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역을 찾아가는 길.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기차도 가지 않는 작은 역을 찾아 힘들여 차를 몰고 가는가? 살기바쁜 세상에, 또릿또릿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금세 뒤쳐져버리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숨막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도, 한번쯤, 아무런 이유없이, 내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소에 가고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 떠난다. 그런 때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잔잔하게 스며드는 안도감에 숨을 깊게 내쉬곤 한다.
 
빽빽한 고층건물과 빌딩보다 더 시야를 어지럽히는 고층 아파트의 밀도가 서서히 옅여지고 그 대신 산등성이의 윤곽이 서서히 시야를 채운다. 그리고 점차 눈 속에 가득 박혀드는 숲의 초록색들, 이파리 하나하나에도 각기 다른 색과 밀도를 갖고 있는 갖가지 초록색을 음미하면서 나는, 어느 새 도시인의 치열함을 잊어버린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히기까지 한다.




내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장소.에 나는 간다. 그곳에서 나와 아무런 관련없이 사는 사람들을 본다.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구태의연한 모양의 집도 있고,내가 세상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유려한 빛깔의 꽃과 나무도 있다. 아무런 역할도 없이 버려진 건물도 있고, 버려진 자동차도 있다. 도시에서는 흉물스런 쓰레기가 될법한 것들이 그 마을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다.

어쩌면 낡아서 폐기해버린 많은 것들이 그냥 그대로 남아도 괜찮은 존재들은 아니었을까.






가은역.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된 간이역이다.  간이역은 문이 닫힌 채 뽀얀 먼지가 두껍게 쌓였고 길게 이어진 단선 철로는 끝이 매섭게 잘려져 두툼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막혔다. 가은역의 맞은 편 산비탈에는 문경탄광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산업화 시대 문경을 비롯해서 경북의 산업을 좌지우지했던 은성탄광이 있던 자리다. 가은역의 역사는 은성탄광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문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38년 은성무연탄광을 비롯해서 모두 38개의 탄광이 형성되어 있던 탄광지역이다. 그 중에서 은성광업소는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던 곳이다. 도시는 유려한 산과 산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평지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내륙 산지의 소도시로 보기에 규모가 상당히 크다. 현재는 문경시의 인구가 8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창 문경지역이 호황을 누릴 때는 15만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1980년대에는 탄광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만도 7천여명에 이르렀다.

가은역이 개통된 것은 1955년. 당시의 이름은 은성보통역이다. 1959년에 가은역으로 이름을 고쳐달았다. 그날 이후 기차역은 은성탄광에서 채취한 검은 탄들과 수많은 부산물들, 그리고 그만큼의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번성하던 탄광마을은 석탄산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탄광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났다. 1995년에 은성광업소가 문을 닫자 가은역은 여객업무를 폐지한 한적한 간이역으로 바뀌었고, 2004년에는 가은선을 폐쇄하면서 기차역도 문을 닫았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소도시의 인구를 둘쭉날쭉하게 만들고 결국 도시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지금은 한나절을 기웃거려도 가은역을 보러 온 젊은 관광객 두엇을 제외하면 길가는 사람 한명 만나기 어렵다. 2,3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레일바이크(철도자전거) 탑승장만 현지인, 관광객 할 것 없이 웅성거린다.










 


가은역은 그동안 보았던 간이역보다 규모가 큰 편이다. 원래 건물의 사무실 부분을 계속 증축하여 공간을 넓혀간 흔적이 보인다. 목조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형태나 규모가 안정적이다. 철도역사는 대형 역사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평면을 담고 있다. 역사는 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직사각형의 공간으로 만들어진다. 지붕은 지붕면이 철도면과 나란하게 맞배형태로 얹히고 왼쪽부분에 박공지붕을 얹어 지붕이 다소 돌출된 공간이 형성된다.

내부는 크게 대합실과 역무실로 구분되고, 역무실은 매표소와 사무실로 나뉘어진다. 철도 이용객은 대합실 입구로 들어와 표를 구입하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기차가 도착하면 반대편 철로방향으로 열린 문을 통해 플랫폼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 역사의 경우 형태가 좀더 화려하고 재료도 벽돌이나 콘크리트를 활용하지만, 간이역사는 노란색의 목조판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주로 사용한다. 일제강점기에 정착된 철도역사의 디자인은 누가 건물을 짓는가, 어떤 의도로 짓는가에 따라 내 외부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을 뿐, 형태나 컨셉트 상에는 큰 변화없이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박공지붕이 얹힌 사각형 공간은 일제강점기의 소규모 관공서에 흔히 사용되던 형태다. 철도역사는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생겨난 공간이었기 때문에 처음 철도역사가 지어질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시설물이었다. 철도역사에 관공서 건물의 형태를 투영한 것은 기차역이 교통수단의 개념이 아니라, 관공서 건물처럼 권위와 위엄을 갖고 있으며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권위의식에 억눌리며 들어섰을 철도역사가 거꾸로 현재 우리에게는 과거 사람들이 살았을 자그마한 집이나 시골마을의 회합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세월은 과거 사람들의 가슴을 억눌렀던 심리를 모두 덧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보드라운 향수에 젖어 과거를 들여다본다.

가은역의 내부는 문이 잠겨서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넓은 창 덕분에 속을 구경할 수 있었다. 목조 좌석이며 수납장이 남아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문을 열면 쌓인 먼지가 풀썩 흐르며 오래된 이야기를 훑어낼 것만 같다.  30여년 전 이곳에는 오랜만에 큰 도시로 나갈 채비를 마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 매표소 안에서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역무원들의 모습이 일상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문밖으로 걸어나온 한 사내는 담배 한 대 꺼내물면서 고운 여자를 생각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품에서 꺼내올 따뜻한 빵 한쪽을 기대하며 하루종일 기차역을 맴돌며 혼자놀기를 했을지도 모르고. 

 

 






기차가 서지 않는 기차역은 한 때, 사람 사는 살림집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때 내부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내기 어렵다. 가은역의 매력은 넓은 격자창이다. 지금은 세월의 힘으로 이가 맞지 않고 비뚤어졌지만 창의 온화함으로 공간이 더 아늑해진다.


이름도 예쁜 가은역이다. 나를 둘러싼 도시의 풍경을 벗어나기 위해 달려온 거리만큼, 간이역 하나가 주는 기쁨은 컸다. 자동차로 왕릉강변길과 가은로, 은성로를 달려보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소도시의 풍경이 아담하기 그지없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겹겹이 흐른다. 촉촉한 공기가 물 위로 차분하게 흐른다. 조령산맥의 한 자락,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문경새재 옛길을 간직한 도시는 그 길목에서 오가는 사람을 맞는다. 그 가장자리로 관광열차가 달린다면 꽤나 볼만하겠다. 다음번에는 KTX처럼 빠른 열차가 아니라, 덜컹덜컹 소리도 내고 역마다 한참 서있기도 하는, 느릿한 기차를 타고 온다면 좋겠다.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비둘기호같은 기차 말이다.







가은역 철로 너머에 역사를 내려다보는 나무가 두 그루 서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가. 도시의 역사를 내려다보던 나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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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없이 친근해진 등록문화재 동판. 문경 가은역은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은역 가는 길>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 536번지

문경 석탄박물관>
은성탄광의 현장은 문경 석탄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탁박물관은 가은역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다. 석탄박물관 주변에 사극 촬영장이 있어 함께 관람하기도 한다.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릉길 112번지 문의-054-571-2475
홈페이지- http://www.coal.go.kr/


더 읽어볼 책>

 

한국의 간이역/ 임석재 저

간이역을 건축사적 관점으로 풀어냈다.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을 위한 역사가 있는가하면,
산간, 해안 지역에 어울리도록 만든 표준화된 간이역도 있다.
건축적 배경을 살펴보면 간이역을 보존해야할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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