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시장 안 보수동 책방 골목.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있는 골목.









보수동 책방골목은 나와도 인연이 있다. 고등학교 새학기가 되면 <수학의 정석>을 사러 갔던 그곳이니까. 책에서는 달걀냄새 비슷한 잉크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깨끗한 참고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할인된 가격. 보수동 책상에서 <정석>을 사지 않으면 신학기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네에도 헌책방이 곳곳에 있어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곳이 많았다. 그중에서 서면에 있는 헌책방을 자주 갔다. 몇 군데의 헌책방이 있었는데, 각기 판매하는 책의 성격이 달랐다. 대로변에 있어 북적거리던 헌책방은 세계문학이나 추리소설을 자주 사러갔다. 때로는 순정만화잡지<르네상스>, 영화잡지 <스크린>은 서면 뒷골목의 작은 헌책방에서 사곤 했다. 영화잡지에 실린 좋아하는 배우의 화보사진- 이자벨 아자니, 리버 피닉스 같은-을 참으로 아꼈었는데.... 그 책들 중 몇 권은 여전히 내 방 책꽂이에 있다.


지금 작업실이 있는 홍대 주변에도 헌책방이 몇 군데 있어, 가끔 새책같은 중고책을 사러 들른다. 인천 배다리 헌책 골목도 취재차 다녀오기도 했다. 아벨서점의 겹겹이 쌓인 책들. 그러고보면 헌책방이야 말로 도시인의 역사를 관통하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샀던 책이 돌고 도는 장소. 책은 사실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물건이 아니던가.


보수동 책방골목은 전국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는 헌책방 골목이 아닐까?. 이미 부산의 관광명소가 되었을 뿐더러, 책방의 수도 많아 거리를 형성하고 있고 더불어 볼만하고 살만한 책들도 참으로 다양하다. 책을 보러, 책을 사러, 사진을 찍으러, 그저 구경하러 사람들은 책방골목에 발을 디딘다. 내가 책방골목에 간 이유는, 그저 책 속에 파묻혀있고 싶어서였다. 묵은 내 나는 책,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뻣뻣한 종이, 콩알만한 서체, 크기고 두께도 작지만 담을 이야기는 충분히 담겨진 책들. 수십년에 걸쳐 모여든 책들은, 내가 오랜 세월을 더 살아간 다음,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상상해보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책들은 누군가의 수집품 같았다.











과연 어떤 책들이 있을 지가 가장 궁금했다.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참고서, 전집류, 사전, 만화전집, 그리고 이사갈 때 처분하게 되는 오래된 책들 정도일까? 그에 더불어 잡지, 외국도서, 각종 단행본들과 백년 가까이 된 고서들이 헌책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 거리는 헌책이 주인이다. 켜켜이 손때가 묻고 낡았지만 아직도 엄연히 책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사물들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많은 헌책방 거리들이 한국전쟁 이후 물자가 부족하고 가난하던 시절에 등장했다고 한다. 보수동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온 손씨 부부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 골목 안쪽에서 박스를 깔고 각종 헌책을 팔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책, 고물상으로부터 사들인 헌책 등을 잘 추려 팔았다고 한다.

부산은 피난민이 밀집된 지역이며, 중구, 서구, 영도구 일대에 피난민이 정착하여 살았다. 각지역에 있던 학교들도 속속 부산으로 옮겨와 개교했다. 서울대학교가 부산에서 문을 열었고, 보수동 뒤쪽의 구덕산 자락에는 천막학교가
많았다. 헌책 노점은 꽤나 안목이 있었던 선택이있다. 책이 귀했던 시절, 학생들은 갖고 있던 책을 팔아 밥벌이를 하고 또 헌책을 사서 공부했다.

노점 헌책방에 다른 피난민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노점에서 가건물로, 의젓한 점포건물로 외양을 바꾸어갔을 뿐, 책방골목은 사라지지 않았다. 70년대에는 점포가 70여개에 달했다. 오래된 책을 팔고 다시 헌책을 사는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잡았을 때니까. 한때 중고 책방이 위기를 겪으며 책방이 문을 닫기도 했으나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수의 책방들이 여전히 골목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책방도 예쁘게 옷을 갈아입었다. 젊은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헌책방의 묘미를 살려간다고 할까? 커뮤니티가 중심이 되고 오래된 책, 절판된 책이라도 친절하게 상담해주는 책방 주인들이 살갑다. 작고 따스한 공간에 발을 디디고 오래된 책 냄새를 맡아본다. 영국을 대표하는 책마을인 '헤이온와이'가 어떤 풍경인지 모르겠지만, 이 골목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좁은 골목 양쪽편에 책방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풍경이 참 좋다.






길이 헷갈릴 즈음에 나타나는 안내판이 나타났다.이쯤에서 쉬어야겠다 싶은 사람들을 위한 따스한 카페와 도넛과 고로케를 먹을 수 있는 간이 분식점이 있다. 어떤 관광지라도 쉴 장소, 먹을 장소가 역시 인기가 높다. 찹쌀 도넛이 3개 천원, 고로케가 3개 2천원이다. 주머니 가벼운 나들이객들도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점도 이곳의 장점이다.





 

 

 

 

 

 


책방 골목에서 규모도 크고 다루는 품목이 다양하여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책방 한곳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책방에는 197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 즐비하다. 김현식 시집 초판본이 벽에 걸려있다. 오래된 책들이 대접받는 곳이다. 군데군데 걸려있는 흑백사진들이 왠지 향수를 자아낸다. 사람들과 헌책과의 교류를 바라보는 책방주인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레코드판이 반갑다. 한때 선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재생하기도 어려운 물건이지만. 아직도 판이 튀는 소리에 대한 향수가 살짝 남아있다.

책방 중앙에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주변에도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오래된 문고본들이 무심하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벽에는 책 속에서 발췌한 좋은 글귀들을 손으로 꼭꼭 눌러쓴 메모들이 붙어있다. 아랫층에는 분야별로 책들이 잘 구분되어 있고 쉬어가도록 작은 카페도 마련되어 있다.

파리의 작은 서점, 세익스피어앤컴퍼니가 떠올랐다. 물론 세익스피어앤컴퍼니는 헌책방이 아니라 영어권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지만, 그 오래된 책방 속 풍경이 자꾸 오버랩된다. 세익스피어앤컴퍼니에서 책을 사면 꼭 스탬프를 찍어준다. 서점 주인의 따뜻한 웃음. 그리고 내 가슴에 콕 찍혔버린 스탬프.

책방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고객이 원하는 책을 신속하고 쾌적하게 전달하는 것일까? 고객이 미처 몰랐던 책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훌륭한 영감을 선사해야 하는 곳은 아닐까? 나는 원하는 책을 살 때는 인터넷서점을 이용하고, 특별한 책을 만나고 싶을 때는 서점에 간다. 그리고 정말 완벽한 책을 찾고 싶을 때는 헌책방에 간다.



 

 




'책의 마음'이라는 서점으로, 따뜻한 불빛에 이끌려 슬금슬금 들어갔다. 단정하게 꽂힌 문고본 문학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197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다. 손에 딱 들어올 정도로 콤팩트하고 깨알같은 활자지만 읽기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콤팩트하고 딴딴한 편집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에도 이런 문고본 책이 나온다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책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익숙치 않은 세대에게는 읽는 게 힘들 것 같았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을 조물락거리다가 그냥 나왔다.



 

 

 



빨간 가판대가 시선을 사로잡은 이곳은 고서 전문 서점이다. 오래된 책은 그 가치를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에 포스트잇으로 가벼운 설명도 덧붙여놓았다. 1960년대의 <여원>이라는 잡지, 일제강점기에 나온 일본어 시집들이 눈길을 끈다. 오래된 외국 서적들은 깨끗하게 정돈하여 커버를 씌워두었다. 그 시대를 엿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들춰보아도 흥미롭겠다.




보수동 책방골목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중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카페도 생겨나고 책방의 외관도 아기자기하게 변신하는 중이다. 작가의 작업실도 보인다.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기 위한 행사들도 열리곤 한다. 헌책방이 책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서 문화와 정신을 교류하는 장소로 가치를 옮겨가는 중이다.




골목에서 대로변으로 내려가면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 나온다. 책방골목의 역사를 보여주는 간단한 전시장이 있다.어린이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으며 책방골목을 내려다보는 카페 라운지도 마련되어 있다. 책방 골목 풍경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잠시 들러도 좋겠다.





나는 어떤 책을 샀을까? 책을 좋아하지만 책방에서는 막연해질 때가 많다. 책이 손짓하길 기다릴수밖에. 잠시 후 응답이 왔다. 그 많고 많은 책 중에 내 손에 들린 건 바로 일본인 저자가 쓴 <명화를 보는 즐거움>이라는 책이다. 미술에세이지만 요즘 책들과 비교해도 내용이 손색이 없었다. 지금과는 표준어 체계가 달라 뉴욕을 뉴우요오크라고 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꽤 되지만 번역은 크게 낯설지 않았다. 1978년도 책이며 당시 가격은 1400원. 내가 지불한 돈은 1만원이다. 싼 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충분하다. 마음에 드는 책이 30년 간의 세월을 넘어 내게로 와주었으니까.






보수동 책방골목
위치-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보수동 책방골목
참고 홈페이지-www.bosubook.com
보수동 책방골목 쇼핑몰- www.bosubookstre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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