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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좋아! F1963 




공장과 창고가 근사한 공간이라는 걸 세상이 알아버린 것 같다. 용도 폐기된 공장과 창고들이 카페와 예술공간으로, 상점과 쇼룸으로 변모하고 있다. 손댄 듯 안댄 듯, 오래전 생겨난 생채기들과 숨겼어야 마땅한 철골과 구조재들을 드러낸 거친 공간에 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과 다른 감각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새로운 행성에 발을 디딘 것처럼 다른 파동이 흐른다. 재료의 거친 질감과 무게감이 신체를 압박하고 불편한 온도와 강도 높은 소음이 신경을 거스른다. 까마득히 높고 넓은 공간이라면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공간의 압력에 신체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구조와 재료가 주는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복잡한 업무를 기꺼이 처리한다. 



부산 수영동의 오래된 공장지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철재 와이어를 생산하는 고려제강이 1963년부터 2008년까지 운영해온 공장이 그 주인공이다. 건물 면적만 1만650㎡에 이르니 누구나 탐낼 만하나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4년에 부산비엔날레라는 깜짝손님이 찾아왔다. 건축가 조병수의 설계한 기념관으로 시민들과 거리를 좁힌 고려제강은 이 오래된 공장의 문을 대중에게 살짝 열었다. 2016년에는 시비를 들여 리모델링하면서 주요 전시공간으로 본격 등장했다. ‘F1963’의 탄생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화려했다. 새롭고 낯선 장소의 기대감과 입소문으로 부산비엔날레는 흥행에 성공했고 메인 테마를 전시했던 시립미술관보다 더 많은 관객이 F1963에 몰렸다. 공간의 특성이 너무 강해서 전시된 작품이 주제와 긴밀해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과 오히려 작품이 특별해보였다는 의견이 교차했다. 



거칠고 센 공간일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F1963은 묘한 부드러움이 있다. 공장 외부를 모두 감싼 옅푸른 색의 경계면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보면 철판에 절단면을 넣어 늘린 전신금속(expended metal)이지만 빛이 투과되면 가볍게 물결치며 오래된 건물의 어두움과 무게감을 덜어준다. ‘세 개의 네모’를 겹쳤다는 간단한 설명답게 공간은 단순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페와 맥주펍이 양쪽에 자리 잡은 첫 번째 네모, 그 사이에 파고든 중정의 네모, 전체를 아우르며 뒤쪽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전시공간이라는 세 번째 네모가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관람객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철강와이어를 제조하는 회사답게 다양한 형태의 와이어가 구조를 지지하는 요소로, 혹은 디자인 요소로 사용되었다. 팽팽하게 잡아주는 견고하고 날렵한 와이어는 구조미와 함께 시선을 적절히 가려주는 반투명한 가림막의 역할을 했다. 외부공간의 독특함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이어와 모양도 성격도 닮은 대나무숲이 펼쳐져 공장이 아니라 공원 같았다. 공장바닥에 사용된 실제 금속판들은 외부 정원의 바닥돌로 재활용되었다. 바닥에 깔린 금속판을 따라 내나무 숲을 거닐다보면 옅푸른 물감을 칠한 가벼운 건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회가 끝난 후 F1963은 더 대담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카페와 맥주펍을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고, 올해는 인터넷 서점의 중고서적매장과 도서관, 갤러리와 공연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연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자선공연과 함께 브랜드의 런칭행사, 젊은 셀러들의 마켓 등이 열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상태다. 이와 더불어 부산 낙동강 주변의 문 닫은 공장지대가 예술공간으로 변모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좋은 사례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좋은’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에 대한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기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초고층빌딩뿐만 아니라, 요상한 감각을 전해주는 오래된 공장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다.   


글/사진 최예선











성당은 참담할수록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보여준다. 기도하는 인간, 겸손하게 몸을 숙이고 타인을 향해 팔을 벌리는 인간, 지고지순한 희망을 꿈꾸는 인간... 그리고 신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며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조각하고 가장 아름다운 빛을 드리우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던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은 건축기술도 부족하고 물자도 없던 시절,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쌓고, 한 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기둥을 세우며 이루어낸 성당이다. 








1892년이 축성된 약현성당은 고딕양식을 닮은 듯하면서도 그보다 이른 시대의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는데, 당시 그는 용산신학교를 완공하고 명동성당 공사를 막 공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고딕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장엄하게 지어진 명동성당과 비교하면, 약현성당은 규모도 작고 천장 구조도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공동체를 품어주는 넉넉함이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은 ‘최고(最古)’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건축학자들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초기 양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약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언덕에 약초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옛 지명인데, 질병을 치유해주는 약초밭에 성당이 지어졌다는 점이 무척 상징적이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의 사형집행장이자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서소문 밖 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약현성당은 피 흘린 장소를 치유하는 의미와 함께, 종교의 신념으로 기꺼이 죽음을 맞았던 인간들의 넋을 감싸안는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약현성당은 다른 성당과 다른 절실함과 신실함이 있다.









120년을 견뎌온 오랜 성당이기에 여러 차례 보수 복원공사가 있었다. 원래는 마루가 깔리고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는 벽이 있었는데 1921년에는 그 벽을 없애고 벽돌기둥을 석조기둥으로 바꾸어 견고하게 했고, 1974년에는 해체대보수를 실시해서 외벽돌을 교체하고 창호, 지붕, 바닥을 완전히 바꾸었다. 


1998년에 화재가 발생해서 지붕과 건물 내외부가 크게 훼손되자, 2000년 이를 보수하면서 성당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원형복원 공사를 실시했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외벽의 벽돌이었다고 한다. 요즘 벽돌과는 색도 모양도 공법도 다른 당시의 벽돌을 재현하기 위해서 고령토를 섞어 가장 흡사한 색을 냈고 오래된 벽돌과 조화를 이루도록 표면을 거칠게 제작했다. 내벽도 붉은 벽돌의 침착하고 단단한 색감이 돋보이는데, 오랫동안 뒤덮인 흰색 시멘트 모르타르를 벗겨낸 결과다. 이렇게 해서 120년 된 벽돌과 새로운 벽돌이 공존하며 거대한 성당을 이루게 되었다. 



건물은 시간이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백년이 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드리운 손길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복구하며 건축물에 담긴 정신과 전통을 이어온 수많은 사연들이 겹쳐진 후에야 건물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영롱하게 어우러진 빛 그림 속에는 시대를 넘나들며 만들어진 다양한 유리 조각들이 섞여있고, 단단하고 고요한 벽돌 속에도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수많은 손길이 있다. 시대가 엮어주는 작은 조각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의, 그리고 시대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유산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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