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다리는 상당히 높았다. 경부선 철도선이 지나는 다리다. '영동', '횡간'이라는 지명은 KTX가 등장하기 전, 무궁화호, 새마을 호를 타던 시절에 자주 들었다.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입했을 때 등장하는 지명이다. 다리 아래에 서있은지 십여분 되었을까? 다리 위 철길로 기차가 우당탕거리며 지나간다. 철로 아래 다리에 날카로운 소리와 묵직한 진동이 이리저리 튄다. 나는 기차에 탄 것 마냥 휘청거린다. 오래된 다리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겁이 난다. 하지만, 곧 소리는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근처에는 사람사는 곳도 눈에 띄지 않고 그저 너른 벌판과 야산이 있을 뿐이다. 차나 사람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지점은 아닌듯하다. 




통로가 두 개가 있어 쌍굴다리다. 하나는 하천이 흘러가고 한쪽은 도로다.  쌍굴다리에서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있는 사람들 몇몇이 차를 멈추고 굴다리를 왔다갔다 한다. 굴다리 주변에는 온통 총탄 파편이 튄 자국과 그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표시해둔 자국들로 가득하다. 동그라미도 있고 세모꼴도 있는데, 두 개가 어떤 차이인지 알 수는 없다. 들은 이야기로는 굴 내부에도 총탄의 흔적들이 가득했으나 보수공사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굳이 흉한 자국을 그냥 둘 까닭이 있겠는가, 잊어야 할 일을 자꾸 들추어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말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꾸 덮어두자고, 감추어두자고 한다. 




노근리.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해불가능한 죽음과 학대와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니말이다. 60년 전에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전쟁, 그 전쟁을 수행하던 외국의 군인들이 피난을 가던 사람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거나, 저항하지도 못한채 죽어쓰러진 자들이 수백에 달한다거나,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군인들은 상부의 사격 명령에 따랐다거나, B-29 전투기가 우선 공격하여 수백미터 상공에서 포탄을 떨어트렸다던가, 한날 한시에 죽은 사람들이 많아 그 지역 사람들은 죄다 제사일이 고날고날이라던가, 참다참다 미국에 진상조사를 요청했다가 증거불충분과 시효만료로 거부당했다던가, 이윽고 비공개 문서들이 공개되어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입장을 재점검하게 되었다거나, 한반도 상황에 무지했던 군인들이 캠핑을 오듯 전쟁 수행을 하다가 여러 차례 전멸했다는 기록과 민간인을 공격한 기록들이 공개되었다거나,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정의를 찾고자했던 전쟁이 아니라 소련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제 다 한세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노근리에서, 그 허탈하고 끔찍하고 숱한 죽음 앞에서,


지금 역시 도처에 놓인 죽음들과 유린된 인권 앞에서 진정 애도하고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싶다. 괜찮다는 등 할수있다는 등의 사탕발림으로 토닥거리며 다시금 죽음같은 긴 행렬에 줄을 세우는 값싼 힐링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길고 아프게 울어야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노근리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 보도하여 결국 진상조사와 미국의 가해사실 인정까지 이끌어냈던 저널리스트들이 가졌던 기자정신, 기자의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기자정신이 무엇인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고 권력과 수구와 관행에 빌붙어 히히낙낙하는 자들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하고싶다.



과거사진상조사를 시행하는 단체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와 같은 단체들-이 국가가 저지른 테러에 희생당한 개인의 비극이 묻히지 않도록 어떤 일들을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은 보도연맹으로 죽어간 사람들, 한국군과 미군들이 오인폭격하여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들, 그저 전쟁의광기에 미친 군인들이 유린하고 초토화시킨 마을을 이야기한다. 전쟁직후 유가족들이 얼마나 거세게 국가를 상대로 투쟁했는지, 그러나 혼란한 틈을 타 정권이 바뀌며 또 어떻게 그들의요구가 침묵으로 바뀌었는지, 왜 지금도 빨갱이라는 말로 금을 긋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토록 오랫동안 국가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줄도 몰랐던 사람들, 시절들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눈을 뜨자고, 잠을 깨지고 말이다. 










겨울 노근리에서, 나는  악몽을 꾸고 깨어난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1950년 8월 7일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고지고 손붙잡고 끌며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이 북한 인민군들이 대전을 함락하러 목전에 와있다는 것도 모른채  노근리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미군들의눈빛이 불안했다고 느꼈지만 파란눈의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을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철길 위로 몰았을 때는 빠른길로 안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윽고, B-29전투기가 보이고 기관총 사격과 폭격으로 눈앞이 하얀 연기로 가득했을 때에도 꿈만 같았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길을 달렸을 것이고, 눈을 뜨고 보니 굴다리 안이었을 것이다. 



굴다리 앞에 서본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굴다리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그날이 펼쳐진다. 습하고 무더운 삼복더위의 한낮, 다치고 찟긴 사람들이 아우성대는 굴다리. 그때 사람들은 모두 짐승이 되어있었다. 총든 군인들은 먹이를 지키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였다. 오도가도 못한 닭장 안의 짐승처럼 수백명의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굴다리에 목숨줄 붙들듯 숨어들었다. 굴다리 안에는 숨을 데도 없다. 누군가가 총알받이가 되어준 덕분에 누군가의 목숨이 붙어있을 뿐. 치료해주었다가 총을 쏘아대는 이상한 군인과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우는 아이를 억지로 물 속에 집어넣은 아비는, 팔다리가 떨어진 채 죽은 가족의 시신을 바라보아야하는 남은 자들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어 죽은자들이 흘린 피가 그득한 냇물을 억지로 삼키던 그 여름의 노근리 사람들은 얼마나 울어야했을까. 





그렇게 일주일이 갔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24사단이 퇴각하면서 쌍굴다리 사람들은 버려졌다. 절반은 죽었고 나머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추스린 사람들은 고작 백여명. 얼마나 울어야 그 여름의 더위와 살이 썩는 냄새와 더러운 물을 잊을 수 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죽음을 말할 수 있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굴다리 앞에 설 수 있었을까.


















노근리 쌍굴다리는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노근리 평화공원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기념관과 널따란 공원이 외딴 마을인 철로 주변을 채우고 있다. 2년 전 여름에 쌍굴다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평화공원은 한창 지어지던 중이었다. 기념공원은 조용히 완성되어 조용히 개관했다. 미군의 양만학살이라는 민감하고 복잡한 사안들 때문이었을까. 잊혀진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한 겨울 해거름에 방문한 노근리는 그저 쓸쓸했다. 기념관인 건물과 조각공원, 위령탑 등이 있고, 건너편 너른 부지에는 조잡한 포토존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십년동안 반복해온 이미지들로 가득한 고답적인 조각들도, 십수년 전 다니엘 리베스킨트라는 건축가가 베를린 유태인박물관이라는 걸출한 체험형 건축공간을 만든 이후로 생겨난 아류 같은 박물관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 유적>이라는 공간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있어야 옳은지 논의한 바도 없으며, 수십년 동안 되풀이해온 이미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근거도 문제의식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곳이 추모의 공간이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허벌판의 너른 부지가 아니라 촘촘하게 크고작은 나무가 심어진 숲이되길, 따뜻하고 참한 숲이 자라나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영원한 삶으로 기념해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웨덴 어느 곳의 숲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시민묘지처럼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함께 치유받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좋겠다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노근리 사건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당시 긴박했던 전쟁상황에 대한 기록도 있다. 민간인임을 알았다고 말하는 미군 병사의 인터뷰나, 죽은자 중에 유난히 정씨가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 이 사건을 세계에 알린 저널리스트의 사건 취재수첩도 놓여있다. 미국에 대한 해명 요구와 철회, 재조사와 재조사. 지난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전히 쌍굴다리에는 "노근리 사건 현장"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중인 싸움들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직 우리는 추모할 준비도, 기념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그 현장에 있을 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