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부산에서도 예술가들이나 마을활동가들이 원도심 재생사업에 나선 현장들을 자주 목격했다. 마음 벅찬 적도 많았지만 갑작스런 뜨거운 활동들이 기름을 끼얹은 불꽃같아 아슬아슬할 때도 있었다. 최근엔 지자체에서 나서서 테마거리를 조성하고 푯말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다. 고요히 유지되던 커뮤니티들이 부동산바람에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며 오래되고 연약한 건물들 또한 살아남지 못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 

백제병원은 그 틈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근대건축물이다. 단단한 벽돌이 검붉은 장밋빛을 유지하며 백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확장과 증축을 거치며 여러 변화를 거치긴 했으나 옛 모습이 여전하다. 고요하다 못해 비밀스럽기까지 했던 이 건물에 들어가보게 된 것은 우연과 인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 연구자인 친구 L로부터 연구주제로 백제병원을 다루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되지 않아, 문화공간인 ‘통의동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가 ‘도시의 기억’이라는 테마의 세미나를 백제병원에서 열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왔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이 건물을 이야기했다. 도대체 백제병원이 무엇이길래? 건물을 찾아가면서 유년의 기억이라는 빈약한 그림자와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먼 시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물결쳤다. 모든 건 친밀하면서도 모호했다.





꽃 같은 건물은 길모퉁이에 있었다. 4층 건물의 절반 이상이 비어있었다. 내부의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덜어낸 채로, 오래된 틀로만 남아있었다. 벽돌은 근사했고 아치형으로 난 창과 문은 오히려 현대적인 감각으로 읽혔다. 나무로 된 계단과 ‘오시레’라 불리는 일본식 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내부는 흥미로웠다. 나무문이며 창틀이며 모든 오래된 것들이 견고하게 남아있어 숨을 멈추게 했다. 건물 2층에서 열렸던 세미나는, 건물에 대한 관심인지 주제에 대한 관심인지, 초대인원을 훌쩍 넘겨 빈 공간 하나 없이 가득 메웠다. 그들 중에 이 건물의 주인인 정은숙 씨가 있었다. 





이 건물이 가진 모호함과 아름다움은 그해 가을과 겨울 동안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해를 넘기기 직전 나는 친구 L과 함께 백제병원을 다시 찾았고, 정은숙 씨를 만나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동네에 사무실을 두고 오랫동안 살았으나 한번도 관심있게 본 적 없었던 건물이 어느날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던 그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서울로 떠난 건축주를 무작정 찾아갔던 자신의 심경과, 절대 팔지 않겠다며 완강하던 건축주가 정은숙 씨에게 건물의 주인이 나타났구나,하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 마음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게 행운처럼 건물을 갖게 되었으나 오래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물은 오랜 정성을 기울인 후에야 몸을 열었다. 정은숙 씨는 건물의 몸 속이며 외부까지 구석구석 만져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건물의 미래에 대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절대로 이 건물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일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연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건물을 다시금 채워가는 계획을 세웠다. 젊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좋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현대적인 개념의 공간들을 이 오래된 건물에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옛 건물의 가치를 알고 정성껏 매만질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하여 장밋빛 벽돌이 여전히 빛나는 1층의 너른 공간의 리모델링과 운영을 ‘브라운핸즈’라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자 그보다 큰 활동을 담보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한다. 도시라는 벅찬 단어도, 재생이라는 생경한 단어도, 관광이라는 세찬 단어도 백제병원의 계획에는 없다. 젊음, 교류, 아름다움, 즐거움, 활동 그리고 예술. 이 우아하고 창조적인 단어들이 오래된 건물 속에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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