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란각은 오래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던 곳이다. 일본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기생집이라고도 하고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이 드나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나 못가는 고급 요정이라는 설명은 이 집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정란각이 이제 누구나 들어가서 내부를 구경하고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세월은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을 활짝 열었고 시대를 관통하는 건축물이라는 의미로 문화재 역할을 부여했다. 정란각의 새 이름은 ‘문화공간 수정’. 이름이 바뀌니 공간이 달리 보인다. 일본인 부호의 집에서 적산가옥, 요정을 거쳐 문화재가 된 이 집의 역사가 천천히 표백되어 말끔해진 느낌이다. 오롯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건축물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요정이 문화재가 된다고 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일본식 저택의 당당한 위용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아름다운 꽃길만 걸어온 것이 아니기에, 역사의 어두운 길만 걸어온 이 건물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세찬 풍파를 헤쳐온 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먼 계절을 돌아 이제 투명한 눈빛으로 후손들 앞에 선 한 노인의 인생처럼.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1943년 6월 12일, 수정동 한복판에서 나는 태어났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지나온 시절을 돌아볼 틈도 없었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정란각이 있는 초량 일대는 부산근대사의 중요한 장면을 품은 지역이다. 한산한 포구였던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왜관이 설치된 곳이었고, 개항 직후엔 일본조계지가 열려 돈과 기회를 잡으려는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운 그 자리에는 철도와 항만이 생겨나고 관공서와 상가, 저택들이 등장했다. 수정동 일대는 옛 왜관지역이라 ‘고관’ 혹은 ‘구관’으로 불렸다.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사지였으므로 대지주와 자본가, 권력가들의 대저택들이 들어서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수정동 1010번지의 옛 토지대장은 이 집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산 상권과 자본을 휘어잡은 주요한 인물들이 소유해오다가 1939년 다마다 미노루라는 재력가가 매입하여 정란각이 되는 저택을 지었다. 철도관사가 자리잡았던 곳이기도 해서 이 집이 철도청장의 관사라는 소문도 무성했으나 문화재 등록을 위한 조사를 하던 중 상량판을 발견하면서 집의 처음이 선명하게 밝혀졌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 보자. 대문부터 높다랗게 세워져 재력가의 저택다운 면모를 보인다. 본채인 이층 목조 건물은 양식 건물이 어색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데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모습이다. 그 사이에는 탐스런 꽃나무들로 조성된 일본식 정원이 있다. 1층과 2층은 일본식 툇마루인 엔가와 바깥으로 유리미서기문이 가지런히 닫힌 상태이며 유리문 너머로 살짝 뒤로 물러선 방들이 넌지시 보인다. 겹을 이룬 공간이 주는 비밀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집의 구조와 규모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부는 중복도와 내부 계단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중층으로 연결된 부속채로 이리저리 이어지는 구조인데다 요정으로 활용하면서 증개축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손님이 다니는 공간과 직원이 다니는 공간을 분리하고, 손님들끼리도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답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문화재 조사를 위한 기록화보고서는 처음 이 주택을 지을 당시에도 일반적인 주거 개념이 아니라 연회나 회합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컸으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2층 다다미방이다. 벚꽃과 독특한 과실 무늬를 새겨넣은 목조장식들과 도코노마 같은 일본식 장식 공간이 돋보이게 꾸며진 이 방은 방문을 모두 걷어내면 수십 명의 권력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다마다 미노루는 이 집을 고작 3년도 소유하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그 뒤 미군정청 장교 숙사로 사용되었고 개인에게 불하된 이후로 요정과 요릿집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찌 부와 권력 이면의 추함과 서늘함을 전부 상상할 수 있을까? 개항기 일본인들이 성공을 좇아 낯선 대륙에 발을 디뎠다가 결국 패망인의 운명에 처했고, 정치를 제 맘대로 주무르던 지난 시대의 권력자들이 결국 역사의 그림자로 사라져갔으나, 건물은 남아 노쇠한 목소리로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란각을 방문한다면 자원봉사로 해설을 하는 어르신을 만나보기를 권한다. 저택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복잡함을 균형 있게 전달할 뿐 아니라, 일본풍을 추종하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재로서 저택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겐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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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정원박물관 : 아사카노미야 저택 






도쿄도 정원 박물관은 일왕가의 일원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1933년에 지은 저택과 영지 내 거대한 정원에서 비롯되었다. 전후 저택 부지가 국가로 환수된 후에 총리관저로도 사용된 이곳은 1983년부터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시민들은 물론 도쿄 여행자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 저택은 1920~30년대 프랑스 파리를 휩쓴 아르데코 스타일을 도쿄에서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도쿄건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웅장함이나 화려함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모던한 외관을 지녔지만 현관을 통과하면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다가온다.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된 바닥과 비상하는 여신을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조각으로 뒤덮인 벽에서 정교한 세공의 세계로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이윽고 우아한 식물 모티프가 기계미학과 만나 섬세한 패턴을 이루는 공간들! 정교한 비례와 절제된 형태의 장식들이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주는 공간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저택은 대형 홀과 응접실, 대식당, 소식당 등으로 이루어진 공적인 영역인 1층과 침실과 서재 등 사적인 영역인 2층, 바우하우스 풍 가구가 구비된 겨울온실이 있는 3층으로 구분되는데, 가구, 조명, 오브제, 벽화, 벽지, 그리고 경첩이나 라디에이터 가리개 같은 크고 작은 철물까지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이것이 바로 아르데코’라고 외치고 있었다. 


박물관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건축물이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곳이었다. 건축과 실내 디자인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오디오 가이드와 도록으로 접할 수 있었다.(한국어 설명도 있다) 이 집을 디자인한 앙리 라팽과 르네 랄리크에 대한 이야기, 건물을 실제로 구현해냈던 궁내부 건축 집단에 대한 심도 깊은 설명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의 서사는 전시장과 카페, 그리고 다양한 상품들에서 훌륭하게 활용되었다. 좋은 건축을 보유하고서도 건축 이야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박물관들이 우리에게는 참 많지 않던가. 건축서사를 잘 활용한 좋은 장소를 알았다는 흡족함에 즐겁게 관람을 마쳤다. 


                        옛 아사카노미야저택의 내부 모습 ( http://www.teien-art-museum.ne.jp)


그런데,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여 아름다운 저택을 완성한 아사카노미야 아스히코. 그가 궁금해졌다. 간단한 검색으로 많은 정보가 나왔다. 메이지천황의 자손인 야스히코는 일본육군 장교로서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예술적 취향이 높았던 그는 1925년 파리장식미술박람회에 참관하고서 아르데코에 푹 빠졌으며, 앙리 라팽과 르네 랄리크를 초빙하여 도쿄 저택의 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그저 예술애호가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군국주의자였고 1938년 난징대학살 때 일본군 지휘관이었다. 전쟁의 책임을 져야할 위치였으나 왕족이라는 이유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던 비굴한 역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전력을 알게 되자 건축적 아름다움과 박물관의 경이로움만으로 이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것이다. 건축은 시대의 요구나 기술력, 건축가 혹은 건축주의 예술적 안목만으로 설명을 끝낼 수 없다. 건축에는 사람의 인생이 압축되어 있고, 그 인생의 의미와 공간의 가치는 서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건축은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한때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의 집이라고 하더라도 후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면서 또다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에게 많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이 그러하듯이,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건축은 다양하게 확장된다. 


삶의 복잡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의 해답이 건축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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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뜨겁게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의 삶에 이토록 깊은 관심이 있다는 건 건축이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설지 않은 분야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 전시의 중심에 카바농이 있었다. 건축가가 남프랑스 가장자리 도시에 지은 작은 별장이다. 그는 이 장소를 무척 사랑했고 카바농에서 내려다보이는 푸른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길 즐겼다. 그는 결국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마을 묘지에 잠들어있다. 

몇 해 전 이 카바농을 취재하러 프랑스 끄트머리의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Roquebrune-cap-matin)까지 간 적이 있다. 절벽을 따라 얇은 선처럼 둘러진 오솔길- 르코르뷔지에 오솔길이라고 적혀있다-을 걷다보면 표지판 하나 없이 서있는 작은 나무집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이 떠난지 반세기가 흐른 만큼 낡아버린 나무집과 여전히 변함없이 드넓고 푸른 바다의 간극이 묘하게 다가왔다. 기후대가 달라지는 것처럼 아열대의 달근한 꽃향기가 계속 퍼졌고 강렬한 햇살은 건너편 고지대 마을의 풍경을 황금빛으로 만들었다. 지난 세기 건축의 대가로 꼽히며 그의 건축물을 예술작품처럼 저작권 보호를 하는 건축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곳이라고 하기엔 뭔가 불충분해보였지만, 그의 마지막 장소라고 하니 그건 그런대로 어울려보였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바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이라는 이 마을이 풍기는 정취 때문이었을까? 니스의 달콤한 해변과 달리 야생적이며 차가워보이는 바닷물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식물들과 가득한 태양빛마저 기묘한 야생성을 갖고 있던 이곳. 여기인가, 홀린 듯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도 건축가처럼 그 바다와 작은 고지대 마을에 푹 빠져버렸다.

아래에 카바농에 대해 쓴 글을 덧붙인다. 내외부 사진이 많지만 저작권이 엄격한 작가라 공개하기가 어렵다. 혼자보기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외관 사진은 아래에 있다. 혹시 문제가 되면 알려주길. 




카바농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다. 

1951 12 30일 남프랑스의 작은 식당의 구석자리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는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린 후 퍼즐을 짜맞추듯 4개의 직사각형과 1개의 정사각형으로 쪼갰다작은 직사각형 안에 다시 여러 개의 사각형을 그려넣었다크고 작은 사각형의 조합으로 보이는 이 스케치는 지중해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벽 암석 위에 세울 별장의 기초 도면이었다쪼개진 직사각형은 각각의 기능을 담은 공간이 되고 그 속의 작은 사각형은 가구가 되었다가장 바깥에 있는 정사각형은 이 기능을 아우르는 집이다그는 집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방 주변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지중해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연필을 놓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줄 작은 여름별장을 그리고 있었다도면은 45분만에 그려졌다그렇게 확정되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45분만에 그려진 스케치 속의 별장 카바농은 다음해인 1952년 여름에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의 절벽 위에 세워졌다남프랑스의 끝자락에 위치한 로크브륀은 온화하면서도 야생의 거칠음이 공존하는 도시였다르 코르뷔지에는 여름마다 이곳을 찾아왔다휴가라고 해서 잠시도 나른하게 보내는 일이 없었다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거나 돌조각을 줍기도 했지만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혼자 있을 때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로 분주했다.

카바농이 세워진 다음 해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장소에 카바농보다 더 작은 아틀리에를 하나 만들었다아틀리에 벽에는 르 코르뷔제가 그린 그림과 스케치들로 가득했다카바농과 아틀리에를 오가며 건축가는 열정과 영감을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그리고 이 집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1965년 8수영을 하러 해변으로 나간 르 코르뷔지에는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작은 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장소가 되었다


건축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기능적인 구조를 감싸는 거대한 풍경과 함께 존재한다.

로크브륀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날씨가 확연히 다르다뜨겁고 달근한 꽃향기가 동네마다 농밀하게 밀려온다굵은 대가 휘어져 축 늘어진 용설란이나 상쾌한 향을 뿜는 유칼리 나무한창 푸르른 아칸더스 나무가 쑥쑥 자라 덤불을 이루고 있다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제각기 한창때를 표현한다온화한 날씨도 잠시폭풍이 밀려와 한바탕 비를 뿌리고 달아난다그러면 바다와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꽃과 나무는 더욱 짙은 향기를 뿜는다

카바농은 절벽의 거친 돌과 하염없이 자라는 열대 식물의 덤불 속에 자리잡고 있다르 코르뷔제가 살았던 당시에는 바다를 가리지 않도록 덤불을 쳐내곤 했지만 야생의 자연은 쉴 줄을 모른다건너편 고지대 마을에는 별장과 호텔리조트가 촘촘이 들어섰다고지대 마을은 르 코르뷔제가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주택들을 경계하며 제대로된 리조트 단지를 세우자던 록 앤 롭(Roq et Rob) 프로젝트의 대상 부지들이었으나 이미 각각의 집들로 빼곡히 채워졌다바다 위에는 거대한 크루즈선이 로크브륀 해안의 절경을 공유하는 중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카바농이 있는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정작 카바농은 그전과 그리 다른 모습이 아니다소나무 패널을 합판 위에 붙여서 제작한 몸체와 슬레이트 지붕은 예전과 다름없이 소박한 모습이다모던한 콘크리트 큐브라면 또 모를까수직과 수평이 강조되고 수평띠창이 있는 흰색의 건축물을 주로 선보이던 르 코르뷔지에가 나무집을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건물 내부로 들어서야 비로소 이 집의 매력이 확연히 다가온다좁은 공간을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었다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한 심플하고 기능적인 가구들은 충분히 세련된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벽에 그려진 생생한 벽화들 때문도 아니었다이 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절묘한 위치에 창문은 액자처럼 풍경을 가두었다세 개의 크지 않은 창문으로 에메랄드 빛의 풍경이 흐른다어두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남불의 공기햇살암석 그리고 풍경집은 밀려드는 자연의 정취와 어울려 더 크고 더 넓게 느껴졌다.  

 공간 가장자리를 따라 2개의 침대와 작은 세면대가 있는 수납장약간 사선으로 놓인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벽장이 차례로 놓였다침대 왼쪽에는 커튼으로 구분한 화장실이 있고천장은 수납시설로 꾸몄다몇 가지 되지 않는 가구들이지만 침대 상판을 들어올리면 내부에 수납공간이 있고스툴형 의자도 무언가를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휴지걸이 모양의 조형물은 밤에 책을 읽거나 할 때 켰다 끌 수 있는 간이 스탠드 조명이다나무널이 깔린 마루바닥은 노란 색으로 칠해져있고 현관 복도에는 큐비즘을 연상케하는 벽화가 그려져있다천장은 화면이 분할되고 부분적으로만 칠해진 몬드리안의 추상화같다내부에는 벽이 설치되지 않았으나 공간은 온통 사각형의 결합이었다그 사각형은 답답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시선을 유도하고 적절히 분산하며 공간으로 넓게 펴져있다.

복도 끝에는 커다란 나사를 끼우듯 목재 옷걸이를 조립했다옷걸이를 조립할 때 수치와 위치를 정하느라 그렸던 연필 선이 지금도 남아있다작지만 효율적으로 꾸미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이 집의 주인은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얻고 또 어떤 구상을 했을까그리고 그의 아내는 생일선물로 마련된 이 장소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이 작은 집이 그의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었을 지 더없이 궁금해졌다.






336cm의 공간에 건축가의 철학이 담겼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카바농에는 샤워시설과 부엌이 없다외부에 수도시설을 끌어올려 샤워를 했고 사용했고 식사는 바로 이웃한 불가사리 식당(Etoile de Mer)’에서 해결했다불가사리 식당의 주인 토마 르뷔타토(Thomas Rebutato)는 카바농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르 코르뷔제는 1930년대부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진 건축가겸 디자이너인 아일린 그레이의 빌라 E-1027을 자주 찾았고 디자이너들과의 교류와 프로젝트 구상을 위해 이 집에 머무는 기간이 많았다. 1949년경 보고타 시의 도시계획에 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빌라에 머물던 중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바로 근처에 르뷔타토의 식당을 선택하게 되었다르 코르뷔지에와 르뷔타토는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되었고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구상했다마음 좋은 식당 주인은 기꺼이 건축가가 머물 집을 위해 작은 부지를 제공해주었다

카바농은 코르시카에서 프리패브 방식으로 만들어 배와 철도로 이곳까지 옮겨졌다공장에서 생산하여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내부 공간을 구성하는 구성체계로는 르 코르뷔지에가 창안한 모듈러가 활용되었다신체의 황금비례를 수학적으로 적용한 모듈러는 공간과 사물의 비례척도라고 할 수 있다카바농의 길이와 너비에 적용된 336cm와 높이 226cm도 자신이 정립한 모듈러 체계에 따라 결정된 수치다가구의 높이창과 면의 구성 등 모듈러에 따라 형성되었다

용설란에 둘러싸인 통나무집이라는 낭만적인 외관과 달리카바농의 내면은 건축가의 엄격한 건축적 이상과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자유롭게 놓여진 듯 보이는 가구도 공간을 형성하는 사각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개인의 취향처럼 여겨지는 추상적인 선들도 공간의 흐름을 무한히 확장하는 요소로 배치되어 있다이 집 자체가 하나의 모듈로서 완전한 기능을 가진 큐브다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건축가의 철학은 단단하고 뚜렷하다


사적인아주 사적인 집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로크브륀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계획안을 세웠다휴양지로 더할 나위없는 장소라 판단한 그는 지중해의 쪽빛 해안을 공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게 머무를 수 있는 리조트 타운을 계획했다로크 앤 롭 프로젝트도 이 때 계획된 것이다건축가는 투자를 얻어 이 계획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아쉽게도 리조트 프로젝트는 르뷔타토의 식당 옆에 여행자 숙소인 캠핑을 세우는 데 그쳤다. 1957년에 건축된 캠핑은 2층으로 구성된 숙소이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져 전망이 좋았다두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콤팩트한 구조에 가구와 세면대까지 설치하는 등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에서 실험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현했다르뷔타토는 이 캠핑 덕분에 여름 휴가 시기에도 활발하게 레스토랑 영업을 할 수 있었지만 건축가에게는 아쉬움으로 찾아왔다개인별장으로 완성된 것은 오직 카바농 뿐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을 배경으로 많은 사진을 남겼다창문으로 벗은 몸을 내밀며 햇살을 쬐는 장면도 있고 카바농 바로 옆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스케치에 매진하는 장면도 있다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개를 끌어안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가 하면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카바농과 로크브륀의 스케치를 넣어보내기도 했다

카바농은 엄격한 이상의 공간이지만 건축가의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도 보듬어주는 장소였다그는 카바농을 마음껏 즐겼다폭우가 자주 쏟아져 길이 진흙밭이 되어도시도때도 없이 자라는 야생의 덤불에 계속 신경써야 해도샤워와 식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해도 말이다.  

건축가는 집 안에 있는 것보다 카바농 옆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수영복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일에 몰두하는 건축가 앞에는 거친 해안과 야생의 덤불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등을 굽히고 몰두하는 뒷모습에서 예술가적 기질을 본다이제 카바농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르 코르뷔지에를 떠올리게 되었다. '작은 별장'이라는 뜻을 가진 평범한 단어 카바농에 예술의 향기가 충만해졌다.  이 작은 집 카바농에서 발견한 건축가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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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가옥 추정복원도-기록화보고서>


근대기 서울 한옥을 보는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옛 사람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구가했나 엿보며 상상할 수도 있지만 전통한옥과는 다른 공간들, 다른 건축언어들이 기발하게 뒤섞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멈춰진 시대가 간곡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지요. 화려한 한옥에 엉뚱하게 끼어든 서양식 공간이나 일본식과 한식을 절묘하게 오가는 공간, 한,일,양 세 가지 스타일이 모두 섞여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중국식 건축 형태가 스며든 집도 있지요. 게다가 한옥 자체가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개량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건축가들은 한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제거하면서 주택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한 근대기 서울한옥을 한채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유한 계층에서는 궁궐에서나 지을 법한 고급한옥을 지었습니다. 백인제 가옥처럼 좋은 한옥과 일식 가옥을 함께 배치하는 경우도 있었고, 완전한 서양식 대저택을 짓고 뽐내던 상류층들도 있었지요. 서양식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게 가장 모던한 유행이었던 당시엔 이런 집들이 환영받았겠지요. 죽첨장(지금의 경교장)이 바로 그런 서양식 대저택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촌 언덕위에 있던 윤덕영 저택(벽수산장)도 있었고요.  그러나 이런 집들은 연회나 귀빈 대접에 사용되었을 뿐 실제 생활은 서양식 저택 뒤켠에 근사하게 지은 한옥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유행은 유행이고 삶은 또다른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한옥에 머물러있었습니다. 

명륜동에는 1937년에 지은 한옥 한 채가 남아 있습니다. 역사인물인 장면 선생의 옛집입니다. 장면 총리라는 직함으로 더 잘 알려져있지만 이 집을 지을 당시엔 교육자의 삶을 누리던 중이었지요. 명륜동이 아직 주택가가 되기 전 천변 언덕에 한옥과 양옥이 각각 한채씩 놓인 이 집이 지어졌습니다. 집 앞에는 천이 흐르고 있었다지만 복개된 지 오래되어 모두 도로로 바뀌었습니다. 이 집은 선생의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놓인 역사인물가옥이자 등록문화재 357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집은 김정희라는 건축가가 지었습니다. 장면 선생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지요. 신학교에 입교했다가 건축가로 선회한 그는 1937년에 지은 이 집을 시작으로 1938년 명동성당 문화관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갑니다. 몇가지 일에 그의 흔적이 있지만 1950년 납북되는 바람에 명맥이 끊어집니다. 

집에 살다간 사람의 일생도 한국의 현대정치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지만, 집만 봐도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집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매력있습니다. 경사지에 세워진 대문을 지나면 눈앞을 가리는 담이 하나 나옵니다. 이 담의 오른쪽으로 양식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됩니다. 담벼락은 은근한 시선높이까지 세워져 본채(안채)인 잘생긴 한옥은 훤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채로 가려면 왼쪽으로 담을 따라 걸어가야하지요. 지체 높은 양반댁에서 중문을 설치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양옥은 사랑채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지요. 

우선 양옥으로 들어섭니다. 나무바닥이 깔리고 방과 거실이 정갈합니다. 손잡이가 달린 문이 방과 복도와 거실을 구분합니다. 바깥에 복도가 있는 점도, 붙박이 장식장이 있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일본식 기와가 올려진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양식처럼 보이지만 일본식 가옥의 언어가 슬쩍 비쳐납니다. 복도나 붙박이장은 워낙 자연스럽게 적용되어 있어서 일식가옥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건물은 목구조에 몰타르와 시멘트, 벽돌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방화의 목적이었겠지요.  

이곳은 장면 선생이 여러 인사들과 만나 담소와 회의를 했던 곳. 신사들의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 선생의 유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창밖으로 꽃나무 사이로 한옥의 처마가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안채로 들어가면 단아한 한옥의 품새를 만나게 됩니다. 단정한 장마루와 반자를 친 천장은 적당히 높아서 편안합니다.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주변으로 연결된 방과 생활공간들은 동선의 편리함을 염두에 둔 것 같지요.  이 집은 솜씨좋은 세공사가 다듬은 듯 고급 한옥의 구조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건넌방의 창문은 외부 유리 쌍창 안에 나무살이 있는 영창, 나무 틀은 두고 벽지를 바른 갑창 등 복잡한 구조로 된 창호는 궁궐 전각에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쌍창도 바깥 경관이 보이는 곳은 유리로, 나머지는 창호지로 해서 장식성과 바라보는 기능을 잘 살렸습니다. 문과 천장 사이의 고창도 단정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지요. 조그마한 환기구창은 새로운 시도입니다. 온돌방의 환기를 좋게 하는 이 조그마한 창은 개량식 한옥에서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동선과 환기. 이 점이 한옥의 개선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죠.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유물들이 전시대 속에 들어있습니다. 

실내외에서 모두 연결되는 부엌과 찬마루는 널찍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라 주방은 무척 바빴을 것 같습니다.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 등 현대적인 설비가 처음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채 뒤에도 작은 채가 있는데 총리시절 경호원 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담과 가까운 곳에도 경호실이 설치되어 있지요.  

정갈하고 조심스러운 집이었을 겁니다.   

오랫동안 머물며 삶을 이어오기에 편안하고 평온한 집이었을 겁니다. 

한 채의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마을을 만들고 길을 열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혹은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는 주요한 길목이라고 봅니다. 그 시대의 질문은 지금도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집을 짓는 자들은 어떤 삶을 표현하려 하는지, 개개인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떠한지, 그때와 지금은 또 어떻게 다른지 해답을 구합니다. 

근대기의 서울 한옥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러나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던 집을 좀더 집중해서 살피며 삶의 개별성과 복잡성을 좀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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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류층이 살던 근대 한옥



집은 삶의 그릇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일상과 내면, 가치관까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택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향기는 비밀스런 시대로 우리를 부른다. 근대건축유산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회동 93번지에는 ‘백인제 가옥’으로 불리는 고택이 있다.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선생이 가족들과 1944년부터 살던 곳이다. 뛰어난 의사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그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고 말았지만 전설처럼 뒤따르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 집은 여러 소유주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백인제 선생 전에는 최선익이라는 청년갑부이자 민족사업가의 삶이 비밀스럽게 묻혀있고, 한성은행이 소유하고 있을 1930년에는 천도교에서 잠시 사용하면서 스며든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을 지은 실업가 한상룡이 있다. 


한성은행장을 지낸 친일실업가 한상룡(1880~1949). 총리대신 이완용의 친인척이며 대한제국왕실 총친의 조카였던 그는 어려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일본통이었다.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추앙하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분이 깊었던 그는 한편, 허례허식이 없으며 정치적 노림수보다는 실업가로서의 철학을 지켰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회갑을 맞아 성대한 연회를 거행하는 대신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집필한 것도 이 인물의 독특한 이력이다. 


1906년 가회동으로 이사온 한상룡은 주변의 집 열 두 채를 매입해서 900평에 이르는 넓은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1913년부터 살림집으로 쓰는 안채와 연회와 사교를 위한 사랑채, 하인들이 사는 문간채, 처가 식구를 위한 별채, 테라스가 있는 일본식 주택 등 100여 평에 이르는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조선 최고 실업가로서 일본인 관료를 비롯, 정제계 유력자들과 회합하는 사교의 장이자 연회공간이었다. 살림집인 안채는 중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고 외부에서는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고위층 인사들이 자동차를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대문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고 정원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총독을 비롯, 일본인 관료들이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를 곳곳에 발휘했다. 일본주거에서 자주 사용되는 흑송을 사랑채에 사용한 것, 전통식 우물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를 깐 중복도와 다다미가 깔린 이층방을 설치한 것 등은 한상룡의 전략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은행 상황이 악화되자 한상룡은 부채 5만원을 스스로 감당하며 한성은행 측에 이 집을 넘겼다. 이 집은 그는 인근 178번지로 거처를 옮겨 자신의 입지에 걸맞는 또 다른 대저택을 세웠으니 가회동에는 한상룡이 소유했던 두 채의 대저택이 있는 셈이다. 


이 집은 서양식, 일본식 건축언어가 접목되어 있지만, 전통한옥의 우아함과 아름다움도 충분히 담고 있다. 공들여 지은 집답게 반드시 살펴봐야할 부분들도 많다. 우선, 분합문(들어 올려 걸어둘 수 있는 장지문)을 설치한 사랑방이 딸린 사랑대청은 이 집의 가장 멋진 장소다. 유리문으로 두른 사랑대청은 서양식 가구가 놓여 근대기의 멋이 살아있다. 안채 마당으로 향한 사랑채 화방벽은 길상문자와 전통 무늬로 고즈넉한 안채에 우아한 멋을 수놓는다. 이 집의 가장 높은 지대인 북쪽 언덕에 세워진 누각은 집주인이 홀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유리문으로 두른 누마루에 앉으면 북촌 일대가 두루 펼쳐져 그 풍경이 한편의 드라마가 된다. 


이 대저택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소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친일파 실업가의 집을 문화재로 보호하는 일, 잘 지어진 집이라고 감탄하는 일에 감정적인 혼란을 배제할 수 없다. 과연 이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어야하나,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건축물들을 ‘부정적인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라고 부른다. 당시 삶을 조명하는 자료로서, 후대에 교훈이 되도록 남기고 그 의미를 계속 새롭게 읽어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의 복잡성, 삶의 복잡성이 끼어든다. 아프고 고된 근대사를 경험한 우리에게 부정적인 문화유산은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상룡의 집은 민족실업가인 최선익이 소유하면서 한상룡이 전략적으로 세운 일본식 가옥을 철거하고 집의 규모를 줄인 역사가 있고, 백인제라는 근대사의 주요한 인물이 살면서 민족의 비극을 읽을 수 있는 역사가옥으로 의미가 더해진다. 문화유산은 오직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거쳐간 인물들이 시대가 켜켜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상룡의 집이자 최선익, 그리고 백인제의 집인 이 역사가옥을 중요하게 살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최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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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좋아! F1963 




공장과 창고가 근사한 공간이라는 걸 세상이 알아버린 것 같다. 용도 폐기된 공장과 창고들이 카페와 예술공간으로, 상점과 쇼룸으로 변모하고 있다. 손댄 듯 안댄 듯, 오래전 생겨난 생채기들과 숨겼어야 마땅한 철골과 구조재들을 드러낸 거친 공간에 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과 다른 감각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새로운 행성에 발을 디딘 것처럼 다른 파동이 흐른다. 재료의 거친 질감과 무게감이 신체를 압박하고 불편한 온도와 강도 높은 소음이 신경을 거스른다. 까마득히 높고 넓은 공간이라면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공간의 압력에 신체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구조와 재료가 주는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복잡한 업무를 기꺼이 처리한다. 



부산 수영동의 오래된 공장지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철재 와이어를 생산하는 고려제강이 1963년부터 2008년까지 운영해온 공장이 그 주인공이다. 건물 면적만 1만650㎡에 이르니 누구나 탐낼 만하나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4년에 부산비엔날레라는 깜짝손님이 찾아왔다. 건축가 조병수의 설계한 기념관으로 시민들과 거리를 좁힌 고려제강은 이 오래된 공장의 문을 대중에게 살짝 열었다. 2016년에는 시비를 들여 리모델링하면서 주요 전시공간으로 본격 등장했다. ‘F1963’의 탄생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화려했다. 새롭고 낯선 장소의 기대감과 입소문으로 부산비엔날레는 흥행에 성공했고 메인 테마를 전시했던 시립미술관보다 더 많은 관객이 F1963에 몰렸다. 공간의 특성이 너무 강해서 전시된 작품이 주제와 긴밀해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과 오히려 작품이 특별해보였다는 의견이 교차했다. 



거칠고 센 공간일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F1963은 묘한 부드러움이 있다. 공장 외부를 모두 감싼 옅푸른 색의 경계면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보면 철판에 절단면을 넣어 늘린 전신금속(expended metal)이지만 빛이 투과되면 가볍게 물결치며 오래된 건물의 어두움과 무게감을 덜어준다. ‘세 개의 네모’를 겹쳤다는 간단한 설명답게 공간은 단순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페와 맥주펍이 양쪽에 자리 잡은 첫 번째 네모, 그 사이에 파고든 중정의 네모, 전체를 아우르며 뒤쪽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전시공간이라는 세 번째 네모가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관람객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철강와이어를 제조하는 회사답게 다양한 형태의 와이어가 구조를 지지하는 요소로, 혹은 디자인 요소로 사용되었다. 팽팽하게 잡아주는 견고하고 날렵한 와이어는 구조미와 함께 시선을 적절히 가려주는 반투명한 가림막의 역할을 했다. 외부공간의 독특함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이어와 모양도 성격도 닮은 대나무숲이 펼쳐져 공장이 아니라 공원 같았다. 공장바닥에 사용된 실제 금속판들은 외부 정원의 바닥돌로 재활용되었다. 바닥에 깔린 금속판을 따라 내나무 숲을 거닐다보면 옅푸른 물감을 칠한 가벼운 건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회가 끝난 후 F1963은 더 대담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카페와 맥주펍을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고, 올해는 인터넷 서점의 중고서적매장과 도서관, 갤러리와 공연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연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자선공연과 함께 브랜드의 런칭행사, 젊은 셀러들의 마켓 등이 열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상태다. 이와 더불어 부산 낙동강 주변의 문 닫은 공장지대가 예술공간으로 변모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좋은 사례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좋은’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에 대한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기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초고층빌딩뿐만 아니라, 요상한 감각을 전해주는 오래된 공장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다.   


글/사진 최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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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niel Koh 2017.03.04 02: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공장을 개조한 레스토랑은 미국 보스톤에 참 많습니다. 메사츠세츠주의 로렌스라는 시는 미국 최초의 산업도시도 개발되었죠. 전 로렌스시에서 10년정도 살았는데 그곳에는 1920년대의 들어선 붉은 벽돌 공장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공장지역은 주로 가죽 염색이 주요 산업이었는데 생산된 제품을 배로 운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수로도 공장주변에 많습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산업이지만 여전히 공장건물은 그대로 남아서 일반 사무실이나 레스토랑, 혹은 렌트 아파트로 쓰입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q=lawrence+ma+mill+restaurant+photo&oq=lawrence+ma+mill+restaurant+photo&gs_l=serp.3..33i160k1l2.4834.6204.0.6443.6.6.0.0.0.0.92.428.6.6.0....0...1c.1.64.serp..0.6.425...33i21k1.XEuaLx881lA











성당은 참담할수록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보여준다. 기도하는 인간, 겸손하게 몸을 숙이고 타인을 향해 팔을 벌리는 인간, 지고지순한 희망을 꿈꾸는 인간... 그리고 신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며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조각하고 가장 아름다운 빛을 드리우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던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은 건축기술도 부족하고 물자도 없던 시절,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쌓고, 한 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기둥을 세우며 이루어낸 성당이다. 





1892년이 축성된 약현성당은 고딕양식을 닮은 듯하면서도 그보다 이른 시대의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는데, 당시 그는 용산신학교를 완공하고 명동성당 공사를 막 공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고딕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장엄하게 지어진 명동성당과 비교하면, 약현성당은 규모도 작고 천장 구조도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공동체를 품어주는 넉넉함이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은 ‘최고(最古)’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건축학자들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초기 양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약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언덕에 약초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옛 지명인데, 질병을 치유해주는 약초밭에 성당이 지어졌다는 점이 무척 상징적이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의 사형집행장이자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서소문 밖 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약현성당은 피 흘린 장소를 치유하는 의미와 함께, 종교의 신념으로 기꺼이 죽음을 맞았던 인간들의 넋을 감싸안는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약현성당은 다른 성당과 다른 절실함과 신실함이 있다.





120년을 견뎌온 오랜 성당이기에 여러 차례 보수 복원공사가 있었다. 원래는 마루가 깔리고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는 벽이 있었는데 1921년에는 그 벽을 없애고 벽돌기둥을 석조기둥으로 바꾸어 견고하게 했고, 1974년에는 해체대보수를 실시해서 외벽돌을 교체하고 창호, 지붕, 바닥을 완전히 바꾸었다. 


1998년에 화재가 발생해서 지붕과 건물 내외부가 크게 훼손되자, 2000년 이를 보수하면서 성당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원형복원 공사를 실시했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외벽의 벽돌이었다고 한다. 요즘 벽돌과는 색도 모양도 공법도 다른 당시의 벽돌을 재현하기 위해서 고령토를 섞어 가장 흡사한 색을 냈고 오래된 벽돌과 조화를 이루도록 표면을 거칠게 제작했다. 내벽도 붉은 벽돌의 침착하고 단단한 색감이 돋보이는데, 오랫동안 뒤덮인 흰색 시멘트 모르타르를 벗겨낸 결과다. 이렇게 해서 120년 된 벽돌과 새로운 벽돌이 공존하며 거대한 성당을 이루게 되었다. 



건물은 시간이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백년이 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드리운 손길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복구하며 건축물에 담긴 정신과 전통을 이어온 수많은 사연들이 겹쳐진 후에야 건물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영롱하게 어우러진 빛 그림 속에는 시대를 넘나들며 만들어진 다양한 유리 조각들이 섞여있고, 단단하고 고요한 벽돌 속에도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수많은 손길이 있다. 시대가 엮어주는 작은 조각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의, 그리고 시대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유산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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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마북동의 조용한 동네에 기와를 얹은 전통 민가가 한 채 있다. 양반댁 큰 저택은 아니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사랑채 앞으로 넓찍한 마당이 있는, 제법 모양새를 갖춘 집이다. 풍성한 나무들이 있어 집이 더 넓어보인다. 겨울엔 이 풍경이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겠지만 봄이 오면 분홍으로 만발할 꽃나무들이 지천이다. 

한옥만 보았다면 이 집의 절반만 본 셈이다. 뒤쪽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된 이층 양옥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다. 건물 옆에는 두꺼운 돌판에 우산을 든 사람과 양옥집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집과 어쩐지 닮았다. 그림 위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 등장한 집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이곳은 화가 장욱진이 여생을 보냈던 집이며 화가의 예술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곳이다. 

장욱진은 집을 자주 그렸다. 초가삼간 작은 집이 땅과 하늘을 모두 담은 듯 광활하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들어앉아 있어도, 누정처럼 마루와 기둥과 지붕만 있어도 좋았다. 그림 속 집은 하늘도 땅도 물도 집의 일부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보듬어주었다. 그 집엔 새가 앉았다 날아가고, 황소와 수탉과 호랑이가 들락날락한다. 부처도 아이들처럼 슬며시 미소짓고 있다. 화문석 한 장으로, 방 한 칸으로 세상과 맞먹는 그림도 있다. 그림 속은 모두 평등하다. 나무 한 그루가 긴 강물처럼 하염없이 깊은 곳, 도인의 이상향처럼 말갛고 밝은 곳이다.

수많은 ‘집’ 그림은 화가가 살아온 여러 ‘집’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화가에게는 특별한 화실이 여럿 있었다. 남한강가 덕소에 화실을 짓고 혼자 생활하기도 했고 가족들이 사는 서울 명륜동 집 근처 한옥을 아틀리에로 꾸미기도 했다. 예순을 넘긴 뒤에도 수안보로 가서 농가를 고쳐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가족과 떨어져 화실 생활을 고집한 것은 그림에 대한 집념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세상과 절연한 채 은둔하며 오로지 그리기만 했다. 그 덕분에 어떤 경지에 이른 맑은 화폭과 개구진 표정의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맑고 옅게 절제된 이상향이 펼쳐졌다. 

1986년 예순아홉의 화가는 용인 마북동의 조선 후기 한옥을 사서 고쳤다. 아내와 둘이 살며 그림을 그림에 매진했던 화가는 3년 후 양옥을 지었다. 몸이 쇠약해지고 기관지가 약해진 화가가 조금은 편리한 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은 살림집 겸 아틀리에다. 이 집은 화가가 술을 마시며 그림을 펴놓고 인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흐른다. 그래서인지 양옥은 그림 같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집에서 맑은 밤을 유영하는 노인을 그린 ‘밤과 노인(1990년 작)’이 완성되었다. 

마북동 주택은 그림 속의 모든 집의 총합이다. 초가삼간처럼 아담한 작은 집도 있고, 양옥도 있고, 조그만 누정도 있으며, 화문석을 깔기 좋은 마당도 있다. 집도 온전히 화가의 작품이었다. 오래된 한옥을 손수 고치면서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길다란 나무판에 그림처럼 글자를 새겨 걸어두었는가 하면, 뒤쪽 정자에는 특유의 물고기 모양의 현판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채를 살펴보면 재미난 부분이 많다. 작은 창문이 예상치 못했던 위치에 뚫려 있었고, 조그만 문은 키가 큰 화가가 제대로 드나들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그 어느 나무 기둥도 반듯하게 재단된 것이 없었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채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양새가 흰 캔버스에 그어놓은 검은 선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부드럽고 온건한 형태의 밝음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고독하지만 밝고 따스한 온기야말로 웅숭깊은 고옥이 드러내는 예술가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 집은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 흔들리며 또 스스로를 세우며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집은 한 인간이 예술가임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 흔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할 때 진정한 감동의 공간이 된다. 

나는 그림 속 작은 집을 향해 걷는다. 작디작은 문을 열고 아랫목에 슬그머니 발을 뻗는다. 그림과 나는 일체가 되어 밝은 밤을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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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라는 소설을 읽었다. 명망 높은 건축가와 아틀리에에 속한 건축가들이 국립현대도서관 지명설계공모를 위해 가루이자와 인근 작은 마을의 여름작업실에 모여 건축계획안을 완성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여름작업실이었다. 그 시절만 되면 습관처럼 그곳으로 가게 하는 장소, 그런 힘을 가진 건축 말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책을 읽고 난 후 짙어졌다.

가루이자와로 대표되는 아사마산 부근의 고지대 마을은 메이지시대부터 부유층의 여름 별장지로 조성되었다. 상류층 외에도 선교사, 외교관, 문학가, 예술가, 학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여름을 즐기러 왔다. 그 중에는 윌리엄 메렐 보리스와 안토닌 레이몬드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들도 있다. 이들은 여름이면 아예 사무실을 가루이자와로 옮겨 작업을 할 정도로 가루이자와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델리키트, 딜레탕트, 데카당스.(delicate, diletante, decadance). 가루이자와에는 그들 지은 여름 별장이 여럿 있는데 비밀스런 취향의 공동체처럼 보였다. 지식인들, 문화예술인들은 자발적으로 ‘여름대학’ 같은 지식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소설 속 여름 작업실의 모델이 된 장소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Taliesin)’이었다. 라이트는 인생의 새로운 2막을 펼치고자 했던 1911년, 위스콘신 스프링필드의 자연 속에 건축스튜디오와 거처를 조성하고 ‘탈리에신’이라 명명했다. 웨일즈 고어로 ‘빛나는 이마’라는 뜻인데, 인생을 뒤바꾸는 명칭으로 충분히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라이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20세기 초를 석권한 건축 명제(그의 스승 루이스 설리번의 선언이었다)에 ‘건축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건축유기론을 더하고, 기하학적인 조형성까지 포괄했다. 라이트의 건축은 근사한 조형작품인 동시에 자연의 질서와 인간적 스케일이 공존한다. 이 새로운 근대건축론에 경도된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 지망생들은 기꺼이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탈리에신으로 찾아들었다. 

1938년에는 애리조나 피닉스 북동쪽에 탈리에신 웨스트를 열었다. 이로써 그와 제자들은 위스콘신의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있었고, 황량한 사막에서 자유롭게 유기건축론을 실험할 수 있었다. 탈리에신은 건축 스튜디오이자 라이트의 건축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건축학교이며 마을 안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탈리에신 웨스트에는 건축 스튜디오와 문서보관실 외에도 생활공간, 방문객을 위한 시설, 대형 거실인 가든룸이 있었고, 극장과 댄스홀 같은 오락시설도 추가되었다.  

라이트는 탈리에신을 자신의 사후에도 문하생들이 그의 건축론을 계승 발전시켜 학파를 형성하는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 의도대로 탈리에신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학교로 계승되었고, 한 건축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의 역할을 하면서 건축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위스콘신의 탈리에신은 1976년 국가로부터 역사자산으로 등록되어 보존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탈리에신 웨스트는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추진하고 있다.  


건축과 예술, 삶과 문화가 드넓은 대지에 조화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탈리에신을 살피다 보니, 삶의 체험과 철학, 인간애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그런 건축이 간절해졌다. 좋은 공간이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가슴 따뜻한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취향과 삶의 목적과 태도가 닮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우리에게 이런 장소, 이런 건축물이 있을까? 만약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면 당장 그곳으로 향하기를! 따뜻한 연대의 장소에서 참담한 시국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기를!    

참고로 가루이자와에도 다른 의미를 가진 탈리에신이 있다. 일본어로는 ‘타리아센’이라고 발음하는 그곳은 언덕으로 둘러진 호숫가 마을이며, 가루이자와의 황금기를 거쳐간 문학가와 예술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여러 여름별장들이 한데 모아 조성한 산책공원이다. 유원지처럼 요란스럽게 운영되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건축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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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weet-work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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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고 어려운, 이 문화유산들 

베를린 보로스 컬렉션



 



(보로스 컬렉션 : www.sammlung-boros.de)










                  




문화유산 연구자 이현경 박사가 이런 이야길 했다. “네거티브(negative)나 다크(dark)라는 개념보다 디피컬트(difficult)라는 개념이 우리 문화유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점과 시대에 따라 문화유산은 다양한 맥락을 가지므로 특성을 고정하는 단어보다 복잡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열린 언어가 적절하다는 뜻이다. 디피컬트. 와닿는 표현이었다. 특히,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건물군들은 이 단어가 필요했다. 외국어를 부러 쓴 이유는 ‘네거티브’ ‘다크’라는 단어가 문화유산과 결합해서 개념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전쟁유적. 예전엔 전쟁영웅의 무용담이 흐르는 호국보훈의 장소임을 부각했으나 지금은 반전과 평화의 의미가 더 중요해졌다. 나는 전쟁 유적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사건임에 틀림없는데, 어째서 모든 관점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아있는 것일까? 방치된 전쟁유적지들은 상당수 사라졌다. 전쟁 체험은 휘발되고 본질을 바라볼 시간을 놓쳤을 지도 모른다. 


파괴의 장소에 삶의 장소가 생겨난다면 그 역시 강력한 장소적 상징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속엔 교교히 전쟁의 아우라가 남아있지 않던가, 권력과 자본이 망각을 종용하며 흐르지 않던가? 삶도 땅도 건물도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토록 어려우니 ‘디피컬트’다. 



보로스 컬렉션(Sammlung Boros)은 그러므로 의미 있게 볼만한 건축물이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있는 거대한 장방형의 콘크리트 건물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주민 방공호로 지었던 벙커다.(보로스 컬렉션 홈페이지에는 강제노동자들이 건설했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제국 수도의 건축 총감독을 맡은 알베르트 슈페어의 마스터플랜 아래 카를 니콜라우스 보나츠가 계획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이라 불리던 나치 독일의 장대한 고전주의 건축물을 설계했던 건축가다. 웅장한 건축과 압도적인 퍼레이드가 합쳐진 나치전당대회를 조직했던 슈페어는 로마처럼 폐허가 된 뒤에도 아우라를 가지는 천년의 도시 게르마니아를 꿈꿨다. 불멸의 도시는 전쟁 종료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보로스 컬렉션이라는 걸출한 미술관으로 탄생하기 전까지 건물은 흑역사로 얼룩진다. 무역회사의 창고로 쓰이기도 했지만, 전쟁포로를 수감하거나 보통은 에로틱하고 미심쩍은 대규모 행사용이었다. 1995년 이후로 전시공간으로 간혹 사용되었고 2003년 크리스찬 보로스가 구입해서 소장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바꾸었다. 옥상에는 보로스 부부의 집이 꾸며져 있다.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로 가볍게 얹혀진 증축부분이 절묘하게도 거대한 벙커와 잘 어울린다. 



예술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기꺼이 치유해주는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간은 힘이 세다. 거칠고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질감이 되어버린 이 건물에서 예술작품은 맥 빠진 존재가 되기 쉽다. 장소의 기억과 그 장소의 감각이 각인된 후에는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음지의 장소에 환한 빛을 뿌린다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전쟁 건축에 대해, 폭력과 광기에 쉽게 사로잡히는 인간에 대해, 그 모든 것을 감싸주는 예술이라는 인간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전쟁 지도부의 책임을 통렬히 언급함으로써 히틀러의 최측근 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다. “정권의 수장이 독일 국민과 세계 시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버린 이상 저에게 그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회고록을 남겼다. 


우리도 비슷한 무게의 짐이 있다. 우리는 침묵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질문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건물은 역사이고 역사는 결코 순결할 수 없다. 그 복잡함과 어려움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결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디피컬트. 그게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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