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신 서울역사가 생겨난 후 옛 서울역사는 오랫동안 문을 닫고 먼지투성이로 있었던가 봅니다. 몇 해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더니 큰 건물에 걸맞지 않게 벌써 복원을 끝내고 공개되었습니다. 저는 2009년 1월에 폐허가 된 서울역사를 돌아보았는데,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거칠게 드러난 벽돌과 천장, 침침한 조명, 1980년대 관공서같은 초록색 카펫, 원래의 것인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붙어있던 것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폐허나 다름없는 거대한 건물의 내장을 훑으며 그래도 부패하지 않은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건축물은 죽지 않고, 큰 기둥부터 작은 돌조각까지, 조악한 스텐레스 손잡이에서 부스러진 벽의 흔적까지 역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둑해진 바깥으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옛 서울역사를 돌아보며 왠지 모를 흥분감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도대체 이 건물에는 얼마나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일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추억의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그 중에는 아마도 내 것도 몇 가지는 될 것입니다.



처음 서울에 도착한 날, 한강철교를 건너 서울찬가를 들으며 도착한 서울역.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서울역사의 모습이 눈에 칼날같이 박히던 1996년 겨울.
낯선 밤공기가 싫어 지하에서 곧장 플랫폼으로 들어가던 1999년.
건축잡지 기자 시절, 지방 출장을 가던 건축가 정기용씨와 3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인터뷰하던 1999년.
프랑스 유학시절 애용하던 TGV와 KTX가 너무도 똑같아(똑같을 수밖에) 신기했던 2006년.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기억을 찾아 그 장소와 오롯이 다시 만났던 2010년.
그 정도만 되새겨 볼랍니다. 서울역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다양할 테니까요.






서울역사는 192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벽돌구조로 짓고 외부는 돌과 벽돌을 섞어서 고풍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서울역하면 청동을 입힌 중앙의 돔이지요. 중앙 출입구가 돌출되어 웅장하게 보이고, 양 옆으로 길쭉하게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유럽의 어느 역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건물이라는 뜻이겠지요. 파리 오르세미술관도 산업혁명기에 지어진 오르세 철도역을 예술공간으로 바꾼 것이지요.  옛 서울역사를 보니 오르세 미술관이 괜시리 오버랩됩니다. 사실 건축물 설계는 스위스 루체른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해요. 설계자가 루체른 역의 디자인을 많이 참조한 듯합니다.


건물의 설계자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본인 '쓰가모토 야스시'로 추정합니다. 그의 소장하던 물건 중에 서울역사의 초기 설계도가 발견되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이름은 경성역이었죠. 경성역이라는 명칭은 그 전에 없던 것으로 경인선과 경부선의 종점은 남대문정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도의 북쪽과 철도가 연결되면서 만주까지 이어지게 되니 북쪽으로 가는 출발점이나 다름없던 남대문 정거장의 이름도 선명하게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건물이 웅장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이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리하여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1925년부터 문을 열게 된 바로 이곳.

옛날 신문기사 한번 볼까요?

장래에 이루어질 대경성의 문호가 될 남대문뎡거장은 방금신축공사를 계속하는 중인대 그뎡거장의 일홈도새로곳친다는 의론이 잇셧든 바 드뒤여래년일월일일부터 경성역이라고 곳치게되얏는데 따라서 승차원도 곳처야할터이나 새로히인쇄가 끗나기까지는 당분간묵으것을 그대로 쓰기로되얏다 (중략) 뎡거장 간판은 일본말영국말아라사말까지분명하게 쓸터이라더라 (1922128일 동아일보)







옛 사진과 비교 한번 해볼까요? 출입구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캐노피가 좀 달라보이네요. 사진상으로는 유리인지 주철인지 모르겠지만, 복원 후 모습으로는 현재 사용되는 유리공법으로 시공한 것이 좀 어색해보입니다. 자세히 보여드리기는 어려우니 현장을 방문하시면 한번 꼼꼼히 들여다보시지요.





중앙홀


 

 



중앙홀은 2층까지 막히지 않고 뻥뚤려 있어 시선이 시원합니다. 내부를 보니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에서 가끔 보았던 뉴욕의 중앙역 이미지가 슬쩍 떠오르는군요. 높고 넓은 대합실에는 시계가 걸려있고 시간마다 출착하는 기차들의 정보판이 휘리릭 돌아가면서 알려주고.
중앙홀 양 옆으로는 매표소가 있고 다시 홀 왼쪽으로는 1,2등 대합실과 귀빈실, 역장실로 가는 문이 보이며 오른쪽으로는 3등 대합실이 연결됩니다. 대합실은 중앙홀을 거치지 않고 바깥에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홀에 보이는 작품은 현재 전시중인 <카운트다운>이라는 미술 프로젝트의 작품들입니다. 중앙돔 아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는데, 원래 작품은 한국전쟁때 사라졌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다가 이번 복원에 새롭게 스테인드 글라스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네요.

경성역 구내식당서 삐-루 판매개시

경성역 중앙홈대합실안의 간이식당에서는 치운겨울동안 삐-루를 팔지안튼바 드디어 봄도되고하엿으므로 십일부터 소소족키한잔 삼십칠전의생삐루를 취급하기로 되엇다. 대륙간선의 긴 기차여행의 도중 정거시간에 한잔을 마실수가 잇게되엇다


 생맥주 한잔 들이키며 기차를 기다렸던 사람들, 열차가 정차할 동안 잠시 한잔 들이키며 목을 축였던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군요. 겨울엔 추워서 못팔았지만 봄이 오니 춘풍처럼 술내음도 남실남실 경성역 안을 채웠을 것 같습니다.





1,2등 대합실



 

 



요즘으로 치자면 특실손님과 일반실 손님의 대합실을 구분했던 셈이죠. 이곳은 1,2등 좌석을 애용하던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던 대합실입니다. 1920년대는 여행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기찻길이 뚫려 어디든 마음먹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된 데다가 관광이 붐을 일으켜 전국의 사람들이 경성, 평양, 경주,인천, 금강산을 찾아 떠났다고 합니다.

1,2등 대합실 중앙에는 사각 기둥이 있는데, 원형은 저렇게 장식적이지 않더군요. 아마 후대에 보수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장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벽에도 타일로 소소하게 장식이 되어 있고, 바로 옆에는 부인대합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내외하던 관습이 여전히 내려오던 시절이라 부부가 같이 기차를 타더라도 대합실을 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2009년 구 서울역사 방문시 찍었던 사진입니다. 이랬던 장소가 위처럼 바뀐 것이죠.



 


플랫폼으로 가는 길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플랫폼으로 곧장 나갔던 것이죠.
계단을 통해서 아래로 내려가서 철로변의 기차를 타는 것이죠. 향후 이곳으로도 기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오디오가이드에 나오던데 정말 그렇게 될까요? 옛날 사람들이 탔던 것과 똑같이 해보는 것.  좀 재미있을 것 같죠? 복원한 후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계속 철도와 관련된 장소로 사용된다면 더없이 좋을 듯합니다.

 

 


옛날 역사에서 기차를 타던 시절이 기억나시는지? 그때는 이렇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양측으로 에스컬레이터도 있었지요. 1980년대에 역사를 크게 리노베이션했는데, 현재는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계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전에 서부역과 연결되던 길고 큰 서울역의 흔적인 셈이죠.



 이것은 1930년대 기차의 내부입니다. 식당칸이 호화롭기 그지 없네요.

 

 


 


귀빈실과 귀빈실 전실

 

 






귀빈실의 내부입니다. VIP 고객 전용라운지라고 하겠죠. 당시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벽난로가 지금도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습은 어땠을까요? 멋진 의자와 소파, 화려한 대리석 테이블이 안락함을 강조하고, 마호가니 책장에는 화려한 장정의 책도 몇 권 꽂혀있고 그랬을까요? 24시간 대기중인 전용 집사가 잘 우려진 홍차를 서빙하거나 알맞게 구워진 스테이크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겠지요.

귀빈실은 왕실과 총독부 산하의 임원들, 외국의 각료와 기자단 등을 위한 장소였으며 일본에서 장기간 머물렀던 영친왕 부처가 먼길을 기차를 타고 올 때 그들을 맞이하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미국기자단북행

아미리가기자단일행은 거십이일오후칠시사십분귀경한산리총독과경성역귀빈실에서회견하고오후팔시발봉천에직행하얏더라 (1929년 614일 동아일보)


사년만에 조선으로 이왕전하작일착어

사년만에 조선땅을 밟으신 이왕, 동비 양전하께서는 일일 오후 오시착특급열차로 연로에 밭가는 농부를 감개깊이 보시며 경성역에 안착하시어 직시 자동차로 창덕궁에 듭시엇다. (중략) 전하께서는 역귀빈실에서 침임관이상의 사알이 잇엇다. (후략) (1933년 42일 동아일보)




귀빈실은 항일거사를 일으키는 독립운동가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폭탄을 투척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십일월십팔일오전칠시사십오분에 동경으로부터 가족을 동반하고 돌아오는 우원총독을 암살하려 폭탄을 가지고 경성역에 모이어 귀빈실을 잔뜩 노리고 잇엇으나 새벽안개가 자욱하야 잘보이지안흐므로 귀빈실까지 가자니 경게가심하야 다시 물러서서 세브란스근처로나와 좀더 좁은 길목근처에서 총독의 자동차를 노리고 잇엇으나
당시 총독의 가족일행은 병자가 잇어 정거장내의 칭게를 올라오안고 플래트폼에서 자동차로직접 철도우편국옆 소하물출입구로 나와 어느틈엔가 가버렷으므로 총독암살게획의제일착에 실패를 하엿다. (1936818일 동아일보)




 

이것은 2009년 복원전의 귀빈실입니다.
대리석 벽난로는 그대로지만 천장이 지금과는 달랐죠.





귀빈실 VIP를 수행하던 수행원들이 머물던 귀빈실 전실입니다.귀빈실 못지 않게 장식적이죠. 문을 열면 바로 귀빈실과 연결됩니다. 귀빈실 앞에는 역장실이 있습니다. 이는 역장이 귀빈을 직접 모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장식은 별로 없지만 기하학적인 묘미가 느껴집니다.

 




 


2층 대식당(그릴)


 

 



2층 대식당은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던 장소일 겁니다. 저도 이 장소가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찾을 지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옛날 자료라곤 흑백 사진 한장 밖에 없어서 당시 모습과 백퍼센트 비교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곳은 대식당, 혹은 경성역 그릴로 불렸는데 당시 서양식 식당이 거의 없던 경성에서 프랑스식 요리를 선보이던 곳이라고 합니다. 후에 인근에 들어선 호텔들(철도호텔 등)에서 서양식 식당을 운영했지만 경성역 식당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은그릇과 은촛대로 화려하게 세팅되어 있었으며 경성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이곳에서 쓰던 테이블은 철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상도 경성역 식당과 티룸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유행에 민감했던 젊고 예민한 (그리고 폐병환자인) 시인에게 이곳은 어떤 영감을 주었을까요?


마호가니빛 가구는 준비된 음식이 나오던 곳입니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이 음식을 날랐겠지요. 가구 뒤는 음식을 준비하던 전실이며 주방은 지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리된 요리가 운반되던 엘리베이터도 남아있습니다.



 

2009년 1월 답사 당시의 2층 대식당의 모습입니다. 그날 이곳을 보고 충격 많이 받았죠.
무엇보다 저 화려한 샹들리에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요?





 


소식당







대식당 오른쪽으로 문을 나서면 통로가 나오는데, 이곳을 예전에는 식당으로 사용했다고 해요. 테이블을 놓고 라운지처럼 활용했던 것이죠. 식당 손님들은 중앙홀을 내려다보면서 와인 한잔 기울이기도 했겠죠. 어둠이 내리면 분위기가 더욱 멋지게 바뀌었을 것만 같습니다. 





복원전시실


 



 

2층 대식당 앞쪽에 복원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훨씬 규모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는데, 자투리 장소를 활용해서 만들었더군요. 예전 이발관과 화장실이었다고 합니다. 이발관이었던 곳은 유리를 부착했던 흔적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드러난 벽체를 통해서 서울역사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샹들리에는 요즘 기성품으로 모두 교체한 모양입니다. 예스럽지 않고 투박하죠. 화려한 것들은 화려한 대로, 거친것은 거친대로 보여주면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각종 돌, 장식, 철물 등 다양한 재료도 보입니다. 서울역사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영상자료도 있습니다만, 친절한 전시실은 아닙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보느라 힘들었거든요.


 

 

 

벽체의 일부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타일 안에 시멘트벽돌, 그 안에 목재, 또 그안에 시멘트, 또 그안에 벽돌......건물의 벽은 그야말로 시간이 압축된 흔적입니다. 수십년에 걸쳐 한겹씩 한겹씩 입혀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고 못쓰게 된 것을 다시 만들어넣는 참 고되고도 지난한 작업이 건축의 복원입니다. 서로 무관한 켜도 보이고 서로 깊이 연결된 켜도 보입니다. 그것들의 이야기를 짜맞추고 이어주고 매끄럽게 해주는 것. 그것이 건축역사가의 역할이겠지요. 때로는 건축물의 겉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기도 합니다.






 


다시 중앙홀을 지나 건물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1925년에서 2011년으로 순식간에 타임슬립했습니다. 당시 경성역이었던 옛 서울역사.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열차가 탈선하여 다치고 사망한 사람들, 갑자기 양수가 터져 역사안에서 아기를 낳은 여인, 폭탄을 숨겨온 독립투사,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기차에 몸을 던진 남녀들, 하릴없이 티룸에서 죽치고 있던 이상과 대합실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를 씹던 구보씨, 은식기를 찰랑이며 서양식 음식을 맛보던 문화 향유자들, 일본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 그리고 원치않은 전쟁을 위해 목숨을 버리러 가던 꽃같은 청춘들.



칙칙거리며 가뿐 숨을 쉬던 기관차가 출발한 후 남은 자들의 부끄러운 상실감을 그 앞에서 느껴봅니다.


참, 이제 옛 서울역사를 <문화역 서울 284>라고 부른다죠?
저는 그냥 옛 서울역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야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이곳에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주말에는 인디밴드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가 너무나 독특하고 그 성격이 강해서 작품들이 빛이 나지 않더군요. 내년 초에 정식으로 개관을 한다고 하니 무엇을 더 보여줄 지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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