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떤 모임에서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쓴 책인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두 문장으로 근대문화유산 기행을 하게 된 배경과 의미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그러고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내가 백년 전 건물을 보고 백년 전 이야기를 수집하는 이유는, 그 시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잘 알고 싶어서라는 거였습니다.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노력보다는  지우고 없애는 데 익숙한 지금을 돌이켜보고, 시대를 연결하는 지점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기는 글과 사진들이 기록물로서 좀더 가치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의 길 위에서 도시를, 어떤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하나로서. 







오늘은 용산으로 갑니다. 





용산은 참으로 복잡한 맥락을 가진 지역입니다. 근대시기, 철도로 인해 새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을 수용하면서 세를 키우기 시작한 용산은 일본군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해방후 일군영은 미군부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지요. 해방 후 월남한 사람들이 자리잡은 해방촌,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집창촌, 다문화지역인 이태원, 곳곳에 고개를 쳐드는 재개발 바람과 최근 와해되고만 용산 국제업무지구 등등...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맥락을 가진 곳이 용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후암동, 갈월동, 해방촌 일대는 걸어본 적 있지만 좀더 철도와 가까운 지역들을 탐색하면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없나,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서너 차례 신용산과 구용산을 넘나들며 걸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구용산과 신용산이라는 지명이 실제 사용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라고 합니다. 전철역에만 붙은 편의상 지명인줄 알았는데, 1920년대 지도에서 용산역을 기점으로 서측편은 구용산으로 동측편은 신용산으로 표기하고 있더군요. 옛 지도들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흐릿한 능선이었던 곳이 점차 도로가 되고 필지가 되면서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을 지도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새로 생긴 도로와 옛 도로 사이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도를 무척 좋아합니다. 지도는 비교해서 볼 수록 재미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봐야할지 까마득할때 지도를 펼쳐봅니다. 그러면 가봐야할 장소들이 점차  뚜렷해집니다. 


 

1940년 제작된 대경성명세도의 구용산 부분입니다. 





같은 지역이구요. 1945년 미군이 제작한 경성지도입니다.  



지도를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철도 관사라고 표시된 지점입니다. 위의 지도는 부분만 캡쳐한 것인데, 전체지도를 보면 용산역 우측 하단에 철도관사촌 필지가 크게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효창공원 근처에도 철도관사촌이 생겨났는데, 지도로 보아 1930년대 이후의 일로 추정됩니다. 능을 옮기고 효창원 넓은 부지가 개발되면서 격자형 필지가 생겨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관사들은 등급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기록할만한 사례들이 지방에는 조금씩 남아있습니다. 용산은 어떨까요? 뭔가 남아있는 게 있을까요? 



두번째로 가보고 싶은 곳은, 불교 자제원으로 표기가 된 곳입니다. 1948년 12월 이곳에서 화가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꽃처럼 어여쁘고 귀했던 여자의 말로는 더없이 처참했습니다. 그녀가 왜 용산 자제원에 있었는지 그 누구도 알수 없으며 왜 거기까지 흘러왔는지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곳이 그녀의 마지막 거처였을 뿐입니다.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영역에서 숙대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효창공원쪽으로 꺾어집니다. 이 동네가 청파동입니다. 청파동이라고 하니,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





빈 들판을 서성이는 말을 잃은 짐승처럼 시는 처절하고 거칠고 직설적으로 사랑의 폐허를 말합니다.  청파동 골목길을 돌아 마주친 몇몇의 집 풍경들이 시어들과 묘하게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집, 사람이 살지 않는 집, 폐허가 된 집, 온기를 잃은 집 들 앞에서, 사랑의 폐허를 보는 것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듯이요. 갈길 잃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집 앞에서 시어들이 날아듭니다.  














효창공원을 지나 일대를 한바퀴 돌면서 우리는 점차 관사촌과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빌라촌으로 바뀌어버려 필지의 흔적만 남아있는 거리에서 초창기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필지가 크고 넓어 상당히 큰 관사들이 자리잡았겠구나, 하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퉁이 앞에서 만난 건물 한 채. 당시의 구조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일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맞은 편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서야 집의 형태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옵니다. 즐거운 수확을 했다 싶습니다. 건축학자는 아니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 중에서도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건축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부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쉬워하며 골목을 돌아나옵니다. 










원효로도로 주변의 집들은 여전히 복잡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식 연립주택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촘촘히 어깨를 맞댄 집들이 무수히 넘어온 세월이 참 길어보입니다. 멀리서 초고층 건축물이 하늘을 가릴 듯 서있는가하면,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양식의 건축물들도 틈틈이 넘나듭니다. 좁은 경사 골목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길을 잃을 뻔합니다. 오래된 골목들도 그대로입니다. 낡은 곳을 나름의 방식으로 덧대고 옷을 갈아입히며 마치 집과 사람이 동반자처럼 함께 살아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불교 자제원이라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도에서도 꽤 번듯한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 자리에 지금은 용산경찰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대에 일제강점기 일본식 사찰이 상당히 많았고, 그 중 하나에서 운영하던 시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병원은 전염병 환자 등 격리 수용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기도 했고, 행려병자들을 거두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립병원의 하나가 되었다가, 병원이 이전하면서 용산경찰서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용산원정 일뎡목십이번디 일본인의 경영하는 불교자제원에서는 이전부터 시내각처에서 의지가지가 업시 류리개걸하는 행려병자들을 수용하야 여러가지로 구제하여왓슴으로 지금도 약 오륙명 가량이 그 병원안에잇다는데....(하략)"

1926년 1월 9일 동아일보 




이곳에서 한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녀,  5척 3촌의 신장을 가진 정상신체의 여인이 흐트러진 머리에 남루하고 낡은 옷을 입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립자혜원에서 병사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여류화가, 구미만유를 다녀온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여인이 쓸쓸하게 떠난 곳입니다. 


나혜석의 죽음을 말해주는 것은, 공보처에서 발행한 관보의 내용입니다. 1949년 3월 14일자 관보에 본적, 주소가 미상이며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53세 여인이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에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흔적을 짚어보려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시간 위에 얹어진 인간의 향기를 더듬어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머물렀던 서울의 장소들을 좀더 쓸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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