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로를 다시 가보게 된 이유는 바로 삼덕상회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인터넷 매체에서 대구 북성로의 오래된 상점에서 카페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루에도 수십개 문을 열고 수십개 문을 닫는 카페가 대단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카페는 가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이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서 오랫동안 북성로 재발견에 참여해온 20대의 건축학도였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본 주인은 갸름한 얼굴을 가진 여성이었다. 북성로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할 사랑방을 운영할 것이라 야무진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고 그 공간은 어떻게 변모하여 공개되는지도 보고 싶었다.



근대건축물을 허물지 말고 잘 보존하자는 말들은 난무하지만 실제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많은 숙제를 품고 있다. 규모가 큰 문화재급 건물 중에는 옛 기능을 회복하거나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어려운 개인 소유의 부동산은 늘 태풍 앞의 촛불같은 신세다.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는 불합리한 일이고 그렇다고 오래된 건물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새 건물이 좋은 건축미나 공간미를 보여주지 못한 채 그저 돈으로 환산된 장소로밖에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축이 경제 논리와 맞물렸을 때, 도시 환경의 품격, 삶의 질, 아름다운 공간, 스토리가 풍부한 거리, 오고싶은 장소... 이런 감성적이며 우리 마음을 끄는 요소들이 모두 제거되고 만다. 옛 건물에도 경제논리의 잣대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거리에 담겨진 역사성이야말로 돈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시간'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해온 일이다. 그것은 그 도시에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소통하며 이루어낸 결과다. 그 결과가 건물에 스며있다. 건물은 그 자체로 역사다.











북성로 모퉁이에 있다는 카페를 찾아갔다. 이름하여 삼덕상회. 원래 공구상회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북성로 골목에는 여전히 기계를 움직이느라 부산하고 소음이 들끓는다. 덕지덕지붙은 간판이 건물의 외관을 가리고 있지만 간판만 떼어내면 이 거리는 옛 모습 그대로이리라.중간쯤에 잘 정돈된 건물의 외관이 나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건물이 자그마했다. 2층짜리 일본식 목조주택이다. 일제강점기에 닦인 도로변에는 파사드(외관)가 좁고 안쪽으로 긴 집들이 거리를 채웠다. 현재 우리네 건물들이 폭이 좁고 파사드가 넓은 형태를 띄는 것과는 다르다. 아파트만 봐도 베이를 늘리고 테라스를 길게 만든다. 채광과 환기 때문이다. (사실 아파트에서 발코니면이 넓은 것은 발코니 확장과도 관련이 없지는 않다.)









예스러운 분위기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 향기가 퍼진다. 양해를 구하고 2층을 먼저 구경했다. 2층 안쪽에는 다다미방이 있고 좌식 테이블이 놓여 사랑방다운 분위기가 났고 바깥쪽에는 오래묵은 의자와 테이블을 두었다. 천장은 높고 시원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뻥 뚫린 자리가 있다. 아마 예전에는 이곳에 계단이 있어 오르내렸을 것 같다. 지금은 건물 뒤쪽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오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구조였다.



날이 추워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관계자분이 말을 걸어온다.
"제가 주인은 아니고, 주인이 제 후배에요."라고 밝고 경쾌한 목소리다.
근대문화유산에 관심많은 사람이라 소개하고 북성로와 카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제가 2009년에 연초제조창을 답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ATBT라는 문화창작집단을 만났었는데요. 연초제조창 둘러볼 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어, 그 후배가 ATBT에서 일했었는데.... 그때 아닌가?"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 담배공장 이야기라는 부분을 쓸 때 답사했던 대구 연초제조창. 대구에 올 때마다 그 넓디넓은 폐허를 온전히 다 둘러볼 수 있도록 도와준 호리호리한 여인이 늘 생각나곤 했는데, 그녀가 바로 이 카페의 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건축을 전공한다는 이야길 했었지!


어찌보면 별 일 아닌 인연이지만 좋은 프로젝트로 다시 만나니 더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라, 아기 돌보러 귀가한 카페 주인에게 급작스런 문자를 보내고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2009년 여름 대구 연초제조창 방문 당시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최지애 씨가 카페 삼덕상회의 주인이었다. 그날 북성로에 대해 무척이나 진지하게 설명해주던 기억이 난다. 근대문화유산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하면서 사진으로 다 보여줄 수 없고 글로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건물들을 만나기도 했다. 80년된 철암의  탄광 시설물이 그랬고, 대책없이 스러져가는 일본인 대농장 시설물이 그랬다. 그리고 담배공장. 담배공장은 참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 청주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대구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제천의 엽연초 수납시설물이 그랬다. 아직 가보지 못했으나 무주에 있는 연초재배장 관리사무소도 곧 발걸음하게 될 것 같다.

이들 건물은, 대책 없이 크고 죽음을 앞둔 공룡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는 형국이다.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없애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개조하여 새롭게 사용하기에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는 건물들.

어쩔 수 없는 인연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건물들.


세월의 틈에서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긴 시간을 삭히고 있는 건물들이 가슴에 다가온다. 그 숱한 시간동안 이 건물을 스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그들은 건물 곳곳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심어놓았을까?



이 건물을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들이건만, 그들에게서 생산된 재화들은 도시를 황금빛으로 만든 주요자본이었다. 철암의 탄광에서 대구의 담배공장에서, 김제의 농장에서 나온 것들이 지역을 먹여살렸다. 지금 그 황금의 재화들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공장이, 탄광이, 농장이 사라지면 어디서 그들의 삶을 유추해볼 것인가?

그중에서 철암의 탄광 시설물 20개 동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철암탄광 관계자는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지어져 지역 산업의 중추 역할을 했던( 한창 무연탄 산업이 좋을 무렵에는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왜 항상 개가 등장하는지 모를 전설이지만.) 탄광 시설물이 잘 보존되어 향후 탄광산업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박물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설명하거나 드러내 보여주지 않아도 이런 장소들을 보는 것만으로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오래된 건물의 힘이다.




대구 연초제조창 본관. 내부는 위험하여 옥상을 건너다니며 건물을 조망했다.






 

시간이 멈춘듯한 연초제조창 본관의 강당. 옥상 위에 세워져있었다. 그날 그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2009년 당시 촬영한 연초제조창의 모습. 지금 이 건물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까? 지금도 그대로일까?





연초제조창은 1910년대 처음 하나의 공장이 세워진 후로 공장이 확장을 거듭하면서 증축 또 증축하여 지금의 육중한 몸집에 이르렀다. KT&G가 대구공장을 영천으로 이전하면서 북성로 상단의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던 이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원래 계획은 건물을 모두 허물고 이 자리에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러다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고 한참을 방치되던 건물에 문화창작단체인 ATBT라는 단체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활기를 잃은 대구 중심부에 문화 프로젝트로 새로운 활력을 불러넣고자했던 단체다.





ATBT에서 시도한 것이 건물철거를 저지한 것과 연초제조창의 창고 건물을 활용하여 예술 페스티벌을 개최한 것이다. 6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4층짜리 건물에 예술의 향기를 가득 채웠다. 연초제조창 본관 건물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고 무척 낡아서 행사를 개최하는 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벽돌로 차곡차곡 지은 장방형의 창고건물은 탁 트인데다 넓고 높아 예술 프로젝트를 하기에 적합했다.

최근 들리는 소식으로는 2013년에 창고건물을 복합문화단지로 바꾼다는 계획안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 장소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떤 컨텐츠를, 어떤 역사를 담을 지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싶다.



장소는 변화하더라도, 나는 처음 이 공간에 발을 디뎠던 그날의 서늘하고 눅눅한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텅빈 공간에서 둥글게 말아올린 거대한 담뱃잎 뭉치들을 환영처럼 보았던 것도, 계단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떠올렸던 그 날의 체험을.







 

 
그리하여 다음 날 카페 주인을 만나 커피를 앞에 두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차분한 대구 사투리다.

그녀는 <북성로의 재발견>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술사와 건축을 전공한 사람, 대구의 옛골목을 샅샅이 정리한 대구 신택리지 팀 등 여럿이 모여 북성로를 활성화시켜보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스터디를 하게 되었단다. 북성로의 몇몇 건물을 새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던 끝에 삼덕상회 건물이 새주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카페를 열게 되었단다. 단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건물을 알맞게 디자인하고 공사를 하면서 1930년대 지어진 오래되고 낡은 공구상회 건물이 카페로 바뀌었다.



아직은 오가는 사람이 적어 손님의 발걸음은 많지 않지만, 예술이나 근대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 워크숍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대구 부자들이 모여살았다는 진골목(근대문화유산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리다)의 식당과 연합하여 점심시간을 이용한 근대문화 특강도 펼쳤다. 뜻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이어진다.
또 모 블로거의 글을 보니 바느질 카페의 회원들이 다다미 방에 모여 앉아 모임을 하고 갔단다. 공간을 필요로 하고 즐기는 사람은 어디라도 간다.


"아직은 관련자의 사랑방이고요. 제 놀이터에요." 라고 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동성로에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지만, 삼덕상회는 북성로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옆 집도 임대간판 붙였던데요.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제 작업실을 이리로 옮기고 싶네요."

"임대가 아니고 매매래요. 매입하기엔 아무래도....."


북성로는 여전히 다방문화가 성업중이다. 공구상 아저씨가 전화하면 아가씨가 커피를 가져다준다. 그런 장소에 커피하우스라니, 아직은 낯설다.

"이 거리에 이런 집이 몇 군데만 더 생겨도 재미있게 해볼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늘 고민이 많아요."



 

 



 

삼덕상회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패널도 세웠다. 장소에 대한 약간의 기록을 남겨두었다.

 


 

 

 




 

 

옛 건물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 이것은 연구자들에게도 숙제이며, 문화지킴이 공공단체나 지자체 등 정부기관에서도 속시원한 해결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우리는, 옛날 건물, 옛날 풍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 재미있다. 할머니 옛날 이야기같은 시절 속을 헤매며 당시 이야기를 찾아보는 그것이 또다른 유쾌한 여행이다. 안타까운 역사도 보고 가슴아픈 역사도 보고 가슴 뜨거운 역사도 보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젊은 우리가 이런 건물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즐겁게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시행착오하며, 토론하며, 담론을 만들며, 하나하나 발자국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반갑다. 부산에는 중구 골목에 예술가들이 모여 '또따또가'라는 단체를 만들어 거리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인천에는 아트플랫폼이 있으며, 대전에는 30년대 지어진 대전 부윤관사가 카페겸 갤러리로 바뀌었다. 군산에도 예술가들이 도시를 스터디하며 오래된 일본식 주택에 머무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그
들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 그들이 오래된 집과 만나서 벌인 일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것이다.








카페 삼덕상회에 가보고 싶다면?
주소- 대구시 중구 북성로 2가 49-2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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