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명동이란 동네를 멀리할 수 없다. 
누구는 우울한 날에는 압구정에 가라고 했지만 내게는 명동이다. 명동에 가는 것만으로도 해방을 느꼈다.


왁자지껄, 북적북적. 많은 물건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란 사람 조차도 그 속에 쉽게 파묻힐 수 있어서,
차를 타고는 지나갈 수 없는, 도보자들의 천국같은 거리라서,
어느틈엔가 저렴한 화장품이나 티셔츠를 몇 개 충동구매하더라도 쉽게 지갑을 열 수 있어서,
그러고나서 명동돈가스나 명동칼국수, 충무김밥 같은 것을 먹고 기운내서 다시 산보를 할 수 있어서,
명동은 해방구와 같았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무조건 을지로 입구에서 내려 타박타박 명동길을 걸었다.



백화점과 근사한 레스토랑도 분명 있지만 주눅들지 않고 싼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 명동이다.
눈치보지 않고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익명의  도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익명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그래서 명동은 특별했다. 신촌과도, 종로와도, 강남과도 달리
나란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는 블랙홀 같은 동네.



지금은 하루가 멀다하고 멀티쇼핑몰이 옷을 갈아입고 글로벌 SPA 패션 브랜드가 각축을 벌이며 상권을 형성한다. 
이제 명동하면, 일본인 관광객을 첫손에 꼽을 정도로 길거리에 일본인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명동성당에는 경건한 신앙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고
화교학교가 있는 중국대사관쪽은 여전히 외국잡지를 파는 서점이 서있다.

명동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국적도, 목적도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헤맨다.
하지만 그 속에 파묻혀 어디론가 사라지더라도 상관없는 곳이 명동이다.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명동이야기>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겨울만큼 익숙한 동네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향수어린 그 동네를 다시금 들여다보려고 전시장에 들렀다.


명동은 조선시대 명례방이라 불리던 주거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 명치정이라는 이름의 상업지역으로 바뀌며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동네로 변모했다. 20세기초부터 명동은 백화점과 각종 상점, 은행과 우체국, 학교 등 각종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오락과 물건이 넘쳐나는 환락의 경성을 표현하기에 딱 좋을 장소가 명동이었다. 다방, 카페, 식당등 유흥 시설도 즐비해졌다.

전쟁 때는 폐허가 되었다. 종현성당, 프랑스성당이라 불리던 명동성당과 명치좌라 불리던 명동예술극장만이 제 모습을 하고 서있다. 온통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 더미를 너머 삶으로 복귀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박완서의 <나목>은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서울, 명동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군 PX로 사용되던 신세계백화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의 경리를 보며 호객행위를 하던 처녀는 퇴근 후 스산한 명동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가곤 했다.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는 건물들의 잔해, 불이 꺼진 어두운 거리를 몸을 움츠리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곤 했다.

반짝반짝 빛났던 거리가 불꺼진 폐허로 바뀌었을때, 무너진 건물 잔해가 여전히 사람들의 시야를 괴롭힐 때 그때도 명동은 있었다.



전후의 허무의 무드를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예술가들이 아니었나 싶다. 명동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연기를 하고, 소설과 시를 쓰던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30년대 모던뽀이의 안식처였던 명치정의 풍경은 1960년대 예술가의 삶을 견인해주는 명동으로 옮겨졌다. 그 중심에 다방이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명동이야기>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며 예술의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틔우던 시기, 1960년대의 명동과 명동에 머물던 사람들에 대한 단상을 다방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예술가들, 예술가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친구와 후원자들, 명동에서 펼쳐졌던 문화현상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다방을 중심으로, 크게는 명동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진한 커피처럼 남아있었다.








1960년대 명동을 가장 잘 설명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전시는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기자이자 작가인 이봉구(1916~1983)의 목소리를 빌어 옛 명동 거리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명동백작'이라는 낭만적이고 다소 웃음나는 별명은 누가 붙였을까 싶은데, 이는 이봉구가 명동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수신인 주소에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의 이봉구, 은성의 이봉구,라고만 써도 그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니 '명동파'의 수장답다.

이 시기 명동이 다사롭게 느껴지는 것은 대기업 브랜드나 프렌차이즈 따위가 아닌
작은 카페나 다방, 그리고 다방과 선술집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다방과 은성 술집은 이봉구의 중심거처였고 그곳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만나 시대를 나누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명동에서 젊음을 소진했다. 시인과 소설가, 화가, 사진가, 무용가, 배우 등 그들의 삶이 투영된 육필원고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영의 육필 원고를 발견했다.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쓴 일기와 원고지에 적힌 시와 글들.

고등학교 시절 <푸른 하늘을>을 배울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시를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그의 육필원고를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으나 글자를 읽어내려가기가 어려웠다. 푸른 하늘을 떠올려본다. 내겐 이 시가 곧 김수영이기에.




푸른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 비상하여본일 있는  사람이라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하늘을





김수영의 일기와 글 묶음, 육필원고를 보는 순간 살짝 떨렸다.



 

 

 

거리는 모두 나의 설움이다 -수영

내 고독과 설움은 술만이 알 것이다 -이봉구

그들은 명동에서 온 설움을 내던질 자유와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장소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온몸으로 겪어온 도시가 있는가,
그런 장소가 있는가, 애정으로 지켜본 장소가 있는가, 하고. 그런 장소, 하나 갖지 못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닐까?






모나리자와 음악다방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의 다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의 다방은 커피와 술을 마시며 사람들을 만나던 곳일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열을 불사를 수 있었던 아지트였다. 다방과 카페에서 전시회, 시낭송회, 음악회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서 문인의 유고를 간행하거나 추모회를 열기도 했고 때로는 연극무대나 영화관이 되기도 했다. 

요즘의 다목적 아트센터의 역할을 다방이 해주었던 것이다.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파를 나누어 단골 다방을 정하기도 했다. 동방싸롱, 모나리자, 포엠, 초원다방, 문예살롱, 휘가로, 은하수, 비너스다방, 청동다방, 마돈나, 오아시스, 갈채, 낙랑, 싸롱 보아그랑 등지에서는 변엉로, 오상순,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구상, 김수영, 임광빈, 김진기, 조병화, 이진섭 등의 인물들이 다방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들은 스스로 명동파라 불렀다. 당시 명동은 그림그리고 글쓰고 연기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퇴계로에 「포엠」이라는 술집이 생겼읍니다. 저녁이 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이 오면
병들어 앙상한 가로수 잎사귀를 돌아 우리들은 술을 마시러 「포엠」으로 갑니다.
(중략) 그림쟁이들이 먼저 모여 들었읍니다. 그리고 글쟁이들이 모여들었읍니다.
그림쟁이와 글쟁이와 노래쟁이들이 같이 취해서 노랑저고리를 웃기다가 돌아들 가곤 했읍니다.

-조병화

 


 

 

또한 명동은 유행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었다. 패션에 목숨을 건 멋쟁이들과 과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패션테러리스트들이 골목을 누볐다. <송옥> <칠성제화> 등 맞춤 패션과 제화 업체가 성시를 이뤘고 명동은 양장을 맞추고 구두를 사러오는 쇼핑거리의 대명사였다.

 


 

 "친구들이랑 명동으로 나가는 거야, 명동을 나가면 그건 최고의 하이클래스지.
배우들도 많고, 명동거리는 새로운 문화가 도입이 돼가지고, 전부 양장을 맞춰서 해입었어요.
정싸롱을 간다. 송옥 양장점을 간다. 무슨 미장원 해 가지고 면도칼로 머리를 착착 컷트를 해요.
명동을 가면 말쑥하게 아주 서양여자가 돼서 나오는 거야.
머플러, 멋있는 거 머리에다 메고 다녔어. 그때는 그담에 하이힐 신지,양산도 들었고, 그게 신식이예요.
그리고 또 눈이 안나쁜데도 선글래스를 써야 멋쟁이였어."


 -김숙년, 서울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2010


 






패션의 거리와 명동예술극장은 마주하고 있다.

1936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세워진 명치좌가 국립극장으로 바뀌어 우리나라 최고의 극장으로 활용되었다. 명동은 연극의 중심지였고 영화사도 곳곳에 들어와있었다.



 
한때 텔레비전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던 여성국극. 여성들로 이루어진 극단이 춤과 노래, 연기로 어우러진 독특한 무대극을 만들었다. 전통극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로맨스가 펼쳐졌는데, 언제나 이런 소재는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처럼 "여성국극, 다 어디갔어?"라고 소리쳐불러보고 싶다.



 


명동은, 저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70년, 명동의 다방문화가 쇠퇴하면서 명동파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히피문화, 저항문화를 내포한 젊은이들이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시절이 수상하던 시기, 명동은 시대를 고민하고 그 틈속에서 외로워하는 젊은이들을 품어안았다. 명동성당은 저항의 아이콘이며, 심지다방과 오비스캐빈은 히피문화의 중심지였다.

1970년대 이후, 지가가 올라가면서 명동의 풍경은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은, 문화중심지로서의 명동은 명동예술극장과 삼일로창고극장 등 약간의 장소들로만 그 명맥을 이어갈뿐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그 문화와 예술의 흐름은 어디로 갔을까? 홍대 아니면 대학로인가?
이제 점조직처럼 곳곳에 넓고 옅게 퍼져있는 것인가?



전시실에는 박인환이 쓰고 박인희가 부르는 <세월이 가면>이 가득 울려퍼진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그것을 기념하는 진혼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도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젊음, 혹은 열정, 이런 것이 아닐까?
명동이 늘 그리운 것은, 해방구가 필요했던 치기어린 젊음의 한 단면을 그곳에 남겨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전시를 보았으니, 직접 명동을 만나고 싶다. 걷고 싶다.



 

<명동이야기>
장소: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


관람안내
일시: 3월 31일까지
관림시간: 09:00~22:00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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