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성당은 향기가 있다. 몇해 전 여름날, 나는 성공회신자인 친구 P와 함께 J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정동에 있는 성공회성당을 구경했다. 밝은 오렌지빛의 몸체와 지붕은 지중해의 햇살을 받은 것처럼 따사로웠다. 장엄하면서도 온기가 넘치는 장소였다. 성당 안은 벽이고 기둥이고 모두 하얬다. 높은 천장만이 오래된 목조의 짙은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햐안 벽과 기둥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무지개빛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단 뒷면의 돔에는 금색 모자이크 벽화가 찬란한 빛으로 성당 내부를 밝혔다. 신앙과 삶이 밀착되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친밀감이 가득했다. 이런 살뜰한 감정을 ‘영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지하의 소성당은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오르겔이 있었고 사람들은 촛불을 켜두고 고요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바닥 중앙에 금장으로 장식된 곳은 특별히 더 성스럽게 보였다. 이 성당을 축성한 트롤로프 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한껏 고양된 나에게 친구 P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웠다. 이 성당에는 초기부터 이어져온 혼배성사첩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첫 페이지를 펼쳤던 순간의 이야기였다. 첫 혼배성사의 날짜는 1899년 3월 22일이었고, 장소는 제물포성당이었다. 신랑은 서양 국적의 52세의 토마스, 신부는 일본 국적의 25세의 유키였다. 나이가 곱절인 신랑을 맞이한 유키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토마스는 어떤 이유로 조선땅을 밟았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낯선 땅 조선에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모습이 백여 년 전 이 땅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토마스에겐 동방의 끝, 유키에겐 서양을 향한 시작이었을 이 땅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그 후로, 나는 연인들의 흔적을 찾아 가장 오래되었다는 성공회성당들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옛 연인의 흔적은 이미 사라졌지만 성당의 진실된 아름다움을 여실히 느낀 나날이었다. 




성당이라는 배에 오르다 

영국국교회인 성공회가 이땅에 상륙한 것은 1890년의 일이다. 조용히 물가에 닿은 배처럼 이 종교는 민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성공회성당은 높은 첨탑도 없고 위압적인 성화도 없다. 선교 초기부터 토착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은 건축을 지향해온 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토착공동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던 데는 한옥의 힘이 컸다. 19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진 수많은 초기 성당들이 한옥의 외피 속에 서양교회의 원형인 바실리카 양식을 삽입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로 손꼽히는 정동 성공회 성당도 원래 한옥성당이 있던 곳이다. ‘외교관 거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정동은 서울이 국제도시라 불릴만큼 외국인들이 많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한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열 줄기 물길을 합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인, 일본인, 한국인 신자들이 각각 다른 한옥성당에 모였던 것이다. 

트롤로프 주교는 흩어진 신앙인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고자 했다. 1914년부터 시작된 새성전 사업은 트롤로프 주교에게 힘겨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헌금으로 모인 육천 환과 영국에서 지원받은 팔천 환을 합해도 총 공사비 삼만 환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결국, 일시에 완공을 보기보다는 일부만이라도 지어서 성전을 열기로 했다. 

공사는 1924년부터 시작되어 2년만에 끝났고, ‘성모와 성 니콜라스를 위한 성당’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하늘에 봤을 때 라틴십자가 형태가 되어야 했으나 팔이 없이 일자형으로 마무리되었고, 신도석의 규모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 건물의 설계자인 영국인 건축가 아서 딕슨은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까지 먼 뱃길을 달려와 자신의 마지막 작품 앞에 섰다. 그는 꼼꼼히 작성한 도면과 스케치, 그리고 모형 등을 가져왔으나, 절반의 완성 앞에 새로운 도면을 그려야했다. 그의 심경은 건물이 완공된 후인 1927년 건축잡지인 <건축과 조선>에 실렸다. 

“... 완성 후에는 하나의 콰이어(성가대석)와 일곱 개의 베이(bay)를 가진 네이브(nave)와 두 개의 트란셉트(transept)로 이루어질 것이나, 현재 네이브의 베이는 단지 세 개에 불과하며 트란셉트는 극히 일부부만 완성된 데 지나지 않는다..... 주교님이 택한 전통은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12세기까지 멀리 유럽에서 행해지던 이른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양식이 발달 변화한 것으로, 보다 더욱 동양풍을 가미한 비잔틴 양식과는 형제 사이와 같은 것이다..... 머지 않아 성당 정원에는 전나무와 기타 수목을 심어 주위에는 낮은 담장 또는 사철나무를 두르고 도로에서의 조망을 미화할 예정이다. 남쪽 탑 위에 최근 단 종은 영국의 로프바로에서 주조한 것으로 영국 제일의 것이다. 이 건물이 언제 완성할 것인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다.” 

딕슨은 1929년에 생을 마감했고 트롤로프 주교도 고베에 다녀오는 길에 해상에서 사고를 당해 1930년 운명했다. 이로써 건물 복원에 대한 염원도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혔다. 





복원, 70년의 세월을 봉합하다

1991년 건축가 김원에게 성당을 증축하고 복원하려는 의뢰가 들어왔다. 건축가는 현대적인 감각에 따라 증축하여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왕립건축학회에 보관된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검토하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잉크로 정교하고 세심하게 그은 선을 더듬으며 원 설계자가 느꼈던 미완의 아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옛 건축가가 미지의 건축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가 언제 이 미완의 건축물을 완성에 이르도록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분명한 희망으로 써내려간 편지.

건축가는 문화재 건물의 복잡한 법규와 규제를 해결해가며 옛 설계를 그대로 옮겼다. 새로 덧붙여야할 공간은 지하로 숨겼고, 옛 건물과 새로 지어지는 부분이 안전하게 맞물리도록 애썼다. 벽돌은 지금의 것과 형태나 크기가 달라 특수제작을 했고, 석재가공은 국내 업체를 찾을 길 없어 모두 중국에서 작업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처음 건물을 계획했던 마음 그대로를 담았다. 그것은 70년이라는 세월을 봉합하는 일이었다. 본래의 모습을 갖게 된 성당은 1996년에 두 번째 축성식을 가졌다. 

정동 성공회 성당은 세월이 건물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1926년과 1996년의 두 시대의 삶이 합쳐지듯, 옛 건물과 새 건물이 경계없이 스며들어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 그 공간에서 세월을 넘은 두 건축가의 대화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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