고증하고 복원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건물은 지금 등록문화재 제567로 등재되었다. 만약 다른 식으로 리노베이션을 했다면 건물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관동갤러리가 선택한 방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옛 건물을 바라보는 방식, 이 건물을 현대화하는 방식에 하나의 기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물에 의미를 담는 방식도 개개인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변함없는 것은 건물이 사용자의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뿐이다. 















"수봉다방으로 놀러오세요!"




문화기획자 H가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장소를 알려왔다. 어쩌다보니 초대 날짜보다 2주나 늦게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인천 숭의동에 있는 수봉다방이다. 실제 운영되는 다방은 아니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작품도 걸고 커피도 마시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마실도 나오는 그런 동네 사랑방이다. 요즘, 이 동네에 젊은 예술가들이 쏠쏠히 모여들고 있다. 동네 예술장소 중 하나인 '그린빌라'는 일반 빌라의 한 세대를 예술가 레지던시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덕분에 인구가 빠져나가고 있는 동네에 젊은 피를 수혈하게 되었다. 

퇴락하여 고요해진 낡은 동네에는 늘 뭔가 뜨겁게 하고 싶어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나는 그들의 뒤를 좋아라하며 쫓는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이 나라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재밌게 살 수 있는 멋진 종족이다. 지하철타고 서울로 출퇴근하고 높은 건물에 갇힌 채로 주어진 업무만 하는 종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진. 그리고 늘 요상하고 기상천외하며 섬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꺼내어 보여준다.   



무용하고 또 무용한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로 날마다 새롭게 노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는데 좀 많이 늦었다. 2주라니.. 전시가 끝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문을 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저 공간이라도 보게 된다면 좋으련만... 일단 전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려서 걷는다. 도원역에서 내리면 늘 배다리 헌책방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는데, 오늘은 반대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싸늘한 날씨지만 햇살이 좋아서 다행이다. 건들건들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조용하지만 오래된 듯한 동네가 나타났다. 도로를 따라 형성된 상점가는 퇴락했다. 나른한 흔적들이다. 이 동네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물이 있었다. 문닫은 옛날 시장인가 싶어 들어가본 그곳은, 거대한 중정을 3층짜리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시장이었다. 'ㅁ'자 모양으로 둘러진 건물은 두 겹으로 세워져서 무척 독특한 구조다. 중정은 넓은 데다 볕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시장은 텅 비어있었다. 벽 하나가 뜯겨나간 것을 보니 철거하다가 멈춘 것 같다.  


어떻게 이 거대한 장소가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저 문을 닫은 수많은 시장 중 하나인가? 이곳은 언제 시작되어 어떤 사람들과 어떤 물건들이 오고갔으며 어떤 역사를 갖고 있을까? 궁금한 것은 많지만, 해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일행과 나는 묵묵히 사진을 찍었다. 구석에서 영화 <써니>와 드라마 몇 가지를 촬영한 장소라는 광고판을 발견했다. 빈집처럼 보이지만 드문드문 사람이 사는 집도 있었고,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누구요? 왜 사진을 찍어요?"


어디선가 등장한 중년남이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근대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며 촬영현장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금세 눈 주름을 폈다. 시장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모르는데, 재개발을 주도하던 사람이 돈을 갖고 날랐다더라고. 공사도 하다가 중단된거지. 그것도 5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에요."


 






     

    


     



나는 이 시장이 제물포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천남구문화대전'이라는 사이트에 따르면 수봉공원과 제물포 역 사이에 있는 재래시장이며, 1972년에 개장했다고 한다. 수봉산 자락은 1970~80년대에 주택지가 형성되어 인구가 모여들고 인천대학교를 비롯, 초중고 학교들이 생겨났다.  인천의 주요 놀이공원이던 수봉공원이 있었기에 시장도 덩달아 번성했던 모양이다. 

한때 잘나가던 위락시설들이 시대의 변화에 쓸쓸하게 폐허가 된 것이 하나둘은 아니다. 수봉공원은 사람들의 여가문화도 변화하면서 쇠퇴를 맞는다. 시장도 타격을 맞는다. 제물포시장의 개선안, 재개발안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96~7년대부터. 신도시로 인구가 옮겨가면서 재래시장의 흐름은 뚝 끊어졌고 분양사기 등으로 피해를 입고서는 몰락했다. 105개에 달했던 상점 중 영업하고 있는 상점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단단한 건물들은 각자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넓은 중정은 축제의 현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따금 예술가들의 돌발적 모임이 열리기도 한단다. H도 이 건물을 보았을까? 그녀라면, 수봉다방 가는 길에 버젓이 서있는 이 화석화된 건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빛과 어둠이 묘하게 그늘질 때, 그녀의 카메라에는 분명 이 시장의 부서진 돌조각과 부식된 철무더기와 먼저처럼 쏟아지는 빛의 입자들을 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도착한 수봉다방은 문이 닫혀있었다. 

자물쇠가 잠긴 문을 잡아당겨 보는데, 옆에 앉아계신 할아버지가 툭 던진다. 


"그 친구들 오후나 되야 나온다."


예술가들의 전시장인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다시 철로변을 따라 걷는다. 숭의평화시장은 어디일까? 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만 달랑 들고서 지도앱에 의지해 장소를 찾아간다. 검색 결과는 조그마한 삼각지를 나타낸다. 지도를 따라 가니 거짓말처럼 시장이 등장한다. 삼각형의 중정이 있는 3층짜리 건물(옥탑처럼 4층도 있다고 한다)로 둘러싸인 이곳이 숭의평화시장이다. 사람이 없으니 시장이 될 리가 있나? 예상대로 시장은 고요했다. 커다란 현수막에는 숭의평화시장 레지던시에 참여할 예술가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다소 낡았고 소비자를 끌만한 그 어떤 장치도 없으나 나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얕은 경사지에 놓인 삼각형의 중정이라니 지나치게 재미있었다. 언젠가 만났던 어느 낯선 여행지의 풍경 같았다. 초여름 햇살 아래 파라솔이 꽂힌 테이블이 상점마다 놓이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상쾌하게 수다떠는 웅성거림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시장이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질식 상태의 시장에 인공호흡을 시도하려고 한다. 공간도, 건물도, 끝없이 번영할 수는 없다. 도시의 변화에 따라 활발했다가 사그라진다. 공간은 늘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공간들에 잠시 머문다. 고여있던 시간의 먼지가 새로운 바람에 일렁거린다. 


봄이 오면, 문닫은 시장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다소곳한 부처를 보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 돌의 질감이 무척 마음을 당긴다. 돌을 쪼고 부드럽게 갈아내며 형태를 완성하기까지 예술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얼굴을 조각하게 되면 불법도, 번민도, 모두 사라진 채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그 예술가도 그예 부처가 되었겠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의 검은 벽을 뒤로 하고 부처와 여인들을 보았다. 반가사유의 자세로 마주보는 두 미륵불도 보았다. 이 불상은 허리 위는 수난의 시대에 잃어버린 채 다리를 하나 든 자세로 앉아있다는 그 초유의 자세만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관을 쓴 보살상은 화려한 자태와 달리 초연한 얼굴이다. 그 또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서 만물의 일렁거림에 개의치 않을 듯한 서늘한 미소를 지녔다. 


그리고 멀고먼 중앙아시아 투르판에서 온 날카로운 눈빛의 여인과 다리를 벌리고 말에 앉을 수 있었던 기마족의 여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투르판. 텐산산맥 동편의 위구르족 마을라고 한다. 나는 이 여인들을 보는 순간 그만 바싹 말라버린 먼먼 들판을 달리는 말타는 여인이 되어버렸다. 내 먼먼 기억 속에는 그녀들과 함께 말을 달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강인한 그들의 후예가 되고 싶었다.      


투르판 흙더미 고분군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어쩌다 자신의 나라에서 옮겨져 옴팡진 언덕의 나라에 당도하게 되었을까? 이 말없는 사물들의 이력들은, 천년 동안 잠들어있다가 억지로 깨어난 채 무참한 여행을 해야했던 어느 시대를 감추고 있다. 


이 전시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사물들은 왜 이곳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부처, 북제, 

1918년 8월 1일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쌍 반가사유상, 북제, 

1916년 8월 12일 우라타니 세이지에게서 구입 






보살, 송

1922년 1월 15일 요시다 겐조에게서 구입 






여인, 투르판 무르투크 

1916년 5월 15일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 






말을 탄 여인, 7~8세기,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군, 

1916년 5월 15일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 






투르판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물건들은 오타니 탐험대가 발굴한 것이다. 


제국의 총아인 고적탐사대는 소멸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발굴한 것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약탈이라고 했다. 독일의 고고학 탐사단이 터키에 가서 아시리아 유물을 모두 불쏘시개를 쓰는 것을 보고서 기겁을 하면서 조심히 가져왔다는 물건들은 베를린 페르가몬 뮤지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학자들은 둔황의 촌부를 쉽게 휘두르며 천년도 더된 불경들을 헐값으로 자기네 나라로 가져와 도서관에 모셨다. 일본의 탐사대 역시 아시아를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190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를 비롯해서 중국까지 고고학 유적을 두루 살폈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된 이후에는 총독부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한반도 전역의 유물들을 조사 수집하여 총독부 박물관(1915년 개관)을 채웠다. 동서를 통털어 근대의 박물관은 약탈과 사기의 검은 그림자 없이는 컬렉션을 이루지 못했다.  

   

교토의 니시혼간지의 주지였던 오타니는 탐험대를 조직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의 유물을 일본으로 옮겼다. 그러나 재정 파탄으로 인해 유물들을 구하라 후사노스케에게 처분했고, 그는 이들의 일부를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동향이었고, 진남포에 제련소를 설립한 후 사업상의 후원을 받기 위한 제스처로 유물을 기증한 것이다. '구하라 후사노스케 기증'이라는 이름 뒤에는 오타니 탐험대의 도굴행위가 숨겨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400여 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이 있다. 오타니 컬렉션이다. 


미술사학자이자 건축학자인 세키노 타타시는 총독부의 고적 답사에서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세키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는 만주에서 발굴한 유물을 대행인인 에토 나미오를 내세워 총독부 박물관으로 입고시켰다. 세키노라는 이름은 다른 이름 뒤에 숨어있는 셈이다.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1910년대 만주를 조사하면서 기록한 자료들. 

화가, 사진가, 통역, 헌병이 그를 뒤따랐다. 

만주의 민족들과 일본인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총독부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은 1915년 총독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던 경복궁의 박물관을 그대로 사용하여 개관했다.







유진오 <화상보>에서 미술관을 구경하는 모습이 나왔다. 뚜렷하게도 석조전이다. 

동아일보, 1940년 3월 12일자 신문이다. 삽화는 심산 노수현이 그렸다.


 



석조전은 1910년에 완공되었으나 영친왕과 왕비의 공간으로 가끔 사용되다가

(그들은 내내 일본에 머물지 않았던가) 1933년에 영친왕이 컬렉션한 일본작가들의 그림이 걸리면서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1938년에 신관을 신축하면서 창경궁 내의 이왕가박물관의 유물을 선별하여 

옮겨와 이왕가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전시에서 가장 보고싶었던 그림은 바로 이것이다. 

와다 산조의 <우의>.






누군가에게는 중앙청으로,누군가에게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억되는 

총독부 청사.






총독부 청사 중앙홀. 북쪽 벽에 우의가 걸려있었다. 














총독부 청사는 철거되었으나 벽에 결려있던 벽화들은 조심스레 떼어져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경향신문 1995년 8월 11일 자 신문에는- 총독부 청사가 해체되기 직전이다- 이 벽화 제작의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와다산조는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색채학을 연구했으며 1963년에 만셀과 함께 색상표를 만든 서양화가다. 1921년 총독인 데라우치가 의뢰하여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으며 "내선일체 사상을 잘 담을 수 있는 작품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총독부 청사에 걸린 벽화는 2점이지만 벽화가 2점 더 남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와다는 1921년 데라우치 총독의 제작 의뢰에 따라 당시 돈으로 6만엔을 받고 벽화제작 계약을 체결했다. 와다는 이후 한국 금강산의 '나무꾼과 선녀'와 일본 후지산의 '하고모로(우의)' 전설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데 착안, 이 두 대표적인 전설을 작품 소재로 정했다. 자신의 고향인 시즈오카현에서 7명의 조수와 함께 벽화제작에 들어간 와다는 24년 동양화충의 벽화를 완성했다..... 무슨 일인지 정작 조선 총독부청사 중앙홀에는 서양화풍의 벽화가 내걸리게 됐다....갑작스럽게 그림이 바뀐 이유를 '데라우치가 서양식 건물인 총독부청사 양식에 맞춰 서양식 풍으로 바꿔 제작토록 요구해 급히 다시 그림을 그린것으로 보인다,며 이때 동양화풍 그림 2점이 일본에 남게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박물관측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상징미술품이자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내선일체의 내용이 담긴 벽화를 역사의 증거물로 영구보전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1995년 8월 11일 금요일 자  






고대의 유물들과 당대의 예술품으로 박물관은 화려하게 채워졌다. 박물관 컬렉션은 문화를 매개하고 선전하는 충실한 도구였다. 그 컬렉션은 광복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흡수되었다. 도처를 떠돌던 사물들이 이 공간에서 멈춰섰다. 방랑하는 문화재들의 이야기 또한 인간의 역사만큼 사연이 복잡하지 않겠는가.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많은 유물들이 과거의 오욕을 숨긴 채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다. 

 

박물관은 역사를 거슬러 교육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먼지처럼 쌓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만큼 비밀스런 공간이 또 있을까? 이제 우리는 유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유물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와있는지도 질문해야할 것이다.  











* 이 사물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동양을 수집하다> 전시는 1월 11일까지 열린다.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이라는 소설은 큐슈제국대학병원에서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중심이 됩니다. 1945년 전쟁 말기, 불시착한 b-29기에서 포로로 생포된 미군병사들에 행한 인체 해부사건이지요. 사건 주변으로 계속되는 전쟁과 공습과 절망으로 이미 지쳐버린 사람들과 병원의 암투에 휘말리는 젊은 의사들과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군인들이 교차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만연한 죽음과 절망 사이에서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의사는 습관처럼 되뇌입니다. 우리 모두 죽을 거라고.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당시의 병원의 풍경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소독약 냄새와 지금보다 덜 정교했을 수술실 장면, 차가운 기구들, 부족한 약, 추운 병실과 얇은 담요, 엉성한 식사, 흰색 모자를 썼던 간호사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 침묵하는 복도, 길쭉한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하늘과  마지막 잎새 같은 것. 병실의 다른쪽에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들과 온갖 논문들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수술법을 찾던 의사들이 있었겠지요. 



서울에는 엔도 슈사쿠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병원 건물이 몇 채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1928년)과 서울대병원 내부에 있는 대한의원 본관(1910), 그리고 용산 철도병원(1928)입니다. 철도병원은 2011년까지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으니, 최근까지 병원의 기능을 유지했던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딱 알맞은 모양새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몇 년간 방치되면서 건물 주변으로 돋아난 덩굴식물들로 인해 어둡고 낡고 미스테리한 모양새이지요. 




어느 날 근처를 지나가다보니 낡은 창과 둥글게 말린 건물 벽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사진 속의 장소는 오래된 학교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합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물들이 등장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내키지 않아 계속 미뤄뒀던 건물의 속 이야기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문화재청의 기록화보고서는 건물의 역사와 이 병원의 특정한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용산역은 경인선과 경부선이 생겨날 시절 종착역이었습니다. 서대문정류장이라 불렸던 마지막 역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용산에서 더 중요한 역이었지요. 모든 역이 용산으로 향했습니다. 용산은 1905년 이후 일본군영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되었습니다. 용산에 병원이 생겨난 것은 1907년부터입니다. 철도를 놓으면서 철도 기술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그들의 가족이 용산에 자리잡게 됩니다. 철도병원은 기술자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들의 질병 혹은 사고를 치료하기 위해 철도국에서 세운 특수병원이며, 대구, 대전, 목포, 평양, 원산, 청진 등지에도 세워졌다고 하는군요. 


이곳에서 진료받은 환자들은 모두 4개의 카테고리로 구분되는데, 1종 환자는 철도국 직원으로 직무상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2종 환자는 철도의 승객 중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3종은 퇴직한 직원이나 직원의 가족으로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4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진료비와 치료비도 서로 차등이 있었고 1종 환자를 가장 우선했습니다.  



용산철도병원은 1907년에 철도 관사 하나를 개조한 동인병원으로 시작하여 1913년에 용산철도병원으로 개칭하고 필요한 건물을 세워나갑니다. 그동안 화재로 인해 여러 차례 무너지고 지어지고 했고, 1928년에 벽돌건물로 어엿한 2층짜리 건물이 완공됩니다. 원래 병원보다 북쪽 도로변에 신관 건물(현재 본관)을 두게 되었고 그 후로도 부족한 설비를 메우느라 조금씩 증축을 거듭했지요. 


당시의 모습을 보면, 도로변에 출입구가 있고 캐노피로 멋스럽게 장식했음은 물론 자동차로 현관까지 올 수 있도록 오르막 도로도 만들었습니다. 출입구의 캐노피는 1984년 도로가 확장되면서 잘려나가고 화강석 테두리의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1973년에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1981년에 9층짜리 병동이 신축되어 병원은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병원은 철도국의 이름이 바뀌면서 그 이름이 계속 변화했습니다. 미군정 시절 운수부였을 때는 운수병원으로, 후에 교통부가 되었을 때는 교통병원으로, 철도국이 교통부에서 분리되면서 서울철도병원으로, 다시 변화를 꾀하느라 국립병원으로 개칭되었고 이윽고 1984년에 중앙대학교가 위탁운영하면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이 되었습니다. 


















<기록화보고서에 실린 평면도 신축당시의 평면도






붉은 벽돌 사이로 하얀색 화강석 라인이 사라진 캐노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원래 도로변에 있던 출입구가 측면 구석에 옹색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의 왼쪽 편에 신축된 병동 건물이 거대하게 남아있습니다. 

병동 건물도 본관 건물도 방치된 채로 문닫혀 있습니다. 코레일 재산이겠지요. 

코레일은 용산 개발의 꿈에 부풀었다가 주저앉았지요. 이 건물은 어떻게 될까요? 











11월 말, 용산지역을 답사하는 행사를 진행하면서 이 건물을 다시 한번 들렀습니다. 건물의 역사와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건물이 주변 관사들과 긴밀했던 예전을 소환해볼 수 있었습니다. 

답사 참가자 중 한 분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중앙대 병원이던 시절, 이곳에서 자신의 딸이 태어났다고요. 병원이 문을 닫아버린 지금, 딸이 태어난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이지요. 


건물이 없다면 기억도 자꾸 지워지는 걸까요? 

아직은 멀쩡한 건물을 현명하게 다시 사용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벨기에영사관, [《韓國風俗人物史跡名勝寫眞帖》 (발행연도미상)에 수록]



예전에 벨기에 영사관 자료를 찾다가 이 사진을 발견하고 좀 놀랐다. 아무리 봐도 현재의 벨기에 영사관과는 형태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이 건축물을 3D 형태로 재현했던 건축가 구원씨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측 도면으로 3D 작업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건물 외관을 샅샅이 봤는데, 이 건물은 아냐. 단언컨대."


이 사진에 벨기에 영사관이라고 붙은 이유가 무엇일까? 

벨기에 영사관이 아니라면 이 건물은 어떤 건물일까?




벨기에 영사관을 살펴보자.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해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든다.

이 건물은 참 아름답다. 술과 장미의 나날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건축물은 이탈리아 도처에 있는 오래된 건물과도 닮은 건물이다. 이오니아식 기둥과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베란다같은 회랑 공간을 보면 지중해의 바람을 맞으러 나온 귀부인들의 엷은 드레스 자락 같은 게 느껴진다.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가듯이 건축물을 샅샅이 비교해본다. 위의 자료사진이 오래되어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일층과 이층의 재료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출입구 부분이 돌출되어 있는 점이나 창문의 특징도 다르다. 자료사진은 삼각형 이마가 올라가 있는 신고전양식의 창문이다. 그에 비하면 벨기에 영사관은 일자형으로 되어있다. 규모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 사진이 벨기에 영사관으로 여전히 통용되고 있을까?




한때 의문을 가졌다가 잊어버린 이 사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서울사진축제>에서다. 아카이빙 사진들로 서울의 시대사를 펼쳐보이는 전시였기에 수많은 옛 건물 사진이 등장했는데, '벨기에 영사관'이라는 설명이 붙은 채 이 사진이 걸려있었다. 원출처가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저작권이 말소된 사진으로 여기저기 통용되고 있다. 한때, 정동 지역 근대 컨텐츠를 구성하던 여러 연구자들의 자료에서도 이 사진이 인용되어 있었다. 《韓國風俗人物史跡名勝寫眞帖》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는 자료다. 사진집으로 구성된 이 책에 위의 사진이 실려있음은 다행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벨기에 영사관이라는 설명은 전혀 붙어있지 않다. 원본을 본 것이 아니라 온라인 서비스로 제공되는 전체 페이지를 본 것임으로 설명이 부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건물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건물을 혼동할 리가 없다. 어쩌면 역사 연구자와 건축 연구자가 서로 교류하지 않기 떄문에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한번 만들어 공표된 자료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참 복잡한 일이다. 









옛 벨기에 영사관 내부 모습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젊은 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이 건물은 생활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 바뀐 후에는 가보지 못했으나, 건물의 아기자기함이 잘 묻어나는 전시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옛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점에 위치하려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아름다운 공간의 창문을 활짝 열고 로지아를 넘나들며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햇볕이 스며들어 따뜻하게 데워진 공간을 보면 참 좋겠다고. 



그리고 저 넓은 홀 어딘가에서 은근한 커피향과 홍차 향이 풍겨나도 좋겠다고. 식기가 부딪혀 나직하게 좋은 소리가 날때, 그럴 때, 이 건물이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위 자료 사진 속 건물은 무엇일까?  서울시청(경성부청)의 옛 자료를 찾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돌출된 출입구, 일이층의 재료도 차이가 있으며 창문의 모양, 그리고 측면의 볼륨이 사진과 유사하다. 비교해보자.







옛 경성부청사.



경성부청이 현재 서울시청(서울도서관) 자리로 옮겨온 것은 1925년의 일로, 그 전에는 그 자리에는 경성일보사 건물이 있었으며, 경성부청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경성일보사는 부청에 자리를 양보하고 건물을 허물고서는 바로 옆으로 옮겼고 총독부 산하의 신문들을 펴냈다. 지금의 프레스센터가 그 위치에 있다.  










  • 통감부 이사청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였다. 그 3조에는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일본정부의 대표로 통감(統監)을 두고, 개항장 및 필요한 곳에 통감의 지휘 하에 기존 영사의 권한을 행사하며 협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2월 20일에 일본칙령 267호로 <통감부 및 이사관 관제(統監府及理事官官制)>가 공포되었고, 주한 일본공사관이 1906년 1월 31일자로 폐쇄되었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이사청(理事廳)은 원래 일본영사관 또는 분관이 설치되었던, 한성,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목포, 마산 등 7개소에 설치되기로 하였으나, 1906년 1월 19일에 군산, 평양, 성진 등 3곳이 추가된 총 10개소의 이사청의 설치가 공포되었다. 이어서 1906년 8월 17일에는 대구이사청, 11월 17일에 신의주이사청, 1907년 12월 10일에 청진이사청 등 3개소가 추가되어 총 13개 이사청이 지방에 설치되었다. 이사청이 설치되었던 도시들은 개항장·개시장 등으로 일본인 거류지(居留地)가 있던 곳들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는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있던 지역이 ‘부(府)’로 지정되면서 이사청의 업무는 부청으로 이관되었으며, 대부분의 이사청 청사도 부청 청사로 전환되었다.

    (국가기록원 일제시기 건축도면 컬렉션의 이사청과 관련된 내용 중 발췌)
















  • 京城府(경성부)청사의 건축
  • 원래 일본영사관은 주자동 6번지에 있었는데 그곳이 협소해 1896년 오늘날의 충무로1가 입구에 새 영사관을 세웠다. 그리고 영사관은 1906년 京城理事廳(경성이사청)이 되었으며 府制(부제)가 실시되면서 그대로 경성부청으로 쓰였다. 총독초기 경성부 직원의 수가 새로운 세제의 시행으로 과세ㆍ징세ㆍ체납처분 등 재무관계 사무가 격증한면서 급증하자 1916년 최초로 청사신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그 후 재정 형편상 진전없다가 1923년 1월 부청사를 부의 재원으로 신축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당시 거론되었던 위치는 ① 당시 부청사 위치(충정로 1가 52ㆍ53번지) ② 황실소유의 정자인 大觀亭(소공동 6번지) ③ 남대문소학교(남대문로 4가 45) ④ 경성일보사 위치(태평로 1가 54) ⑤ 경성일보사 뒤편 국유지(태평로1가 31) 다섯 곳이었다. 1923년 2월 경성일보사 사옥을 철거하고 신축 이전비를 지급하고 경성일보사는 뒷자리인 국유지로 물러앉는 조건으로 새청사 부지가 확정되어 1924년 11월 공사가 착공되어 1926년 10월에 완공되어 낙성식을 가졌다. 이로써 연건평 2,502평의 6층 건물이 부청사가 신축되었다.




(서울시 중구청 홈페이지 내용 중 발췌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30604.php)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뭔가를 찾았다. 일본영사관->이사청->부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건물들. 


벨기에 영사관이라고 잘못 이름붙여졌던 사진(건물)의 원래 이름은 경성부청이며 그 이전에는 경성이사청었고, 원래는 1896년 무렵 세워진 일본영사관이었다. 



  




경성부청 신청사가 건립되기 이전(1925년 이전)의 경성시가 풍경. 



아랫쪽 왼쪽에서 세번째 2층 건물이 이사청 건물이다.  첫 자료사진과 비교하면 건물 주변으로 서양식 건물이 다수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의 사진은 충무로, 을지로 일대가 정비되기 전의 기록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1906년 이사청은 부족한 설비를 보충하기 위해 옆에 단층짜리 부속 건물을 지었다. 첫번째 자료에 보면, 건물 왼쪽으로 단층 건물이 약간 보인다. 그러므로 1906년 이후, 이사청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위치로 보면 일본영사관과 벨기에 영사관은 같은 시기에 회현동 일대에 있었는데, 벨기에 영사관이 좀더 뒷쪽으로, 남산에 가까운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회현동 우리은행 자리다. 


벨기에 영사관은 1903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했으나,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주권을 빼앗긴 상태로 업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일합병조약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국의 영사관들이 속속 본국으로 돌아갔다. 벨기에 영사관도 건물을 팔았다. 이 건물은 일본의 보험회사와 해군성에서 사용한 바 있으며 적산으로 분류되어 해군 등에서 사용하다가 1953년에 상업은행이 불하받았다. 


큰 건물을 짓게 되면서 옛 건물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남현동 자리에 이축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1984년의 일이었다. 지금은 빈번하게 이축되곤 하지만 당시에는 문화재 복원기술이 지금에 미치지 못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석재 한장 한장, 목재 하나하나를 모두 해체해서 정교하게 재조립했으나 벽난로와 굴뚝이 서로 이어지지 않아 난로를 피울 수 없게 된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당시 현장감독이 얼마나 진땀을 흘렸을 지 짐작이 간다. 



건물의 연혁을 따지다보면, 당시의 역사가 그물처럼 짜여지고 펼쳐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수수께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시의 역사가 정교하게 맞물려 살아숨쉬는 인물과 사건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듬성듬성 구멍난 부분이 여전히 많다. 


사진이나 자료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당시 사람들의 심리와 내면의 풍경을 읽는 일까지, 여전히 그 시대는 비밀로 가득하다. 













"서울사진축제에 사진을 출품해보세요!" 




얼마전에 서울사진축제에서 시민답사를 기획하는 H씨와 만났습니다. 답사 프로그램 하나를 준비하기로 하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시민 사진을 응모하는 부문에 참여해보라고 했습니다. "1880년에서 1980년 사이의 서울의 나들이 사진"이면 가능하다며, 조선호텔 숙식권 등등의 훌륭한 부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이죠. 부상에 눈이 어두우려는 찰나, 나는 부산 출신이며 1997년에야 비로소 서울이라는 땅을 밟아보았다는 엄연한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랬더니 H씨가 말합니다. 


"부모님 사진이면 더 좋죠! 옛날 사진이요!"





그리하여 시부모님이 찍으신 사진들 중에 재미난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장롱을 뒤지게 되었습니다. 예상보다 서울의 장소가 뒷배경으로 등장하는 사진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실내에서 찍혔고, 야외에서 찍은 것은 교외로 나들이갈 때였기 떄문이지요. 지금처럼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이 아니었으므로, 사진은 특별한 날, 특별한 시간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한때 카메라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던지요. 


옛 사진을 들추며 이야기 하는 시간을 꽤 즐거웠습니다. 부모님의 60년대 초반의 결혼식 사진이나 뭔가 자신만만한 포즈를 하고 있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들으며 웃을 수 있었지요. 이 겹겹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디엔가 모여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였습니다. 




시아버님이 결혼 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찍은 캠퍼스의 일상들이 아주 조그만 사진 속에서 펼쳐집니다. 1950년대의 대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고향 부여에서 친구들이나 친지들이 서울나들이하러 왔을 때 창경원과 종로와 중앙청을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옛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옛 기억에 흐뭇해지셨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 중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돌아간 분들도 있습니다. 오래된 사연이 깊숙이 숨겨진 기억저장소에서 뛰쳐나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 아버님은 예의 허허 웃으시고요. 


이십대로 잠시 돌아가셨을까요? '학우'라고만 짧게 설명해주신 그 단발머리 여학생을 떠올리셨을까요? 



저는 그 중에서 한 장을 골라 아버님의 사연을 적어 응모해보았습니다. 얼마 후, 담당자로부터 사진이 전시장에 걸릴 것이며, 도록에 실릴 것이니 전시장을 방문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울사진축제의 본전시는 아카이브 사진들로 채워져있습니다. 한성-경성-서울로 변모하는 동안 도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풍경들이 사진에 담겨있습니다. 사진은 시정을 홍보하기에 좋은 수단이었으며 스펙터클한 장면을 작은 화면에 담음으로써 편집된 시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실된 모습을 기록하는 장치인 동시에, 왜곡된 관점을 심어주기에도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도시가 담깁니다. 낡은 것을 허물고 규격화된 고층건물들이 심어지는 과정과 놀랄만큼 거대한 것들이 이식되는 것이 곧 발전하는 도시라는 공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놀랄만한 수단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곤란한 것들입니다. 과거 백년 동안 '서울'이라는 도시는 기념비의 도시였습니다. 경성시대뿐만 아니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하던 60-70년대의 서울의 풍경 또한 그러했습니다. 온갖 동상이 세워지고 모노리스를 방불케하는 숱한 고층건물들이 자리잡으면서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무한의 도시였습니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높은 것들 아래에 가려진 그림자 속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서울은, 꽃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고 새로운 반면, 늘 분열하고 불안하고 저항하고 눈물을 흘리던 곳이기 떄문이지요.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과정이 시기순으로 담겨있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지요. 

 총독부 청사의 기억은 나에게는 전무합니다. 하지만, 아래의 건물은 나의 기억에도 뚜렷합니다. 








남산 외인 아파트의 철거장면입니다. 두 동의 아파트가 풀썩 풀썩하고 무너져내렸던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던 것이지요. 그 기술이 그 당시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관광과 여가의 장면이 자주 포착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경원이군요. 창경궁이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삽입하면서 궁궐에서 정원으로 바뀌었던 시절부터, 다시금 궁궐로 되돌려지던 1984년까지 이 장소는 밤이건 낮이건 시민들의 여가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사진들을 보면, 없었던 건물이 생겨나고 묘한 형태로 바뀌었다가, 놀이공원의 위락시설까지 생겨나 휘황찬란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아연할 수밖에 없지만, 한때 그곳은 밤벚꽃놀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월드컵 쇼에 등장하는 나신의 무희를 보려고 사람들이 밀려들었지요. 1984년 궁궐의 옛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이후에 삽입된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대온실을 제외하고) 벚나무 등 외래종 식물을 제거하고 전통수목들로 채웠습니다. 춘당지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건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왕가박물관이 등장한 이후 근처에 1915년에 귀한 왕실 서책들을 보관하던 장서각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1938년에 덕수궁 미술관이 지어져 이왕가미술관으로 개칭되면서, 원래 이왕가 박물관 건물(1911년 건립)로 장서각의 서가가 옮겨가고, 이 건물은 생물표본관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1984년 궁궐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철거된 건물 중 하나입니다. 


상당히 이질적인 건물이기도 하지만, 건물의 형태가 워낙 독특하여 관광지 사진사들이 이 건물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던가 봅니다. 


그러고보니 그 시절에는 관광지마다 사진사가 있었지요..








시민들이참여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오래된 사진 속에는 도시의 풍경이 마치 지금의 것처럼 생생하게 담겨있습니다. 모든 시간마다 장소들은 인물들과 생생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남산식물원 앞에서 시간차를 두고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사진을 봅니다. 그 기억들이 과거의 것으로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대번에 알아챕니다. 홀연히 나타나 바로 어제의 일인양 존재합니다. 


사진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과 같은 것일까요?  단숨에 수십년 전의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니 말입니다.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적인 기록이 공공의 영역으로 편입됩니다. 그의 기록은 도시의 역사를 말하는 공공의 기록이 됩니다. 옛 사진 한장이 50년 후에는 엄연한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역사의 증인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록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서있습니다. 뒤로는 정동 성공회성당이 보입니다. 그 양옆으로 이상한 건물이 서있습니다. 왼쪽에는 덕수궁이 있을 것이며, 돌담길이 이어지겠지요. 1962년 혹은 1963년, 아니면 1964년... 서울시청 앞 풍경은 이랬습니다. 그 사진 속에 영원히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쳤던 재건시대의 청년들, 그들이 보았던 서울은 어땠을까요?


그때의 서울은 안녕한가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부산에 살던 무렵인 듯하다. 버스를 타고 자갈치 시장을 지나오는데, 묘한 집들을 보았다. 연대가 상당히 거슬러올라가는 듯 보이는 목조가옥들이 희뿌옇게 먼지를 날리며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풍경이 스쳤다. 자갈치인듯 자갈치가 아닌 그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나는 궁금해하면서도 낯선 기운에 발을 디디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희미한 안개를 타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산을 방문한 지난 달, 우연인듯 필연인듯 그 거리를 지나갔다. 가을이라 하기에 너무나 쾌청한 날씨 덕분에 예전에 보았던 그 희끄무레한 어둠은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곳에서 홀린 듯 집을 구경했다. 원래 자갈치 시장이 있었던 자리가 이곳이라 했다. 적어도 192-30년대에는 생겨났을 법한 일본식 목조형 상가들이 지금껏 남아서 도열해있는 희안한 곳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이 생겨나기 시작했을까? 부산의 가장 크고 유명한 이 어시장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을까? 어떤 활동들이 있었을까? 골목마다 수십년에서 길게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건물들이 자신의 시대를 먼지 아래 지우면서 생선을 파는 일에만 골몰해왔다. 지금은 공동어시장 센터에 주요상권을 내주고 건어물시장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길 끝에 옛 시대 어시장 건물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부산은 비린내가 내재된 도시다. 먼 곳에 오래 있다가 부산역에 내렸을 때 나는 들큰하고 짠 내음이 코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짠 내음과 비릿한 바다 냄새는 엄마 몸냄새처럼 익숙하고 유난스럽고 다정하고 안심을 주는 그런 것이다. 끈적이는 짠 맛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생물들의 냄새인지, 그 바다에 몸의 일부를 비비고 사는 인간들의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다. 부산에 사는 한, 사람과 바다와 땅은 하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거대한 밀도의 물에 익숙해지고, 짜고 비린 냄새에 익숙해지고, 대책없이 새파란 하늘에 익숙해지고, 또 먼지 한오라기 남기지 않을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부산이다. 









지금 남포동 수협으로 바뀐 저 장소가 최초의 어시장 건물이라고 일행이 알려주었다. 부산시 수협의 전신인 부산어업조합의 자리란다. 어선이 실어온 물고기를 자갈밭 해안에 내다팔던 시장이 열렸다고 자갈치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남포동 수협 건물 앞이 모두 찰방찰방한 해안이었다는 이야기다. 복개된 해안 위에 서서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바글바글 시작된 어시장은 지금 다대 공판장, 자갈치 공판장, 남포동 건어물 공판장 등 세 개의 공판장에서 2천억원이 넘는 위판고를 올린다. 명실공히 국내 최고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옛 건물을 구경하는데 솔솔 고소한 내음이 난다. 가을전어라고 하더니, 여간 꼬숩지가 않다. 이동하다가 일행 모두 멈추고 전어구이와 생탁으로 쉬어갔다. 한갓진 평일 오후에 전어구이집 주인이 대목 만났다. 뼈까지 모두 씹어먹어야 꼬순 맛을 잘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안씹히는 거지? 다급한 나머지 바짝 구워야 제맛인데, 좀 덜 구워졌던 것 같다. 냄새 흡입하고 살 발라먹으며 전어맛을 즐긴다. 그날의 기억 중에서 전어구이를 먹던 장면이 가장 선명하다. 건축 답사를 하더라도 별미 먹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영도다리가 다시 도개교로 바뀌었다. 요즘도 12시가 되면 다리를 번쩍 들어올린다. 예전에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가 엄청 대단했던 것 같은데 광안대교니, 거가대교, 마창대교 등을 보다보니 이런 다리쯤이야 보잘것 없다. 그 바다에서 여전히 낚시를 이어가는 꾼들이 자리를 잡았다. 흥미롭게도 영도대교 근처에는 예부터 그자리에 있었다는 점집들이 영업중이다. 전쟁 때 최후의 피난처였던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쫒겨내려온 피란민들이 넘쳐났고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바다의 끝 영도다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눈물을 흘렸단다. 이것은 그런 바람이 불러일으킨 점집들이다. 지금은 드문드문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옛 시대를 흘려보낸 푸른 물결처럼, 이산의 마음도 추스러졌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탄생지가 아니던가, 다리 밑이란.











덕수궁 석조전이 문을 열었다. 수년간 가림막으로 가려져있던 궁역이 개방되었다. 내부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부른다. 역사관이 좀 많은가, 싶지만  덕수궁의 내부가 궁금했기에 얼른 들어가보고 싶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한 사람에 한해서 그것도 30분 간격으로 15명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야 1층과 2층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공간이었다. 





하마마츠시립도서관에 있던 1898년의 도면과 옛 사진과 신문기사를 통해 복원하고 내부의 가구들은 부분적으로는 창덕궁 수장고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재현했다. 불충분한 부분은 서양식 가구를 공급했던 영국 가구회사인 메이플 사의 카탈로그를 점검하면서 당시의 것을 추정했다고 한다. 



석조전은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궁궐 중에서 가장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종임금은 석조전을 정전으로 사용하고자 했으나, 1910년에야 완공된 당시는 이미 한일병합조합이 이루어진 해로, 우리는 독립된 국가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를 위한 모든 장식들이 석조전에 활용되었다. 신고전주의풍의 장식과 기둥, 금테를 두른 몰딩, 완벽한 서양식 건물안에 완벽한 서양식 가구로 꾸며진 궁궐은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대단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석조전에서 프랑스에서 보았던 수많은 저택, 궁궐들을 떠올렸다. 이토록 유럽을 닮고 싶었던가,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던가. 





  


서양식 건물의 창에서 전통 궁궐의 아름답고 정교한 색과 형태가 바라보인다. 

이런 이질적인 만남이 참 좋다.





고종임금은 석조전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고 이 궁궐은 영친왕 부처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용하거나, 그의 주요 컬렉션을 보관, 전시하는 장소로 쓰였다. 도쿄 아카사카에서 거처하던 영친왕 부처는 조선땅을 거의 밟지 않았으므로 석조전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덕수궁은 어느 순간, 시민들의 위락을 도모하는 장소로 바뀐다. 어린이 놀이터가 생겨나고 물웅덩이는 스케이트장이된다. 영친왕 이은의 일본미술컬렉션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미술관이 설립되었고, 시민들은 쉽게 궁궐을 드나들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비밀스런 분위기가 한껏 풍기는 대식당. 이곳에는 어떤 음식이 등장했을까? 

궁궐의 서양음식을 재현해볼 수 없을까?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고, 1955년에는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내부는 차례차례 변화를 맞았다. 복원은 2009년에 시작되었다. 원형찾기는 쉽지 않았으나 공들여 그 시대로 되돌려놓았다. 우리는 석조전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 우리는 100년 전 과거를 들여다보고 판단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기에. 해설사는 말을 아꼈고, 답사자들 중 나이든 양반은 일제를 욕했다. 그런 장소로서 석조전을 보기에 이 공들인 것이 너무 아깝다. 


작은 공간이라도, 대한제국을 이해할 도서관이나 자료실이 있다면 좋을텐데, 우리의 역사관과 기념관은 이런 면이 너무나 부실하다. 석조전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혼란한 질문들이 마구 떠올랐으나 그 어떤 해답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언가 시작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파헤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되는 것이다. 





석조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개된 장소이니, 다른 이야기는 차지하고 내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1층 중앙홀에 놓인 당시의 가구. 창덕궁 소장인 왕실 가구라 한다.






1층 접견실 / 공식행사가 열리던 공간  



1층 귀빈대기실 /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 



1층 귀빈대기실의 가구 



1층의 복도 



1층 접견실과 인접한 방. 제국의 복식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든 것이 새롭게 복원되었으나, 계단의 황동 손잡이는 100년전 그대로다. 






커튼도 예쁘다. 컬러는 붉은 색, 연두색, 황금색의 세가지가 골고루 쓰였다. 

물론, 이 컬러와 문양은 재현이다.  



석조전의 도면 자료. 일반공개되면 좋을텐데. 얼른 자료집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 참 좋다. 가장 좋은 목재로 가장 공들여지은 궁궐 건물이 아닌가!



2층은 왕실 가족들의 사적 공간이다. 당시를 재현한 화장실과 세면대  




벽난로와 관련된 소품들.




2층 황제 침실 




2층 황제의 서재 






2층 황후의 서재. 

1층과 2층 모두 완전히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 목재 패턴. 이것도 고증된 것일까, 궁금했다.

중명전은 이에 비하면 품위없이 복원되었다.  






30분 간격으로 해설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2층의 회랑. 석조전의 다양한 역사를 볼 수 있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아직 어린 영친왕이 석조전 2층 난간에서 사진을 남겼다. 



1910년대의 석조전모습. 뒤쪽으로 돈덕전인지 환벽전인지 

양관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층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덕수궁 일대와 궁담 바깥까지 훤하게 보인다. 

왕의 시름. 왕의 존재.



가을이 찾아온 덕수궁. 이곳에서는 모든 풍경이 찬란하다. 







제랄딘 하비에르.(Graldine Javier)


그녀의 작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공간에 대해 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간건축이 도산하고 그 유명한 건축물이 매물로 나왔다. 미술 컬렉션의 큰 손이었다가, 예술가로 변신했다가, 국내에는 천안, 서울, 제주에, 해외에는 북경, 뉴욕에 갤러리를 두고 있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던 공간 사옥을 인수했다. 그리하여, 공간 사옥이 아라리오 미술관으로 바뀌어 9월 1일 개관했다. 




이 소식은 꽤 유쾌하게 들렸다. 아라리오라면, 이 공간이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장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오너의 폭넓은 컬렉션을 한자리에서 구경하는 것도 볼만하지 않겠나 싶었다. 김수근 건축의 정점이자 현대건축의 하나의 이정표를 찍었던 장소였으므로, 건축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개관하고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 주에야 비로소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이 건물이 건축사무소였을 때, 나는 이곳을 여러차례 방문했었다. 십수년 전 잡지 기자였을 무렵의 일이다. 공간 사옥에는 <공간>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가 있었다. 초짜 기자였을 무렵, 공간지에는 나에게 선배였던 최연숙 기자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꽤 좋아했다. 나와는 동향이었는데다 건축계에서 저돌적인 여인으로 소문나있었다. 점잖고 말이 느린 건축기자들 사이에서 직선적이고 성격이 급했던 그녀였으니 이런저런 말들이 왜 없었으랴.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으나 그러지는 못했고, 건축기자들끼리 친했던 만큼 워크숍을 함께 가거나 술자리도 하곤 했다. 존재만으로 든든한 선배였다. 


건축계에 뼈를 묻을 것 같았던 그녀는 병마와 싸우다가 5년전 여름에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녀의 나이를 지나쳐 지금에 왔다. 벌써 그만큼 지났구나. 그 여름이.


그리고 그녀와 스치며 내 후배가 그 잡지사에 입사하여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다. 그들의 안내로 회사 내부를 구경하기도 했는데, 그 기억조차도 꽤 오래되어 벽돌과 좁고 넓은 느낌만으로 남아있다. 그녀와 내 후배 모두 공간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이 건물은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저 단편적인 기억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원서동 길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일까?  담쟁이가 덮였다가 떨어졌다가 하면서 검은 벽돌의 몸체를 드러냈다가 감추었다가 하는 그 건물.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표지석이었기에, 이 건물이 사라지게 된다면 무척 애석했을 것이다. 




나는 익숙하게 출입구쪽으로 다가가다가,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당황했다.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입구가 달라져있었다. 그러자 나는 처음 이곳에 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미술관 동선에 따라 한쪽 면으로 5층까지 올라갔다가 다른쪽 공간으로 지하까지 내려오는 구조로 바뀌었고, 층층마다 귀에 익은 이름의 예술가들의 야심만만한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백남준과 신디셔먼과  키스해링과 잘 나가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건성 건성 바라보았다. 


공간은 힘이 셌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바라볼 데가 없었다. 벽돌로 단단하게 구축된 건물은, 층고가 낮아서 낯선 긴장감을 주었다. 조밀하게 쪼개진 공간과 그런대로 트인 공간이 뒤섞여 닮은 장소가 한군데도 없었다. 몇 번을 오가도 과연 내가 이 건물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대답하기 어려웠다. 건축을 이루는 익숙한 듯 낯선 질감들이 마치 환영처럼 온갖 기억을 재생시켰다.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장면들도 모두 정교하게 설정된 것만 같았다. 나는 작품을 보는 시간 만큼 공간을 보았다. 창에 서서는 바깥을 바라보았고 계단에서는 묘한 틈들을 보았다. 이런저런 기억을 반복재생하느라 감정이 복잡해졌다.


이 공간 안에서 대단한 작품들이 맥을 못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거대한 작품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관통하기에는 섬세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플럭서스가, 그래피티가, 액션 포토가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다가, 그녀의 작품을 보았다. 제랄딘 하비에르의 <마담 A>라는 비디오 작품이었다. 

28분짜리. 나는 꼬박 서서 이 작품을 보았다. 

이 작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미술관에 대한 생각은 관람 하기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있었기에 건축은, 작품은, 사물들은, 모두 그 전과 달라졌다.  



필리핀의 신예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동남아 열대의 환상적인 언어들이 낯설고 즐거웠다. 작품 언저리에서 조지아 오키프와 프리다 칼로가 함께 보였다. 제랄딘 하비에르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얼른 메모했다.



마담 A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유려한 영상과 분명 작가가 직접 만들었을 수많은 소품들이 영상 속에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건너와 전세계를 방랑하다 필리핀 케손 섬에 정착하게 된 마담의 일대기 였다. 나는 영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담 A'가 벨 에포크 시대의 화가 존싱어 사전트가 그린 <마담x>의 주인공인 마담 고트로의 실제 스캔들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는 마담이 평생을 모아둔 이상야릇한 물건들(동물의 뼈, 새의 그림, 아름답지만 무용한 종류의 소품들)이 가득한 마담의 오래된 집에 대한 것이었다. 마담은 그것을 박물관이라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담은 마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풀이끼와 마른 꽃나무가 뒤섞인 정원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마담이 떠난 후 사물들도 흩어지고 집은 점점 폐허가 되었고 어느 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 장소를 안타까워하던 몇몇의 사람들이 있어서 마담의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등장인물 중 한명이 이야기한다. 

(작품은 촬영이 불가하므로, 나는 비디오에 나오는 내용을 부랴부랴 받아 적었다. 

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질문에 모든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건축이나 분류에 대한 것만은아니라는 겁니다. 박물관은 정신적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


"우리는 사물을 모읍니다. 그것과 대화하기 위해서죠."


"사물들은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고, 우리는 우연히 그것들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 알아듣는 것이지요."


"사물들은 말합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이 말은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내가 모으는 사물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해주었고, 내가 하고 있는 기록들, 내가 보러 다니는 그림들, 박물관들을 좀더 사랑스럽게 만들어주었다. 신비롭고 즐거운 이야기는 계속 존재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려한 영상이었다. 이것이 영상의 힘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영상의 힘이었다. 


모든 멀리 있던 예술이라는 것이 내 가까이로 훌쩍 다가왔다. 


나는 이제부터 원서동의 공간 건축을 제랄딘 하비에르를 알게 해준 곳으로 바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억을 위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그 사물들에게는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아름다운 시적인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곳으로. 그런 예술가를 만나게 해준 곳으로서.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떤가. 이 건축물도 하나의 사물로서, 특별하고도 시적인 이야기를 발산하지 않을까? 도시에 오래된 점으로서. 이 장소를 거쳐간 많은 인물의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서, 혹은 애정과 음모와 배신 같은 드라마로서,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야기로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우연히 들리게 될 이야기로서 '공간'은 오랫동안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아래는 마담A의 첫 장면이 나오는 티저 영상 중 캡쳐한 이미지다. 몇 장면이지만 영상의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랄딘 하비에르의 작품을 칭송하며 쓴 글이니 이 사진이 저작권 관련해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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