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가을쯤이었나,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옛날 엽서를 구경하고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엽서를 가리킨다. 모두 엽서 4장이 합쳐져 하나의 풍경을 형성하는 시리즈 엽서다. 엽서를 모두 연결하니 꽤나 번화한 마을 풍경이 나온다. 



철원이었다. 



철원을 굳이 엽서로 제작하면서까지 홍보하려 했다면, 이 도시는 타지의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했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경성이나 부산, 대전처럼 큰 대로와 높은 빌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꽤나 번화한 도시 풍경을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철원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철원. 그곳은 일종의 국경, 바다보다 더 깊은 경계가 있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는 도시다. 철책으로 둘러진 군사분계선, 무장 군인들이 대응하는 남방한계선,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민통선 등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이 그어진 엄격한 땅이다.  최근에 와서는,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4킬로미터에 이르는 DMZ를 두고 생명과 평화의 땅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또한 와닿지 않는다. 나에게 금기의 땅은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어쩌면 그곳에는 거친 야생같은 자연만이 숨쉬고, 어쩌면 그곳에는 오래전 전쟁 때 묻어놓은 지뢰가 스스로 터지고 어쩌면 그곳에는 죽음과 정적만이 감도는 그런 곳이라고. 세상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 나는 금기의 땅을 그렇게 두렵게 상상하고 있을 뿐, 그곳의 모습이 실제 어떠한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엽서를 보고서 철원의 역사가 더없이 궁금해졌다. 경계선으로 나뉘기 전에는 상상의 땅이 아니라 사통팔달 통했던 번화한 도시였다. 촘촘하게 집들이 자리잡고 시장과 상점, 관공서와 철도역, 병원과 여관이 사이좋게 모여있었다. 1914년에 경성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철원을 통과하면서 도시는 조금씩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철원의 평평하고 넓은 평야를 접수하고 일본민간기업 불이흥업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 운영을 하면서 철원으로 인구의 유입이 늘어났다. 1930년대에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금강산전기철도가 놓여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홍보엽서를 제작한 이유도 철원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꽤 볼만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이 생기고, 금융조합이 문을 열었으며, 농산물 검사소가 활발이 영업했고, 2600여명의 학생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개교했다. 철원역은 금강산 관광을 하려는 사람들로 천여명씩 북적거렸고 백화점이 문을 열고 손님맞이를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국민 여배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차홍녀가 지병으로 급사하기 전 마지막 공연을 펼쳤던 철원극장이 있었다. 이렇듯 인구가 모이고 산업이 발달하던 도시가 철원이었다.



감히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엽서를 들고 철원으로 갔다.

 




당시와 지금의 철원읍은 다르다. 옛 군청소재지인 월하, 중리, 관전, 사요, 외촌 등의 5개 마을을 일컫는다. 지금은 대부분이 민통선 내부에 있다. 물론,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단다. 전쟁이 마을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백마고지, 아이스크림고지(이건 반전있는 이름이겠지.), 김일성 고지, 피의 500능선....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접전지들이 포진하고 있다. 포탄과 폭격으로 산능성이가 물컹해지고 수천명의 병사들이 목습을 잃은 땅이 어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겠는가. 감쪽같이 사라진 도시는 군사시설로 채워지고 위험을 알리는 숱한 표지판들과 군사작전으로 파묻은 지뢰들로 여전히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민통선 내부에는 폐역이 된 철원역, 월정리역과 농산물 검사소, 노동조합, 얼음창고, 금강산 전기교량 철교 등이 전쟁으로 파괴된 모습으로 남아있고, 민통선 밖에는 1946년에 세운 노동당사와 철원제일교회의 흔적, 그리고 철원의 당시 인구와 도시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수도국지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은 철원땅이 신라 말기 고구려 회복운동을 펼쳤던 궁예가 세운 태봉국이었다는 것이다. 천년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성곽을 쌓았던 궁예로부터 철원이라는 지명도, 한탄강이라는 이름도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태봉국의 도성터를 군사분계선이 절반으로 자르고 있다고 한다. 더 멀게는 홍적세 시기에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철원 땅이 빙하기를 거치면서 깊은 골을 형성하여 한탄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민통선 내부에 형성된 농촌마을은 196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이주민들의 정착촌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 중간에 철원땅에 큰 상흔을 내었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이 지금껏 큰 물줄기 혹은 핏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전쟁은 수천년에 걸친 땅의 역사를 사라지게 했고 그 후의 역사에도 줄곧 영향을 미쳐왔다. 엽서 속의 드넓은 철원읍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폐허로 남은 철원의 전쟁 유적들을 끌어담았다. 전쟁의 비극은 사라진 도시 그 자체에 있었다. 철원은 60년간 줄곧 폐허였고 여전히 폐허이며 앞으로 폐허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엽서 속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 또 어떠할까.

  그건 여전히 상상 속의 일이다.














노동당사(철원읍 관전리)- 등록문화재 제 22호



철원 일대는 38선 이북의 지역으로 해방정국에서 북조선에 포함되었던 지역을 한국전쟁이후 수복한 것이다. 노동당사를 보게 된 것은 그런 맥락이다. 이 건물을 매체에서 자주 보아온 탓인가, 나는 노동당사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아서 깜짝 놀랐다. 더 무시무시하고 더 거대한, 검은 동굴같은 건물일 것이라 상상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어둠의 기운에 훅 빨려들어갈 것 같은 그런 공간을 상상했던가보다

이미 폐허가 된 노동당사 건물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종전 60년, 한창 젊은 나이에 불구가 되어버린 채 60년의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온 건물을 보면서, 만기로 형을 살고 나온 전범의 모습을 떠올렸다. 더이상 빳빳하고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러하기에 건물에서 자행된 수많은 살상행위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60년이 지났건만, 전쟁 시기,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일들이 여전히 산재하다. 

건물은 벽돌조와 시멘트로 지은 것으로 이미 내부가 헐려나갔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푹 패인 총탄자국 등도 숱하게 남아있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골조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런 전쟁 유적지들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타진하고 있기에, 다시 보게 되는 건물이다. 















철원 수도국지 내 급수탑(철원읍 사요리) - 등록문화재 제 160호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설치된 상수도 시설로 1936년에 지어졌다. 급수탑이 3기, 출입구가 3군데인 저수조, 그리고 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500여 호, 2500여 명에게 마실 물을 제공했던 이 장소가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전쟁시기 저수소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저수조에는 물이 찰랑거리며 차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저수조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면서 상당히 위협적인 느낌을 받았다. 로톤다 모양의 급수탑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수도국지의 건물들이 몹시 수상하게 여겨졌다. 수상한 시절, 수상하게 사용된 건물이 어디 이것뿐이랴. 뚝섬 수도박물관에는 당시의 상수도 시스템에 대해 잘 소개되어 있는데, 저수조 바닥에는 모래 등이 차 있어 물을 걸러주는 역할을 했다.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 이곳 역시 저수조 바닥에는 물을 걸러주는 모래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후달리는 다리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승일교(동송읍) -등록문화재 제 26호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놓기 시작한 다리가 완공되어서는 승일교가 된 까닭은 무엇일가?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땄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고,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인물의 이름이라고 추정한다. 어쨋건 지금 이 다리의 이름은 승일교이며, 1999년에 앞에 한탄대교가 새로 놓이면서 차량을 통제하고 인도교로 사용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다리의 아랫쪽 모양이 딱 절반씩 서로 다르다. 왼쪽은 둥근 아치가 촘촘한데 반해 오른쪽은 각이 둥글어진 사각형과 같은 모양이다. 1948년 북측에서 군사목적으로 설치하다가 전쟁이 터져서 중단했던 것을, 1952년 철원에 주둔했던 미군 공병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군수품 보급로를 구축하기 위해 급히 완성했다. 

공사시기도 다르고 공사 주체도 다른데 공사의 목적도 다르고 공사의 이름도 달랐던 다리.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를 보여주는 다리다. 흥미롭게도 다리 위는 서로 달라지는 지점이 없이 연결되어 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교각의 구조도 흥미롭지만 이 다리를 건너가면서 왠지 새로운 시대를 향해 걸어간다는 느낌이 들어 참 묘하다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고 그것은, 통합, 통일, 화합, 그런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먼저 손을 내밀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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