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영사관, [《韓國風俗人物史跡名勝寫眞帖》 (발행연도미상)에 수록]



예전에 벨기에 영사관 자료를 찾다가 이 사진을 발견하고 좀 놀랐다. 아무리 봐도 현재의 벨기에 영사관과는 형태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이 건축물을 3D 형태로 재현했던 건축가 구원씨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측 도면으로 3D 작업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건물 외관을 샅샅이 봤는데, 이 건물은 아냐. 단언컨대."


이 사진에 벨기에 영사관이라고 붙은 이유가 무엇일까? 

벨기에 영사관이 아니라면 이 건물은 어떤 건물일까?




벨기에 영사관을 살펴보자.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해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든다.

이 건물은 참 아름답다. 술과 장미의 나날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건축물은 이탈리아 도처에 있는 오래된 건물과도 닮은 건물이다. 이오니아식 기둥과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베란다같은 회랑 공간을 보면 지중해의 바람을 맞으러 나온 귀부인들의 엷은 드레스 자락 같은 게 느껴진다.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가듯이 건축물을 샅샅이 비교해본다. 위의 자료사진이 오래되어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일층과 이층의 재료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출입구 부분이 돌출되어 있는 점이나 창문의 특징도 다르다. 자료사진은 삼각형 이마가 올라가 있는 신고전양식의 창문이다. 그에 비하면 벨기에 영사관은 일자형으로 되어있다. 규모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 사진이 벨기에 영사관으로 여전히 통용되고 있을까?




한때 의문을 가졌다가 잊어버린 이 사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서울사진축제>에서다. 아카이빙 사진들로 서울의 시대사를 펼쳐보이는 전시였기에 수많은 옛 건물 사진이 등장했는데, '벨기에 영사관'이라는 설명이 붙은 채 이 사진이 걸려있었다. 원출처가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저작권이 말소된 사진으로 여기저기 통용되고 있다. 한때, 정동 지역 근대 컨텐츠를 구성하던 여러 연구자들의 자료에서도 이 사진이 인용되어 있었다. 《韓國風俗人物史跡名勝寫眞帖》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는 자료다. 사진집으로 구성된 이 책에 위의 사진이 실려있음은 다행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벨기에 영사관이라는 설명은 전혀 붙어있지 않다. 원본을 본 것이 아니라 온라인 서비스로 제공되는 전체 페이지를 본 것임으로 설명이 부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건물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건물을 혼동할 리가 없다. 어쩌면 역사 연구자와 건축 연구자가 서로 교류하지 않기 떄문에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한번 만들어 공표된 자료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참 복잡한 일이다. 









옛 벨기에 영사관 내부 모습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젊은 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이 건물은 생활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 바뀐 후에는 가보지 못했으나, 건물의 아기자기함이 잘 묻어나는 전시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옛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점에 위치하려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아름다운 공간의 창문을 활짝 열고 로지아를 넘나들며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햇볕이 스며들어 따뜻하게 데워진 공간을 보면 참 좋겠다고. 



그리고 저 넓은 홀 어딘가에서 은근한 커피향과 홍차 향이 풍겨나도 좋겠다고. 식기가 부딪혀 나직하게 좋은 소리가 날때, 그럴 때, 이 건물이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위 자료 사진 속 건물은 무엇일까?  서울시청(경성부청)의 옛 자료를 찾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돌출된 출입구, 일이층의 재료도 차이가 있으며 창문의 모양, 그리고 측면의 볼륨이 사진과 유사하다. 비교해보자.







옛 경성부청사.



경성부청이 현재 서울시청(서울도서관) 자리로 옮겨온 것은 1925년의 일로, 그 전에는 그 자리에는 경성일보사 건물이 있었으며, 경성부청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경성일보사는 부청에 자리를 양보하고 건물을 허물고서는 바로 옆으로 옮겼고 총독부 산하의 신문들을 펴냈다. 지금의 프레스센터가 그 위치에 있다.  










  • 통감부 이사청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였다. 그 3조에는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일본정부의 대표로 통감(統監)을 두고, 개항장 및 필요한 곳에 통감의 지휘 하에 기존 영사의 권한을 행사하며 협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2월 20일에 일본칙령 267호로 <통감부 및 이사관 관제(統監府及理事官官制)>가 공포되었고, 주한 일본공사관이 1906년 1월 31일자로 폐쇄되었으며, 1906년 2월 1일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이사청(理事廳)은 원래 일본영사관 또는 분관이 설치되었던, 한성,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목포, 마산 등 7개소에 설치되기로 하였으나, 1906년 1월 19일에 군산, 평양, 성진 등 3곳이 추가된 총 10개소의 이사청의 설치가 공포되었다. 이어서 1906년 8월 17일에는 대구이사청, 11월 17일에 신의주이사청, 1907년 12월 10일에 청진이사청 등 3개소가 추가되어 총 13개 이사청이 지방에 설치되었다. 이사청이 설치되었던 도시들은 개항장·개시장 등으로 일본인 거류지(居留地)가 있던 곳들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는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있던 지역이 ‘부(府)’로 지정되면서 이사청의 업무는 부청으로 이관되었으며, 대부분의 이사청 청사도 부청 청사로 전환되었다.

    (국가기록원 일제시기 건축도면 컬렉션의 이사청과 관련된 내용 중 발췌)
















  • 京城府(경성부)청사의 건축
  • 원래 일본영사관은 주자동 6번지에 있었는데 그곳이 협소해 1896년 오늘날의 충무로1가 입구에 새 영사관을 세웠다. 그리고 영사관은 1906년 京城理事廳(경성이사청)이 되었으며 府制(부제)가 실시되면서 그대로 경성부청으로 쓰였다. 총독초기 경성부 직원의 수가 새로운 세제의 시행으로 과세ㆍ징세ㆍ체납처분 등 재무관계 사무가 격증한면서 급증하자 1916년 최초로 청사신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그 후 재정 형편상 진전없다가 1923년 1월 부청사를 부의 재원으로 신축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당시 거론되었던 위치는 ① 당시 부청사 위치(충정로 1가 52ㆍ53번지) ② 황실소유의 정자인 大觀亭(소공동 6번지) ③ 남대문소학교(남대문로 4가 45) ④ 경성일보사 위치(태평로 1가 54) ⑤ 경성일보사 뒤편 국유지(태평로1가 31) 다섯 곳이었다. 1923년 2월 경성일보사 사옥을 철거하고 신축 이전비를 지급하고 경성일보사는 뒷자리인 국유지로 물러앉는 조건으로 새청사 부지가 확정되어 1924년 11월 공사가 착공되어 1926년 10월에 완공되어 낙성식을 가졌다. 이로써 연건평 2,502평의 6층 건물이 부청사가 신축되었다.




(서울시 중구청 홈페이지 내용 중 발췌  http://www.junggu.seoul.kr/web/w05/w05030604.php)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뭔가를 찾았다. 일본영사관->이사청->부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건물들. 


벨기에 영사관이라고 잘못 이름붙여졌던 사진(건물)의 원래 이름은 경성부청이며 그 이전에는 경성이사청었고, 원래는 1896년 무렵 세워진 일본영사관이었다. 



  




경성부청 신청사가 건립되기 이전(1925년 이전)의 경성시가 풍경. 



아랫쪽 왼쪽에서 세번째 2층 건물이 이사청 건물이다.  첫 자료사진과 비교하면 건물 주변으로 서양식 건물이 다수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의 사진은 충무로, 을지로 일대가 정비되기 전의 기록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1906년 이사청은 부족한 설비를 보충하기 위해 옆에 단층짜리 부속 건물을 지었다. 첫번째 자료에 보면, 건물 왼쪽으로 단층 건물이 약간 보인다. 그러므로 1906년 이후, 이사청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위치로 보면 일본영사관과 벨기에 영사관은 같은 시기에 회현동 일대에 있었는데, 벨기에 영사관이 좀더 뒷쪽으로, 남산에 가까운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회현동 우리은행 자리다. 


벨기에 영사관은 1903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했으나,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주권을 빼앗긴 상태로 업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일합병조약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국의 영사관들이 속속 본국으로 돌아갔다. 벨기에 영사관도 건물을 팔았다. 이 건물은 일본의 보험회사와 해군성에서 사용한 바 있으며 적산으로 분류되어 해군 등에서 사용하다가 1953년에 상업은행이 불하받았다. 


큰 건물을 짓게 되면서 옛 건물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남현동 자리에 이축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1984년의 일이었다. 지금은 빈번하게 이축되곤 하지만 당시에는 문화재 복원기술이 지금에 미치지 못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석재 한장 한장, 목재 하나하나를 모두 해체해서 정교하게 재조립했으나 벽난로와 굴뚝이 서로 이어지지 않아 난로를 피울 수 없게 된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당시 현장감독이 얼마나 진땀을 흘렸을 지 짐작이 간다. 



건물의 연혁을 따지다보면, 당시의 역사가 그물처럼 짜여지고 펼쳐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수수께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시의 역사가 정교하게 맞물려 살아숨쉬는 인물과 사건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듬성듬성 구멍난 부분이 여전히 많다. 


사진이나 자료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당시 사람들의 심리와 내면의 풍경을 읽는 일까지, 여전히 그 시대는 비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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