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관으로 운영하던 수덕여관. 문화재가 되어버린 지금은 썰렁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가 갈 길은 어떠해야 할까?









지난 11월 어느날 트윗에서 이응노 생가 기념관 오픈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 조성룡 씨가 설계한 건물이 충남 홍성에 세워진단다. 다소 의아하기는 했다. 대전에 이미 보도엥이라는 프랑스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이응로 미술관이 있고 전시회도 자주 열리기 때문이다. 원래 이응노 미술관은 서울 평창동에 있었는데 문을 닫고, 대전에 크게 미술관을 지으면서 각종 컬렉션들이 이동해왔다. 미술관 오픈 당시 취재를 갔었는데, 이응노 선생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그토록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기쁨이 무척 컸다.

그리고 선생이 태어난 충남 홍성에 세워지는 생가 기념관. 반가운 마음 한켠에 의아함도 있다. 왜 이응노일까. 대중들에게 이응노 선생의 그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 기념관을 세우는 걸까.

오픈 당시는 가보지 못했지만 지난 연말에 이곳을 방문했다. 꼬불꼬불한 시골도로를 달려가다가 언덕을 돌아서니 갑자기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다. 논과 밭이 펼쳐지고 마을은 산자락까지 들어가야 나올법한 훤하고 너른 시골마을. 그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장식 없는 입방체가 툭툭 던져진 듯하다.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건물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눈은 가득 쌓인데다 날이 날이니만큼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기념관은 조용했다. 도로 주변에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이 푹푹 빠질만큼의 눈을 헤치고 걸었다. 어떤 기능을 하는 장소일지, 내부는 어떠할지, 이 장소는 호기심이 일었다.


고암 이응노는 화가다. 1904년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화가로 활동했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한국적 색채를 널리 알렸다. 선생은 우리 문자를 이용한 문자추상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문자가 가진 기가 막힌 조형성이 캔버스에 파묻힌다. 글자인 것도 같고 그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암 선생의 일대기에서
동백림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건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1960년대 남북냉전기에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고초를 치뤘다. 고암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에서 1969년까지 옥고를 치뤘고, 1970년대에 또한번 사건에 휘말려 국내 활동이 금지되었던, 안타까운 개인사의 소유자다.

예술가에게는 어떤 시련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이 내재된 것인지, 고암은 출옥후 선으로 표현된 인간 군상의 뜨거운 혈기를 추상화로 표현한 군상 시리즈로 새로운 화풍을 전개한다. 고암의 흔적은 프랑스에 더 진하게 남아있다. 선생은 1989년에 작고하여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렇듯 어두운 시대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상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펼쳤으며, 시대의 아픔과 시대의 수훈을 골고루 누렸다. 그리고 고국 땅에는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카페,아트숍 등의 용도로 쓰는 작은 동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기념관 입구.

 

 

큐브 덩어리 건물 내부는 이렇게 복도로 이어져있다. 어둡고 밝은 공간의 콘트라스트가 퍽 기분 좋다.

 

 


선생이 쓰던 유품들이다. 물감과 붓, 그리고 엽서와 전시회 방명록들. 생전에 썼던 물건은 아우라를 가진듯하다.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좋은 풍경을 보고 즉석에서 그린 그림 엽서와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엽서와 편지.

우리가 평생 간직하게 될 물건은 무엇일까? 품고 있던 편지나 사진은 있기나 한걸까? 나의 유품으로 나를 설명해주는 물건들을 무엇일까? 책이나 노트 같은 것?


 



여러개로 나뉜 전시관은 크지 않지만 소품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대전 미술관이 작품을 충실히 보여주는 넓은 공간으로 구성된다면 이곳은 화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 작은 공간들과 길(복도)로 이루어져있다.



 

전시장을 한바퀴 돌면 다시 매표소쪽으로 나온다. 동선이 명쾌하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1층 정도 높이로 올라간 모양이다.



 



생가 기념관이 있다면 생가도 있어야 할 터. 기념관 옆 부지에 방 두개와 부엌, 마루로 연결되는 4칸짜리 'ㅡ'자 형 초가와 헛간채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도 없어서 완벽한 복원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따뜻한 햇살이 담뿍 들어오는 마루는 잠시 앉아 생각에 잠길 정도의 여유를 준다. 존재의 이유가 알쏭달쏭한 건물들임에도 무언가 기분좋은 것이 있다. 누군가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 그런 행위를 할 장소가 정말로 필요했던가보다. 그것이 고암선생의 족적이어도 좋을 것이고, 내 속에 있는 그 누군가를 생각해보는 장소여도 좋을 것이다.

너른 연못은 동장군을 이기지못하고 꽁꽁 얼었고 눈이 쌓였다. 따뜻한 봄날에는 물이 놓고 연꽃이 만발할 것이다. 너른 뜰이 푸르게 변하면 건물도 덩달아 푸르러질 것이다. 기분 좋은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조용한 마을에 들어선 아담하고 보기 좋은 공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있는 홍성과 멀지 않은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이곳이었다. 수덕여관은 수덕사 일주문 주변에 있다. 고암 선생이 옥고를 치른 후 몸을 추스렸던 장소. 고암 선생의 첫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하던 여관이다.

수덕여관을 처음 구경했던 게 10년 전. 남편과의 연애시절이다. 날 좋은 봄에 덕산온천에 왔다가 수덕사에 올라갔다. 그때는 그저 봄바람이 좋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속닥속닥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수덕사를 돌아 내려오면서 수덕여관에 들렀다. 그때도 여관은 붐볐다. 그때 여관이 문을 열고 영업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저 문패가 달린 문을 드나들며 수덕여관의 정취를 맛보았다.








수덕여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간다. 예술가 나혜석을 필두로 많은 문사들이 여관에 머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나혜석이 이혼의 상흔을 달래기 위해 친구인 일엽스님을 만나러 온 곳이 수덕여관이다. 비구니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나혜석은 3년간을 수덕여관에 머물며 글을 쓰며 자신을 달랬다. <이혼고백장>을 쓴 곳이 수덕여관이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칼날이 되어 나혜석의 가슴을 찔렀지만 마음 속의 것을 내려놓으며 온전히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찾아간 곳이 이곳이 아니었나 싶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때 이응노가 선배화가인 그녀를 찾아왔다. 나혜석은 파리를 절대적으로 그리워했다. 예술의 모든 것이 숨쉬는 파리에 대한 꿈은 이응노에게 전해졌다. 이응노는 1944년에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인 박 여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1956년에 파리로 떠났다. 옥고를 치른 이응노가 잠시 쉬어가긴 했지만 50년 동안 여관을 일구며 여관에서 살아온 사람은 선생의 부인인 박귀희 여사다.

여사는 2001년 돌아가실 때까지 50년간 여관을 운영했다. 수덕여관은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면 머물다가는 곳이었다. 요령부득의 아이들을 상대하며 여사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았을까. 여사는 고왔을까, 강했을까, 까다로웠을까, 무뎠을까, 아름다웠을까.







10년전에도, 다시 찾은 지금에도 남편은 소리지른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와서 여기서 잤었는데. 어떤 방인지 기억이 안난다.

발코니같은 나무 기둥을 타고 이방저방 돌아다녔던 건 기억나."


기억은 참으로 오래 간다. 잠깐의 즐거웠던 것도, 잠깐의 놀라움과 슬픔도, 잠깐 동안 했던 거짓말도 오랫동안 감춰져있다가 어느 순간 툭 터져 나온다. 어떤 공간에 서면, 옛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어떤 장소에 있으면, 기억은 더 농밀해진다.



 


여사가 돌아가시고 여관은 문을 닫았다. 잡풀이 자라고 종이문이 뜯겨나가 폐허가 된 듯했다. 고암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단장을 하자는 의견을 모아 2007년에 여관을 복원했다. 지금 여관을 구경하면 70년이 넘는 정감이나 정서를 읽어낼 수가 없다. 해체복원을 하면서 대부분의 자재를 폐기했고 모두 새 재료를 사용한 까닭이다.

복원할 때의 웃지못할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한옥자재를 모두 털어냈더니 새로 쓸 수 있는 자재가 별로 없었단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새 재료를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공자 측 이야기를 관련 전문가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초기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인부들이 무조건 해체를 시도한 결과, 벽 등에 숨겨져있던 고암의 습작들이 대거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종이겠거니 하고 폐기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복원한 건물은 계절마다 습기와 벌레의 싸움에 지친다. 옛날 방식을 그대로 수용한 재료가 아니기에 비가 오면 나무가 썪고 곰팡이가 생기며 초가에는 잡초가 자란다. 한옥이되 한옥이 아니며 문화재이되 문화재가 아닌, 기묘한 상황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사람손이 지속적으로 닿지 않는 박제된 공간이 갖는 한계점이리라.


고암이 거쳐한 방은 문패가 붙어있으나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8개의 방을 터서 3개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모든 방문이 잠겨있었지만 날이 좋을 때나 특별한 날에는 방안에서 차를 나누는 기념공간으로 활용되는 모양이다. 마당 중간에 솟아있는 굴뚝은 방이 많은 여관의 구들을 모두 데우기 위한 굴뚝이다. 항아리를 덮어놓은 것이 재미있다. 한때 여관이 폐허가되었을 때 이 굴뚝을 타고 담쟁이가 기둥처럼 자라있었다고 한다.



'ㄷ'자 형으로 구성된 한옥이다.






인물을, 사건을,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란 어떠해야 옳을까? 암중모색이라지만, 그 공간은 '기억', 집단의 기억이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설명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재 건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며 솔루션을 찾아보면 좋겠다.




 

 이응노 선생이 직접 바위에 새긴 암각화 두 점이 수덕여관 앞에 있다. 옥고를 치른 후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릴 때, 끓어오르는 표현의 의지를 이렇게 드러냈던 것이다.  바위에 새겨진 상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뎌지고 흐릿해진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음이다. 그러나, 왠지 공감이 간다. 인생이란, 사람이란 이렇게 세월에 따라 흐릿해지고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그저 '족적을 남겼다'는 것으로 존재를 알 수 있으면 그뿐.

그 열정에 공감하고 감동한다면 그뿐.















찾아가는 길

이응노 생가 기념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로 61-7번지 
041-630-9232 
매주 월요일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이면 화요일 휴관, 1월 1일, 설날, 추석 휴관)
관람시간- 09:00~18:00(동절기 09:00~17:00)
관람요금-성인 1000원/어린이 청소년 500원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진입로 입구에 주차후 일주문까지 도보 15분.
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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