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진축제에 사진을 출품해보세요!" 




얼마전에 서울사진축제에서 시민답사를 기획하는 H씨와 만났습니다. 답사 프로그램 하나를 준비하기로 하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시민 사진을 응모하는 부문에 참여해보라고 했습니다. "1880년에서 1980년 사이의 서울의 나들이 사진"이면 가능하다며, 조선호텔 숙식권 등등의 훌륭한 부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이죠. 부상에 눈이 어두우려는 찰나, 나는 부산 출신이며 1997년에야 비로소 서울이라는 땅을 밟아보았다는 엄연한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랬더니 H씨가 말합니다. 


"부모님 사진이면 더 좋죠! 옛날 사진이요!"





그리하여 시부모님이 찍으신 사진들 중에 재미난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장롱을 뒤지게 되었습니다. 예상보다 서울의 장소가 뒷배경으로 등장하는 사진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실내에서 찍혔고, 야외에서 찍은 것은 교외로 나들이갈 때였기 떄문이지요. 지금처럼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이 아니었으므로, 사진은 특별한 날, 특별한 시간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한때 카메라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던지요. 


옛 사진을 들추며 이야기 하는 시간을 꽤 즐거웠습니다. 부모님의 60년대 초반의 결혼식 사진이나 뭔가 자신만만한 포즈를 하고 있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들으며 웃을 수 있었지요. 이 겹겹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디엔가 모여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였습니다. 




시아버님이 결혼 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찍은 캠퍼스의 일상들이 아주 조그만 사진 속에서 펼쳐집니다. 1950년대의 대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고향 부여에서 친구들이나 친지들이 서울나들이하러 왔을 때 창경원과 종로와 중앙청을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옛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옛 기억에 흐뭇해지셨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 중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돌아간 분들도 있습니다. 오래된 사연이 깊숙이 숨겨진 기억저장소에서 뛰쳐나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 아버님은 예의 허허 웃으시고요. 


이십대로 잠시 돌아가셨을까요? '학우'라고만 짧게 설명해주신 그 단발머리 여학생을 떠올리셨을까요? 



저는 그 중에서 한 장을 골라 아버님의 사연을 적어 응모해보았습니다. 얼마 후, 담당자로부터 사진이 전시장에 걸릴 것이며, 도록에 실릴 것이니 전시장을 방문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울사진축제의 본전시는 아카이브 사진들로 채워져있습니다. 한성-경성-서울로 변모하는 동안 도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풍경들이 사진에 담겨있습니다. 사진은 시정을 홍보하기에 좋은 수단이었으며 스펙터클한 장면을 작은 화면에 담음으로써 편집된 시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실된 모습을 기록하는 장치인 동시에, 왜곡된 관점을 심어주기에도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도시가 담깁니다. 낡은 것을 허물고 규격화된 고층건물들이 심어지는 과정과 놀랄만큼 거대한 것들이 이식되는 것이 곧 발전하는 도시라는 공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놀랄만한 수단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곤란한 것들입니다. 과거 백년 동안 '서울'이라는 도시는 기념비의 도시였습니다. 경성시대뿐만 아니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하던 60-70년대의 서울의 풍경 또한 그러했습니다. 온갖 동상이 세워지고 모노리스를 방불케하는 숱한 고층건물들이 자리잡으면서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무한의 도시였습니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높은 것들 아래에 가려진 그림자 속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서울은, 꽃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고 새로운 반면, 늘 분열하고 불안하고 저항하고 눈물을 흘리던 곳이기 떄문이지요.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과정이 시기순으로 담겨있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지요. 

 총독부 청사의 기억은 나에게는 전무합니다. 하지만, 아래의 건물은 나의 기억에도 뚜렷합니다. 








남산 외인 아파트의 철거장면입니다. 두 동의 아파트가 풀썩 풀썩하고 무너져내렸던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던 것이지요. 그 기술이 그 당시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관광과 여가의 장면이 자주 포착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경원이군요. 창경궁이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삽입하면서 궁궐에서 정원으로 바뀌었던 시절부터, 다시금 궁궐로 되돌려지던 1984년까지 이 장소는 밤이건 낮이건 시민들의 여가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사진들을 보면, 없었던 건물이 생겨나고 묘한 형태로 바뀌었다가, 놀이공원의 위락시설까지 생겨나 휘황찬란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아연할 수밖에 없지만, 한때 그곳은 밤벚꽃놀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월드컵 쇼에 등장하는 나신의 무희를 보려고 사람들이 밀려들었지요. 1984년 궁궐의 옛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이후에 삽입된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대온실을 제외하고) 벚나무 등 외래종 식물을 제거하고 전통수목들로 채웠습니다. 춘당지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건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왕가박물관이 등장한 이후 근처에 1915년에 귀한 왕실 서책들을 보관하던 장서각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1938년에 덕수궁 미술관이 지어져 이왕가미술관으로 개칭되면서, 원래 이왕가 박물관 건물(1911년 건립)로 장서각의 서가가 옮겨가고, 이 건물은 생물표본관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1984년 궁궐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철거된 건물 중 하나입니다. 


상당히 이질적인 건물이기도 하지만, 건물의 형태가 워낙 독특하여 관광지 사진사들이 이 건물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던가 봅니다. 


그러고보니 그 시절에는 관광지마다 사진사가 있었지요..








시민들이참여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오래된 사진 속에는 도시의 풍경이 마치 지금의 것처럼 생생하게 담겨있습니다. 모든 시간마다 장소들은 인물들과 생생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남산식물원 앞에서 시간차를 두고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사진을 봅니다. 그 기억들이 과거의 것으로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대번에 알아챕니다. 홀연히 나타나 바로 어제의 일인양 존재합니다. 


사진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과 같은 것일까요?  단숨에 수십년 전의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니 말입니다.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적인 기록이 공공의 영역으로 편입됩니다. 그의 기록은 도시의 역사를 말하는 공공의 기록이 됩니다. 옛 사진 한장이 50년 후에는 엄연한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역사의 증인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록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서있습니다. 뒤로는 정동 성공회성당이 보입니다. 그 양옆으로 이상한 건물이 서있습니다. 왼쪽에는 덕수궁이 있을 것이며, 돌담길이 이어지겠지요. 1962년 혹은 1963년, 아니면 1964년... 서울시청 앞 풍경은 이랬습니다. 그 사진 속에 영원히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쳤던 재건시대의 청년들, 그들이 보았던 서울은 어땠을까요?


그때의 서울은 안녕한가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부산에 살던 무렵인 듯하다. 버스를 타고 자갈치 시장을 지나오는데, 묘한 집들을 보았다. 연대가 상당히 거슬러올라가는 듯 보이는 목조가옥들이 희뿌옇게 먼지를 날리며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풍경이 스쳤다. 자갈치인듯 자갈치가 아닌 그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나는 궁금해하면서도 낯선 기운에 발을 디디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희미한 안개를 타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산을 방문한 지난 달, 우연인듯 필연인듯 그 거리를 지나갔다. 가을이라 하기에 너무나 쾌청한 날씨 덕분에 예전에 보았던 그 희끄무레한 어둠은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곳에서 홀린 듯 집을 구경했다. 원래 자갈치 시장이 있었던 자리가 이곳이라 했다. 적어도 192-30년대에는 생겨났을 법한 일본식 목조형 상가들이 지금껏 남아서 도열해있는 희안한 곳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이 생겨나기 시작했을까? 부산의 가장 크고 유명한 이 어시장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을까? 어떤 활동들이 있었을까? 골목마다 수십년에서 길게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건물들이 자신의 시대를 먼지 아래 지우면서 생선을 파는 일에만 골몰해왔다. 지금은 공동어시장 센터에 주요상권을 내주고 건어물시장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길 끝에 옛 시대 어시장 건물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부산은 비린내가 내재된 도시다. 먼 곳에 오래 있다가 부산역에 내렸을 때 나는 들큰하고 짠 내음이 코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짠 내음과 비릿한 바다 냄새는 엄마 몸냄새처럼 익숙하고 유난스럽고 다정하고 안심을 주는 그런 것이다. 끈적이는 짠 맛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생물들의 냄새인지, 그 바다에 몸의 일부를 비비고 사는 인간들의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다. 부산에 사는 한, 사람과 바다와 땅은 하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거대한 밀도의 물에 익숙해지고, 짜고 비린 냄새에 익숙해지고, 대책없이 새파란 하늘에 익숙해지고, 또 먼지 한오라기 남기지 않을 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부산이다. 









지금 남포동 수협으로 바뀐 저 장소가 최초의 어시장 건물이라고 일행이 알려주었다. 부산시 수협의 전신인 부산어업조합의 자리란다. 어선이 실어온 물고기를 자갈밭 해안에 내다팔던 시장이 열렸다고 자갈치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남포동 수협 건물 앞이 모두 찰방찰방한 해안이었다는 이야기다. 복개된 해안 위에 서서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바글바글 시작된 어시장은 지금 다대 공판장, 자갈치 공판장, 남포동 건어물 공판장 등 세 개의 공판장에서 2천억원이 넘는 위판고를 올린다. 명실공히 국내 최고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옛 건물을 구경하는데 솔솔 고소한 내음이 난다. 가을전어라고 하더니, 여간 꼬숩지가 않다. 이동하다가 일행 모두 멈추고 전어구이와 생탁으로 쉬어갔다. 한갓진 평일 오후에 전어구이집 주인이 대목 만났다. 뼈까지 모두 씹어먹어야 꼬순 맛을 잘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안씹히는 거지? 다급한 나머지 바짝 구워야 제맛인데, 좀 덜 구워졌던 것 같다. 냄새 흡입하고 살 발라먹으며 전어맛을 즐긴다. 그날의 기억 중에서 전어구이를 먹던 장면이 가장 선명하다. 건축 답사를 하더라도 별미 먹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영도다리가 다시 도개교로 바뀌었다. 요즘도 12시가 되면 다리를 번쩍 들어올린다. 예전에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가 엄청 대단했던 것 같은데 광안대교니, 거가대교, 마창대교 등을 보다보니 이런 다리쯤이야 보잘것 없다. 그 바다에서 여전히 낚시를 이어가는 꾼들이 자리를 잡았다. 흥미롭게도 영도대교 근처에는 예부터 그자리에 있었다는 점집들이 영업중이다. 전쟁 때 최후의 피난처였던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쫒겨내려온 피란민들이 넘쳐났고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바다의 끝 영도다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눈물을 흘렸단다. 이것은 그런 바람이 불러일으킨 점집들이다. 지금은 드문드문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옛 시대를 흘려보낸 푸른 물결처럼, 이산의 마음도 추스러졌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탄생지가 아니던가, 다리 밑이란.











덕수궁 석조전이 문을 열었다. 수년간 가림막으로 가려져있던 궁역이 개방되었다. 내부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부른다. 역사관이 좀 많은가, 싶지만  덕수궁의 내부가 궁금했기에 얼른 들어가보고 싶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한 사람에 한해서 그것도 30분 간격으로 15명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야 1층과 2층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공간이었다. 





하마마츠시립도서관에 있던 1898년의 도면과 옛 사진과 신문기사를 통해 복원하고 내부의 가구들은 부분적으로는 창덕궁 수장고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재현했다. 불충분한 부분은 서양식 가구를 공급했던 영국 가구회사인 메이플 사의 카탈로그를 점검하면서 당시의 것을 추정했다고 한다. 



석조전은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궁궐 중에서 가장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종임금은 석조전을 정전으로 사용하고자 했으나, 1910년에야 완공된 당시는 이미 한일병합조합이 이루어진 해로, 우리는 독립된 국가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를 위한 모든 장식들이 석조전에 활용되었다. 신고전주의풍의 장식과 기둥, 금테를 두른 몰딩, 완벽한 서양식 건물안에 완벽한 서양식 가구로 꾸며진 궁궐은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대단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석조전에서 프랑스에서 보았던 수많은 저택, 궁궐들을 떠올렸다. 이토록 유럽을 닮고 싶었던가,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던가. 





  


서양식 건물의 창에서 전통 궁궐의 아름답고 정교한 색과 형태가 바라보인다. 

이런 이질적인 만남이 참 좋다.





고종임금은 석조전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고 이 궁궐은 영친왕 부처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용하거나, 그의 주요 컬렉션을 보관, 전시하는 장소로 쓰였다. 도쿄 아카사카에서 거처하던 영친왕 부처는 조선땅을 거의 밟지 않았으므로 석조전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덕수궁은 어느 순간, 시민들의 위락을 도모하는 장소로 바뀐다. 어린이 놀이터가 생겨나고 물웅덩이는 스케이트장이된다. 영친왕 이은의 일본미술컬렉션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미술관이 설립되었고, 시민들은 쉽게 궁궐을 드나들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비밀스런 분위기가 한껏 풍기는 대식당. 이곳에는 어떤 음식이 등장했을까? 

궁궐의 서양음식을 재현해볼 수 없을까?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고, 1955년에는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내부는 차례차례 변화를 맞았다. 복원은 2009년에 시작되었다. 원형찾기는 쉽지 않았으나 공들여 그 시대로 되돌려놓았다. 우리는 석조전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 우리는 100년 전 과거를 들여다보고 판단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기에. 해설사는 말을 아꼈고, 답사자들 중 나이든 양반은 일제를 욕했다. 그런 장소로서 석조전을 보기에 이 공들인 것이 너무 아깝다. 


작은 공간이라도, 대한제국을 이해할 도서관이나 자료실이 있다면 좋을텐데, 우리의 역사관과 기념관은 이런 면이 너무나 부실하다. 석조전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혼란한 질문들이 마구 떠올랐으나 그 어떤 해답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언가 시작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파헤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되는 것이다. 





석조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개된 장소이니, 다른 이야기는 차지하고 내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1층 중앙홀에 놓인 당시의 가구. 창덕궁 소장인 왕실 가구라 한다.






1층 접견실 / 공식행사가 열리던 공간  



1층 귀빈대기실 /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 



1층 귀빈대기실의 가구 



1층의 복도 



1층 접견실과 인접한 방. 제국의 복식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든 것이 새롭게 복원되었으나, 계단의 황동 손잡이는 100년전 그대로다. 






커튼도 예쁘다. 컬러는 붉은 색, 연두색, 황금색의 세가지가 골고루 쓰였다. 

물론, 이 컬러와 문양은 재현이다.  



석조전의 도면 자료. 일반공개되면 좋을텐데. 얼른 자료집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 참 좋다. 가장 좋은 목재로 가장 공들여지은 궁궐 건물이 아닌가!



2층은 왕실 가족들의 사적 공간이다. 당시를 재현한 화장실과 세면대  




벽난로와 관련된 소품들.




2층 황제 침실 




2층 황제의 서재 






2층 황후의 서재. 

1층과 2층 모두 완전히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 목재 패턴. 이것도 고증된 것일까, 궁금했다.

중명전은 이에 비하면 품위없이 복원되었다.  






30분 간격으로 해설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2층의 회랑. 석조전의 다양한 역사를 볼 수 있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아직 어린 영친왕이 석조전 2층 난간에서 사진을 남겼다. 



1910년대의 석조전모습. 뒤쪽으로 돈덕전인지 환벽전인지 

양관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층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덕수궁 일대와 궁담 바깥까지 훤하게 보인다. 

왕의 시름. 왕의 존재.



가을이 찾아온 덕수궁. 이곳에서는 모든 풍경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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