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사바친의 흔적을 찾아서



도시의 골목은 가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인 것처럼 문득 낯설어진다. 그럴 때면, 이 도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이방의 여행자가 된다. 이방의 시선은 내부적 존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진귀한 눈이다. 이 땅을 스쳐간 역사를 더듬을 때 이방인의 기록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도쿄 여행에서 길을 지나던 길이 우연히 문화재로 지정된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츠비시를 세운 이와사키 집안의 저택 중 하나였는데, 규모와 화려함이 유럽에서 보았던 궁을 연상케했다. 목재와 벽지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이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는 조시아 콘더(Josiah Conder). 영국인인 그는 자국의 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화려하게 이식했다. 

콘더가 일본에 온 것은 1877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 후 40여년 동안 메이지시대 상류층의 유흥공간인 로쿠메이칸, 오랜 후원자였던 미츠비시의 양관과 저택들, 성 니콜라이 성당 등 교회와 성당 등 메이지 시대를 이끄는 건축가로 활동했다. 공부대학교 조가학과(후에 동경대학교 공학부 건축과) 교수를 지냈으며 그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이후 일본의 건축을 주도했다. 동경대 건축과 건물 앞에는 그의 동상도 세워져있다. 콘더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다쓰노 킨고는 동경역 등을 지었으며 킨고의 제자인 츠카모토 야스시, 나카무라 요시헤이 등은 조선의 건축에도 족적을 남겼다. 경성역, 중앙고등학교 동관, 서관, 한국은행 본점, 군산 조선은행, 옛 충남도청 등등.




1. 조시아 콘더는 메이지시대의 건축을 이끌었다. 옛 이와사키 저택. 

2. 미츠비시1호관의 도면. (1894년 완공)





구한말 궁정의 외국인 건축가 사바친 

조시아 콘더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면서 우리 땅에도 그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가 서양식 건축문화를 이식해온 사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크라니아 출신으로 스물셋에 조선에 온 아파나지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친.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다. 조시아 콘더와 마찬가지로, 한창 젊은 나이에 극동의 작은 나라에 들어와서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경운궁의 양관(관문각, 중명전, 정관헌, 돈덕전, 구성헌)과 인천해관청사, 독립문, 정동 러시아 공사관, 손탁호텔, 세창양행 사옥과 사택, 홈링거 양행 사옥, 제물포 외국인 구락부 등을 지어 개화기 인천과 서울에 양식 건축의 풍경을 이식했다. 



특히, 1900년대 전후로 경운궁(현재 창덕궁)의 양관 건축에 깊이 관여했던 바, 대한제국기의 궁정건축가라는 그의 직함을 다시 한번 주의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사바친은 아내, 그리고 다섯 아이와 함께 인천 조계지에 살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순양함을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사바친의 가족은 상하이를 거쳐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으나 그곳 생활에 정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들 가족에게는 조선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극동의 생활을 그리워했던 사바친의 가족은 1908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다시 왔고,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미국 등으로 흩어졌다. 사바친은 유랑의 삶을 살다가 1920년에 볼가 강 근처 어디쯤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 대한제국기 경운궁(덕수궁)의 양관을 설계한 사바친.
        2. 덕수궁 내부에 있었던 돈덕전. 



사바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태중 교수의 논문 <개화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1993)>을 참고로 하면, 그는 성실하고 강직한 원칙주의자였다. 인천에 도착하고 인천해관에 소속된 관리로 몸담았던 10여 년간 세레딘-사바친은 아직 서양식 건축물을 수용할 수 없었던 정부의 호출을 기다리며 어려운 날들을 보냈다. 제안들은 반려되었고 제대로된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경복궁 내에 관문각 공사를 맡게 되었는데, 공사 현장에서 불합리한 행동을 일삼는 한국관리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를 신임했고, 어떤 대안이든 해결해주려 노력했다. 경복궁 수비대에 사바친이 배치된 것도 그의 성실함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때, 명성황후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는데, 전모를 목격한 그는 외국 언론에 자신이 본 것을 거짓됨 없이 알렸다.  





        1. 손탁호텔의 외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엽서 
        2.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한국전쟁시기 파괴되고 긴 탑신만 남아있다. 



이후 10년을 살펴보면 그는 실리를 쫓는 약삭빠른 사람이기 보다는, 한번 목표한 것을 끝까지 관철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레딘-사바친은 해관의 신분에서 벗어나 건축가로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가 등장하자, 왕은 경운궁의 양관 프로젝트를 서둘러 진행한다. 1900년 전후로 왕은 외국 공관들에게 내어주었던 정동의 땅을 다시 사들였고 궁궐 권역은 점점 넓어졌다. 거기에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양관들이었고 그 주역은 세레딘-사바친이었다. 황실 도서관이자 황제의 집무실이었던 중명전, 어진을 보관하던 상징적인 공간인 정관헌을 비롯해서, 침전과 정전이 있던 돈덕전, 환벽정 등이 사바친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돈덕전은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으나 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붉은 벽돌과 묵직한 장식, 영국공사관과 미국공사관 사이에 가로놓인 절묘한 위치는 이 장소의 의미를 좀더 되새기게 해준다. 왕궁건축과 맞물려 새로운 일들이 쏟아졌다. 고종에게 매일 같이 올렸다던 커피의 주인공 앙투아네트 손탁이 운영하던 손탁호텔을 지었고, 인천에는 외국인들이 어울려 회포를 풀 수 있는 제물포 구락부를 완공했다. 20년의 세월 동안 두 도시에서 풀어놓은 건축물들은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 조계지 건축가로서 외국인들을 위한 건축물에 그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제물포구락부. 
        2. 자유 공원 내에 건립되었던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사택.  



기록되지 않은 인생을 엿보다 

나는 낯선 땅에 빌을 디딘 스물 셋의 젊은 청년이 본 하늘과 화염을 뒤로하고 다급하게 짐을 꾸려 프랑스 순항함에 몸을 실은 마흔넷의 남자가 바라본 하늘이 어떻게 달랐을까, 궁금해진다. 은자의 나라에 점점 가까워지며 호기심과 기대감이 부풀어올랐을 1883년 9월과 점점 멀어지는 그 땅 위로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던 1904년 2월. 지지리도 고생스러운 한편, 환희와 감격으로 벅찼던 20년의 세월이 그 사이에 압축되어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젊음을 모두 던졌던 20년이었다. 그가 바라보았던 조선은, 대한제국은 어떠했을까?


안타깝게도 사바친이 남긴 흔적은 여기까지다. 미국에 살고 있다는 유족들의 증언과 아들이 남긴 회고록(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 학자들이 연구한 사바친의 약사 정도가 있다.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미약한 언어들을 추려보자면, 1908년에 나가사키로 온 사바친은 가족들을 그대로 두고 대륙으로 떠났다. 은둔자처럼 유랑하는 사바친을 찾아온 아들에게 남겨준 것은 사냥용 총, 카메라, 제도용품, 그리고 판화 콜렉션이었다. 한 인간의 보유한 사물들이야말로 그를 설명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면, 총, 카메라, 제도기, 그리고 판화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축가가 모든 걸 다 버리고서라도 떼어놓을 수 없었던 필수품들일 터이다. 나는 그 총이 쏘아 맞춘 것들이 무엇일지, 카메라에 들어있는 필름에 찍힌 것들이 무엇일지(카메라는 어떤 상표의 어떤 기종인지도!), 그 제도기가 그린 도면들은 과연 어디 있을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그림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극동의 끝 조선으로 밀려오게 한 홀연한 바람과 홀로 다시금 대륙으로 걸어들어가게 한 그 바람은, 그리하여 태어난 고향까지 다시 그를 밀어놓은 그 바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몇 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인생의 여정 동안 인물을 휘둘렀던 바람같은 운명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공사관 거리, 정동을 걷다 

나는 정동길에 서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면 정동제일교회를 기점으로 왼쪽은 옛 경성재판소를 개조한 시립미술관이, 우측에는 미국대사관저, 그리고 큰 길을 따라 영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길따라 쭉 올라가면 좁고 아기자기한 보도 주변으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화여고 박물관, 정동극장 안쪽에 있는 중명전, 옛 신아일보 본사 등이 가로수 사이로 몸을 드러낸다. 이 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공사관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학교와 사무실들을 오가는 발걸음들이, 느긋하지만은 않은 속도를 보여준다. 






1. 덕수궁 정관헌. 왕실번영의 상징물이 다채롭게 장식되어 있는 야외 살롱이다. 어진을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2. 덕수궁 중명전은 외따로 떨어져있어 당시 궐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의 황실도서관 겸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사라진 건물과 남아있는 건물 사이의 간극을 본다. 백년이 넘는 시간만큼이나 무수한 사건과 인물들이 이 거리를 거쳐갔다. 정동을 화려하게 수놓던 세레딘-사바친의 건물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탁호텔은 이화여고의 기숙사로 쓰이다가 사라졌고,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탑신만 남아있다. 그리고 덕수궁의 양관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사라진 채다. 민간에 불하되어 여러 차례 개축되어온 중명전이 궁궐건물의 위상을 되찾고 정관헌에서 가끔 커피 시연회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돈덕전과 환벽정이 사라진 것을 위안해본다. 사라진 건물은 새로운 건물들로 대체되고, 옛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그들의 먼 후손이 다른 마음, 시선으로 살아간다. 


이 거리에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 같은 것 사이로 낡은 양복을 입은 콧수염의 신사가 환영처럼 나타난다. 마음을 움직이는 풍경을 만났는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그린다. 그는 오랫동안 그 풍경 속에 멈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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