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에서 따뜻한 햇살을 쬐니 뭐라도 쓸수밖에 없었다. 부여 신동엽 고택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제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대문화, 1969.







시를 외던 시절이 있었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숱한 문학 작품들 속에서 푹 빠져 지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스무살부터는 무엇에 홀렸는지 시를 잊었다. 많고 많은 말들, 남을 아프게하는 말들, 애써 변명하는 말들, 현실을 회피하는 말들, 억지로 끼워맞춘 말들, 그 넘쳐나는 말들 사이에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때로 내 입에서 시어 몇 개가 흘러나오다 냉큼 사라진다. 시가 사라진 세상이었다.

2011년은, 시가 도처에 생겨났다. 다시 시를 찾는 시대가 돌아왔다. SNS에, 책 속에, 시를 다시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많아진다. 왜 우리들 가슴에, 입술에, 뇌리에, 손끝에, 시가 닿게 되었을까? 우리가 원하는 시가 가진 짧고 순간적인 감정일까, 시에 담긴 메시지일까?



시를 읽는 시간은 짧지만 강렬하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 나열되는 욕설들이 강렬하다. <푸른하늘을>을 지금까지도 외고 있는 것은 언어가 쉽고 견고해서일것이다. 도종환이 <접시꽃당신>에서 '새벽이 있는 싸움을 위대하여라'라고 한탄하던 부분을 기억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쉼보르스카의 조근조근하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저 멀리 1930년대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함경도 사투리는 신비로운 겨울밤같다. 나타샤와 당나귀를 말하는 백석의 시는 쫄깃거리다 못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리고 지금 독일 북부도시에서 고고학자가 된 시인 허수경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고 툭 내던질 때 나는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어느 도시와 그녀가 고고학 발굴 때문에 가곤했던 중동의 모래도시와 그녀의 고향인 진주 사이를 오가며 그 어느 도시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21세기 노마드가 되기도 한다.


시는 부르짖음이고,속삭임이고, 감정의 횡포이고, 탄식이다. 이십대의 나는 시를 읽지 않았지만 삽십대의 나는 시를 읽는다. 가슴 속으로 절절 끓이며. 시건 저널이건, 누군가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말들의 맥락 속에 나 스스로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사회를 읽고,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널을 읽는 것처럼 시를 읽는다.


종로 5가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 1967년

 


얼마전 시인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진중공업의 직원 불법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이 넘도록 온몸으로 투쟁하던 김진숙 선생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 영도까지 수차례 운행했던 희망버스의 기획자 송경동 시인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어찌어찌 마무리되는 쪽으로 흐르자 경찰은 희망버스를 조사하고 시인을 구속했다. 시인은 창작과비평사에서 주관하는 신동엽 문학상의 올해 수상자였다.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 구속된 시인은 오지 못했고 의자에는 시인의 이름만이 남았다. 시인이 구속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동엽 시인이 살았던 집을 찾아 충남 부여에 갔다. 1960년에 민주세력을 억압하던 정치세력을 비판하며 쓴 "껍데기는 가라"가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난 시인은 광복, 한국전쟁, 전후 혼란한 상황 두루 겪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여가 북측 점령기였을 때는 민족청년연맹의 지도부로, 또 남측 수복후에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고초를 겪었다. 20대 초반의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혼란한 상황을 맞닥뜨린 시인은 내적 시름이 깊어졌다. 게다가 간디스토마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겪으면서 39세로 요절할 때까지 이 병은 시인을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전주사범학교를 마친 후 상경하여 단국대 사학과를 다녔다. 1961년에 명성여고에 적을 두고 후학을 길렀다. 1959년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등단했다. 그 해 <진달래산천(조선일보)> <새로 열리는 땅(새계일보) > 등을 발표했고, 1963년에 첫 시집 <아사녀>를 냈다.

1967년에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의 시를 묶어 52인의 시집에 게재하며 시작 활동을 지속했다. 같은해에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쓴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하면서 신동엽의 입지는 굳어졌다. 

시인의 요절로 시작활동이 10여년에 그쳤으나 시 속에 담긴 참여 의식과 분명한 저항 의식은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 회자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때 판금조치를 당하기도 한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당시만큼이나 2011년 지금 더욱 공감을 이끌어내는 면면을 발견하고선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참으로 이 현실이란!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 

.

 

 



집은 두 채로 지어진 한옥이다. 예스러운 모습보다는 현대식으로 말끔히 고친 한옥이 좀 낯설다. 저, 파란색 인조기와가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보인다. 안채는 부엌과 작은 방이 두 개 연결되어 있고, 별채도 두 개의 방과 창고로 보이는 장소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신동엽 시인이 8살때부터 이사와 자란 곳이다. 전쟁 후 피골이 상접한 채 돌아온 시인을 보듬어 안고 사람으로 만든 곳이다. 서울의 한 서점에서 일하다가 만난 눈빛 맑은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고, 병마가 재발한 시인이 요양하며 시를 쓰던 곳이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두루두루 지켜보며 아픈 몸을 감싸주던, 그의 부모같은 집이 지금 그자리에 남아있다. 

시인이 머물면서 글을 쓰던 장소는 어느 방이었을까? 알콩달콩 아내와 사랑싸움하던 방은 또 어디였을까? 일찍 요절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본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작은 방 너머 어딘가, 툇마루 안쪽 어딘가에 그날의 풍경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를 쓰는 동안 축음기의 교향곡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하는 그 방. 철쭉과 목련이 피었던 그 집.


눈빛 맑은 시인의 아내는 집풀생활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인병선 관장이다. 인병선 여사가 직접 쓴 글이 판각되어 방 문 위에 걸려있다. 아마도 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방은 문이 잠겨있어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별채의 중간 방만 문을 열어볼 수 있었다. 마치 얼마전까지 사람이 기거한 양 체취가 느껴졌다.

지금 이곳은 한창 공사 소음이 가득하다. 고택 뒷편에 신동엽 기념관이 한창 지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시인이 보던 책과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놓고 가족들이 기념관을 운영하다가 고택과 유고, 유품 일체를 부여군에 기증하고 대신 기념관을 지어 그곳에 전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방문객들이 남기고간 쓰레기며 낙서들까지 있어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데, 전시관이 세워지면 인
력이나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잘 관리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디자인한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1985년에 세워진 기념비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고택을 돌아보자니, 여유있게 시인의 삶을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훌쩍 보고 바삐 돌아갈까 했는데, 툇마루에 내리쬐는 햇볕이 좋아서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 앉으니 아트막한 돌담과 황폐하지만 널찍한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에 꽃과 나무가 예쁘게 자라면 보기 좋겠다.. 한옥이 공사장 소음을 막아주어 오롯이 볕을 즐기며 나만의 생각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어여쁜 집이었다.

집에 깃들인 시심(詩心)의 향기가 나를 부른 것인가? 바삐 가려던 마음을 멈추고 노트를 꺼내 몇 자 끄적여본다. 신동엽 시인의 시집이라도 가져와 한 페이지 읽어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나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디지털 활자로 몇 개의 시를 읽어보았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남향의 작은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심을 읊던 시인의 하루를 떠올리며,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시인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라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기슭에 시인이 작고한 후 1970년에 동료 문인들이 세운 시비가 있다. 시비의 앞에는 신동엽을 기리는 시 한편이, 뒷편에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1970년 4월 7일이라는 한자에서 진득한 그리움이 퍼진다. <금강>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쓸 정도로 시인은 부여를 흐르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쫓고 그 속에서 역사를 읽어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고 강둑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생겨난 상태였다. 강 주변에는 소란스러운 공사 소음이 지속적으로 들린다.



시비 주면에는 시인의 시를 읽을 수 있도록 적어둔 표지판이 많이 놓여있다.

 

 






시인의 시 중에서 하나를 덧붙여 적어볼까 한다. 시인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그의 시이기에.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년 11월 창간호>



 



 


시인 신동엽 가옥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501-3번지
등록문화재 제3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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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vs 신동엽/ 최성수 지음/ 숨비소리
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 두 사람을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는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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