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도시인지 알 수 없는 풍경. 해방촌은 1950년대 전쟁후의 도시구조를 보여주는 곳이다.





해방촌이라는 지명을 인식하게 된것은, 압구정동에서 남산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였다. 이태원의 왼쪽 어느 부분을 지날 때 버스 안에서 들리던 정류장 지명이었다. 신앙촌도 아니고, 해방촌. 이름이 참 희망차다. 산등성이에 손바닥만한 집들이 오글오글 들어찬 동네를 아름답게 불러 달동네라 하듯이, 해방촌이라는 동네도 그런 역설적인 지명같았다. 아직도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곳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 이곳과는 인연이 없었다. 우연찮게라도 발걸음조차 하지 않은 거리였다. 한 때 내가 일 때문에 자주 들락거리던 H호텔을 가느라 남산 순환도로인 소월길을 달려갈 때, 그때 눈 앞에 펼쳐진 거리의 일부분이었던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나는 소월길을 따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거리에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종로나 광화문, 강남, 신촌 등의 풍경과는 달랐으니까. 사람사는 동네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뚤비뚤한 골목, 막 쌓아놓은 탑처럼 보이는 집들, 빼곡하게 들어차서 옆집에서 무슨 반찬을 먹는 지도 알것 같은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 서울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곧 내가 내려서 취재를 해야 할 호텔은 최고급과 최신 트렌드, VVIP 서비스 등 일상 생활과 괴리된 것들로 가득차있지만, 그 틈에서도 숨쉴 수 있었던 것은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살아있는 서울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구나,라고 들여다볼 수 있는 그 골목, 그 냄새, 그 집들의 실루엣 너머로 붉게 번지던 노을같은 것. 아래로 내려다볼수록 더 많은 것들이 켜켜이 숨겨지고 차곡차곡 채워진 그 거리들.

서울에 사람이 참 많다,라고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그 속에 내가 몸 누일 곳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그곳이다. 약간의 희망이, 실낱같은 웃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은, 내 고향이 서울 그 어느 곳도 아니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는 그 촘촘한 집들, 빼곡한 골목들이 더 나와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좁은 창문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대화를 할까, 가장 높은 층은 다락방일까? 어떤 젊은이가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지는 않을까? 이런 상상도 가끔은 했다.

그곳의 일부가 해방촌이었다. 




 


해방촌의 골목을 돌아보는 건축 답사를 다녀왔다. 해방촌의 정식지명은 용산2가동이다. 4대문 바깥에 위치한 용산은 후암동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 언덕배기 산비탈의 나대지였을 뿐이다. 용산에 일본 군영이 들어오고 (지금의 미군부대자리) 경성역이 세워지면서, 후암동과 용산 일대가 일본인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용산고등학교의 전신인 용산중학교가 세워져 일본인 군인 자제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남산에는 거대한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신궁으로 올라가는 길이 계단으로 정비되었다. 주변에 경성신사와 호국신사가 세워져 일본인촌다운 모양새를 만들어갔다.


해방촌은 호국신사가 있던 자리 주변이다. 당시에는 부촌과 군영 사이에 위치한 신사 지역이기 때문에 자연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장소였으며 이렇게 촘촘하게 집들이 들어차게 된것은 전쟁 후의 일이다.



해방촌은 광복 후 귀환한 사람들,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용산 일대에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났다. 용산 일본군영 자리의 관사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미군부대가 이곳으로 들어오자 쫓겨나 남산의 남쪽 귀퉁이에 머물게 되면서 산비탈이었던 이 지역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사는 마을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후 서울에 몰려든 피난민들과 도시빈민들도 살곳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해방촌은 핍박과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가자는 뜻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몸을 누일 방이 필요한 도시빈민들이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삶이 이어졌다. 그 시절은 모두 가난했다. 누가 덜 가난하고 더 가난한가, 구별하는 것도 의미없었다. 언덕배기를 따라 켜켜이 좁디좁은 판자집들, 달동네집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밤에는 집마다 뿜어내는 불빛들로 별처럼 반짝였을 듯하다. 그 불빛처럼 남루하고 가난한 전쟁 후의 살림살이가 이어져왔다.


깎아지른듯한 산비탈을 오가며 살았던 사람들. 소설가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에 당시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주인공 기애는 불시에 떠났던 가족들에게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해방촌으로 향한다. 중산층의 신분으로 잘 살던 기애 가족들이 모든 것을 잃고 이곳으로 들어오던 날을 떠올린다.


"이 년 전, 그 중턱의 판잣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 서글픈 감정을 서로 감추느라고 세 식구가 미묘한 고통을 겪은 일을 지금도 생생히 마음 속에 되사려 올렸다. 초라한 판잣집은 정말 너무도 형편이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쩌릿하게 아파오도록 그것은 그냥 닭장이나 헛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오랜만의 귀환 후 첫 밤을 보내고 눈을 뜬 그녀는 좌절한다.


"눈을 뜨니까 잡지책을 뜯어 바른 천장과 벽의 괴상스러운 얼룩이 시야에 들었다.... 이 방에 그득 차 있는 것은 가난 그것뿐이라 느껴졌다.기애는 눈을 감았다. 사굴욕적인 정상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보다는 동물에 가깝도록 궁핍에 인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기애에게 부끄러운 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머리맡을 바람결같이 연달아 지나가는 것이 있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눈을 뜨고 그것의 행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커다랗고 시꺼먼 쥐들이었다."


가난과 굴욕. 하지만 삶을 위해서 그것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무엇보다 살아야했기에, 무엇이건 먹고 배우고 일하며 살아야 했던 그 암울한 나날. 해방촌은 그날을 증언하는 공간이다.


" 주위가 온통 안개에 두루 말려서 산등성이에 밀집해 산다는 감이 더한 것 같았다. 기애는 장씨의 고무신을 끌고, 문마다 뺴끔빼끔 내다보는 까만 눈들을 곁으로 흘리면서 총총히 들어앉은 판잣집 곁을 지나쳤다. 찔꺽찔꺽 미끄러지는, 본래는 층계처럼 깎이었던 모양인 황토 샛길을 기어오르니까 뭉클하고 풀향기가 몰려들었다. 꽃을 떨군 아카시아의 싱싱한 초록, 우거진 잡초. 치마와 다리를 폭삭 적시면서 함부로 쏘다녀보았다. 벌써 어스름 저녁때였다.


산록을 돌면서 곧장 뻗어온 넓은 길은 여기서는 실낱처럼 가늘어져 가지고 그대로 산허리를 감싸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해방촌의 주민들이 그 길을 따라 속속 돌아오고 있다. ...놀랍게도 빠른 걸음새로 미끄럽고 좁은 산길을 휙휙 지나간다. 그러면서 동행끼리는 열을 올려 사업 이야기, 장사 이야기를 한 것이다. 파고드는 듯한 눈길, 여자고 남자고 힘찬 걸음걸이. 거친 호흡. 똑같은 표정이 어느 몸에나 있었다.... 길 한편이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이루어, 까마득한 아래쪽에서 연기같이 안개가 피어오르고 또 더욱 멀리 펼쳐져 가라앉으면서 시가지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은 까마득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장사하러, 공부하러 갔고 물을 길어 날랐다. 도시가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함께 발달하는 것이 슬럼가다. 도시의 빈민이 살면서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것. 해방촌은 일감이 많은 서울역, 남대문시장 등과도 가까우며 도시와 일일생활권으로 오갈 수 있는 데다 아직 도시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남산의 허리에 켜켜이 들어찬 집들, 사람들. 그들은 이곳에서 도시를 키웠다.


지금 해방촌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다. 재개발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주택들이 보수를 거쳐 다세대 연립주택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도로 역시 깨끗하게 정비되어 버스가 오간다. 당시의 기억을 가진 집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골목과 도로와 길에서 해방촌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1920~30년대 정비된 도로와 깎아지른 산비탈을 가늠케하는 경사도의 도로들을 걸었다. 그 길 위에서 80년 전의 호국신사터와 60년 전 해방촌의 자리를 더듬어보는 게 전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바뀌어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계단은 호국신사로 올라가는 길목을 알려준다. 계단은 1930년대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호국신사로 통하는 계단이다. 호국 신사란 일본 건국의 신을 봉안한 신궁과 달리, 황국을 위해 죽어간 전쟁영웅들의 영혼을 기리는 곳이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가 대표적인 호국신사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는 중일 전쟁 후 경성과 나남에 호국신사가 세워졌다. 일본군영와 멀지 않으면서 남산의 조선신궁과도 인접한 장소인 용산에 호국신사가 세워졌다. 신사는 사라졌지만 길은 남아있다. 경성신궁은 계단까지 없애버렸지만 이곳은 계단조차 그대로 남아있다. 중앙 분리대 부분만 새로 고쳤을 뿐, 양쪽 계단은 옛날 그대로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

불원에 경성, 나남에 호국신사를 창립.
간사회에서 원안작성

불원에 경성 및 나남에 창립될 호국신사의 조영에 관한 구체안을 심의할 고국신사봉찬회 제1회간사회는 30일 오전 10시부터 총독부 제 2회의실에서 개최, 간사장 대죽 내부국장 이하 각 간사, 총독부관계과장, 조선군십구, 이십양사단각부관, 육군어용괘 등 출석, 유생지방과장으로부터 총독부 원안을 설명하야 계획예산 및 부지 조영설게등에 대하야 협의를 하고 정오에 산회하엿다. 그리고 불원평의원회를 소집하고 원안을 부의결정한뒤 본격적게획수행에 착수할터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1일)



 

호국신사건조비 일부 성열의 헌금모집

경성과 나남에 호국신사를 건조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오는 18일 조선호텔에서 봉찬회를 개최하기고 양지의 호국신사건조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하기로되었다. 이 호국신사의 건조비는 총액 백삼십만원으로 정하고 그중에서 이십만원은 국고에서 보조하려던 것을 다시 증액하야 삼십만원을 국고보조하기로 하엿으며 남어지 백만원은 일반기부로 거출하는데 관공서원, 민간, 학동 등에 각층각게급을 통하야 성열의 헌금을 모으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17일 )




 

 

 




신사 터 안쪽에서 찾아낸 공동주택들이다. 많지는 않으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집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실시한 공동주택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나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집 앞에서는 갈팡질팡하게 된다. 삐걱 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가 앉아보고 싶은 마음도 한켠에 있다. 집의 역사는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것이다. 하지만 문은 닫혀있고 모든 방이 소리없이 고요하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강아지나 고양이의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느 집앞에 벤치가 놓여있다. 따뜻한 햇살이 잘 드는, 해바라기하기 좋은 자리다. 혹은 밤바람이 좋은 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곳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일까? 과거 타임라인 어디에선가 뚝 잘라다가 끼워넣은 듯한 집들. 조용히 몇 컷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타인의 삶을 엿보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신흥시장. 신흥, 부흥이라는 명칭 또한 전후에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신흥시장은 언뜻보면 오래된 동네 어디쯤에나 있을 법한 재래시장인데, 이곳이 특이한 점은 일렬로 늘어선 양쪽의 건물 사이를 메워 길다란 아케이드를 형성한 점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 집과 집의 틈새 등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내가 본 것은 해방촌의 전부도 아니고, 해방촌의 속살도 아니다. 나는 그 길을 걸었을 뿐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1960년대 사람들의 발길로 반질반질해진 흙길 위에 시멘트를 씌운 골목을 따라, 1980년대 옛길을 다시 정비한 도로를 따라 걸었을 뿐이다. 길, 골목, 도로 주변에 펼쳐진 삶의 모습이 내가 걷는 속도에 따라 점차 바뀐다.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볼 수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길, 그리고 길 위에 남겨진 명칭들뿐이다. 해방촌은 더이상 해방촌이 아닌 것이다. 



좀더 읽어볼 책

전후 해방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소설들을 소개한다. 구체화되지 않은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연결고리를 문학이 채워준다.


이지민/ 나와 마릴린
<모던보이>의 작가 이지민이 전쟁과 그 후의 이야기를 썼다. 젊은 작가로서 쉽지 않은 주제를 선택하는 용기를 높이 산다.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이건만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도 밝혀두고 싶다. 참고로 영화 모던보이와 소설 모던보이는 좀 많이 다르다. 나는 이 작가가 역사소설을 많이 써주면 좋겠다.

강신재 - 해방촌가는길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 단편이다. 1920년대에 출생하여 역사의 굴곡을 지켜본 작가다. <해방촌 가는 길>은 전후 젊은 여자가 겪어야 했던 이야기다. 남자들이 죄다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야했던 강인한 여자들. 돈을 벌어야 했고 일을 해야했고 동생 공부를 시켜야했고 나이든 노모도 돌봐야했던 그래서 용산 미군부대를 출입할 수밖에 없었던 언니 누나들 이야기. 독일이 패망한 후 소련군을 맞이한 베를린의 처참한 상황을 그린 <베를린의 한 여인>이란 소설도 연결된다.


이범선- 오발탄
해방촌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걸리는 소설이 바로 오발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개인의 자존감조차 회복할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우리는 소설과 영화로 가상 전쟁을 경험하지만 실제와 다르단 것을 안다. 가장 전쟁은 끝이 있고 실제 전쟁은 끝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이 소설의 배경은 해방촌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서 살아온 박완서 선생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 전후 강인했던 여인과 나약했던 그 남자의 대립각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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