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성당에 간다
. 기도를 드린다기 보다는 성당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성당 주변에는 작고 소박하더라도 나무 그늘이 있고 걸터앉을 만한 자리도 있다.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혀주는 성모상,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아름드리 나무도 만나게 된다. 마음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잦아든다.


사람의 소리는 모두 묵음이 되고 자연의 소리만 남아있는 곳. 성당을 거닐 때면 평범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내 발 아래에서 마른 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머리카락을 헝클고 도망가는 바람 소리, 나뭇잎에 살짝 얹힌 풀벌레의 가냘픈 움직임. 그런 소리들.



날 좋은 가을날 풍수원 성당에 갔다
.
강릉에 12일 여행을 떠나던 날, 자동차를 달려 여정을 중간쯤 되는 곳에 풍수원 성당이 있었다. 점심식사도 할 겸 잠시 쉬어간다고 횡성에 들어섰는데, 그만 이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쯤이었다.






붉은 벽돌로 촘촘하게 다진 아담한 성당이 눈앞에 등장했다.
첨탑이 있고 등뼈가 솟은 것처럼 지붕 위가 뾰족한 박공 지붕이다. 붉은 벽돌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켜 때문인지 작은 규모가 아닌데도 아담해 보인다. 성당 안에도 성당 밖에도 이미 사람이 많다. 서울이며 곳곳에서 피정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성지순례를 올만한 유서 깊은 성당인가 보다.




건물을 보면 그런 느낌이 전해진다
. 단순하고 단단한 형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간결하다.


정오
를 넘어가니 햇살이 더욱 진해진다. 햇살이 진할수록 건물은 더 투명하게 보인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실루엣이 느슨해지는 대신, 그림자는 짙어진다. 건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본다. 성당 안에서 미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신부님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온다. 오늘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나 보다.

 

포근한 산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풍수원, 바람이 불고 시내도 흘렀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첩첩 산중 작은 마을에 이토록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풍수원 성당은 1909년 낙성식을 올렸으니 벌써 백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성당이 생겨나기 전에도 천주교인들이 신앙촌 마을을 형성하며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역사가 1801년부터인데, 천주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왕실이 천주교인을 모질게 죽이기 시작했던 신유박해가 있었던 해다.

그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 온 교인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이곳까지 흘러 들었던 모양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천 명의 목숨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라졌을 때에도 도망 온 무리가 또 풍수원에 숨어들었다.
풍수원은 이렇게 성직자 한명도 없이 교인들이 모여서 만든 자생적인 신앙촌마을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0
년 후인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통상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때부터 천주교의 포교와 교육이 자유로워진다.
강원도 산골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이들이 점차 신앙촌으로 자리를 굳히자 1888년에 프랑스인 르메르신부가 부임하여 초가집에서 미사를 드리며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진설명-성당 유물관에는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0년대초반에 인쇄된 성경,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돌려보던 성서와 기도서, 
그리고 성당 안에 두던 다양한 성물들이 오래된 세월을 보여준다.

                                                                             

르메르 신부에 이어 부임한 한국인 정규하 신부에 이르러 제대로 된 성당을 축조하기로 하고 신도들과 힘을 합했다. 중국인 기술자와 신도들이 벽돌도 굽고 나무도 해오면서 이를 바탕으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1905
년에 기공식을 시작한 후 4년 만에 성당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성당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서 깊은 장소다. 한국인 신부가 앞장서서 지은 성당으로는 최초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 설명- 좌측 아래에서 세번째 인물이 정규하 신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감곡 매괴 성당, 용소막 성당과 닮은꼴이라 이들 성당을 설계한 시잘레(chizallet, 한국명 지사원) 신부가 건축설계를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는데, 설계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부임온 신부들 중에서 명동성당을 지은 코스트 신부처럼 성당 건축만 전문으로 담당한 신부가 있었다. 
정규하 신부의 노력으로 성당이 지어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고딕식 외관을 지닌 건물이 한국인의 손으로 설계되었을까 하는데는 좀 의구심이 들기는 한다. 게다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오래된 성당이지 않은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뮈텔 주교 일기 4>에는 1910년 11월에 주교가 풍수원 성당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당 건물을 본 주교 일행은 계곡 앞에 우뚝 솟아있는 성당을 보고 약현 성당의 모방이라고 단정하여 말했다.(김종기, 박희용, 최종철, 홍대형, 가시체계로 본 강원도 성당건축의 평면구성 변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4권 제7호 2008년 7월)
최초의 벽돌성당으로 알려진 약현성당은 1892년에 완공되었으며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역시 프랑스인인 두세 신부가 감독하여 완공했다.


얼른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데 한 시간이 넘도록 미사가 끝나지 않는다
. 피정을 위한 특별미사라서 신부님이 할 이야기가 많으신가 보다. 성당 뒤쪽에 있는 사제관을 먼저 구경했다.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은 성당의 오래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은 강원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이고, 사제관은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다.


사진 설명-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 모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제관이라고 한다.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당을 이끈
정규하 신부의 업적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다. 가무잡잡한 얼굴의 정규하 신부를 사진으로 보니, 깐깐한 성직자이자 넘치지 않고 소박하게 성당일을 이뤄 나갔던 분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신도들을 맞이해온 한결 같은 큰 나무 같았으리라 생각해본다
. 라틴어 기도서에도, 재단의 불을 밝히던 촛대와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님의 성복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1800년대 말에 필사된 기도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궁서체로 쓰인 필사본 기도서는 여성들이 썼던 것이라고 한다. 천주교가 전래되어 올 무렵(당시는 천주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었다) 기도서는 양반가의 여인들이나 궁 안의 여인들이 돌려보기도 했다고 한다.
말씀에 가까이 간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써내려 가다가
, 그 말씀 때문에 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사람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글씨처럼 가늘게 흐르는 필사 기도서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마음이 어지러운 나에게는 쉽게 말씀을 들려주지 않는가 보다.

 

 


이윽고 한 시간 반에 걸친 미사가 끝이 날 무렵이다
. 살짝 열린 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교인들이 마룻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서양 중세의 교회가 그러하듯 길게 나열된 두 줄의 기둥이 공간을 세 개로 나누고 있다. 재단으로 향하는 중앙 천장이 높고 양쪽은 낮다. 재단은 정성스러운 장식으로 채워져 있다. 베풀어주시는 사랑, 그리고 보답하는 사랑이 이곳에 있다.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고 신도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간 후 잠깐의 공백기에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검은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만든 기둥인 줄 알았는데
, 알고 보니 목재 기둥에 페인트로 벽돌처럼 색칠하고 줄눈을 그려 넣었다. 멀리서 보니 그럴싸하다.

서양식 구조로 만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서양식 돌 성당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없다
. 나무로 바닥을 만들고 기둥을 세우면서 경건한 성당에 소박한 따스함을 더했다. 장식도 없고 화려한 그림도 없지만 종교의 신념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행복감이 가득 피어난다.



 


사진설명- (위 좌+우) 성당 내부의 기둥은 검은벽돌처럼 보이지만 가까이가면 목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색페인트를 칠하고 줄눈까지 그려넣어 멀리서보면 감빡 속을 정도다.

(아래 좌+우) 성당 외벽을 이룬 벽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회색 벽돌에는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이,
붉은 벽돌 위에는 더 진한 붉은 색이 덧칠해져 있다. 붉은 색 페인트를 긁어낸 듯 벽돌 표면이 거칠다.



나무도 풍수원에서 구한 것이며, 외벽을 쌓아 올린 벽돌도 풍수원에서 구워냈다. 이 시대의 붉은 벽돌은 요즘보다 크다. 붉은 벽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이 거칠거칠하고 색깔이 차이가 나는 곳이 눈에 띈다. 색이 칠해진 표면을 긁어낸 것이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을 보수하느라 벽돌 위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흰색 줄 눈까지 그렸던 모양이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 앉은 건물에 페인트로 색을 내다니! 싶지만 한때 이 방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지금도 수많은 붉은 벽돌 건물은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붉은 색이 과히 좋지 않았던지 이 부분을 긁어낸 흔적이 성당에 남아있다.

 

성당 건물에 눈이 어두워 십자가의 길을 초입에만 겨우 발을 디뎠다. 이철수 판화가의 소박한 그림체를 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것도 남겨둬야 다음 번에 또 오게 되는 것이니까.  행복 한 줌 얻어가면서 가늘게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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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과 사제관
성당-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69호
사제관-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 163호

주소-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번지
문의-033-343-4597
홈페이지-
www.pungsuw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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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덕수궁에 속해있는 궁궐 건물이다.
한자 명자는 날일(日)이 아니라 눈 목(目)자를 썼다.
더 밝게 보겠다는 의지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한다.







길고긴 복원의 시간이 끝나고 중명전이 문을 열였다. 유난히 무덥던 올해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말의 일이었다. 나는 중명전이 문을 열기를 꽤 고대했던 사람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꼭 보여주고픈 건물이었건만,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었던 그 건물. 중명전.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의 중요한 역사를 목격한 장소다. 1899년 왕실 도서관으로 문을 연 중명전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덕수궁의 전각 대부분을 태웠을 때부터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온통 서양식으로 꾸며진 중명전에서 외교관을 맞아들이며 임금과 그의 측근들은 나라의 앞날을 심대하게 고민했다.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 울분을 삼키며 임금이 헤이그 특사를 명했던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중명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명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중명전. 덕수궁 궐역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



덕수궁에 속한 건물임에도 이 건물의 위치가 수상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뚝 떨어져 정동극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미대사관저가 있어 일년 365일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그곳. 외따로 떨어진 궁궐 건물은 놀랍게도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시기,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을 정궁으로 삼은 고종황제는 궁궐의 규모를 날로 넓혀갔다. 지금 성공회 정동성당이 있는 덕수궁의 북쪽 지역에도 궐역이 있었으며(성공회 성당 뒷편에 한옥건물이 다소곳이 남아있다) 중명전이 있는 이 지역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지어져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동은 당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많은 서양 국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세력을 견제하던 고종황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희궁의 전각을 옮기면서까지 수백채의 전각을 세운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으로 몸을 옮겼다.

대한제국기에는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경운궁과 경복궁은, 의도적인 방화이건, 자연적인 불꽃이건, 화재가 자주 일어나 임금의 목숨을 위협했다.  임금은 불에 타지 않는 서양식 건물을 궁궐 내에 서둘러 지었다. 중명전은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경운궁 담 안쪽에는 1902년 경에 돈덕전, 구성헌,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계획은 일찌감치 시작되었으나 공사가 늦어져 1910년에 완공된 석조전이 들어서면서 경운궁은 조선 전통의 전각과 서양식 건물,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교묘하게 섞은 혼합의 건물이 함께 있는 독특한 궁궐의 풍경을 자랑하게 되었다.


다시 중명전으로 돌아가보자. 한일합병 이후에는 외국인 클럽으로, 광복 후에는 이방자 여사의 소유물로 옮겨졌다가 민간에 매각된 후 이 건물은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사무실로 용도변경되면서 건물은 흉하게 첨삭되는 과정을 겪었다. 중명전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2007년부터다.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가 바로 그 중명전에서 열리면서 건물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궁궐 건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명전이 덕수궁에 속한 사적으로 문화재 등급이 높아졌고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잡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의지도 높아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중명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되기 전 중명전의 모습. 흰색 페인트로 칠해지고 테라스를 막아 버렸다.
내부도 손상이 심했다. 벽을 터서 테라스까지 모두 넓혔고 벽난로는 막혔다.
복원 작업은 이 모든 것을 새로 틔우고 막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자 했다.




 


흰색 건물이었던 중명전이 붉은 벽돌 몸을 드러내고 건물의 앞과 양쪽 옆에는 긴 회랑이 생겨났다. 이 회랑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살짝 감동하고야 말았다.  건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건물의 역사를 내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흥분감을 준다. 중명전이 일반에게 공개되기는 했지만 내부를 관람하려면 미리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다른 일로 무척 바쁘던 9월의 어느날 짬을 내어 남편과 함께 중명전을 방문했다. 흥분은 나눠야 제맛이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이는 단체팀과 합류하면서 뭔가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능하긴 했지만서도. 




중명전 전시실 풍경. 1층은 중간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큰 홀이 있고
왼쪽에 두 개의 홀이 있다. 전시 내용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 등
중명전에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이다.



 

중명전의 내부 장식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 첨삭과정에 의해
원형이 사라버렸다. 1층 중앙의 복도 타일만 유일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다.
실내화로 갈아신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밟을까 하여
강화유리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꼭 유리로 덮어야 하나?






요런 이쁜 장식이 눈에 띈다. 당시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의
창문 장식이 있었으리라 상상되었다.



당시 외교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문건. 아래는 고종황제의 밀서.
전시용 사본이다. 어떤 글이 오고갔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2층에는 대형 홀과 두 개의 사무실이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문화재 보호단체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중명전을 위탁관리하면서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2층 대형 홀에는 딱히 전시물이 없다. 뻥 뚫린 공간에는 고종의 어보를 전시했고,
옛 국기와 고종이 어진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 구성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황태자 이은과 이완용 내각 사진(1907). 이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이 중명전이다.
거꾸로 이 사진 한장으로 중명전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중명전에 대한 흥분은 붉은 벽돌 건물로 되살린 것과 긴 회랑에서 느껴진 진지함이 전부였다. 내부를 둘러볼수록 아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부가 많이 손상된 건물이기에 복원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며, 겨우 남아있는 복도 타일만이라도 제대로 간수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중명전은 외관만 남은 형식적인 건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가 남긴<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있다는 이런 내용.


"러시아인 기술자가 만든 쇠와 벽돌로 된 조잡한 건축물인 알현관 앞에는 대신 민종묵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알현관의 큰 뜰에서 차를 마시며 알현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대신들과 흥미로운 대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알현관의 응접실로 들어서면 예기치 않았던 매우 기이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들이나 장식이 동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닥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주위에는 비엔나풍의 의자가 12개 정도 놓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집트 담배들과 하바나 시가, 차와 비스켓, 바카라 컵들과 독일제 찻잔 등이 놓인 탁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응접실에 한국 것이라고는 벽 구석에 서 있는 거대한 병풍 뿐인데, 병풍에는 한국의 기마병들에게 쫓기는 중국 벽사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대한제국 1907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국립고궁박물관, 민족문제연구소(2007)> 도록에서 재인용.


 

 
붉은 양탄자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한 병풍은 없더라도 궁궐다운 위엄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떠나버린 듯했다. 떠나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니 억지스럽고 힘겨운 싸움이 된 것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저렴한 재료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 부족한 자료로 인해 원형에 더 다가가지 못한 사정, 아직도 논의가 거듭되어야 할 근대사의 의미들, 당시의 재료를 더 이상 조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
등 근대건축물을 되살리는 일에 뒤따르는 각종 문제들이 중명전에는 한꺼번에 발생한 것 같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문화재 건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기적인 전시 프로그램의 부재까지 포함되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중명전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우리 근대사의 비어있는 부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2010년 10월 13일에 중명전에서 복원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대책없는 아쉬움도 위로를 얻지 않을까 하여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주관한 이 행사에는 학계 인물들 외에도 일반인들도 많이 참가해서 중명전에 대한 관심이 깊음을 보여주었다.


중명전의 복원은 영친왕이 찍힌 사진 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면도 없고 서류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복원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틀이나 벽돌의 구조, 벽난로의 형태 등 디테일의 원형은 알 수 없었다. 학계에서조차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중요한 자료를 공유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겨우 결론을 내리고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뒤늦게 발견된 자료 때문에 관계자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예산이 부족하여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커다란 논의는 없었다. 그럼에도 5시간에 걸친 심포지엄을 꿋꿋하게 들어보면서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엇다. 중명전은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근대건축물의 복원, 혹은 원형 찾기에 대한 의문을 폭넓게 제시했다고 할까? 

복원 그 자체가 문화재의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복원이 마무리되었다고 하여 모든 역사적 의문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건물의 복원은 역사적 의문점의 시작이라 하겠다. 복원은 언제든지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탐구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중명전이 공개되고 연구가 구체화될수록 도처에 흩어진 많은 자료들이 모여들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과도 닮았다. 

근대건축물의 원형찾기는 근대사를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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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위치-서울시 중구 정동 1-11 


좀 더 읽어볼 책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안창모/ 동녘(2009)
- 근대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졌던 대한제국기를 알고 싶다면!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2004)
-당시 외교의 거리였던 정동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순우/ 하늘재 (2010)
- 중명전의 건립 연대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군요.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대한제국 견문기
그가 수집한 사진들만 모아서 해설한 책.
1900년대 초반의 궁궐, 도시, 사회, 사람들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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