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사 이전,
그리고 그 이후
거대한 건물이 완전히 비었다. 2,267m2에 달하는 3층짜리 건축물이 손에 꼽을 정도의 인원을 남겨두고 모두 떠났다. 2012년 말, 대전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옮겨갔다. 원래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온 것이 1932년의 일이니, 80년만에 도청사가 또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간 것이다.
노란색 타일이 붙은 육중한 건물은 1930년대 관급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가 정확하게 대칭되는 긴 건물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빨려들것 같은 현관 포치는 시커먼 입과도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청사를 드나들었을까? 이미 세월을 머금어 어둑해진 외부의 타일들과 수십년동안 손길이 닿아 반질반질해진 돌로 된 계단 난간들. 도시를 스쳐간 수많은 바람과 발길이 닿은 건물을 본다.
비어있는 건물은 안식년을 맞이한 초로의 교수같은 모습이다. 안타깝기보다는 평온한 분위기다. 고풍스런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사위어가는 저녁 나절, 조용히 건물을 돌아보았다. 한켠에는 <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비어있는 건물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니, 내부가 더욱 깊고 더욱 넓게 느껴졌다. 고윤수, 안준호 두 학예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전시와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앙계단
2층 중앙계단과 복도
조선시대부터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는 전통적으로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감영을 도청사로, 관찰사를 도지사라 하여 명칭과 역할이 다소 바뀌었지만 여전히 도청사는 공주에 있었다. 초대 충남도 장관에 박중양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철도 특수를 누리며 점점 규모를 키워가던(바꿔 말하면 일인들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던) 대전으로 충남도청사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자주 등장했다. 박중양이 총독부에 정식으로 도청 이전을 건의하는가 하면, 총독이 충남도청 건과 관련한 뇌물수수에 연루되는 일도 있었고, 대전 유지들과 공주 유지들이 각자 충남도청을 사수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하는 등 첨예한 방향으로 흘렀다.
"최후의 일각까지 도청을 사수하라"
"유림도 궐기, 총독부에 진정서 제출"
"지사 관저에 연일 쇄도, 부인들도 첨단적 활동"
"충남도청 이전 반대차 동경의회에 제출, 진정위원 급파"
등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남녀노소 일인 한인을 가리지 않고 한몸이 되어 자기 도시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절을 보여준다.
충남도청 이전 문제는 일본 정계에서도 골치아픈 사안이었다. 결국, 격렬한 저항과 시위, 로비와 첩보전을 거쳐 대전으로 도청사를 이전하기 위한 예산이 확정되었다. 대전이 충청도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00년대 초, 농가 몇 채 만이 유유자적하던 대전이 불과 30년만에, 철도와 도청이라는 승부수로서 충청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도청을 빼앗기게 된 공주 시민들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 대안으로 철도 부설, 연초전매국 공장 건설, 의학전문학교 건립을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31년 6월 신청사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1920년대말 대전 시가 풍경(자료 출처-충청남도청사 기록화조사보고서)
공사중인 충남도청사(자료-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 전시 카탈로그)
충남도청사의 위치가 절묘하다. 대전역 광장과 마주보는 도로 끝에 도청사가 자리하게 된다. 대전역과 도청사라는 대전의 두 가지 호황의 축이 형성된 것이다. 청사를 짓기 위한 토지는 김갑순이라는 자가 선뜻 내놓았다. 김갑순은 현재 대흥동, 은행동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인근 지역의 땅을 희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기 소유의 땅이 도시계획 안으로 유입되게 된 것이다. 유성온천을 개발하는 등 대전갑부로 불리는 김갑순의 전성시대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도청사의 대전 이전으로 인해 대전의 지가는 일제히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전답에 불과한 지역도 도시계획으로 개발되는 호황을 맞이했다.
1932년 신축당시 내부 사진/ 1층 평면도( 자료- 충청남도청사 기록화조사 보고서)
1931년 6월에 착공하여 14개월이라는 단시간에 완공된 도청사는 웅장하고 위풍당당했다. 관급 공사는 총독부 소속의 건축가들이 맡았다. 이 건물은 이와스키 센지와 사사 게이이치가 설계했다. 이와스키 센지는 경성제대 건축과 교수로 있으며 경성부청(옛 서울시청), 경성재판소(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경성제국대학 본관 등 서울의 주요 관공서들을 설계했다. 이와스키가 1931년 6월에 사망한 후, 사사 게이이치가 뒤를 이었는데, 그 역시 당시 건축계의 실력자로 활동했다.
날개를 단 대칭형의 이 건축물은, 이전 시대의 화려함 보다는 단순하지만 위엄있는 공간을 선보인다. 외벽 장식이나 바닥타일, 조명이 매달리는 부분의 장식 등은 소소한 장식은 놓치지 않았고, 특히 벽돌 쌓기를 활용한 장식과 스크래치 타일은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한다. 1920년대 후반, 30년대의 건축물에는 스크래치 타일이 유행하듯 사용된 건물이 많다. 무척 섬세하고 공정이 복잡하게 짜맞춰진 타일 구조로 보아, 노련하게 이 타일을 제조하던 회사가 있었으리라. 일본에서 만들어서 가져온 것일 확률이 높다.
건축물을 보다보면, 당시 건축재료 중에서 무척 섬세하고 까다롭게 작업한 것들을 보면 제작회사와 제조산업에 대해 궁금해지곤 하는데,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창틀과 창호의 섬세한 황동 철물의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충남도청사 입면도(자료- 충청남도청 기록화 조사 보고서)
1932년 10월 14일 7천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신축 청사 앞에서 오전 10시 이청식을 거행했다. 당시에는 2층으로 완성되었는데, 딱히 지붕을 얹지 않은 이유는 증축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60년, 정경운 교수의 설계로 3층을 올려 증축하고서 도청사는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헐겁게 보였던 건물이 마지막 층을 올리고서야 마무리된 느낌이 든다.
도청의 역사가 곧 대전의 역사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시대를 거치면서 도시가 얼마나 처참하게 불탔고 또 얼마나 힘겹게 일어섰는지, 장소의 한 가운데에서 시대의 굴곡에 따라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신도시가 발달하고 원도심(구도심)이 활력을 잃어가는 슬픈 과정도 지켜보았고, 지금 그 원도심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지켜보고 있다.
건축물은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어있는 건축물을 다시금 활력있게 하는 것은 그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 삶의 모습들이 아닐까? 무엇으로건, 건축물은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머물고 쉬고 이야기하는 장소로서.
역사가 된 건축, 시간을 담다라는 부제가 달린 <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 전시회.
대전의 역사와 충남도청사의 건립과정, 한국전쟁과 재건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도청사의 역사를 보여준다. 도청사의 역사는 대전의 역사와도 같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옛 충남도청사 1층에서 열린다. 전시와 더불어
건축물을 둘러보는 여유도 누리길 권한다. 관람시간- 오전 9:30~오후 5:30.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진 도시 철원 (1) | 2013.07.30 |
---|---|
창신동, 여름 (2) | 2013.07.24 |
솔랑시울길을 따라서- 대전 소제동 관사촌 걷기 (2) | 2013.07.12 |
붉은 벽돌로 지은 시- 대학로 문예회관과 미술관 (0) | 2012.04.23 |
문래동 1941 - 영단주택을 가다 (0) | 201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