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동지사대학은 윤동주의 모교다. 투옥되기 전까지 윤동주는 문학을 배우며 이 기독교계 대학교에 다녔다. 1995년 시비가 세워진 후, 교토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기억하며 이 시비 앞을 서성인다. 누군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필사한 액자를 가져다놓았고, 누군가는 방명록이 다할 때마다 새로운 노트를 가져다놓는다. 방명록은 비에 젖기도 하고, 눈과 바람에 찢기기도 했다. 글자는 뭉쳐지고, 종이는 젖어서 떼어지지 않을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글자가 적혀진 노트는 보통의 방명록이 아니라, 작은 시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시인의 시비를 찾았던 10월 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10월부터 새로 쓰기 시작한 방명록은 젖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비닐을 씌워두었지만, 금새 찢어질 것 같아 나는 가방 안에서 낡은 비닐을 꺼내 그 위에 덧씌워놓았다.









2013년 3월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본 후, 나는 내내 이 시인이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보고픈 생각이 컸다. 서울의 몇몇 장소들과 멀리 섬진강 근처의 어느 작은 집에도 들렀다. 일본 교토에도 머물렀다. 동지사대학의 시비 앞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적지 못해 한참 앉아있다가 딱 두줄의 메모만 남기고 돌아나왔다. 나혜석과 정지용이, 윤동주와 그의 사촌이자 문우이자 동지였던 송몽규가 거닐며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카모가와 강도 걸어보았다. 몇백년 된 나무집에서 풍기는 음침한 냄새들을 맡으며 그 시절의 젊은이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도 회색의 원고지에 메마른 잉크로 쓰여진 시인의 글자만큼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어느 장소도 시인이 아꼈던 그래서 낡고 닳은 책들만큼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을 품어준 도시와 집들을 미약하게나마 더듬어보고싶었다. 시인이 숭배했던 수많은 시인의 이름을 옮기며 나 또한 열렬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쓰다만 원고들을 조금 더 채워보고자 한다. 





 尹東柱를 줄을 그은 뒤 平沼東柱라고 새로 쓰여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그 학적부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1942년 1월 29일에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주라는 일본식 이름이 적힌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에 제출했다.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면 이름을 바꿔야했던 것이다.  석자에서 넉자로 바뀐 그 이름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이유로, 시인은 '참회록'이란 시를 그 즈음에 남겼다.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에는 시인이 <참회록>을 쓴 종이의 여백에 낙서처럼 이런 글자들이 남아있다고 썼다. "시인의 고백, 창씨개명, 힘, 생, 생존, 생활, 문학, 시란? 비애 금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중에서





그가 먼 곳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학을 떠나기로 한 데에는 사촌인 송몽규의 영향이 클 것이다. 송몽규는 시인의 행보와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으며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용정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과 일본으로 갈 때에도, 그리고 사상범으로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을 때에도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였다. 둘은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고, 송몽규는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실패하였으므로 동경의 입교대학에 다시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한학기 머문 후에는 교토 동지사대학으로 옮겼고 두 사람의 사상적, 학문적 교류는 계속되었다. 







동지사대학을 찾았던 작년 10월말. 학교 곳곳에서 금목서가 고옥한 향기를 뿜었다. 노란꽃들이 자잘하게 매달린 푸르른 나무들은 고풍스런 빨간벽돌 건물을 한층 생동감있게 했다. 진한 꽃향은 가을을 향하는 길목이라 더 매혹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동지사 대학 하면 교정을 가득채웠던 금목서의 향기를 먼저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20세 전후의 학생들이 몸도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곳곳에는 학회와 세미나를 알리는 안내포스터가 가득했는데, 군데군데 한글로 된 것들도 있었다. 



















1875년에 세워진 학교답게 오래된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작지만 단정한 교사와 크고 육중한 채플이 교차되는 평평한 길은 은근한 소란만이 가득했다. 평일 오전 시간이었는데, 학교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꽤 보였다. 천천히 거닐다보니 문학부 건물 옆에 윤동주 시비를 발견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시인은 동지사대학의 문학부 문화학과 영어영문학 전공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영문학사, 영문학연습, 영작문, 신문학 등의 수업을 들었다. 시인이 집은 다나카 타카하라초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 있었다. 시로카와(백천)과 카모카와(압천) 두 강 사이의 동네다. 그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통학했다. 거리는 아주 먼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대학이 곧바로 이어져 학풍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훌륭한 산책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더구나 그의 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몽규의 집이 있었다. 둘은 자주 함께였을 것이다. 



나혜석이 그렸고 정지용이 읊었던 카모카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나는 강변을 따라 조금 걸어보았다. 넓고 잔잔한 물가는 여름이면 사람들의 휴식처가 된다고 했다. 누군가는 카모카와는 밤에 보는 게 더 좋다고도 했다. 나는 아무 감흥없이 물을 보고 다리를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 어떤 까닭에서인지 교토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히 감흥에 젖어들 수가 없었다. 다만 금목서의 향기가 나를 불렀다. 혹시 시인의 글 언저리에도 금목서의 향이 깃들지 않았을까. 





1942년은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다. 군국주의는 거세게 날뛰어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옥죄었다. 사상의 압박이 거세졌고 조선어로 된 것들이 사라져갔다. 누구나 전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열정적이며 창백한 지사인 송몽규는 요시찰인이었고 온화하고 조용한 시인이나 집안 좋고 두뇌가 뛰어난 조선인 학생들과의 회합은 전쟁 중인 경찰에게는 좋은 사냥감이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사상 탄압을 주임무로 하는 특고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취조과정에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쓴 시와 글들을 일본어로 옮겨야했다. 단 한편도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던 시인이 자신의 글을 일본어로 옮긴다. 그는 재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교토를 떠나 후쿠오카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후에 발견된 취조문서와 판결문은 조선독립과 자국의 문화부흥을 위해 어떻게 활동할지를 조밀하게 의논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선고받은 날은 1944년 4월 1일, 맑은 봄날이었다. 시인이 교토를 떠나던 날, 벚꽃이 진창으로 피었을까, 얼음장처럼 암담했던 카모가와가 맑은 노랫소리를 내며 흘러갔을까,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며 소란스런 젊음을 내뿜지 않았을까, 강가의 다리에서 예술학교 학생들이 사생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검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그들은 죽음의 형무소로 가게 되었던 것일까, 거대한 주목 같은 오래된 도시를 떠나며 그들은 이 도시의 묵은 내를 폐속 깊이 심어두지는 않았을까, 귓가에 들리는 온갖 달콤한 일본말들이 상냥했을까, 그들은 죽음을 예감했을까. 떠나면서 이 도시가 그리웠을까? 







이 도시는 작은 시비로서 그렇게 떠났던 자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 시비 옆에 세워진 정지용 시비를 들여다보았다. 시비에 새겨진 카모카와(압천)이라는 시는 윤동주가 걸작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좋아한 시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지사대학에 유학했으며 또한 윤동주가 그토록 숭배하던 시인이었다. 그는 1947년에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를 소개했고, 그 다음해 뜻을 모은 사람들이 윤동주의 유고시집을 출간할 때 서문을 적었다. 정지용의 시비는 2005년에 세워졌다.


압천 십리 ㅅ 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여울 물소리에 묻는다. 십리벌에 묻는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가혹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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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weet-work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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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삵 2014.04.09 01:0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갑니다. 어렸을 때 갔었는데, 그때는 별 다른 감흥없이 다녀왔었어요. 미래에 교토 도시샤대학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꽃 한송이라도 놓고 오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