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를 맞아 남쪽으로 가족들을 보러갔습니다. 오랫동안 부산에 살았던 부모님은 몇 해전부터 양산 천성산 아래 신도시로 이사했고 큰동생 부부도 부모님댁에서 멀지 않은 정관신도시(여긴 부산광역시에 속해있다고 하는군요.)로 옮겨왔지요. 부산의 오래된 곳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우리 가족 역시 살던 데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그렇게 옮겨다니는구나, 싶습니다. 온가족이 모였으니 금정산에 올라가 산바람도 쐬고 산성막걸리도 한잔 마시자 했는데, 날이 우중충하니 비소식이 있더군요. 동생 내외가 양산 근처에  한적하게 거닐만한 곳이 있다고 하여 가보기로 했습니다. 


"70년만에 개방하는" 숲이 있는 수원지라고 하더군요. 


숲을 거닐 생각에 따라나섰습니다. 신양산에서 구양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들녘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니 '법기리'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도로 끝에 막힌 담이 있는데 이곳이 수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멀리서도 거뭇거뭇한 큰 나무들이 보입니다. 이곳이 '법기 수원지'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숲의구조가 몹시 이상한 탓이지요.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와 벚나무 숲인데, 그 위로 깎아지른 높은 언덕이 있습니다. 언덕은 잔디를 심어두긴 했지만 그 높이가 몹시 인위적으로 보였어요. 오른쪽에 석재로 쌓은 통로와 문이 있습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세운 댐이었어요. 부산의 물부족 해결을 위해 부산에서 한참 떨어진 양산 어귀에 수원지를 조성한 것입니다. 


옹벽같은 언덕을 올라가려면 120여개의 계단을 밟고 가야합니다. 절로 한숨이 푹 쉬어지는 등반 후에 넓디넓은 물이 우리를 반깁니다. 산으로 둘러싼 호수같은 물은 지하 어딘가에 매설해놓은 수도관을 통해 지금도 부산으로 흘러갑니다. 얼마나 큰 파이프가 그 속에 깔려있는 걸까요? 물 아래 어디쯤일지 가늠되지 않습니다. 



수원지의 물도 많이 줄어있음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2013년 부산은 가뭄으로 피로한 한해였습니다. 여름내내 빗방울이 거의 떨어지지 않아 땅도 들도 사람도 목이 탔습니다. 지금도 그 피로가 여전합니다. 축축해야할 숲길에서 가슬가슬한 기운이 느껴지고 잔디는 말랐으므로, 물은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제 할일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반기는 숲길은 여전히 조성중입니다. 안내문에는 편백나무, 히말라야 시다, 벚나무, 추자나무, 은행나무, 반송, 감나무 등 7종 총 644그루의 나무가 촘촘히 심어져있다고 합니다. 길 따라 심어진 키큰 히말라야 삼나무를 따라 걷다보면 그 틈으로 촘촘히 메워진 편백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편백의 향이 많이 느껴지지 않은 건 여전히 가뭄이 끝나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건 벚나무인 것 같습니다. 


반송은 댐 위쪽에 모두 일곱그루가 심어져있습니다. 허리가 꺾인 채 낮게 가지를 펼친 반송의 자태가 꽤 근사합니다. 나무 모양만 보아도 척척 수종을 알아맞춘다면 좋을텐데요. 나무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어떤 나무들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조만간 꽃과 나무를 좀 배워보렵니다. 배우고 알아갈 때 애정이 더깊어지는 법이니까요.







<1927년 1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 중>



수원지 까닭에 법기리 전멸?


부산부에서는 공업비 이백오십만원을 투하여 사개년 게획으로 부산 상수도 확장을 하는데 그 수원지는 양산군 동면 법기리 하경사산구이라하며 시공식은 거월에 동래 제이 수원지 안 범어사에서 거행하엿스며 차 상수원지 공사는 내년초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이 법기 수원지의 집수면적은 '이백칠십만오천 평'이요 저수하부지 면적은 '십일만삼천삼백여 평'이라 하며 면적 중에 경작면적 '칠만팔천여 평'이 함입된다는데 법기리 중상부락은 전멸지경에 함아엿으며 그 상하부락 전 인구 백삼십육호 중에서 차함멸되는 경지의 소작인은 구십호에 달하여 그 인구가 삼백여명이나 된다 한다. 원래 차 부락은 산중협곡지로 경지가 최귀하며 산곡에 처하야잇는 까닭에 하부락 혹은 경작지와는 전연상격하야 잇스며 농경작면적이 백여정보에 불과하는 터임으로 금번 부산 상수원지가 됨을 따라 각 리민은 경작지 태반이 업서지는 동시에 삼백인구는 그 활로를 실하야버리게 된다더라.







우 수원지 공사 착수에 당하야 부산부에서 그 토지매수와 이민의 양해를 구코저 양산군을 통하야 해함입지주 및  동 소작인 사십여인을 거 십칠일 하오 일시에 양산군읍 보통학교에 초집하고 부산부윤의 부산상수도 확장공사의 설명과 기사의 설계과정이 유한 후 양산군수와 경찰서장의 희망과 주의가 잇슨 후 지주와 주민의 희망진술을 하고 지주급 주민 중에서 토지가격 및 소작인구제에 대한 교섭위원으로 구인을 선거하야 금후교섭을 하기로하엿다는데 부산부에서는 토지가격에 대하야는 상당한 대가를 변상하겠다 하나 활로를 실한 소작인에 대한 구제에 대하야서는 하등설명이 업슴으로 삼백여 인구의 금후 생사양로는 실로 막연하게 되어 잇는데 교섭위원과 군당국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문제는 엇더케 낙착될 것인지 모든 해결은 금후에 남겨두고 마럿다더라.  (하략)





















옛 기사에는 식수로 사용하는 물이 아니라, 공업용수로 제공되는 물이라고 하는군요. 경지는 댐이 되고 주변의 산지는 함양림으로 경작될거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법기 주민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는군요. "생활터전도 경작지도 없이 이곳에서 무슨수로 살아가나, 만주나 간도로 갈수도 없는 마당에...."



댐의 총길이는 260미터에 달하고 댐의 옹벽은 21미터입니다. 공사는 1932년까지 5년에 걸쳐 진행되었지요. 완공후부터 2011년까지 금단의 공간이었습니다. 몇 번 예외는 있었다고 하네요. 1960년대에 대통령이 이 수원지에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은 안내판에 실려있고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일본 황족의 방문하여 숲을 즐겼다고요. 지금은 보호림 내부로 들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누구나 숲과 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석재를 쌓아올리고 문을 만들어놓은 곳은 취수터널입니다. 취수터널 위 석판에는 "生(원정윤군생)"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습니다. 발원지가 맑고 깨끗하면 모두를 살린다는 뜻이겠지요. 글자의 왼쪽에는 子爵 齋藤實 (자작 재등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에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자였지요  1927년에 총독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고문이 되었다가 1929년~1931년에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댐이 조성될 당시 총독이었던 그가 내린 글귀입니다.

 

가까이가면 마치 석빙고의 입구처럼 찬바람이 불고, 물 냄새인지 한 기운이 코로 스며듭니다. 긴 터널이 끝도 없이 뻗어있습니다. 댐 안에 있는 수위관측소도 유사한 시점에 지어졌을 겁니다. 하늘색 페인트는 썩 아름답지 않지만 돔은 꽤 재미난 모양새를 하고있습니다. 마치 클로슈 모자처럼 가장자리가 날렵하게 꺾인 것이 공들여 제작한 것 같아요. 











70년 전에 만들어진 수원지는 있는 듯 없는 듯 듯 제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역사의 한조각을 품고서 우리 삶의 작은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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