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 답사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특정한 건물을 보는 일일수도 있고,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말하기도 하고, 또, 조망할 필요가 있는 인물들이 머물던 장소를 가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아주 오래되고 기묘한 형태의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을,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하고서, 도대체 저건 무엇이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호기심이 문화유산 답사의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고 싶어서 시작하게 된 답사는 어느 순간, 이번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뀝니다. 










다섯번째 용산답사는 구용산으로 분류된 지역으로 '원효로 일대'를 돌아보았습니다. 



보통 용산이라고 하면, 용산역의 동쪽 넓은 지역을 연상하게 되는데, 원래 용산은 한강변에 있는 산의 이름이었습니다. 높지는 않으나 한강이 내려다보여 경치가 좋은 곳이었지요. 철도가 생겨나 용산역 동측이 신용산으로 개발되면서 어떨결에 원래의 용산지역은 구용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용산신학교와 용산성당이 용산의 원터가 어디쯤인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름이라고 하지요. 



'원효로'라 이름붙여진 이유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당나라를 갈 때, 서울을 지나갔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기반하여 (효창공원에 원효대사의 동상이 참 뜸금없이 서있는 이유지요.) 효창원의 의미를 부여하여 결정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좀 허무맹랑하게 들려서, 아마도, 이 지역의 일본식 이름인 '원정'과 '효창원'의 만남으로 '원효로'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성의없는 결정 같기도 합니다. 제강점기 동명을 개정할 때 대부분의 동명이 특별히 옛 지명을 되살리곤 했는데, 원효로는 불분명한 지점에 있습니다.  







'용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용산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을 찾아가보았습니다. 

성당은 1902년에 세웠고 명동성당을 세운 코스트 신부의 주도로 세워졌습니다. 성당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습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층고가 높아서 종교적인 경건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교는 1892넌에 세워졌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라 하는군요. 신학교는 혜화동으로 옮겨가고 건물에는 <성심기념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수녀원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붉은 벽돌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시간을 가늠하기기 어려우면서도 흙이 주는 안정감이 있지요. 우리 전통 건축에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나 벽돌의 전통이 있긴 합니다. 언제부터 붉은 벽돌 건물이 생겨났는지, 왜 벽돌집이 널리 사용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성당내부로 들어가봅니다. 마루바닥이 잘 닦여서 기분좋은 느낌을 줍니다. 볕도 환하게 들어 평온하고 느낌을 줍니다. 출입문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상징들이 그려져있습니다.


IX JUNII MDCCCXCIX / XIV APRILIS MCM I I 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로마자로 적힌 연도숫자이겠지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자면 (M=1000 D=500 C=100 L=50 X=10 V=5)  1899년 6월 9일과  1911년 4월 14일 두개나 나옵니다. 앞엣것은 용산신학교의 개교일이고 뒤엣것은 교구가 분리된 날이라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날짜와 성인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상징이 있습니다.수수께기의 상징들은 모종의 메시지같습니다. 어느 집단들만 공유하는 명백한 글자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밀스런 수수께기가 되기도 하지요. 

 


예수성심성당과 수도원은 성심여중고와 함께 있습니다. 누군가, 카톨릭계 학교답게 규율이 엄격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정말 그러한지 궁금합니다. 












학교를 나와 원효로 사거리로 향하는 골목에서 일식 목조가옥을 만났습니다. 주택은 아니고 회사 건물로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내부는 어떤 구조일까요? 시간이 멈춘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물의 변화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서로 각기 다른 매스와 재료, 색의 건물이 겹쳐지는 거리를 걸어봅니다. 












원효로 일대를 다니면서 우연히 발견한 건물들입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만 가치있는 건 아닙니다. 독특한 경관을, 도시의 특징과 흐름을 보여주는 모든 건물들이 가치가 있습니다. 디자인이 훌륭하건, 건축적으로 가치가 있건, 그것과 전혀 무관하건, 모든 건물들이 도시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똑같은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자그마한 차이에 유쾌함을 느낍니다. 


나는 그 차이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미세한 차이, 그 미세한 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효로에서 꽤 공들여서 세심하게 지은 건물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 보수하고 쓸 수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모두 비었습니다. 과연 건물주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이 건물은 어떻게 될까요? 1년후, 혹은 10년 후, 이 자리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건물 하나하나의 변화 과정이 도시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수준일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역사가 오래된 건물도 마구 허물고 새 건물 짓기를 아주 좋아하지요. 그 자리에는 때론 거대한 우주모선 같은 것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감각도 없고 어떠한 문화적 고려도 없는 싸구려 임대건물이 세워지기도 하고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어느 거리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것도 생겨납니다. 저는 싸구려 재료로 싸구려 임대건물이 들어오는 게 가장 한심스럽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것을 건축주의 직권으로 없앤다면 그 자리에 그만큼 의미있는 것을 만들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변화가 이 사회와 시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용산 답사 네번째, 오늘은 삼각지입니다. 삼각지 전철역과 한강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1972년에 지어진 삼각아파트와 그쪽의 경성전기회사의 창고 건물 외에도 일제 강점기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비어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 건물도 있고 지금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궁금한 건물도 있습니다. 


삼각지라는 지명의 연원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한강과 서울역, 이태원으로 향하는 세갈래길을 뜻하며, 경부선 철로가 건설된 후 생겨난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각지 바로 아래에 삼각맨션이 들어와있지요. 삼각맨션 뒤에 역시 삼각형의 부지가 있고 오래된 창고 건물들이 여러 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용도의 건물인가 싶은데, 옛 지도에는 이 지역으로 전차철로가 들어가며 '일한와사00'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가스회사였습니다. 이 창고부지는 어떻게 사용될까요? 




































한강로쪽으로 내려오면 이런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1926년에 완공된 간조 경성지점 사옥인데, 건물 내부에 건축연도와 시공사의 이름이 새겨진 패널이 있습니다. 지금도 꽤나 웅장한 모양새로 적당한 장식이 아름답게 남아있는데요.  입구 오른쪽에서부터 건물의 뒷면까지는 보수한 흔적으로 벽돌타일 위에 보강하고 드라이비트를 칠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용산구 문화재>라는 책자에 실린 것으로 <조선과건축>이라는 일제강점기 건축전문잡지가 원 출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조선과건축>은 일본어로 발간되던 잡지이며 조선에 지어진 최신 건축물들을 소개하던 잡지였습니다. 간조라는 회사는 압록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시공한 철도회사라고 합니다. 이렇듯 용산에는 일본 기업체나 건설회사들이 지점을 설립하는 주요 장소였습니다.   











너른 부지에 신경써서 지은 주택 건물도 발견했습니다. 이 건물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요? 부지도 넓고 건물 규모도 크며, 현재는 건물 바로 옆에 창고가 있어 무역회사나 회사의 창고와 사무실 겸 주택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건물 뒤쪽에도 부속건물들이 있어서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상당히 넓은 부지의 주택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일본식 단층 건물로 보이는데요. 정원이 넓어져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주택 뒤에는 2층짜리 양식건물이 덧붙여져있다는 것이지요. 상업용도의 건물과 주거가 연결된 건물이겠지요. 지금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삼각지에서 경부선철로쪽으로 향하다보면 일제강점기 상가 주택들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중 한 건물은 재미있게도 햄버거 가게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2층 내부에 목조 천장을 훤히 열어서 오래된 집의 냄새를 여실히 풍깁니다. 작은 집이지만, 이런 장소가 얼마나 재미있고 소중한지요. 오래된 집들을 보면서 한번 들어가서 내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런 욕망을 충족해준 곳입니다. 








이 건물은 규모도 크고 장식도 훌륭하여 특별한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출입구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으니 주요 사옥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철도부지 주변인데다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어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겠지요. 시대를 짐작하게 하는 오래된 집들을 바라봅니다. 곧 어떤 식으로든 재개발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고가를 건너 철로를 지나갑니다. 경부선 철도의 서쪽으로 건너옵니다. 동네명은 문배동인데, 문배산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지역은 용산공설시장이 처음 생겼던 장소인데요. 이후, 공장시설이나 그 배후 시설들이 자리잡은 곳입니다. 지금은 창고건물과 식당 등이 있습니다. 









남쪽으로 걸어내려오면 오리온 제과 공장이있습니다. 박공지붕과 벽돌 건물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지요? 

모리나가 공장이라고 용산 거주하시는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들을 보면, 과연 어떤 이유로 생겨나와 지금까지 살아남아있는지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러고보면 민중생활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연로하신 분들의 구술사를 남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가치가 높아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기 떄문에 가치가 높은 것이니까요.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하는 것이니까요. 










당고개 순교성지를 지나갑니다. 


신계동 아파트 단지안에 있는 이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10여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최근 서소문 순교성지를 공원화하는 사업이 공표되었던데, 서소문과 새남터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입니다. 신계동 아래로 내려오면 개발과 비개발 사이에서 신음하는 지역이 등장하다가 용산 역 주변 상권지역과 연결됩니다.



한적한 골목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어렸을적 자주 마주쳤던 골목길이 아닐까요? 

집 밖에 내놓은 의자들이 정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구나 빛나는 하루를 살고 있겠지요. 

이들의 삶이 더이상 위협받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남영동을 돌아보면서 1호선 남영역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전철역 플랫폼의 동쪽편에는 예사롭지 않은 검은벽돌 건물이 서있습니다. 마치 묘비석처럼 특징없이 거대하게 서있는 건물 덩어리. 이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일행이 말해주었습니다. 대.공.분.실. 이 말을 듣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배어나옵니다. 


왠지, 과거 속에 사라져버렸을 것만 같은 건물이 눈앞에, 그것도 거의 매일 타고 다니는 1호선 전철 인근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대공분실의 조사실에서 고문을 당하며 죽었거나 죽음을 가까이 겪었거나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 이야기를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그 남영동 대공분실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오싹하도록 생생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건물은 속을 보여주지 않는 묵직한 어둠을 품고 서있습니다. 대공분실이 더 이상 대공분실의 기능을 하지 않으며, 문제의 장소인 조사실은 심지어 누구나 관람하고 그 역사에 대해 질문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우리가 과거사에 대해 이토록 오픈된 자세를 가지고 있다니요. 악명 높았던 대공분실은,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76년 치안본부의 대공분실로 지어진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졌습니다. 과연 건축가가 이 건물에서 자행될 일을 알고 설계를 한 것인가, 그렇다면 건축가의 윤리는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건축계에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지요. '남영동 1985'라는 영화가 개봉된 후, 대공분실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묻혀있던 김수근의 건물도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건축가는 고인이 되었고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침묵하는 가운데, 건물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은 벽돌로 조형물을 만들 듯이 시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건축물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축물을 보면, 빛과 그림자가 아름다운 선과 면을 이루며 마음에 파문을 던집니다. 건축이 말을 거는 것 같고, 시를 읊는 것 같지요. 붉은 벽돌 외에도 공간사옥에서 볼 수 있듯이 검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도 있습니다.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에도, 벽돌이 쌓아올린 면면이나 비례감, 창이 주는 율동감 등이 좋게 다가왔습니다. 막 지은 건물은 아닌거죠. 이름난 건축가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작품의 하나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건물에 가까이 갈수록, 상층부의 검은 벽돌이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알고보니, 원래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는데, 후에 2개층을 더 올려서 7층으로 증축했습니다. 그렇지만 조사의 용무는 5층에서 계속 진행했나 봅니다. 건물은 대공분실이라는 업무 특성상,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채 위장했다고 합니다. 두꺼운 철문, 철조망으로 둘러싼 담도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대로 두어 과거사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지요. 내부는 리모델링이 되었지만, 현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1976년 10월 2일 건물의 준공. 

관리실, 옆에 있는 두 별관 건물, 조경, 뒤쪽에 테니스 코트까지 함께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인권센터로 사용중인 본관과 아동, 여성, 장애인 경찰지원센터로 사용되는 별관을 연결하는 부분. 

벽과 기둥, 통과하는 문 등이 지루하지 않게 구성되었고 다양한 틈새 공간을 촘촘히 배치해두었습니다. 

마치 골목을 걷는 것처 다양한 느낌의 장소를 거쳐가게 됩니다. 직원들의 야외 휴게시설이겠지요. 

 



외부로 보여지는 벽은 단순한 벽면처럼 구성했지만 내부의 벽 하나는 요철을 두어 지루하지 않게 했네요. 

이공간의 내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요. 



1호선 철로와 바짝 붙어있습니다. 빈번하게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이 꽤 귀에 거슬립니다. 




크고 작은 창이 리듬감을 줍니다. 문제의 좁고 길쭉한 창이 계속 공격 대상이 됩니다. 

조사실의 창이 바로 좁고 긴 형태인데, 피조사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혹은, 피조사인에게 

불편함을 주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거죠.  







정면에는 큰 창이 있고 번듯한 출입구가 있는 반면, 피조사인을 끌고 올 때 

철조망 담쪽의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원형계단입니다. 5층까지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1층에 전시된 사진에는 콘크리트로 된 계단이 보입니다. 그런데, 1층에는 철제계단이군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콘크리트로 된 계단 공사 장면이 보입니다. 계단 옆의 사진은 1976년 공사 당시 모습입니다. 






관람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피조사인은 눈을 가린 채 차에 실려와 뒷문으로 들어오고, 원형계단이나 그 옆에 있는 3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조사실 복도는 마치 감옥같은 구조입니다. 리모델링한 후인지 보통의 아파트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어둠침침한 복도는 무척 불길하게 보입니다. 문에 달린 작은 렌즈는 안에서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피조사자들을 감시하는 수단이었지요. 







(도면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9432.html)


문제의 도면입니다. 하지만 도면 작성 연도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정면도를 보면 1983년 증축된 도면인데, 

평면도는 언제 것인지 사진상으로는 파악이 어렵습니다. 어쨋건, 조사실이라고 쓴 부분은 정확히 보이네요. 

조사실에는 욕조와 변기 세면대, 침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있습니다. 원형계단, 그리고 두개의 분리된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이렇게 상세한 도면을 보니, 김수근은 건물 설계자로서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건물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난후 김수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이후, 아무런 코멘트도 남기지 않았던 걸까요? 


김수근은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직전인 1986년에 사망했습니다. 





(사진출처: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454)

콘크리트로 된 원형계단입니다. 안창모 교수님이 2005년 답사한 내용에 이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5층의 계단부분은 문이 잠겨있어서 인권센터측 안내자와 함께 있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바깥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 박종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자료들이 4층 추모실을 채우고 있습니다. 






작은 욕조와 움직이지 않게 박아둔 책상과 의자, 주황색 타일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게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다른 방은 모두 시설이 철거되고 리모델링 되어있는데, 이 곳은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이 방은 9호실로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 죽은 장소입니다. 1987년의 일입니다.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을 당했던 14호실은 좀 큰 방이었습니다. 내부는 리모델링되었지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붙여 놓은 흡음판과 검은 유리로 된 카메라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역한 공포와 말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이 내 몸을 덮치는 것만 같습니다. 1987년부터 88년까지 관련 기사들을 읽으면서 괴로움은 더 커졌습니다. 고문기술자라는 사람들의 잔혹한 폭력 언어로 쓸수가 없군요. 




안내를 맡아준 경찰청 홍보 담당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의 목적은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조사를 할 때, 밀폐된 시설에서 하지 않습니다. 이 건물의 조사실은 구조로 보면, 조사가 아니라 구금시설입니다. 형이 확정된 사람을 구금하는 시설이죠. 서대문형무소처럼요. 조사를 진행하는 장소의 구조가 구금시설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그 자체가 인권 유린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사실은 존재만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현재, 대공분실은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꿨고, 남영동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이 장소에 경찰인권위원회가 들어온 것은 2005년 노무현대통령 재임하의 일입니다. 불편한 과거사를 공개하며 현재와 화해를 시도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사건에 개입된 소위 고문경찰관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추모하고 애도하는 일만으로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처벌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국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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