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작가라면 모름지기 도회의 항구와 친해져야 할 것이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떠나는 기차들로 붐비는 역이 그다지 아름답지도 기능적이지도 않았다. 누런 색깔의 3층짜리 사각형 건물에 부,산,역,이라고 적힌 볼품없는 간판과 시멘트로 발라진 대책없이 너른 광장이 부산역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기차를 타는 일은 늘 즐거웠다. 티켓의 모양과 크기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던가. 각잡힌 모자를 쓰고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깎듯하게 거수경례를 하고 검표를 하면 멀리 떠나는 일이란 이렇게도 대접받는 일이며,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나의 여행은 대구와 구미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졸업반때 입사시험을 보러 처음으로 서울역까지 오는 기차표를 끊었을 때의 두근거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둔 밤에 보았던 붉은 벽돌 건물의 불빛반짝이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게는 여전히 서울역,하면 붉은 벽돌과 초록빛 청동돔이 얹혀진 바로 그 건물이 떠오른다. 지금은 서울역도 부산역도 그 전과 모습이 달라졌다. 쇼핑몰을 낀 높고 깊은 유리커튼월 건물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대도 유리커튼월의 거대한 공간은 내 마음에 들어오기가 어렵다. 




1925년에 경성역으로 지어진 서울역이 '문화역 284'로 바뀐지도 벌써 몇해가 지났다. 몇번의 전시회, 몇 번의 행사와 공연으로 옛 서울역사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행사와 전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너무 아름답고 너무 난해했다. 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기에 예술센터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예술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자 하는 지적인 그룹만이 누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쉽게 공감하고 널리 공유하며 충분히 아름다운 그런 예술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기차 플랫폼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파이프 오르겔 제작자인 홍성훈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옛 서울역 중앙홀에서 오르겔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그 울림 좋은 곳에서 오르겔의 소리를 듣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손꼽아 날짜를 기다렸다. 오르겔은 바람을 불어넣어 관(파이프)을 통해서 소리가 흘러나간다. 홍성훈 선생님의 오르겔은 맑고 쟁쟁 울리는 소리보다는 거친 나무를 쓰다듬는 숨소리가 흐른다. 거문고와도 대금과도 맥이 통하는 소리, 오랫동안 우리 정서 속에 흐르는 소리가 서구 악기에서 나온다.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나 성당 건물 내부에 설치되어 있어 미사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그 소리를 듣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서울역에 공개되는 오르겔은 가로세로높이 각 1미터짜리의 이동할 수 있는 트루에 오르겔이었다. 갤러리, 한옥, 문화시설 등지에서 자유롭게 연주하고 소리를 경험하며 음악의 감동을 나누려는 계획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오르겔의 계획, 제작부터 활용까지, 문화운동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클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몇 가지 인증절차를 거쳐서 펀딩 프로그램에 약간의 기부금을 보냈다. 프로젝트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많은 분들의 재능기부를 통해서 작은 오르겔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공개했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 가는 것을 보면서 7개월이 흘러 연주회 날이 찾아왔다. 



파이프오르간을 바람피리라 이름붙여졌다. 풍관. 폐와 심장을 가진 사람같은 악기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입장하니 리허설 중이었다 가림막 뒤에 분명 트루에 오르겔이 숨어있으리라. 조심조심 가슴을 졸이며 오르겔의 탄생을 기다렸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오르겔 독주와 트럼펫과의 협주, 현악사중주와의 합주, 가야금과의 혐주, 그리고 국악편성과의 합주 등이 있었다.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귀에 익은 곡과 낯설지만 기품있는 곡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제천. 정악 중의 정악이라 불리는 수제천이 오늘 연주될 예정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트루에 오르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 장인의 손길로 검은 칠 위에 홍매화가 그려졌다. 붉고 검고 금색이 어우러진 빛깔에서 새침하고도 세련된, 감각적인 아가씨가 연상되었다. 악보대가 세워지고 붉은 빛이 드러나자 탄성이 이어졌고, 경첩 장인이 만든 자물쇠를 열자 은색의 파이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름답고 예뻤다. 오르겔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다니!


오르겔 제작자가 트루에 오르겔 제작과정과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는 공간을 채운 소리들이 옛날 건물을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던가,를 말하고 싶다. 사적이라는 엄격한 문화재로, 작품이 전시되는 장소로서 고유의 특성이 제거되고 엄정한 규격 속에 포장된 듯 보였던 이 공간이 오늘만큼은 오페라 홀처럼 자유분방하게 보였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공간은 그 어떤 예술이 와도 품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잊혀진 공간을 되살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던 밤. 











공연이 끝나고 찬찬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살펴보았다. 이 작은 몸통에 224개의 금관과 목관 파이프가 담겼다. 건반은 5옥타브에 불과하지만 오르겔의 소리를 조절해주는 버튼으로 다채로운 음을 들려준다. 원래 오르겔은 피아노건반을 방불케하는 페달이 있는데 과감히 그것을 없앴다. 전문 오르겔 연주자가 아니라 건반 연주자 누구나 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깊었지만 돌아서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아리따운 마드무아젤 오르겔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근사한 공간. 서울역 중앙홀에서 그 유쾌함을 다시 즐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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