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은 우리 삶의 바탕화면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대화하듯 독백하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문득, 그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 건축은 예술이 되고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건축물이,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를, 아니면 내가 그 존재를 확인하려 다가가야하는 순간을. 


나는 대학로를 좋아한다. 서울에 처음 온 그날도 대학로를 가장 먼저 가고자 했다. 대학로 언저리의 학교에서 입사시험을 보았고 대학로 언저리에서 지금 남편이 된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고 대학로 언저리에 있는 회사를 다녔으며 대학로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로의 한 다방을 몹시도 좋아하며 대학로의 한 서점을 또 좋아하며, 대학로의 영화관을 좋아한다. 대학로의 오래된 건물을 좋아한다. 붉은 건물이 군집된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 높지 않은 건물들이 내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어수선할 때도 많지만 차가 사람을 배려한다. 







                                                  





















그 어느날 바라본 대학로의 건물 하나는 뜯어볼수록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학로 문예극장의 붉은 벽돌은 시간에 따라 햇살의 농도와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늘려 공간의 깊이를 조였다 풀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벽돌이 만든 레이어는 별다른 장식도 아니거늘 건물의 외부를 변화무쌍하게 컨트롤한다. 날씬한 펜슬 스커트에 슬쩍 그어놓은 슬릿처럼 딴딴한 벽돌벽도 슬쩍 갈라졌다. 스커트처럼 바람에 나폴거리지 않더라도 보여줄 듯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긴 틈이 시선을 잡는다. 








건물의 측면은 이렇듯 벽돌 장식이다. 조분조분한 나무 그림자 아래에 마치 점자처럼 솟아오른 작은 엠보스.

유쾌한 기분이 든다. 







                                       

  창도 장식도 없는 건물의 뒷모습은 큐브를 조각조각 맞춘 듯한다. 매스를 분절하고 뒤틀고 붙여서 완성된 외부, 내부는 공연장과 입구 홀이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의 입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우리라. 우리는 매끈한 유선형을 미래형이라며 반기는 중이거나 저렴하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건물들을 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토록 다이나믹한 입면을 가진 건물을 다시금 보고 싶다. 










                              






                    







문예회관 바로 옆의 아르코미술관. 이 역시 벽돌로 이룩한 한편의 시다. 비례감이 좋은 창 주변의 벽돌로 쌓은 레이어들은 입체감이라는 미묘한 언어로 건물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저 매시브한 건물인데 단순하지 않고 볼수록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보게 되는 건물 중 10퍼센트만이라도 보는 재미를 주는 건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걷고 싶은 거리는, 잘 지어진 건축물과도 관련이 있다.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 미술관

 




오래되고 고즈넉한 거리, 연속적으로 늘어선 붉은 벽돌 건물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길거리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소극장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그리고 대학병원. 대학로의 풍경이다. 북적이고 소란스럽지만 한편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곳. 서울대 캠퍼스가 이곳을 떠난 지 30년도 더 흘렀지만 대학가의 열기는 여전히 대학로의 공기 속에 떠돈다.


대학로 하면 마로니에 공원과 더불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르코 예술극장(1981년 완공)과 아르코 미술관(1979년 완공) 두 개의 건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두 건물은 대학로의 풍경과 분위기를 형성하는 구심점이자 이 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김수근의 주요작품이기도 하다.


1925년부터 경성제국대학이, 광복 후에는 서울대 캠퍼스가 자리잡았던 대학로. 서울대가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난 1970년대, 대학로는 아파트 단지로 바뀔뻔했다. 다행히도 학교 건물을 역사적 기념물로 남기자는 서울대 측의 의지와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자는 문화예술계의 요청을 서울시가 받아들여 공연장과 소극장, 미술관과 갤러리가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대학로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이 장소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바꾸자고 주장했던 인물 중에 건축가 김수근이 있었다.


김수근이기에 그의 건축물은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을 정도로 건축계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은 대단하다. 건축을 예술의 분야로 확장하여 다양한 소통의 현장을 진행했으며 건축의 미학적 해법과 철학, 기술까지 다채롭게 실험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근은 붉은 벽돌을 조형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건물을 많이 남겼다.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벽돌이야말로 건축의 장인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재료다. 김수근은 진부하고 하찮게 여겼던 벽돌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미학적 완성도를 가진 건축재료로 격상시켰다. 대학로에 유난히 붉은 건물이 많은 것도 그의 건축언어가 지닌 파급력 때문이라 할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르코 예술극장(전 문예회관)과 미술관(전 미술회관)은 거리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인 장소이자 풍경 속에 어우러지는 한편의 시 같은 건물이다. 수많은 공연과 전시를 통해 배출한 예술가들이 남긴 숱한 이야기들도 이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겠지만 단순히 건축이 가진 아름다움만으로도 이 건축물은 의미가 있다.


단단하고 엄격한 성격을 가진 벽돌 입방체들이 자유롭게 조립된다. 외부는 쪼개지고 내부는 길게 연결되는 미묘한 공간이 펼쳐진다. 정면과 배면, 측면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입면이 다채롭기에 길에서 보면 움직일 때마다 건물의 형체가 계속 변화한다. 입방체를 조합하여 하나의 조각 작품을 만든 것 같다. 벽은 어떤가? 엄격하게 지정된 자리의 벽돌을 돌출시켜 비어있는 벽면마다 무늬가 드러난다. 엄격하게 잘려진 입면은 빛을 받아 날카롭고 세련된 그림자를 만든다. 건물은 한 장의 추상화가 된다.


조각이며, 그림이며, 또한 시가 되는 건축. 그 위로 시간의 흔적이 내려 앉으며 붉은 벽돌의 색이 더욱 깊어졌다. 이 웅장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의 배경이 되어준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벅차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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