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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2 서울한옥 : 명륜동 장면 선생 옛집
  2. 2017.02.07 서울한옥 : 백인제 선생 옛집




<장면가옥 추정복원도-기록화보고서>


근대기 서울 한옥을 보는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옛 사람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구가했나 엿보며 상상할 수도 있지만 전통한옥과는 다른 공간들, 다른 건축언어들이 기발하게 뒤섞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멈춰진 시대가 간곡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지요. 화려한 한옥에 엉뚱하게 끼어든 서양식 공간이나 일본식과 한식을 절묘하게 오가는 공간, 한,일,양 세 가지 스타일이 모두 섞여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중국식 건축 형태가 스며든 집도 있지요. 게다가 한옥 자체가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개량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건축가들은 한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제거하면서 주택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한 근대기 서울한옥을 한채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유한 계층에서는 궁궐에서나 지을 법한 고급한옥을 지었습니다. 백인제 가옥처럼 좋은 한옥과 일식 가옥을 함께 배치하는 경우도 있었고, 완전한 서양식 대저택을 짓고 뽐내던 상류층들도 있었지요. 서양식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게 가장 모던한 유행이었던 당시엔 이런 집들이 환영받았겠지요. 죽첨장(지금의 경교장)이 바로 그런 서양식 대저택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촌 언덕위에 있던 윤덕영 저택(벽수산장)도 있었고요.  그러나 이런 집들은 연회나 귀빈 대접에 사용되었을 뿐 실제 생활은 서양식 저택 뒤켠에 근사하게 지은 한옥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유행은 유행이고 삶은 또다른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한옥에 머물러있었습니다. 

명륜동에는 1937년에 지은 한옥 한 채가 남아 있습니다. 역사인물인 장면 선생의 옛집입니다. 장면 총리라는 직함으로 더 잘 알려져있지만 이 집을 지을 당시엔 교육자의 삶을 누리던 중이었지요. 명륜동이 아직 주택가가 되기 전 천변 언덕에 한옥과 양옥이 각각 한채씩 놓인 이 집이 지어졌습니다. 집 앞에는 천이 흐르고 있었다지만 복개된 지 오래되어 모두 도로로 바뀌었습니다. 이 집은 선생의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놓인 역사인물가옥이자 등록문화재 357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집은 김정희라는 건축가가 지었습니다. 장면 선생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지요. 신학교에 입교했다가 건축가로 선회한 그는 1937년에 지은 이 집을 시작으로 1938년 명동성당 문화관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갑니다. 몇가지 일에 그의 흔적이 있지만 1950년 납북되는 바람에 명맥이 끊어집니다. 

집에 살다간 사람의 일생도 한국의 현대정치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지만, 집만 봐도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집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선이 매력있습니다. 경사지에 세워진 대문을 지나면 눈앞을 가리는 담이 하나 나옵니다. 이 담의 오른쪽으로 양식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됩니다. 담벼락은 은근한 시선높이까지 세워져 본채(안채)인 잘생긴 한옥은 훤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채로 가려면 왼쪽으로 담을 따라 걸어가야하지요. 지체 높은 양반댁에서 중문을 설치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양옥은 사랑채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지요. 

우선 양옥으로 들어섭니다. 나무바닥이 깔리고 방과 거실이 정갈합니다. 손잡이가 달린 문이 방과 복도와 거실을 구분합니다. 바깥에 복도가 있는 점도, 붙박이 장식장이 있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일본식 기와가 올려진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양식처럼 보이지만 일본식 가옥의 언어가 슬쩍 비쳐납니다. 복도나 붙박이장은 워낙 자연스럽게 적용되어 있어서 일식가옥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건물은 목구조에 몰타르와 시멘트, 벽돌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방화의 목적이었겠지요.  

이곳은 장면 선생이 여러 인사들과 만나 담소와 회의를 했던 곳. 신사들의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 선생의 유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창밖으로 꽃나무 사이로 한옥의 처마가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안채로 들어가면 단아한 한옥의 품새를 만나게 됩니다. 단정한 장마루와 반자를 친 천장은 적당히 높아서 편안합니다.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주변으로 연결된 방과 생활공간들은 동선의 편리함을 염두에 둔 것 같지요.  이 집은 솜씨좋은 세공사가 다듬은 듯 고급 한옥의 구조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건넌방의 창문은 외부 유리 쌍창 안에 나무살이 있는 영창, 나무 틀은 두고 벽지를 바른 갑창 등 복잡한 구조로 된 창호는 궁궐 전각에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쌍창도 바깥 경관이 보이는 곳은 유리로, 나머지는 창호지로 해서 장식성과 바라보는 기능을 잘 살렸습니다. 문과 천장 사이의 고창도 단정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지요. 조그마한 환기구창은 새로운 시도입니다. 온돌방의 환기를 좋게 하는 이 조그마한 창은 개량식 한옥에서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동선과 환기. 이 점이 한옥의 개선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죠.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유물들이 전시대 속에 들어있습니다. 

실내외에서 모두 연결되는 부엌과 찬마루는 널찍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라 주방은 무척 바빴을 것 같습니다.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 등 현대적인 설비가 처음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채 뒤에도 작은 채가 있는데 총리시절 경호원 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담과 가까운 곳에도 경호실이 설치되어 있지요.  

정갈하고 조심스러운 집이었을 겁니다.   

오랫동안 머물며 삶을 이어오기에 편안하고 평온한 집이었을 겁니다. 

한 채의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마을을 만들고 길을 열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혹은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는 주요한 길목이라고 봅니다. 그 시대의 질문은 지금도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집을 짓는 자들은 어떤 삶을 표현하려 하는지, 개개인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떠한지, 그때와 지금은 또 어떻게 다른지 해답을 구합니다. 

근대기의 서울 한옥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러나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던 집을 좀더 집중해서 살피며 삶의 개별성과 복잡성을 좀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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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류층이 살던 근대 한옥



집은 삶의 그릇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일상과 내면, 가치관까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택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향기는 비밀스런 시대로 우리를 부른다. 근대건축유산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회동 93번지에는 ‘백인제 가옥’으로 불리는 고택이 있다.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선생이 가족들과 1944년부터 살던 곳이다. 뛰어난 의사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그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고 말았지만 전설처럼 뒤따르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 집은 여러 소유주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백인제 선생 전에는 최선익이라는 청년갑부이자 민족사업가의 삶이 비밀스럽게 묻혀있고, 한성은행이 소유하고 있을 1930년에는 천도교에서 잠시 사용하면서 스며든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을 지은 실업가 한상룡이 있다. 


한성은행장을 지낸 친일실업가 한상룡(1880~1949). 총리대신 이완용의 친인척이며 대한제국왕실 총친의 조카였던 그는 어려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일본통이었다.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추앙하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분이 깊었던 그는 한편, 허례허식이 없으며 정치적 노림수보다는 실업가로서의 철학을 지켰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회갑을 맞아 성대한 연회를 거행하는 대신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집필한 것도 이 인물의 독특한 이력이다. 


1906년 가회동으로 이사온 한상룡은 주변의 집 열 두 채를 매입해서 900평에 이르는 넓은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1913년부터 살림집으로 쓰는 안채와 연회와 사교를 위한 사랑채, 하인들이 사는 문간채, 처가 식구를 위한 별채, 테라스가 있는 일본식 주택 등 100여 평에 이르는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조선 최고 실업가로서 일본인 관료를 비롯, 정제계 유력자들과 회합하는 사교의 장이자 연회공간이었다. 살림집인 안채는 중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고 외부에서는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고위층 인사들이 자동차를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대문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고 정원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총독을 비롯, 일본인 관료들이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를 곳곳에 발휘했다. 일본주거에서 자주 사용되는 흑송을 사랑채에 사용한 것, 전통식 우물마루가 아닌 일본식 장마루를 깐 중복도와 다다미가 깔린 이층방을 설치한 것 등은 한상룡의 전략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은행 상황이 악화되자 한상룡은 부채 5만원을 스스로 감당하며 한성은행 측에 이 집을 넘겼다. 이 집은 그는 인근 178번지로 거처를 옮겨 자신의 입지에 걸맞는 또 다른 대저택을 세웠으니 가회동에는 한상룡이 소유했던 두 채의 대저택이 있는 셈이다. 


이 집은 서양식, 일본식 건축언어가 접목되어 있지만, 전통한옥의 우아함과 아름다움도 충분히 담고 있다. 공들여 지은 집답게 반드시 살펴봐야할 부분들도 많다. 우선, 분합문(들어 올려 걸어둘 수 있는 장지문)을 설치한 사랑방이 딸린 사랑대청은 이 집의 가장 멋진 장소다. 유리문으로 두른 사랑대청은 서양식 가구가 놓여 근대기의 멋이 살아있다. 안채 마당으로 향한 사랑채 화방벽은 길상문자와 전통 무늬로 고즈넉한 안채에 우아한 멋을 수놓는다. 이 집의 가장 높은 지대인 북쪽 언덕에 세워진 누각은 집주인이 홀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유리문으로 두른 누마루에 앉으면 북촌 일대가 두루 펼쳐져 그 풍경이 한편의 드라마가 된다. 


이 대저택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소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친일파 실업가의 집을 문화재로 보호하는 일, 잘 지어진 집이라고 감탄하는 일에 감정적인 혼란을 배제할 수 없다. 과연 이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어야하나,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건축물들을 ‘부정적인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라고 부른다. 당시 삶을 조명하는 자료로서, 후대에 교훈이 되도록 남기고 그 의미를 계속 새롭게 읽어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의 복잡성, 삶의 복잡성이 끼어든다. 아프고 고된 근대사를 경험한 우리에게 부정적인 문화유산은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상룡의 집은 민족실업가인 최선익이 소유하면서 한상룡이 전략적으로 세운 일본식 가옥을 철거하고 집의 규모를 줄인 역사가 있고, 백인제라는 근대사의 주요한 인물이 살면서 민족의 비극을 읽을 수 있는 역사가옥으로 의미가 더해진다. 문화유산은 오직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거쳐간 인물들이 시대가 켜켜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상룡의 집이자 최선익, 그리고 백인제의 집인 이 역사가옥을 중요하게 살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최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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