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쾌대 씨 




그림과 음악과 문학. 그 사이에서 “예술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이 낡은 질문을 늘 새로운 대답을 요구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예술은 작은 역사라고. 격랑의 시대에 파묻힌 개인의 기록이며,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남루한 시대조차도 빛나게 끌어올려진다고. 낯선 화가 이쾌대가 찾아왔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안녕하시오, 여러분. 









낯선 이름, 이쾌대

이쾌대. 한번 들으면 결코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처음에, 그는 낯선 이름으로 멀찍이 서있었다. 두 번째로 이쾌대라는 화가를 보게 된 것은 그의 작품 <카드놀이하는 부부>에서 묘한 도발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초록색 저고리를 입고 쪽을 진 전통적인 여인을 보라. 아내는 남편과 함께 카드놀이에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부드러운 쾌남 스타일의 남편의 표정과 달리 아내는 새초롬한 표정이다. 


“당신 때문에 게임을 계속 못하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방해할 건가요?” 


아내는 이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이 아내,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무심하듯 시크하다고 할까? 모두 일곱장의 카드를 들고 있고 테이블에는 여러 장의 카드가 펼쳐져있다. 카드게임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이 게임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나는 도통 모르겠다. 숫자와 그림을 맞춰 하나씩 카드를 버리고 가장 먼저 버리는 사람이 이기는 그런 게임일까? 무엇보다 카드 테이블에 놓인 술병이 시선을 끈다. 병 모양이나 색깔로 봐서 위스키가 아닐까?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즐기면서 카드게임을 하는 아내는 백년 전 여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이쾌대는 감성이 충만했던 휘문고보 시절에 근처에 살던 여학생 유갑봉에 첫눈에 반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를 아내로 맞은 이쾌대는, 그 아내가 너무나 귀하고 어여뻐서 평생 존대할 정도였다. 부부는 사진으로 봐도 무척 닮았다. 심지가 강해보이는 아내는 전쟁 중에 궁핍하던 시절에도 화가가 북으로 간 뒤에도, 화가의 그림을 절대 놓지 않았다. 



너는 내 운명. 이들 부부에게서 느껴지는 단 한마디는 바로 그것이다. 


















<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탐스런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술을 마시며 남편과 카드게임에 열중하는 아내. 

자못 유쾌한 설정은 1930년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상황, 1938> 외세에 대항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힘과 

봉건적인 구습에 저항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두 가지 과제가 예술가들 앞에 놓여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 알레고리로 담겼다. 






시대의 얼굴을 그리다 


세 번째로 이쾌대를 깊이 새기게 된 것은 원주 한솔뮤지엄 개관전에 걸린 석 점의 대형 작품을 본 이후다. 그의 대표작인 <상황>과 <운명>을 보았을 때 이 화가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건 아닌지 불현듯 부끄러워졌다. 1938년에 그려진 이 두 작품은 이쾌대가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전람회 출품을 위해 그린 것들이다. 알레고리화처럼 보이는 <상황>이나 비통한 애도를 표현한 <운명> 모두 강렬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지도 설정할 수도 없었다. 그림에서 풍기는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층의 수수께끼를 담은 그림과 선연한 색채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이쾌대를 만나게 될 시간을 나는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은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두루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바람도 없이 찜통같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림은 서늘했다. 한여름의 열기마저도 차갑게 식히는 결기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인물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화폭에 담긴 인물들의 날카롭고 짙은 눈빛들, 생생한 표정들이 압도적이었다. 미술관의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에 이런 얼굴의 사람과 마주칠 것 같았다. 피가 돌고 살이 뜨거운 저 살아있음. 이것이 식민지 시대 청년들의 얼굴일까? 그 얼굴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첼로를 연주하고 시를 쓰오. 들어보시겠소?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소. 

나도 꿈이 있소. 나는 멋지게 살아갈 것이오.

거긴 안녕하시오? 여긴 뭐 그냥 그렇습니다만. 




이쾌대는 1930년대부터 1950년까지 근현대의 가장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다. 이쾌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보고싶어졌다








이쾌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대 현실 속에서 곧바로 끌어올린 듯 생생함이 묻어난다. 

그들의 표정에서 당대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1930년대 청년의 모습이다. 






혼란한 시대,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유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여유롭고 풍족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족함 없이 자유롭게 성장했다.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도쿄로 가서 제국미술학교(오늘날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에게는 열두살 위의 형님 이여성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이여성은 항일에 뜻을 두고 만주에서 활동했고, 도쿄로 유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섭렵한 지식인이었다. 상하이, 도쿄, 만주 그리고 경성을 오가며 정치와 사상뿐만 아니라 미술과 학술연구에도 심취했다. 

이여성은 1939년 ‘신동아에 실린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말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현실 조선의 과학적 파악자인 예술가-우리의 예술가는 유한자를 위한 사치품의 제조자가 아니오, 민중의 피와 살을 돋우며, 그 감각과 기분을 살리면서 또 생활과 활동을 향도하고 붙들어 주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면 아닐지니 조선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여 그 마음의 소리를 밝게 듣는 예술가가 요구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여성은 민중을 위한 예술을 설파했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었던 큰형의 울타리는 이쾌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조선에서 예술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여전히 이쾌대라는 화가가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전쟁 이후 북쪽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의 족적이 너무나 미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선미술전람회나 미술협회 등 식민지 시대의 관전이나 기관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해방공간에서 그의 흔적은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인 몇 개의 미술협회와 성북회화연구소라는 장소에서 나타난다. 성북회화연구소는 후대 많은 화가, 조각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불과 4년여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해방공간에서 그림을 배울 장소로는 그곳뿐이었다. 







군상 시리즈. 곤궁한 시대에 불어닥친 해방의 바람을 표현했다. 

대형벽화처럼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군상 시리즈는 

이쾌대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에 이르면 선이 편안해지며 

전통적인 붓칠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그림, 누군가의 희망을 보다


이쾌대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을 하나 구했다. 삼선교 부근에 있는 상가건물이었다. 화가의 꿈은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군상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큰 화폭을 다듬은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장소에 예술대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들이닥쳤다. 그림을 그릴 공간과 그림을 배울 선생이 필요했던 학생들에게 이쾌대는 흔쾌히 공간을 허락했다. 어느새 서른명 가까운 학생들이 모였고 그의 화폭을 바라보며 데생을 하고 그림 지도를 받았으며 그의 예술론을 경청했다. 


돈암동에서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겨서 4년 남짓 운영되던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해방공간은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이념을 요구했고 그 어느쪽도 선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쾌대는 머뭇거렸다. 실낱같은 희망이 핏빛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그림을 남겨둔 채로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성북회화연구소도, 그가 심오하게 바라보았던 인물들도 육체들도 봄날의 바람도 이제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 돈암동 458-1번지에 있었다는 그곳은, 지금은 사라진 지번이다. 그곳은 그러므로 사라진 시대의 장소다. 예술은 끊임없이 유전되고 전래되지만 그에 비하면 장소의 생명은 얼마나 짧은가. 



그렇다면 화가가 몰두했던 시대의 얼굴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 시와 음악과 그림과 사람을 말하던 그 얼굴들을 나는 여기, 도처에서 본다. 시청앞 광장에서, 덕수궁에서, 광화문에서, 도로에서, 지하철에서. 이쾌대의 시대처럼, 이 거리의 얼굴들도 간절하고 또 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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