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동, 도시의 폐허



폐허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몇 달 전 다녀온 현저동이라는 동네입니다. 




얼마전, 박완서 선생의 소설들을 읽다가 현저동이라는 지명을 발견했습니다. <엄마의 말뚝>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선생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는 어김없이 현저동이 등장합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장소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현저동에서 살았을 때, 돈암동에서 살았을 때, 그리고 명동으로 일하러 다닐때의 풍경은, 그 삶의 연결성에 비해 그 모습이 확연히 달랐나 봅니다. 


선생은 각각의 장소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개성 근처의 시골마을에서 살가운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처음 서울로 와서 머물게 된 현저동은 어린 소녀의 눈에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가 봅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은 어수룩했고 악다구니를 하면서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 달동네마을이었지요. 선생은 현저동을 '좁다란 초가가 켜켜이 들어선, 도시빈민층이 살던 달동네'라 표현했습니다. 


선생의 가족은 처음 몸을 뉘었던 좁은 집에서 벗어나 좀더 언덕 위에 있던 6칸짜리 기와집으로 옮겨갑니다. 집과 집 사이 남은 자투리땅에 세워 축대가 높고 마당이 삼각형으로 나있던 집을 천오백원에 사서 왔지요. 축대 아래 집 지붕쪽으로 마당을 내어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며 괴불마당집이라 불렀지요. 남루하고 소란한 와중에도 그 시절의 기억이 무척 아름다운지 선생은 괴불마당집의 기억을 아름답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박완서가 처음으로 외었던 집주소, 현저동 46-418번지. 



나는 그곳이 어딘지 궁금했습니다. 현저동을 찾아보니 서대문형무소 공원을 넘어 서울과학고등학교 주변으로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주소명이 '산 00 번지로 되어있는 이곳. 하지만, 좀더 찾아보니 당시의 현저동과 지금의 현저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의 현저동 맞은편 무악동도 현저동의 일원이었다가 행정개편되면서 현저동과 무악동으로 나뉘었습니다. 


선생의 주소지는 지금은 없는 번지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이상하지요. 지도 검색을 해보면 이 두 지역 모두 재개발예정지라 표시되어있었습니다. 이미 여러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듯 좁은 사각형 모양의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있습니다. 


현저동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서대문 전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무악동 방향으로 갑니다. 아직 무악동에 이르려면 거리가 남았는데 이미 많은 폐허들이 보입니다. 돈의문 주변 재개발 예정지였습니다. 빈 집, 빈 거리는 도시의 벙커처럼 침묵 속에 존재합니다. 독립문을 지나서 언덕으로 꺾어 올라갑니다. 몹시도 경사가 진 도로를 자동차가 잘도 올라갑니다. 이제 내려서 걸어보기로 합니다. 


재개발 예정지여서 많이 파헤쳐진 것은 아닐가 했는데, 무악동은 아직 재개발의 여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사를 따라 켜켜이 들어선 집들에서 알콩달콩한 삶들이 보입니다. 이 언덕길 너머로 등산로가 이어져있나 봅니다. 얼마가지 않아 마치, 몽마르트르 언덕길 같은 계단 앞에서 '한양 도성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발견했습니다. 무악동 인근 산책로를 표시한 표지판도 나옵니다. 종로구에서 만든 동네 골목길 관광지도 무악동 코스가 바로 이길과 이어지나 봅니다. (참고로 동네 골목길 관광코스는 알찬 정보가 담겨있으니 답사여행을 하시려는 분들은 꼭 참고하세요.)













올망졸망하게 연결된 경사로의 집들이나 소소한 동네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경사를 거의 내려왔다 싶었는데, 골목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오래된 한옥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습니다. 한옥들은 살림집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식당으로 쓰기도 하는데, 좁은 골목길로 연결되어 운치가 있습니다. 도시형 개량한옥입니다. 192-40년대에 많이 지어졌지요. 
























골목을 따라 걸어갈수록 미로를 거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지역은 모텔, 여인숙이 즐비합니다. 과거에도 이 지역은 음식점과 유흥업소 유곽이 있었겠지요. 무악동 일대에는 노후된 주택지들이 다수 보였습니다. 그때그때 맞춰서 길을 낸듯, 계단으로 연결된 좁은 골목길도 있었고, 그 좁은 길을 따라 집들이 촘촘합니다. 오래된 집과 그나마 최근에 지어진 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추고 있기도 합니다.























무악동을 한바퀴 돌고 현저동으로 향합니다. 서대문역사공원 뒤쪽으로 동네가 보입니다. 대로를 건너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을 보니 인왕산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왕산을 마주보는 동네군요. 현저동은. 




동네로 점점 가까이갈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꽃분홍 잎사귀도 보이고 초록빛으로 너울거리지만 왠지 회색빛 집들이 생동감을 잃은 듯 보였습니다. 현저동은 이미 재개발이 시작된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발이 멈추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낡고 퇴색한 빈 집들이 입을 벌리고 나자빠진 모양새였습니다. 사람이 살았다면 이렇게 흉물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저 오래된 집들에서 얼마나 많은 달콤한 삶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남기고 간 살림살이의 흔적이 왠지 가슴에 남습니다. 미쳐 가지가지 못한 것들, 기탄없이 털어버리고 간 오래된 것들이 뒤섞여 잉잉거리는 것 같습니다.


큰 골목 가의 몇몇 집들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골목에는 조합과 재개발업체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담은 메시지들이 바람따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길을 걷고 있었지만 고요하기 짝이 없는 동네는 이미 삶을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현저동의 풍경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책에서 전쟁을 맞은 서울의 풍경을 서술하면서 폐허의 곳곳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폐허는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 도시 곳곳에 이런 폐허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전쟁 때는 공습으로 살던 집을 잃고, 지금은 대기업의 포크래인 아래서 살던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이 적층되지 않고 계속 부서지고 무너지는 상황을 볼 때마다 우리는 폐허를 힘겹게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고 풀이 자라고 초록이 일렁입니다. 희고 작은 꽃들이 회색의 폐허를 덮어줍니다.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꽃과 풀들은 회색의 틈을 메우며 삶을 잃은 집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도 위로를 받습니다. 괴불마당집에 일렁이는 꽃들도 이랬겠지요. 

녹진한 삶을 위로하며 그렇게 피어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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