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익숙한 표지판이죠?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새겨진 동판. 






연천, 폐허에서 듣는다



언젠가, 한국전쟁 납북자 명부를 보게 되었다. 이름과 나이, 주소, 그리고 행방불명되거나 납북된 장소, 연도가 명시된 자료였다. 납북자 명단은 여러 차례 작성이 되었는데,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그리고 해마다 진행되었고, 정전 협정 이후에도 한차례 진행되다가 마무리되었다. 친가 외가가 모두 대구 경북인 나로서는 납북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라면서 들은 적이 없다. 간간히 소설이나 자료에서 보았을 때도, 납북이란 공습이나 총살, 전투, 학살 등 전쟁과 관련한 가장 보편적인 단어로만 들렸다. 경험하지 못한 피상적인 단어나 행위로서. 



명부는 손글씨로 담담하게 공식적인 것들만 적혀있었으나, 

나는 그 행간에서 아주 슬픈 뒷모습을 보았다. 



그 누군가는 스무살 대학생이었고, 그 누군가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고, 그 누군가는 병원이나 일터에 있다가 사라졌다. 흰 셔츠를 입은 등을 떠밀리며 당황한 얼굴로 뒤돌아보는 그 얼굴이 마지막이기도 했고 밝게 웃고 집을 나서서는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었다. 고지를 점령하느라 죽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전쟁이었다. 전방에서 전투가 있을 때, 후방에서는 약탈과 악다구니가 있었고, 하늘 높은 곳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공습이 있는가하면, 바닥에선 암시장 밀거래를 하면서 배를 채우던 피란민의 생활도 있었다. 전쟁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고지를 점령하여 국경선을 넓히는 것과 전쟁 후의 정치적 상황에 유리하게 이끄는 게 전쟁의 방식일 테지만, 민간인은 그저 학살당하고, 전사하고, 굶어죽고. 그렇게 죽어가는 게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창래 선생의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 <생존자>에서는 전쟁은 배고픔이었다. 



그 무엇보다 처절했던, 부끄럽고 두려워하면서도 먹어야 했던, 먹을 게 없어서 슬펐고 또 미쳐가는 순간이 소설에 등장한다. 가족의 죽음보다 나의 자존감보다, 그 모든 것보다 우선했던 것은 배고픔. 후방에는 배고파 싸움을 벌였고, 전방에는 배가 고파 싸움을 할 수 없었다. 1951년 겨울, 미군이 압록강을 탈환하고서도 종내 중공군에게 밀려 파죽지세로 내려왔던 이유도, 기세등등하던 중공군이 임진강 전투에서 패퇴했던 것도 배고픔 때문이었다. 보급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식사도, 탄환도 떨어졌으니 싸울 이유도 약해지는 것이었다. 











폭우로 지뢰를 묻은 야산의 흙이 휩쓸렸던가보다. 전쟁 전 채 완공하지 못한 

철도 터널로 가는 중간에 마주친 금지구역 표지판과 지뢰에 대한 경고문. 

조심스레 표지선 바깥으로 빙 둘러 하천쪽으로 내려가니 폭우 이후 철철 넘치는 

물 덕분에 물고기가 펄펄 난다며 한창 물고기 낚는 재미에 빠진 주민들을 발견했다.

"고기 많아요!"라며 그들은 웃었다. 결국 폐 터널을 구경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터널 앞 널찍한 공터에서 양봉을 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 때문이었다. 붕붕 날아다니는 

벌이 지뢰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다. 




유엔군 화장터 건물에서 만난 흰색 장미. 조화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몰랐던 장소를

누군가는기억하고 애도하고 있었던가 보다. 폐허에서 멈칫거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누군가를 잠시 기억하고 또 애도하기 위해서. 





올해가 정전 60주년이다. 두 세대가 지나가는 사이, 아예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전쟁이라고,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데도,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전쟁이란 오로지 단 하나의 것만 가리켰다. 나는 그분들과 다른 관점에서 한국 전쟁을 알고 싶다. 내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소환해보기로 한다. 장소를 찾고, 그 장소에 벌어진 일들을 찾는다. 



연천은 철원을 가기 전에 먼저 들렀던 곳이다. 몇 군데 폐허로 남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연천에서 전쟁을 읽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안내판으로, 경고판으로, 혹은 돌무더기로, 그도 아니면, 허수아비 대신 사용하는 인민군 사격표지판으로 전쟁이 남아 있었다. 연천은 한국전쟁의 큰 획을 긋는 전투가 발발했던 곳이다.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저지했던 임진강 전투가 그것이다. 연천 일대에 구축했던 영연방군 29 보병여단과 중공군의 싸움으로 기록된 설마리 전투는 3일간의 전투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해전술로 밀어부치는 중공군을 저지하여 후방을 지키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죽음으로 되받아친 시간싸움에서 중공군은 세를 잃었다. 서부전선은 죽고 쫓으며 얇디 얇은 국경선을 주거니받거니 했다. 주거니 받거니 사이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영연방에는 벨기에와 아일랜드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역시 봄이 완연한 연천에서 다수 전사했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2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다. 그것은 그많은 많은 군인이 전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투의 중심지에 설마리 전투 전적비가 세워졌다. 영국의 국빈이 방문할 때, 반드시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죽은 자를 거두기 위한 장소도 필요한 법. 




연천에는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 있다. 치열한 싸움 뒤의 처리를 위해 이런 시설도 만들어졌던가 보다. 1952년에 세워진 곳이라는데, 6월초만 해도 마른 풀잎이 듬성듬성하던 언덕배기가 한달 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풀더미에 휩싸였다. 누군가, 이곳을 기억하고 애도하고 간 것처럼 흰색 장미가 한무더기 놓여있다. 조화(造花)이자 조화(弔花)였다. 부서지고 무너져 벽체의 일부와 굴뚝만이 남아있는 이 장소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듯, 막돌을 마구쌓아 시멘트를 부어 굳혔다. 군인의 시신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다. 근처에 영국군 묘지가 있다고 하는데, 미처 가보지 못했다. 민통선 안 마거리에 1951년에 세워진 화장장 시설이 있다고 한다. 통제구역이라 출입이 어려워 문화재 지정이나 관리도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나라가 한국전쟁에 파병했는지 궁금해졌다. "미국, 영국, 홍주,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고 의료지원을 했던 나라도 있었다."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이들이 혹독한 겨울과 뜨겁고 습한 여름을 견디며 한반도에 있었다. 나는 폐허에서 그날의 역사를 소환해본다.  폐허라도 남아있기에 역사의 한토막을 불러내고 되새길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유적을 조금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등록문화재 제 408호)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 연천의 첫 답사지였다. 거친 돌조각으로 쌓아올린 굴뚝과 듬성듬성하게 남아있는 벽체가 전부다. 하지만, 장소는 무언가 증언하고 있다. 아직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소환한다. 한달 사이 무성하게 자라버린 잡초들을 보니, 자연의 생명력이 이토록 강하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그곳은, 끝나버린 삶을 추스리는 장소이자, 이토록 새파란 생명을 도처에서 발견하는 장소였다. 






인민군 모습의 사격연습용 물체가 허수아비를 대신하고 있는 곳이 연천. 길은 고요하고 움직임도 없지만 곳곳에 군부대가 포진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문을 연 연천역. 경원선은 백마고지까지 운행한다. 





연천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5호)


연천역 내부에 근대문화유산이 2채가 있다. 둘다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67년까지 사용했다.

지금은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다. 네덜란드에서는 재기발랄한 건축가들이 급수탑을 주택으로 개조한 사례도 있는데, 그저 방치된 시설로 남아있어 아쉽다. 내부를 관람하게끔 해도 좋을 텐데. 네덜란드 사례에서는 상부에 물탱크가 있고 하부는 창고로 썼다.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고. 






상자형 급수탑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지 궁금하다. 보통 급수탑하면 원통형인데, 이 건물은 보조 용도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건물 벽에는 전쟁 중 총탄을 맞아 떨어져나간 자국이 있다. 베를린 국립회화관 건물도 외부 벽체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 국립회화관의 경우, 깨끗하게 활용되는 건물벽에 촘촘한 총탄자국이 있으니 그 아찔함과 아연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전쟁의 흔적이 비껴가지 않았다. 









대광리로 향하는 길. 어떤 이유에서인지 놓다만 철교가 물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광리 폐터널을 보러가는 길에 이 폐철교도 볼 수 있다. 이 철교는 어디로 향하던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 놓다가 만 것일까? 철교 앞쪽 먼곳에 유사한 형태의 교량 다리가 보인다. 추리소설의 힌트처럼 남아있는 폐허들이 무언가 정보를 주는 것 같다. 계속 자료를 찾아볼까 한다. 





 폭우로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매설된 지뢰들이 유실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길을 가다보면 경고문을 자주 보게 된다. 지뢰라니, 너무 무섭잖아. 이런 안내판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경고하는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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