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전. 덕수궁에 속해있는 궁궐 건물이다.
한자 명자는 날일(日)이 아니라 눈 목(目)자를 썼다.
더 밝게 보겠다는 의지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한다.







길고긴 복원의 시간이 끝나고 중명전이 문을 열였다. 유난히 무덥던 올해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말의 일이었다. 나는 중명전이 문을 열기를 꽤 고대했던 사람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꼭 보여주고픈 건물이었건만,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었던 그 건물. 중명전.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의 중요한 역사를 목격한 장소다. 1899년 왕실 도서관으로 문을 연 중명전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덕수궁의 전각 대부분을 태웠을 때부터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온통 서양식으로 꾸며진 중명전에서 외교관을 맞아들이며 임금과 그의 측근들은 나라의 앞날을 심대하게 고민했다.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 울분을 삼키며 임금이 헤이그 특사를 명했던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중명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명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중명전. 덕수궁 궐역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



덕수궁에 속한 건물임에도 이 건물의 위치가 수상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뚝 떨어져 정동극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미대사관저가 있어 일년 365일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그곳. 외따로 떨어진 궁궐 건물은 놀랍게도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시기,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을 정궁으로 삼은 고종황제는 궁궐의 규모를 날로 넓혀갔다. 지금 성공회 정동성당이 있는 덕수궁의 북쪽 지역에도 궐역이 있었으며(성공회 성당 뒷편에 한옥건물이 다소곳이 남아있다) 중명전이 있는 이 지역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지어져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동은 당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많은 서양 국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세력을 견제하던 고종황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희궁의 전각을 옮기면서까지 수백채의 전각을 세운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으로 몸을 옮겼다.

대한제국기에는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경운궁과 경복궁은, 의도적인 방화이건, 자연적인 불꽃이건, 화재가 자주 일어나 임금의 목숨을 위협했다.  임금은 불에 타지 않는 서양식 건물을 궁궐 내에 서둘러 지었다. 중명전은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경운궁 담 안쪽에는 1902년 경에 돈덕전, 구성헌,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계획은 일찌감치 시작되었으나 공사가 늦어져 1910년에 완공된 석조전이 들어서면서 경운궁은 조선 전통의 전각과 서양식 건물,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교묘하게 섞은 혼합의 건물이 함께 있는 독특한 궁궐의 풍경을 자랑하게 되었다.


다시 중명전으로 돌아가보자. 한일합병 이후에는 외국인 클럽으로, 광복 후에는 이방자 여사의 소유물로 옮겨졌다가 민간에 매각된 후 이 건물은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사무실로 용도변경되면서 건물은 흉하게 첨삭되는 과정을 겪었다. 중명전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2007년부터다.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가 바로 그 중명전에서 열리면서 건물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궁궐 건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명전이 덕수궁에 속한 사적으로 문화재 등급이 높아졌고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잡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의지도 높아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중명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되기 전 중명전의 모습. 흰색 페인트로 칠해지고 테라스를 막아 버렸다.
내부도 손상이 심했다. 벽을 터서 테라스까지 모두 넓혔고 벽난로는 막혔다.
복원 작업은 이 모든 것을 새로 틔우고 막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자 했다.




 


흰색 건물이었던 중명전이 붉은 벽돌 몸을 드러내고 건물의 앞과 양쪽 옆에는 긴 회랑이 생겨났다. 이 회랑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살짝 감동하고야 말았다.  건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건물의 역사를 내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흥분감을 준다. 중명전이 일반에게 공개되기는 했지만 내부를 관람하려면 미리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다른 일로 무척 바쁘던 9월의 어느날 짬을 내어 남편과 함께 중명전을 방문했다. 흥분은 나눠야 제맛이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이는 단체팀과 합류하면서 뭔가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능하긴 했지만서도. 




중명전 전시실 풍경. 1층은 중간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큰 홀이 있고
왼쪽에 두 개의 홀이 있다. 전시 내용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 등
중명전에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이다.



 

중명전의 내부 장식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 첨삭과정에 의해
원형이 사라버렸다. 1층 중앙의 복도 타일만 유일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다.
실내화로 갈아신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밟을까 하여
강화유리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꼭 유리로 덮어야 하나?






요런 이쁜 장식이 눈에 띈다. 당시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의
창문 장식이 있었으리라 상상되었다.



당시 외교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문건. 아래는 고종황제의 밀서.
전시용 사본이다. 어떤 글이 오고갔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2층에는 대형 홀과 두 개의 사무실이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문화재 보호단체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중명전을 위탁관리하면서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2층 대형 홀에는 딱히 전시물이 없다. 뻥 뚫린 공간에는 고종의 어보를 전시했고,
옛 국기와 고종이 어진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 구성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황태자 이은과 이완용 내각 사진(1907). 이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이 중명전이다.
거꾸로 이 사진 한장으로 중명전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중명전에 대한 흥분은 붉은 벽돌 건물로 되살린 것과 긴 회랑에서 느껴진 진지함이 전부였다. 내부를 둘러볼수록 아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부가 많이 손상된 건물이기에 복원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며, 겨우 남아있는 복도 타일만이라도 제대로 간수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중명전은 외관만 남은 형식적인 건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가 남긴<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있다는 이런 내용.


"러시아인 기술자가 만든 쇠와 벽돌로 된 조잡한 건축물인 알현관 앞에는 대신 민종묵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알현관의 큰 뜰에서 차를 마시며 알현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대신들과 흥미로운 대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알현관의 응접실로 들어서면 예기치 않았던 매우 기이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들이나 장식이 동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닥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주위에는 비엔나풍의 의자가 12개 정도 놓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집트 담배들과 하바나 시가, 차와 비스켓, 바카라 컵들과 독일제 찻잔 등이 놓인 탁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응접실에 한국 것이라고는 벽 구석에 서 있는 거대한 병풍 뿐인데, 병풍에는 한국의 기마병들에게 쫓기는 중국 벽사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대한제국 1907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국립고궁박물관, 민족문제연구소(2007)> 도록에서 재인용.


 

 
붉은 양탄자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한 병풍은 없더라도 궁궐다운 위엄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떠나버린 듯했다. 떠나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니 억지스럽고 힘겨운 싸움이 된 것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저렴한 재료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 부족한 자료로 인해 원형에 더 다가가지 못한 사정, 아직도 논의가 거듭되어야 할 근대사의 의미들, 당시의 재료를 더 이상 조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
등 근대건축물을 되살리는 일에 뒤따르는 각종 문제들이 중명전에는 한꺼번에 발생한 것 같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문화재 건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기적인 전시 프로그램의 부재까지 포함되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중명전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우리 근대사의 비어있는 부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2010년 10월 13일에 중명전에서 복원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대책없는 아쉬움도 위로를 얻지 않을까 하여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주관한 이 행사에는 학계 인물들 외에도 일반인들도 많이 참가해서 중명전에 대한 관심이 깊음을 보여주었다.


중명전의 복원은 영친왕이 찍힌 사진 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면도 없고 서류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복원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틀이나 벽돌의 구조, 벽난로의 형태 등 디테일의 원형은 알 수 없었다. 학계에서조차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중요한 자료를 공유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겨우 결론을 내리고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뒤늦게 발견된 자료 때문에 관계자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예산이 부족하여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커다란 논의는 없었다. 그럼에도 5시간에 걸친 심포지엄을 꿋꿋하게 들어보면서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엇다. 중명전은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근대건축물의 복원, 혹은 원형 찾기에 대한 의문을 폭넓게 제시했다고 할까? 

복원 그 자체가 문화재의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복원이 마무리되었다고 하여 모든 역사적 의문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건물의 복원은 역사적 의문점의 시작이라 하겠다. 복원은 언제든지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탐구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중명전이 공개되고 연구가 구체화될수록 도처에 흩어진 많은 자료들이 모여들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과도 닮았다. 

근대건축물의 원형찾기는 근대사를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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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위치-서울시 중구 정동 1-11 


좀 더 읽어볼 책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안창모/ 동녘(2009)
- 근대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졌던 대한제국기를 알고 싶다면!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2004)
-당시 외교의 거리였던 정동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순우/ 하늘재 (2010)
- 중명전의 건립 연대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군요.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대한제국 견문기
그가 수집한 사진들만 모아서 해설한 책.
1900년대 초반의 궁궐, 도시, 사회, 사람들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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