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건협(새건축사협의회 www.kai2002.org)에서 매달 서울의 골목을 돌아보는 답사 프로그램이 있어서 얼른 신청하고 다녀왔습니다. 개화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살펴보면서 도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직접 들여다보는 답사입니다. 9월은 1930년대의 일본인 주거지였던 후암동과 갈월동 일대를 돌아보았습니다.





후암동은 남산 순환도로를 가기 위해 슬쩍 거쳐갔던 동네 정도로 알고 있었고, 갈월동 역시 제 생활 반경에서 멀리 있는 탓에 이름만 들어본 동네 정도였습니다. 잘 모르는 곳이죠. 골목과 언덕, 옛 집과 요즘 집, 재래시장과 100년 전에 만들어진 도로 등이 혼재해있어서 돌아보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남산서울타워만 안보인다면 과연 이곳이 서울일까? 의심을 가질 만한 풍경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이곳이 오래되고 낙후된 동네구나, 라는 의미가 아니라, 군산, 강경, 나주, 대구 등지에서 보았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거리의 풍경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슬쩍 겹쳐지고 뚜렷하게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후암동에서 발견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 일본식 주택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축물은 시대별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달라질 수 있고, 시공이나 재료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회구조나 문화가 달라지면서 건축의 형태가 변하는 일도 많지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한옥은 개량한옥으로 바뀌었고, 서양식 주택, 일식주택, 문화주택 등등 다양하게 변화된 주택들이 서울을 채워갑니다. 한옥은 한인 사회의 주거로 계속 남아있지만 남대문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일본인 주거지에는 한옥과는 다른 일본식 주택, 개량식 주택이 등장했습니다. 





1925년에 세워진 경성역과 남산 조선신궁, 그리고 남쪽으로는 일본군영으로 둘러싼 지역이 답사로 돌아보았던 후암동, 갈월동 일대입니다. 이 동네의 중심이 되는 도로인 삼판통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남아있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 언덕배기에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은행 사택이 이 지역에 있었는데, 최신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한 대규모 주택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삼판소학교와 용산중학교 등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인 거주지는 향후 한남동, 청파동으로 이어졌으며, 강 건너 일본 민간업자들이 개발한 흑석동, 주택 영단등이 대규모로 개발했던 상도동, 대방동 등지까지 확대되어 영등포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한인 거주지는 종로를 따라 동대문 바깥으로 계속 이어졌는데요. 일인과 한인의 거주지가 분리되면서 종로 북쪽 지역에는 한옥형 주택이 많고, 남쪽지역에는 개량형 주택이 많이 남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주택은 어떤 유형이 있는 지 알아볼까요?

1. 양식 주택- 2층의 벽돌 구조로 지어진 서양식 구조의 주택. 접객공간인 홀, 응접실, 식당, 오락실 등이 1층에 있고 침실이나 서재 등 사적 공간은 2층에 두었다. 내부 복도가 있는 겹집 형식을 가졌으며, 내부와 외부공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베란다, 벽난로나 라디에이터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화기에 인천에 지어진 다수의 서양인 주택을 비롯하여 서울에는 옥인동 윤덕영 별장, 운현궁 양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 한양 절충식 주택- 선교사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양식. 벽돌조의 서양식 내부공간과 한식 목구조 지붕과 기와, 온돌 등 전통식 방법이 절충된 주택이다. 대구 선교사 주택, 청주 선교사 주택 등.

3. 일본식 주택- 다다미가 깔린 방과 부엌, 욕실,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본토에서 수입된 전통 일본식 가옥과 중복도를 놓고 접객공간을 주요하게 배치하며, 서양식 혹은 한옥의 요소를 빌어온 개량식 일본 가옥으로 나뉘어진다.

4. 개량 한옥(근대한옥)-전통적인 한옥과 달리 서양식 응접실이나 주방 등이 내부에서 연결되어 불편함을 줄인 형태. 사랑채와 건넌방이 복도로 연결되기도 하고, 욕실 변소 등이 내부에 설치되는 등 기존 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현관이 등장하고 유리문이 사용되었다.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한옥을 개량한 도시형 한옥도 등장했다.


5. 문화주택- 1920년대에 접객 위주의 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의 생활을 중심으로 주거 공간을 형성하고, 좌식생활에서 입식생활로 전환하는 등 가족의 문화를 담는 형태로서 주택을 새롭게 정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서구적 외관의 2층 구조의 벽돌조, 수도설비와 온돌 등 시스템이 가미된 주택이 등장했다. 집을 지을 때 건축가가 주요 등장인물로 거론된 것도 이때부터다.


6. 공동주택-1930년대 후반, 병참기지화 정책 이후 도시로 대거 인구가 유입되어 주택 부족현상이 심화된다. 조선주택영단이 설립되어 대규모 단지를 개발하여 평형과 타입별로 정형화한 연립주택을 설치했다. 상도동, 문래동, 번대방동 등에 이러한 연립주택이 등장.








 

 



 

 




후암동을 돌아보면서 숨이 가빴습니다. 1920년대부터 역사의 굴곡진 면을 모두 간직한 듯, 다양한 시점과 사건을 반영한 건축물들은 연대를 따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생명을 가진 유기체처럼 활동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몇 십년 전에서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동네 풍경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덧붙이고 새로 만들고 바꾸어 온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죠. 그 속에 사는 개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온 풍경의 총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몇 가지 1930년이라는 시간을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곳은 온갖 시간대의 온갖 사건들이 만들어낸 온갖 풍경의 집합체. 그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삼판동에 세워졌던 조선은행 사택 중 한채입니다.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물은 30년대에 활발하게 건축되었는데, 10년이나 일찍 신공법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2층 건물이었죠.









복잡한 시간의 층위를 들락날락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깜짝감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지금이 아닌 먼 곳, 다른 시간대로 여행을 다녀온 듯, 나의 발걸음은 허공에 있었나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용산중학교 학생들과 시장보러 나온 동네 주민들과 길을 잃고 헤매는 답사팀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1930년대는 일본군영이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미군이 차지하고 있는 용산의 언저리를 돌아나와 답사를 시작했던 서울역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길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답사를 지도하신 안창모 교수님의 말씀대로, 건축물은 그 흔적이 사라지거나 변하면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 수 있지만, 길이란 것, 골목이란 것은, 오히려 그 어떤 것보다도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 도로, 골목은, 바로 몇 해 전에 도로계획으로 뻥 뚫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조선시대 600년을 걸쳐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이 이어집니다.


문득 길고긴 역사가 흘러가는 길 속에 내가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이 뚜렷해집니다. 내 삶도, 당신의 삶도, 도시 속의 길 그곳에 엮여 있는 까닭이겠지요. 우리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뜻하겠지요.








더 읽어볼 책>


식민지 시대 경성의 변화과정과 계획은 <지배와 공간-식민지 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김백영/ 문학과 지성사>에 잘 나와있지만,
다소 볼륨이 부담된다.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염복규/살림>도 있다.
근현대 주택을 유형별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은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임창복 / 돌배개>다. 근대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개인이 살고 있는 주택이기 때문에 내부를 관람할 수 없는 문화재 건축물들을 도면, 사진 등 사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유형에는 속하지 않으나 도시 경성의 하층을 형성하던 주택형태로 토막집이 있다. 판자집의 식민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토막집, 문화주택의 허와 실 등 경성 주택문화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경성리포트/ 예지숙, 최병택 / 시공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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