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 영단주택. 1940년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집합주거들이다. 집집마다 내부 구조와 디자인, 용도는 바뀌었으나 영단주택의 규모와 유형을 파악해볼 수 있다.




서울은 깊다.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길과 집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길은 끝나지 않는데다 차곡차곡 시간이 쌓인다. 이야기의 여러 층위가 덮이면서 역사가 된다. 장소는 점점 깊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장소는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어제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은 탓에,
한 장소를 대상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는, 안개에 잠긴 카프리 섬의 매력을 발견하자,
이스키아 섬을 주고 카프리를 사들였다. "


나 역시 장소를 대상으로 맥없이 반하거나 질투하거나 소유하고싶은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점이라면 단지 하나의 장소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장소들에서 특별함을 발견한다. 장소에서 눈에 띄는 거대한 변화를 보기도 하고, 미묘한 스크래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발견들이 흥미롭다.

장소 그리고 발견.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 혹은 나를 감싸고 있는 장소, 혹은 나를 소유하고 관리하며 교육하는 장소,
어쩌면 내 눈 앞의 모든 것인 장소.

내가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은 그 '곳'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다양한 요소에서 솟아나와 내 마음으로 달려들다. 아직 그 아름다움을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임금님귀는 당나귀귀'처럼 대숲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 속에서 자꾸 외칠뿐이다.


나는 이 장소들이 아름답다. 오랜 시간이 머문 장소들이.
오늘은 문래동이다. 이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현재진행형인 과거였다. 삶의 궤적이 넓기에 내가 몸담고 있는 시공과 다른 시공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음을. 그들과 내가 서로 맞부딪힐 확률은 많지 않으나, 나는 잠시 이 삶에 머물렀다 간다.

오늘은 머무름이 만들어낸 발견이다. 우리는 정확히 1941년으로 타임슬립 할지도 모른다.
심호흡이 필요하다면, 그리하여도 좋고.










1941년, 신도시 문래동

1939년 만주사변 후 조선반도가 병참기지가 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일본인 거주자들을 위한 주택이 시급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일본에서 미리 시범적으로 활용되었던 주택영단을 모델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주택영단이 1941년 출범했다. 영단은 6만호의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4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 첫단계로 구획정리가 사업이 완료된 영등포, 돈암동, 대방동, 신길동, 상도동에 사업을 추진했다.

영등포 문래동의 당시 이름은 도림정. 1941년 신도시였다.

비가 오면 한강이 넘치고 모래가 많던 강변마을을 구획정리하여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래동에는 200채마을이 한꺼번에 세워졌다하여 이백채마을이라는 명칭도 한때 불렸다고 한다.

격자형으로 집이 들어설 자리와 도로가 날 자리를 구획하고 부분적으로 녹지와 병원, 목욕탕, 상점 등의 시설물을 계획하여 설치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분양 아파트처럼 평형대별로 다양한 평면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단독주택형태로 건평만 20평이 넘는 갑형, 단독 혹은 연립주택 형태의 15평 규모의 을형을 비롯 중하류 거주민을 위한 10평짜리 병형, 8평짜리 정형 등으로 나뉘었다.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공존했고 평형에 따라 욕실 화장실등이 내부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와 우물도 함께 사용되었다. 집의 뼈대는 중복도와 현관, 오시래(벽장) 등 일본식구조로 이루어졌다.



영단주택의 방침을 이러했다고 한다.

"주택은 총독부의 방침을 기초로 외관은 공통적으로 내지식(內地式)의 주택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조선에 적합하도록 1실은 반도시 온돌로 살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일본인용이나 한국인용 등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이는 "주택에서도 내선일체의 이루고자 한 것이"며 영단주택은 주택을 보급하는 것과 더불어 식민문화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임창복 교수가 쓴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참조) 영단주택은 일제 말기의 전쟁 등으로 물자부족을 겪으며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공존하던 이 지역은 광북 후 적산가옥이 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네이버지도에서 찾아본 영단주택, 인근지역과 확연히 다른 형태. 필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 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거리는 바다

...(중략)

동해바닷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1936년에 쓰인 임화의 시에 영등포가 언급되어 있다. 공장과 상업지구였고 이들의 사택이 대규모로 들어섰기에 사택마을로도 불렸다고 한다. 타임스퀘어의 주인인 경방은 경성방직의 줄임이다. 경성방직공장의 건물들은 여전히 영등포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영단주택은 원래 영등포 인근 지역의 노동자들의 삶터로 지어진 주택은 후대의 세월을 거치며 중소규모의 산업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주거지로 일부분 사용되고 있으나 도로변은 대부분 공업사다. 예전의 일본식 가옥의 흔적은 우리식 주택 언어로 바뀌었음은 당연하다. 또한 창고, 공업사, 중소 상업건물로 바뀌면서 입면에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문래역에 내려서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그냥 걸어서는 정확히 이 거리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네이버지도로 살펴보니 주변지역과 확실히 다른 필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도를 보며 도로를 따라 걸어보았지만 뭔가 답답하다. 높은 곳을 찾다보니 꽤 층수가 높은 교회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라 믿으며, 우리 일행은 교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영단주택이 모였다.  


거리에서는 변화된 모습만 보였다. 낮은 건물들이 나열된 거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대규모 단지라는 점은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더욱 뚜렸하게 보였다. 개개 건물은 어쩌면 그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나, 마을 단위로 보니 그 형태가 뚜렷해졌다.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만 눈에 보이는 것들. 오래된 흔적은 이렇게 멀리서 보아야 완성될때도 있다.





영단주택이라는 이 지역의 역사는 오직 여기, 영단수퍼에만 남아있는 것같다.















그리고 문래동의 다른 흔적들

문래동 일대를 누비며 오래된 공장과 사택의 흔적을 발견한다. 널따란 공장부지와 또한 널따란 아파트가 공존하는 희안한 동네. 문래동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대의 시간을 누비며 흘러간다.

하기야 집이 오래되었다고 그 속의 삶도 과거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우리의 삶이 과거와 얼만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같은 삶이 아니듯, 장소도 똑같은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래동에서 만난 재미난 흔적- 갤러리 정다방 프로젝트

오래된 다방에서 예술공간으로 바뀐 신기한 공간. 전시와 공연도 열리고, 커피와 와인도 마실 수 있고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는 장소란다. 그날따라 점심나절에 문이 닫혀있다. 내부에 불이 켜진 채 음악도 들리는 것을 보니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쉽게도 들어가보지 못한 장소다. 곧, 좋은 날 찾아가보리라.



갤러리 프로젝트 정다방

주소-서울시 영등포구 문래4가 7-1번지
http://www.jungdab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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