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랑시울길을 따라서

대전 소제동 관사촌 걷기 







대전을 다녀왔다. 한 3년 만인가. 답사 기회가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았다.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고 달라진 거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가 겨우 기회를 잡았다.

그동안 충남도청사는 신도시로 이전했고 대전에 살던 지인은 서울에 완전히 정착했으며 대전에서 전시회를 하던 몇몇 아티스트들은 다른 도시로 터전을 옮겼다. 대전 토박이 빵집은 서울에서도 유명해졌고 – 동네 빵집들이 이렇게 대단해진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튀김 소보로를 먹기 위해서, 그 집 팥빙수를 먹기 위해서 멀리서 택배 주문을 하는 상황이란다.


뾰족집은 결국 헐렸다. 이축복원을 하기 위해 부재들을 옮겼다고 한다.(실측도면은 그렸겠지.) 사라진 건물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남아있는 것들은 표지석을 만들어 지켜나가려 하는 한편, 공동화 현상으로 텅빈 구 도심은 오히려 젊고 재기발랄한 사람들의 참신한 문화공동체의 장소로 활용된다고도 한다. 그동안 자잘한 변화들이 도시에 생겨났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들을 감지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도시의 한켠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꿈꾸며 높고 낮은 모든 것들을 없애버린 평평한 땅으로 바뀌어있지만 또다른 한켠에서는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키고 남기려는 움직임이 있다. 지금은 전자의 힘이 훨씬 강력하지만 머지 않아 두 힘이 자발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대전 사람들조차도 이 도시는 뚜렷한 인상이 없다고 하지만, 어느 도시나 속살을 파헤쳐 보고 뒤집어 보아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법이다. <어린 왕자>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진정 아름다운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이 말이 도시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자취들이 아니라, 알듯 말듯 느껴지는 좋은 느낌이 도시에서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대흥동과 신도시쪽에서 머물던 예전 경로를 벗어나 대전역 뒤쪽의 소제동으로 이번 여행의 목표지를 설정했다. 소제동은 철도 관사촌이 형성되었던 곳인데, 그 중 한 곳을 ‘대전근대아카이브포럼(DMAF)’이라는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화공간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단다. 소제동 42호 관사를 찾아서 일단 걸었다.












대전역 동편 출구로 나가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철도보급창고가 있다. 이곳에서 음악회를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지속가능한 활용방법은 없는 걸까? 







철도와 도청, 도시의 확장



대전은 너른 들판이었다. 자연스럽게 범람하던 하천 주변에 평평한 땅이 펼쳐진 한촌이었다. 솔랑산이라는 나지막한 산도 있었고 그 앞에는 소제호라는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개나리가 덤불을 이루고 여름이면 연꽃이 호수를 뒤덮으며 장관을 자랑했다. 그 한촌 어귀에 1650년대에 지어진 우암 송시열의 사가가 있었다. 연꽃과 국화, 구기자나무가 장관이이라 하여 그 집의 사랑채는 기국정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글을 지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던 한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대의 풍경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꾸어놓았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도시라는 구조체가 이식된 것이다. 철도역은 소제호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한산한 들판에 세워졌지만 이미 새로운 도시를 예고했다. 경부선 열차는 대전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고 다음날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대전에는 숙박시설과 먹고 마시고 사고 즐기는 곳이 생겨나야 마땅했다. 일본인 상인과 군인들이 대전에 입성했다.


다카사키 소지 교수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보충되어 있다.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관구 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혹시나 있을 의병투쟁에 대비해서였고, 통감부에서 의병진압을 공표한 이후로는 가열차게 호남선 철도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호남선이 완성된 1913년에는 명실상부 두 철도 노선이 만나는 요충지가 되었다. 1904년 88명에 불과하던 일본인은 1911년에 3891명에 육박했고, 1912년 전등이 들어와 불을 밝혔다. 라고. 그리고 1932년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사가 대전에 신축됨으로써 도시는 도약했다. 대전역과 도청사. 두 개의 축이 대전을 일군 셈이다.



1907년 소제호 뒤쪽에는 대전신궁이 세워졌고 소제공원이라 하여 보고즐기는 곳이 되었다. 공설운동장도 생겨났고 편의시설도 다양하게 설치되었다. 대전은 철도를 세우며 벌어들인 돈과 철도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뿌리는 황금으로 움직였지만 엄연한 거대도시로 점차 꿈틀거리고 있었다.  뜨내기의 도시에서 정주민의 도시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철도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살던 관사촌이 소제동 지역에 있었다. 소제동 관사촌은 1920년대에 형성된 것이라 한다. 대전역전시장에 남관사촌이, 역사 북서쪽에 북관사촌이 1910년대에 형성되었으나 전쟁과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고 소제동 동관사촌만 남았다.



대전시가지도 (1933) 일부(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42호 관사를 찾아가는 길



대전역 동편 출구로 나서면서 맞은 편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철도보급창고 건물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도대체 길을 파악할 수가 없어 스마트폰에서 42호 관사의 주소를 입력했다. 골목이 촘촘해서 길찾기가 쉽지 않다. 상당히 오래된 집들이 어깨를 맞대로 있는 골목이 묘하게 시선을 끈다. 그곳으로 들어선다. 소제동 관사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상당히 오래된 살림집들이 묘하게 닮은 구조로 열을 지어 서있다. 지금은 불량주택 등으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를, 노후가 심한 주택들이다. 살던 사람들이 떠나버린 방치된 주택도 있고 애써서 고쳐가며 살고 있는 집들도 있었다.




관사촌 건물은 아니지만 오래된 집들이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60년대 지어진 주택단지가 아닐까? 








자료에는 40여 채의 관사 건물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진 주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니 이 지역에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즉, 관사촌은 아니지만 그 주변으로 살림집이 대규모 단지로 들어섰다는 것인데, 어떤 건축업자들이 이런 주택 건축에 개입되었는지, 어떤 구조를 모델로 해서 지어졌는지 등등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빈집을 담바깥에서 넘어보니 천장이 낮은 집들은 ㄱ자 구조를 하고 있고, 마루와 퇴, 방이 구분되어 보였다. 자료집<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과 경관(대전광역시 출간)>을 보니 1948년 지도에는 없고 1974년 항공지도에는 이 지역에 집들이 있다. 이 골목에서 북쪽으로 두 블럭 쯤 올라간 지점부터 관사촌 건물들이 등장한다.

 









                                     이 골목들이 참 좋았다. 적당히 넓고 깨끗하고 잘 구획된 미로같은 골목.







42호 관사를 향해 골목을 돌다보니 조금씩 시대를 거슬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길과 집들이 묘하게 달랐다. 반듯하고 적당히 넓은 골목과 단정하게 구획된 담은 오래전에 계획되었음에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수준을 느끼게 했다. 골목은 미로같았다. 골목을 돌다보면 어느 순간 80년 전으로 훌쩍 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골목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고급 기술자들이 살던 중산층 동네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제동 철도 관사 분포도. 빨강과 검정으로 표시된 것이 철도관사로 확인된 것.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실측한 철도 관사 조감도(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바깥 골목을 따라가면 규모가 큰 일자형 집이 등장한다. 지붕이 높고 길이가 길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전형적인 한옥구조와는 달라보이는 집들이다. 기숙사 형태로 방들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료집에는 하나의 집이 내부가 대칭인 두 세대의 집으로 이루어진 형태가 보편적이라 한다. 나무로 된 전신주와 가로등이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이곳은 관사촌이 분명하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 너머로 아쉽게 시선을 던져보았다.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솔랑시울길이라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머지 않아 42호 관사가 나타났다. 대전근대아카이브에서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다. 오늘은 사람이 없다. 비가 내린 후여서 우중충하지만 길을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먼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그길이다. 길에 솔랑시울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였다. 솔랑산은 소제호 뒤쪽에 있던 산인데, 지금은 소제호도 솔랑산도 없어지고 소제동과 솔랑시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는 것이다. 



솔랑시울길 주변의 관사건물은 1920년대 동관사촌을 설명하는 지도에 등장하는 바로 그 건물들이다.항공사진으로는 분명하게 집의 형태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모든 집이 비슷하게 낡았다. 42호 관사의 경우는 다른 집들과 달리 나무비늘판벽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앞서 본 건물들보다 42호 관사가 더 오래된 것으로 짐작했다. 골목은 담을 따라 반듯하고 집은 비슷비슷한 규모다. 반듯하게 잘 닦인 길이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구획되는 지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관사촌에서 원형을 간직한 것이 40여 채. 그외에 다소 변형된 것들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은 건물을 관사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철도 관사촌이 이 정도 규모로 남아있는 사례는 소제동이 유일하다. 42호 관사촌은 흐릿한 회색의 거리에 선명한 색을 발산한다. 없어지기 전에 기록하겠다는 것, 더이상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도시의 역사찾기는 조금씩 계속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관사촌은 일반에 집들을 내놓았다. 코레일 승무원들을 위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학교 기숙사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 따로 있다.  


솔랑시울길을 따라 모퉁이를 도는데 아주 오래된 세탁소가 있었다. 주인 어르신이 세탁물을 가지고 왔다갔다 하시는 걸 보니 여전히 성업중인 모양이다. 세탁을 마친 옷들이 세탁소 문 앞에 걸려있는데, 검은 제복 비슷하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에 코레일 마크와 글자가 새김되어있다. 그러니, 이 길은 여전히, 철도 승무원들이나 기술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라진 소제호, 왜?



“어, 물길이 없네.”

1920년대 동관사촌과 관련된 지도를 보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소제호가 그려진 1925년 대전시가지도에 소제동 가장자리에 깊게 형성된 대동천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이 지나는 길도 아니며 신도시도 아닌데, 이 물길은 도대체 언제 형성된 것일까? 자료집을 뒤젂이다가 소제호의 매립과정을 알게 되었다. 

 




대전지도 1910년대 말                                                                   대전지도 1928년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1948년 항공사진. 오른쪽 상단이 동관사촌.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대전역은 주류천인 대전천을 앞에 두고 지류천인 대동천이 철도선을 가로지르며 넉넉한 소제호를 뒤에 두고 있다. 거대한 급수탑이 있어야 했으니 하천과 인근한 지역에 역사를 짓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지류하천인 대동천이 자주 범람했다. 철도역과 대전천 사이는 춘일정, 영정, 본정 등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지천의 범람은 꽤나 골치였겠다. 1927년 치수사업이 시작되었다. 소제호를 매립하고 지천을 없애고 도시 북쪽에서부터 물길을 뽑아내는 인공수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대동천이다. 호수를 메우기 위해 솔랑산과 인근 구릉이 사라졌다. 소제호가 사라질 즈음, 신궁도 대흥동으로 옮겨졌다. 사라진 소제호 위에 새로운 관사촌이 생겨났고 지금 그 아래 위로 무수한 집들이 켜켜이 들어섰다. 



산을 없애고 호수를 메우고 물길을 바꾸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도시의 삶. 언덕을 깎고 돌산을 밀고 오래된 집들을 없애고 삶의 흔적들을 지우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도시의 삶과 똑같이 겹쳐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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