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고 도시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넘어서, 건축가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건축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단호한 목소리 아닐까? 한때 우리에게도 ‘말 많은’ 건축가가 있었다. 정부의 주택 정책의 부실함과 인권유린을 분명한 목소리로 비판했던 김중업. 그는 소위 블랙리스트 건축가로 낙인찍혀 10여 년을 해외로 떠돌았다. 그런데, 그의 건축에서는 오히려 희망이라는 감정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건축가는 건축으로 비판하고 건축으로 희망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김중업의 인생 변곡점은 1952년 세계예술가대회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3년을 보내며 유럽 건축을 제대로 흡수하고 돌아온 그는 전후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게 프랑스 문화훈장을 선사한 프랑스대사관 본관과 관저, 서강대 부산대 제주대의 본관, UN묘지 정문과 채플,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던 삼일빌딩, 최근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된 장충동 서산부인과, 예술경매에 등장하여 ‘건축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옛 한국미술관 등 감각적인 풍요로움과 힘찬 역동성이 느껴지는 건축물이 한국건축사에 등장했다. 그리고, 김중업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자신을 위한 박물관으로 헌정된 유일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김중업 건축박물관은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있다. 안양을 대표해온 유유산업이 1959년부터 본관과 연구소, 공장과 창고 등을 신축하고 증축하면서 사세를 확장해온 바로 그 자리다. 김중업이 설계한 네 동의 건축물(본관, 연구동, 창고, 경비실)이 남아있는데, 대지를 거스르지 않고 앉혀진 건물들은 자연이라는 컨텍스트를 강조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조각상과 구조적인 장식이 어울린 본관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전시와 휴게공간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창이 많아 부드러운 빛이 넘실거리는 2층짜리 연구동은 김중업의 건축관을 보여주는 건축박물관이 되었다. 패기 넘치는 야심찬 디자인을 겨우 삼십대의 건축가가 해냈다는 것이야말로 당시가 젊고 역동적인 건축의 시대였음을 실감케 한다.  















건축가가 생전에 꼼꼼히 기록한 노트와 앨범, 건축 도면을 디지털 화면으로 꼼꼼히 살필 수 있는 아카이브와 프랑스에서 제작된 ‘건축가 김중업(1970)’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영상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 되려고 건축을 포기했다가, 시를 버리고 건축으로 돌아왔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빛과 자연이 콘크리트 공간에 아름답게 녹아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그의 건축에 ‘시’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 지 알 것 같다. 김중업의 건축은 도약과 비상의 언어가 읽힌다. 완곡하면서도 절실한 감정이다. 대지의 조건과 인간의 신념이 건축이라는 언어로 번역될 때 필요한 것은 건축가가 품고 있는 세계, 꿈이다. 









펜으로 그린 도면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서 건축가의 의지를 더듬어본다. 도면에서 치열한 삶이 읽히는 건 왜일까? 삶을 혁명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하며 영혼을 고양시키는 비상. 그것이 김중업이 꿈꿨던 건축이기 때문이다. 김중업은 ‘건축가란 역사에 삶을 건 사람이며, 죽음 뒤에 닥칠 책임이 더욱 무거운 것’이라고 했다. 올곧은 선을 긋게 하는 건 곧 건축가라는 자존심이다. 김중업이 견지했던 짱짱한 자존심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건축이 희망이 되는 일은 지금도 유효하다.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춘 단어들 - ‘시’, ‘꿈’, ‘희망’과 같은 감정의 단어들을 건축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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