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용산을 걷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몇 군데 표식을 해보았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철길을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삼각지와 용산역주변에서 한강변까지 걸어볼 예정이며, 몇 군데의 장소들은 추가답사하여 블로그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답사를 했던 곳은, 남영동입니다. 지도에서 숙대입구역과 남영역 사이에 있는 사각형 격자모양의 필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지도들을 놓고 비교해보았는데요. 이 지역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점은 1930년대부터입니다. 하지만 용산지역만을 따로 떼어만든 용산시가도(1927년 제작)를 보면 남영동 지역의 필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고, 공설시장이라는 단어도 분명히 적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1920년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1. 1927년에 제작된 용산시가지도.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지도 2. 1929년 제작된 경성시가전도에는 이렇게 필지 구획만 나와있어요. 

아마도 용산시가지도가 더 정확하게 지역을 표시하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지도 3. 1933년에 제작된 경성정밀지도에는 지번까지 부여되어 빼곡히 채워진 모습입니다.

지도 해상도가 뛰어나지 않아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습니다. 






지도 4. 남영동의 당시 지명은 연병정이었습니다. 좌측하단에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경성부도로공사일람도, 1935년 제작, 부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광복 후에 등장하는 지명인데, 일제강점기에는 연병정이라고 불렸습니다. 일본군영과 바로 맞닿은 지역이므로 그와 이어진 지명이겠지요. 조선시대에도 군 주둔지가 있었고 군영지의 영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자료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남영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용산에 남아있다는 옛 시장을 찾아가려고 검색하다보니 옛 필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쩌면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었지요. 그곳이 남영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지도의 그곳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었습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간판들로 몸을 가리고서 이웃집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케이드로 형성된 시장 내부는 상점이 마주보며 일렬로 서있습니다. 너무 오래된 시장이라서인지, 이미 일대에 시장을 이용할 만한 수요층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인지, 상점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았습니다. 아케이드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물들은 꽤 오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용산시가지도에 표시된 바로 그 시장일 것입니다. 그동안 수차례 개수하고 보수하며 지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니 남영동 좌측 하단에도 공설시장이라는 지역이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시장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시장 내부로 들어가 두리번거립니다. 지금은 좀체로 볼 수 없는 천장 구조물을 올려다보고, 창과 창 틈으로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나 살펴봅니다. 상점들은 모두 샷시문이 달려있습니다. 






2층에도 방이 있는 걸로 보아 아케이드 양쪽 옆에도 분명 공간이 있겠지요. 그 방은 어느정도의 규모일까요? 어둡게 닫혀진 창 안에는 아마도 창고로 사용하는 이층방이 있겠지요. 양쪽 출입구의 문은 양문경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 수 있고 뒤로도 열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는군요. 인근 상점에서 일하는 분께 물어보니 문이 오래되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시장은 남영 아케이드라는 간판을 달고 서있습니다. 


<서울의 시장>이라는 책에 따르면, 용산 지역에는 군영을 비롯하여 일본인 사회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시장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수산시장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을 위한 먹거리와 살거리를 제공하는 일본 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서울의 큰 시장이었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크게 자리잡고 있을 때였고 공설시장도 여러 곳 등장했습니다. 



용산의 공설시장은 1920년부터 신문에 등장합니다. 동아일보를 살펴보면, 1920년 8월에 용산의 '경정'에 공설시장을 설치하고 9월 20일부터 시장을 연다는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경정은 지도4에서 공설시장이라 적혀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 시장은 위치가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1922년에는 건너편 연병장 인근에 가옥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수요가 높아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원정2정목(원효로 2가)에 사설 시장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윽고 공설시장도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공사를 진행중이든 룡산연병장에 새로 설치한 경성부의 공설시장은 일전에 공사가준공되야 금십이일오후 세시부터 개상식을 거행하고즉시물품을판매할터이라더라. 

<1922년 10월12일 동아일보>



하지만, 화재로 시장이 불타버렸고 약 백여평 규모의 시장을 부랴부랴 재건하여 1923년 12월에 다시 개점을 하게 됩니다. 다시금 용산 시장의 건물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점은 1937년인데요. 2만3천여원을 들여 "용산공설일용품시장"을 개축했다는 기사입니다. 공설시장이 품목별로 시탄소채시장과 일용품시장 두 가지로 나뉘어진 모양입니다. 


흥미롭게도 신문에서 서울시내 공설시장에서 매달 판매한 액수를 공표하여 시장을 이용하는 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 세워진 공설시장은 명치정, 화원정, 용산, 종로 등 네 곳이며, 이는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시장은 화재가 잦아 소방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공설시장법안이 시행되게 되는데, 1924년 동아일보에는 이러한 법안이나 각종 사회사업비, 공원조성비 등이 조선인의 삶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고 토로하는 기사나 실려있습니다. 


경비비는 작년 본뎡 애정뎡 등의 화재로 인하야 소방긔관을 충실히하라는 일반의 여론이 만흠을 따라 부당국에서도 다소간 충실히 시설할 필요를 늣기고 작년보다 삼만여원을 증가하게 된 것인데, 자동차 몃개를 느리고 소방긔구를 더갓추고 소방수몃명을 더늘이고 아울러그들의(거의 일인)대우를 올려주는것가튼것은 별로 문뎨가 아니나 이가치 충실히하는 소방대들이 어느곳에잇는가 상비소방대는 남대문밧게 경성소방대는 영락뎡에 룡산소방대는 룡산에 잇어 황금뎡큰길을 이북으로한 소위 북부에는 비번소방수 일인이잇슬 출장소한개 설비치 아니하얏스니 까닭은 알수업스나 엇지하얏든지 현재의 소방대와 북부와는 거리가먼것만콤북부와는 등한한처디인즉 이십여만원의 경비는 누구의생명재산을보호할 밋천인가


사회사업의뎨일항이 일용품 공설시장인데 긔설된 공설시장중에서 명치뎡 공설시장 화원뎡 공설시장 룡산공설시장은 그이름과가치 조선인과는 하등의관계가업슬뿐만 아니라 간신히 하나만 잇든 공로공설시장도 무슨까닭인지는 모르나 부에서 방임주의를 쓴지 오래이며 더욱 최근에 이르러 사월일일부터 시행하는 공설시장규뎡에 "종로시장은 제외하고...."라는 문구가씨엿슴을 보아이제로부터 이곳은 경성부와 영영 관계가업서지는 모양인즉 조선인은 공설시장으로하야 부의 덕택을 바든 일도 업고 밧는일도 업스며 그 다음부영주택 중 한강통 삼판통에 잇는 열세평짜리 마흔채는 일본인 주택이오 봉래뎡과 훈련원에 잇는 세평짜리 여든여럽채는 조선인 헛간인데 긔왕은 고사하고 금년에 계상된 삼천여원의 경비도 "다다미"를 밧꾸어놋는다는 것을 보아 조선인 헛간에 관한 비용은 아니즉 이것도 조선인은 모르는 돈이며 도시개량비 이만여원도 연구조사의 경비로 봉급 소모비 등인대 "무슨도시""누구의 서울"을 만들려고 연구와조사를 하는지는 모르나....


(하략)


(1924년 3월 24일 동아일보)






위의 기사를 읽다보면 조선인 거주촌을 '소위 북부'라고 표현한 부분 (그곳에는 소방시설도 변변치 않았고)이 눈에 띕니다. 지금 살펴본 용산시장은 일본인 거주자들을 위한 시장이었지요. 당시에도 요즘처럼  "무슨 도시" "누구의 서울"같은 구호가 있었던 것일까요? 도시 개발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던 것일까요? 

 






시장을 지나 격자형 골목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 지역은 미군부대(옛 일본군영을 그대로 이어받았죠)와 바짝 붙어있어서 개발이 제한된 지역입니다. 때문에, 높은 건물들도 지을 수 없고, 옛날 집들도 찾아볼 수 있지요. 길을 따라 가면 새로 지어진 빌라들 사이로 옛 집들이 슬그머니 몸을 들어냅니다. 


가장 남쪽 구역에는 집들이 서로 마주보고 같은 형태로 지어진 것들이 보입니다. 용산 일대에는 각종 은행 사택, 총독부 직원들의 숙소, 철도관사 등 관사촌과 사택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곳도 어떤 기관의 관사촌이 여태 남아있는 것일까요? 개발이 어려운 곳이었으니, 광복 후 개발업자가 지은 민간주택단지라 보기는 어려울 듯하고요. 이런 저런 짐작과 기대를 하면서 골목을 걸어봅니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있군요. 당시에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골목이었겠지요. 
































미군부대 바로 옆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것은, 부대찌개와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들입니다. 백반을 팔 것만 같은 식당에서 T본 스테이크를 대표 메뉴로 하고 있네요. 왠지 들어가서 한 스테이크 하고 싶은 집이에요. 
















지도에 "선은사택"이라고 적힌 부분까지 가보았습니다. '조선은행'을 '선은'이라고 불렀지요. 지도의 그 장소는, 3년전 답사팀을 따라 가보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때도 일대는 빌라촌으로 바뀌었고, 사택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콘크리트 슬라브의 집 한채가 남아있었지요. 





(2011년 9월 촬영. http://sweet-workroom.khan.kr/24)





하지만,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 일대를 둘러보아도 높다란 빌라들만이 가득하더군요. 겨우 한 채 남은 그 집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주변의 높은 건물을 찾아 옥상에 올라가 일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옛 집들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시간이 뒤섞인 자취를 그대로 노출한 채 도시는 점점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혹시, 

남산타워도 사라질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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